역사 이야기

[스크랩] 여문 십현 학사 김응조

강나루터 2017. 11. 29. 04:32

여헌 문인을 찾아서

여문십현(旅門十賢)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장동만(여헌아카데미 원장)

1. 들어가는 말


 학사 김응조는 17세에 서애 류성룡의 문하가 되었으며,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위해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27세부터 여헌(旅軒)선생의 문인이 되어 10년을 직접 모시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품행을 도야하였다. 스승의 권고로 포기했던 대과에 응시하여,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종9품)로 출사(出仕)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현감(縣監), 정랑(正郞), 지평(持平), 장령(掌令), 도호부사(정4품), 응교(應敎), 동부승지(同副承旨), 참의(參議) 등에 이르기까지 40여년을 관직에 몸담았다. 관직보다는 오히려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뜻이 있었기에 20여년은 사직,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매진하였다.
공(公)은 관리이면서도 스승의 길을 걸어온 ‘글 잘하는 문신이요, 성리학자’였다. 특히 스승에 대한 공경이 지극하였는데, 서애(西厓)를 위해서는 변무록(辯誣錄)을 지어 스승에 지워진 의혹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고, 여헌(旅軒)을 위해서 생전(生前)에는 선산도호부사를, 사후(死後)에는 인동도호부사를 자원하여 스승 현창(顯彰)을 위하여 진력(盡力)하였다.
선산부사 때는 화공(畵工)을 인동(仁同)에 보내어 스승의 영정(影幀)을 그렸고, 인동도호부사 때는 스승의 사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奉安)하고, 문집간행(文集刊行)을 간행했으며, 스승의 위패(位牌)를 오산서원(烏山書院)에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공은 삼백팔십 여명의 여헌 문인들 중에서 선발되어 여문십현(旅門十賢) 12과 여문십철(旅門十哲)3로 칭송받는 영예를 누리고 있으며, 제자들 중 오랫동안 스승을 직접 모셨을 뿐 아니라 스승 현창에서도 가장 두각(頭角)을 나타내었다. 


2. 학사 김응조의 생애


  학사 김응조는 1587년(선조20)년 12월 26일 관찰사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4의 증손인 현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5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의 아홉 아들 중 여섯째 아들로 영주(榮州) 봉향리6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휘는 응조(應祖),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6세(1603년, 선조 36)에 부친을 여의고 줄곧 백형 봉조(奉祖)의 훈도를 받으며 성인이 되었다. 어려서 권두문(權斗文), 권호신(權虎臣)선생에게 글을 배웠으며, 17세(선조 37년)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아들 김굉(金宏)의 딸과 혼인하여 학봉의 손서(孫婿)가 되었다. 영주 학가산(鶴駕山)과 사천(沙川) 사이에 집을 짓고 거처하며 학사(鶴沙를 자호(自號)로 하였다.
  부친의 상기(喪期)가 끝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을 찾아가 질정(叱正)을 청하며 문하생이 되었다. 23세(1610년, 광해군 2)에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과 독서를 하였으며, 26세(광해군 5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후,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대과(大科) 응시를 포기하고, 27세(광해 6년)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10년간 선생을 모시고 학문과 인격수양에 정진하였다.
  36세(1623년, 인조 1)에 알성문과(謁聖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정자(正字), 주서(注書)가 되고, 38세(인조 3년)에는 교수(敎授)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승진하였지만, 모친 전주이씨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상기를 마한 후 40세(인조 5년)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복직되었다. 42세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44세에는 전라도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학교를 일으키니 그 명성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46세에 다시 병조정랑을 거쳐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나갔다.
  선산은 공이 여헌선생 문하에서 오래도록 공부한 인동과 인접한 고을로 ‘여헌 장현광 문하에서 조용히 강학을 하고 여가에 글을 지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선현(先賢)의 유적이 많은 곳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농암(籠巖) 김주(金澍),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신당(新堂) 정붕(鄭鵬), 송당(松堂) 박영(朴英) 7분의 묘소에 친히 제사하고7 도호부민을 위해 선정(善政)을 펼쳤다. 화공(畵工)을 시켜 스승 여헌(旅軒)선생의 영정(影幀)을 그려 사은(師恩)에 보답하려고 하였다. 여헌선생의 실제 모습을 현재까지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의 덕이며,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 보은(報恩)의 결과라고 하겠다.


학사 김응조가

화공에게 명하여 그린

여헌선생 영정(79세)



  47세(인조12년) 선산도호부사를 그만두고 고향 영주로 돌아서 못 다한 학문을 연구하였다. 48세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복직하였다.
  49세(1636년, 인조14)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勃發)하자 중형(仲兄)인 망와(忘窩) 영조(榮祖)8공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는데, 인조께서 삼전도(三田渡)9에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니, 그 치욕을 누를 길 없어 관직을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여 다시 은거10하였다.
  인조께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4년간을 은거하며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53세(인조 18년)에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으로 출사(出仕)했다가 곧 자청하여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로 부임하였다. 공은 3년 전에 타계(他界)한 여헌선생을 위해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으며,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11 등 문인들과 지방 사림(士林)의 도움을 받아 여헌선생 문집을 간행하였다. 또 야은(冶隱) 길재선생을 제향하는 오산서원(烏山書院)에 스승의 위패를 배향(配享)하였다.
   공은 청(淸)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에서 ‘북(北)’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고, 달력을 입수하면 연호를 오려 버리고 나서 펼쳐 보았다고 한다.
  54세(인조 19년)에는 학문에 전념하기 위하여 도호부사직을 사퇴하고 영주 학가산(鶴駕山) 북쪽 기슭, 경관이 아름다운 사천(沙川)의 언덕에 학사정사(鶴沙精舍)를 짓고, 학사(鶴沙)12를 자호(自號)하며,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으로 2년여의 기간을 보냈다. 공이 직접 지은 학사정기(鶴沙亭記)에는 때가 되면 사직․낙향의 뜻을 밝히고 있다.
  56세(인조 21년)에 다시 장령(掌令), 종부시정(宗簿寺正), 헌납(獻納)을 거쳐 홍문관부수찬겸지제교(弘文館副修撰兼知製敎)가 되고, 이듬해(인조 24년)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62세(인조 27)에는 부교리(副校理), 부응교(副應敎, 종4품)가 되고, 63세(효종 1)에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 64세(효종 2)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다. 같은 해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로 나아가 폐정을 개선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자 반대하는 자들로 물의가 야기되자 65세(효종 3년)에 밀양부사를 미련 없이 사직하였다. 66세(효종 4년)에 다시 전라도 담양도호부사(潭陽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간 재임하였다.
  68세(효종 6)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정3품)가 되고 이듬해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나 곧 체직되었다. 사직․낙향하였으나,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며, 71세(효종 9년)에는 형조참의에 제수되나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효종이 승하(昇遐)하자 공조참의로 입조(入朝)하여 호곡(號哭)하고 난 후 바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치사(致仕)13를 결심하였다. 75세(1662년, 현종 3년)에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77세(1664년, 현종 5)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으며, 80세(1667년, 현종 8)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으나 고령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같은 해에 서거(逝去)하였다.
  공은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3대에 걸쳐 40여년간 출사하였으나, 20여년은 사직․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이바지한 관료학자였다. 1679년 영주 의산서원(義山書院)14에 배향(학사가 배향되면서 서원으로 승격)과 안동 물계서원(勿溪書院)15에 제향되며, 묘소는 안동 북후 석탑리(암영골) 동남향이다. 향도사림(鄕道士林) 공의(公議)에서 불천위(不遷位)로 추천되어 봉화 오록리 가묘(家廟)에 봉향되었다. 저서는 학사집(鶴沙集)16, 추원록(追遠錄), 변무록(辨誣錄)17, 사례문답(四禮問答)18, 산중록(山中錄)19 등이 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소재



 

의산서원 사당 충절사(忠節祠)



   물계서당(勿溪書堂).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소재


  

 

학사 김응조의 친필 초서(草書)


3. 인동도호부사와 찰미당(察眉堂) 


  공은 목민관(牧民官)으로 5개 고을을 다스렸다. 전라도 흥덕현감, 경상도 선산도호부사, 인동도호부사, 밀양도호부사, 전라도 담양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흥학(興學)과 애민(愛民)의 정신으로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하였다. 공은 부임하는 곳마다 공을 칭송하는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세워져 있다. 청덕선정비는 목민관(牧民官)이 떠난 후 향민들이 전관(前官)의 공과(功過)를 평가하여 그 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건립하였는데, 공덕비(功德碑), 송덕비(頌德碑), 거사불망비(去思不忘碑)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인동부사 학사 김응조 선정비의 일부(김후응조거사비 : 金侯應祖去思碑)


  학사는 53세(1640년, 인조 18)에 자청하여 인동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인동(仁同)은 공이 여헌 장현광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청운의 꿈을 이룬 곳으로 제2의 고향이다. 공이 인동부사를 자원(自願)한 데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돌아가신 스승을 현창하고, 인동 백성을 위해 선정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 예로 공은 부임한 이듬해(1641년) 왜란으로 소실된 도호부청사를 신축하여 낙성한 후 편액(扁額)을 찰미당(察眉堂)으로 정하고 직접 찰미당기(察眉堂記)20를 지었다.
 찰미당이라고 한 이유는 백성들의 눈썹을 관찰하여 눈썹이 펴지고 웃으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눈썹이 찡그려지거나 성을 내면, 백성의 삶이 고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학사의 목민철학(牧民哲學)에 바탕을 둔 학사의 생각이었다. 공은 목민관의 기본 임무를 ‘찰미(察眉 : 백성의 눈썹을 살핀다)’에 둔 조선에서 몇 없는 선정의 목민관이었다. 


4. 스승에 대한 보은(報恩)과 현창(顯彰)
 
  학사는 18세에 서애 류성룡선생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왜란(倭亂)이 끝나자 영의정이었든 류성룡에게 전란(戰亂) 책임 추궁과 비판이 집중되었다. 이에 공은 스승을 위해 ‘서애류선생변무록(西厓柳先生辨誣錄)’21을 지어 스승에 대한 의혹(疑惑)을 조목조목 변호(辯護)하였다. 당시 서애를 변호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위험한 상황이라서 당파가 같은 동인들도 변호해 주지 않았지만 공은 스승 변호에 주저하지 않았다.
  공이 영주에 은거하든 때에 여헌선생이 입암(立巖)의 만욱재(晩勗齋)에서 서거(逝去)하였다. 공은 문인들과 함께 직접 입암에서 인동까지 운구하여 장례를 치루었지만 스승에 대한 도리를 다 못한 것을 늘 한스러워 하였었다.
  공은 여헌선생 사후(死後) 3년 되는 해에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스승의 유업 계승과 현창(顯彰)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22에 사당(祠堂)을 세워 스승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둘째, 여헌선생 문집 간행을 추진하였는데, 문집간행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큰 사업이었다. 동문수학한 선배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등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 스승의 유고(遺稿)를 정리하고, 문인, 유림으로부터 비용을 염출하여 판각(板刻)을 하는 등 방대한 사업을 잘 마무리하였다. 셋째는 여헌선생을 서원에 배향하는 일이었다. 인동현감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이 1587년(선조 20년) 금오산(金烏山) 동록(東麓)의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 묘소 아래에 오산서원(烏山書院)23을 건립하여 야은을 배향하였었다. 공은 오산서원에 여헌선생을 추가 배향을 성사시킴으로써 스승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이듬해 학문연구를 위해 인동부사를 사임하고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5. 겸손과 검소의 실천가 


  공은 스스로 좌우명을 짓기를 “문(文)을 일삼았으나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고 관직에 있었으나 시정(時政)에 어두웠다. 선비는 사람의 떳떳한 도리에 뿌리를 견고히 하는 것을 사모하니, 나물과 콩이 햇빛 쪽으로 기우는 것은 사물의 성질이다. 한바탕 꿈은 남가태수(南柯太守)에서 끝났고, 만 가지 계획은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다. 저 학사(鶴沙 : 학가산과 사천)의 봄이여, 물이 파랗고 산이 푸르도다. 천년만년 혼백이 잊지 못하리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비록 선생의 겸손한 말이지만 그 덕업(德業)과 지행(志行)의 대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임종 시 자손과 문인들에게 한 유언(遺言)은 상례(喪禮)를 검소하고 간소하게 치루라는 당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을 치를 때 무당을 부르지 말고, 둘째, 수의로 비단을 사용하지 말며, 셋째, 곽(槨)은 야산의 목재로 만든 얇은 널(棺)을 사용하되 송지(松脂)는 사용하지 말라. 넷째, 칠(漆)을 하지 말고 석회도 넣지 말며, 높이와 너비는 세 치를 넘지 않게 하고 흙 계단을 쌓으면 된다. 다섯째, 석인(石人)과 상석(床石)을 사용하지 말며, 여섯째, 짧은 비갈(碑碣)을 사용하고, 앞면에는 ‘학사모옹풍산김공지묘(鶴沙某翁豊山金公之墓)’라고만 적고, 뒷면에는 자명(自銘)을 적어라. 일곱째, 비갈은 자손(子孫)과 서족이 스스로 새길 것이지 석공(石工)에게 새기도록 하지 말라. 여덟째, 남에게 돈을 꾸거나 가재를 팔아서 제수(祭需)를 마련하지 말라. 만일 조금이라도 유언을 어겨서 혼령(魂靈)을 불안하게 한다면 신이 흠향(歆饗)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청백리였든 고조부 허백당(虛白堂)과 부친 유연당(悠然堂)의 청렴한 가풍을 계승한 것이며, 공 또한 겸손과 검소를 실천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6. 맺는 말


조선시대 경상좌도(慶尙左道)에는 안동(安東), 의성, 상주를 중심으로 퇴계와 그 문인들로 이루어진 퇴계학파(退溪學派)와 우도(右道)에 합천, 진주, 산청을 중심으로 남명과 문인들로 구성된 남명학파(南冥學派)가 있다. 또 낙동강 중류지방(선산, 인동, 칠곡, 성주, 의성, 영천)에는 여헌과 문도들의 여헌학파(旅軒學派)가 있다. 여헌학파는 영남의 제3학맥으로 삼백팔십여 문인을 가진 거대한 학단(學團)을 이루고 있다. 여헌 장현광의 문인 중에서 뛰어난 자를 “여문십현(旅門十賢)” 또는 “여문십철(旅門十哲)”이라 불렀는데, 양자에 함께 선발된 문도(門徒)로서 스승 존경과 현창에서는 학사 김응조 만한 이가 없다. 퇴계와 남명도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학사와 같이 스승을 현창한 제자는 없었든 것으로 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학사는 훌륭한 문신이요 학자이며, 존경받을 만한 제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1. 1) [본문으로]
  2. 1)여문십현 : 수암(修巖) 류진(柳袗), 만회당(晩悔堂) 장 경우(張慶遇),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수암(守菴) 정사진(鄭四震),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 구암(龜巖) 김경장(金慶長),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 성재(省齋) 권봉(權崶), 백암(栢巖) 안응창(安應昌)을 말한다. [본문으로]
  3. 2)여문십철 : 수암(修庵) 류진(柳袗), 학가재(學稼齋 이주(李주), 만회당(晩悔堂) 장 경우(張慶遇),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수암(守菴) 정사진(鄭四震),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운제(雲堤 ) 노형필(盧亨弼),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 구암(龜巖) 김경장(金慶長),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를 말한다. [본문으로]
  4. 3)조선 중기의 문신, 전라도관찰사 시절 선정과, 청렴결백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경주부윤, 황해도관찰사 때에도 선정으로 이름이 나서,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본문으로]
  5. 4)유연당이 산음현감 재임 중 사망하니, 청빈하여 여벌의 옷이 없었다. 이 사실을 들은 그 지역 선비 오장, 권집, 박문영 등이 옷을 벗어서 소렴(小殮)을 하였다고 전한다. 허백당이나 유연당 모두 청렴한 관리로 유명하다, 김대현은 1553년 안동 풍산 오미동에서 출생하여 36세에 영주 봉향리(현 휴천동)로 이주하여 풍산김씨 영주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슬하에 아들 아홉 중 요절한 술조를 제외하고, 8명이 소과(小科, 蓮榜)에 입격하였고, 그 중에서 5명(봉조, 영조, 연조, 응조, 숭조)이 대과(大科, 桂榜)에 급제하여 인조께서 이 사실을 칭송하여 김대현 가문을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하고 이들이 살든 마을을 오미동(五美洞)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본문으로]
  6. 5)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본문으로]
  7. 6) 이세택 찬 “학사 김응조공 묘지명” [본문으로]
  8. 7)조선 선조 때의 문신, 학사 김응조의 중형, 자는 효중, 호는 망와, 학봉 김성일의 사위, 이조참판을 역임함. [본문으로]
  9. 8)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든 한강나루,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곳으로 청나라 전승비인 삼전도비(사적 제101호)가 있다. [본문으로]
  10. 9)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본문으로]
  11. 10)1625년(인조 5) 진사 입격 후 관직에 나가지 않음. 정묘호란 때 인동의병장으로 활약함, 여문십현의 한사람 으로 학사보다 6살 연상, 인동의 세력가로 여헌문집 발간, 오산서원에 여헌 배향 등에 동참하였다. [본문으로]
  12. 11)학가산(鶴駕山)의 ‘학(鶴)’자와 사천(沙川)의 ‘사(沙)’자를 따서 스스로 호(號)를 지었다. [본문으로]
  13. 12)대부는 나이 70세면 치사(致仕) 한다는 예경(禮經)의 고사에서 나온 말, 경국대전(經國大典) 주해(註解)에 따르면 관직을 왕에게 되돌리고 나이들었음을 고(告)하는 뜻이라고 했다. 즉 70세가 되면, 관직에서 은퇴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14. 13)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갈미)에 있는 서원, 1610년(광해군 2)에 의산서당으로 건립됨. 1664년 묘우를 건립하여 성오당 이개립의 위패를 봉안하고 절효사(節孝祠 )라고 함, 1679년 학사 김응조를 배향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됨, 1868년(고종 5)에 훼철됨, 성오당 이개립은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본문으로]
  15. 14)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에 있었든 서원, 고려장군 김방경(金方慶, 1212-1300)과 고려 후기 문신 김구용(金九容, 1338-1384), 학사 김응조(1587-1667)를 배향.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으며, 1962년 복원하면서 물계서당으로 명명 [본문으로]
  16. 15)학사 김응조의 시문집, 5책 목판본, 1716(숙종 42)에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 후 아들 서필이 간행하였다. 1776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서문을 썼다. [본문으로]
  17. 16)원명은 서애류선생변무록(西厓柳先生辨誣錄)이다. 왜한 후 전쟁책임에 대하여 서애 류성룡이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자 학사 김응조가 서애를 위해 조목조목 변호하는 글이다. [본문으로]
  18. 17) 학사 김응조가 선유(先儒)들의 사례(四禮)에 관한 학설을 모아 엮은 예서(禮書)이다. [본문으로]
  19. 18) 학사 김응조의 시문(詩文)을 모아 역은 책으로 총10책의 목판본이다. [본문으로]
  20. 19) 찰미당기 : “사람의 눈썹은 기쁘면 펴지고 성내면 찡그린다. 기쁨이 늘 있는 것도 성냄이 늘 하는 것도 아니어서 펴고 찡그리고. 찡그리고 펴고 하는 것은 신체의 이치다. 그렇고 보면 찡그리는 것은 진실로 펴질 수 있는 조짐이다. 내가 인동부사로 부임한 다음해에 관아 동쪽에 사무실을 옮겨 짓고 나머지 재목으로 그 남쪽에 당을 지으니 인동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형세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서쪽으로 낙동강을 부여잡고 금오산을 마주 대하고 있어 우뚝하고, 상쾌한 기운을 즐길만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로서 당의 이름을 지었다. 나의 성격은 좁고 재주는 졸렬하여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 지방의 풍속에 어두웠다. 무릇 백성들 중 관아에 이르는 어른, 어린아이, 늙은이 할 것 없이 그들의 눈썹을 살펴보니 모두 찡그리고 있어 고을의 정황을 알 수 없었다. 찰미(察眉)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그 사실을 뜻 한 것이다. 시험삼아 당에 올라 살피어 보았다.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 혹은 세금이 무겁다고 성내는 사람, 혹은 노역이 많다하고 성을 내고, 형벌을 시행함에 있어 과하다고 성을 내고, 송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성을 내는 백성이 많았다. 아 ! 백성들 중 나에게 성을 내고 눈썹을 찡그리는 사람은 진실로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니고 이러함을 초래한 것이 나 한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마음의 병에는 갑자기 약을 써서 낫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록 사람들마다 기쁘게 하여 눈썹을 펴도록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드라도 사물의 흥망성쇠가 끝없이 서로 이어지니 지금 찡그린 자가 어찌 뒷날 눈썹이 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내가 이미 그들로 하여금 찡그리게 하였으니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펴게 할 것이다. 글로 기문을 써서 훗날의 군자를 기다린다.” [본문으로]
  21. 20)서애선생무변록 내용 : ① 1591년(선조 24년) 서애 류성룡이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을 때,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이 일본의 평수길(平秀吉 : 豊臣秀吉)의 편지를 가져왔는데 그 중명(明)과 관련된 문제는 류성룡은 명나라에 먼저 전달해 주자고 하였으나 당시의 의론은 이산해(李山海)의 주장에 따라 처리하였을 뿐이며,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함은 서애가 지인(知人)의 눈이 밝아 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변호하였다. ② 1592년 4월 왜군이 쳐들어와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하였을 때, 명 의 총병 조승훈(祖承訓)은 평양을 공격하여 패퇴하였지만, 류성룡은 안주에 머무르면서 인심을 위무하였으며, 이여송(李如松)이 장병 4만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도착했을 때 서애가 평양지도를 가지고 가서 공격할 길을 제시해 주었으며, 1593년 이여송이 평양을 탈환하자 적이 화해를 청하고 물러가려 하자 서애가 이여송에게 글을 보내 화호(和好)하는 것은 잘못이고 적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③ 1594년 적이 오랫동안 물러나지 않자 명에서는 화호할 것을 허락하였으나, 서애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서애가 강화를 주장하였다는 것은 잘못이며 거기에다 오국(誤國)을 더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④ 1596년 명에서 책봉사(冊封使)를 보내어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왜군이 강화를 요청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그 방향을 몰랐으나 서애가 차자(箚子)를 올려서 일본이 통신을 그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계략이며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자신의 책임을 면하자고 한 것을 지적하였다. ⑤ 경리(經理)에게 서애를 모함하는 자가 있어 경리가 이덕형(李德馨)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서 서애가 군문(軍門)에 죄를 지었으니 피신하도록 하고 군량 등의 일은 윤승훈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서애가 치계(馳啓)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서애에게 편지를 보내어 '주화오국(主和誤國)'하였다고 비판한 것은 일을 꾸미는 자에게 좋은 빌미가 된 것으로 이이첨 등의 무리들이 사론(邪論)을 내어 주화오국 4자로 사림을 일망타진하고자 하는 계책으로 이것을 크게 떠들게 된 것은 월천의 문인 김택룡으로 "월천언행록"을 편찬하면서 정유년의 편지를 장황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참봉 김확이 "행록(行錄)"을 꾸며 동계 정온(鄭蘊)에게 신도비를 요청한 것으로 말미에 이 문제를 적어 놓아 사림의 논란이 분분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 해제 6, 안동지역편, 학사집 권 5, 이한방 교수) [본문으로]
  22. 21)여헌 장현광이 학문연구와 제자를 강학하든 곳, 동락서원(東洛書院) 동편(구미시 임수동 소재)에 있다. [본문으로]
  23. 22)구미시 오태동 산2번지에 있었든 서원, 1857년(선조 20) 인동현감 겸암 류운룡(서애 류성룡의 형)이 야은 길재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 1868년(고종 5) 서원훼철 시 훼철되어 복원되지 못했다. [본문으로]
출처 : 강나루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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