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구양순 서)
구양순(歐陽詢, 557~641)과 구양순체(구성궁체)
歐陽詢의 生涯
중국 陳 隨 그리고 唐나라 초엽에 걸친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당대의 4대가(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중의 한사람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닦았다. 후진 지도를 맡다가 정고 십오년 팔십사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新舊라는 서적에는 그의 사적이 이렇게 적혀있다.
詢은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詢이 하루는 길가에서 陳대의 명필 索靖의 쓴 碑를 보고 두서너 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와서는 碑 곁에서 사흘간을 묵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詢은 당고조 이연과는 친구 사이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황제의 측근관)이 된 詢은 배구 등과 함께 예문류취 일백권을 편집했다.
당태종은 홍문관을 두고 학생들을 뽑아서 서법을 연구하게 했는데 詢은 우세남과 함께 으뜸가는 서도가로서 그 학사직을 겸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후에 발해남의 작위가 수여되고 전관 15년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 태자솔경령 이란 벼슬은 황태자담당관으로 구양순이 태자송경령을 지냈기 때문에 그의 자를 信本과 함께 率更이라 부르기도 한다.
歐陽詢의 書風
구양순은 隨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정관초에는 蘭亭書마저 배웠다. 따라서 그 결체가 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男派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로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의 영향이다.
그가 쓴 방언겸의 비는 그가 북파의 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 한 것 같은 서체 칼을꺾듯한 落筆法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현존하는 구양순의 글씨인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서풍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렇듯 구양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같은 구양순의 서풍은 그가 비록 초기에는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글씨에는 굳세고 늠늠하며 잘 정돈된 남파의 특징과 칼로 베듯 도끼로 찍은 듯한 굳센 북파의 특징이 함께 잘 버무러져 나타나고 있다.
구양순 글씨의 뛰어남은 당세에 이미 널리 알려져 당시 사람들이 그의 편지 등을 입수하면 다투어 교본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특히 고려에서는 그의 글씨를 소중히 알아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그의 필적을 구해 갈 정도였다고 한다.)
歐陽詢體의 特徵
구양순체(歐陽詢體) 또는 구성궁체(九成宮體)는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순의 서체'를 말하는 것이다.
구양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그가 쓴 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후세 사람들에게 불후의 명작으로 칭송받고 있는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서체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