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스크랩] 구양순과 구양순체(구성궁체)

강나루터 2018. 4. 17. 05:34

 

반야심경(구양순 서)

 

 

구양순(歐陽詢, 557~641)과 구양순체(구성궁체)

 

歐陽詢의 生涯

 

중국 陳 隨 그리고 唐나라 초엽에 걸친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당대의 4대가(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중의 한사람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닦았다. 후진 지도를 맡다가 정고 십오년 팔십사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新舊라는 서적에는 그의 사적이 이렇게 적혀있다.

 

詢은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詢이 하루는 길가에서 陳대의 명필 索靖의 쓴 碑를 보고 두서너 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와서는 碑 곁에서 사흘간을 묵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詢은 당고조 이연과는 친구 사이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황제의 측근관)이 된 詢은 배구 등과 함께 예문류취 일백권을 편집했다.

 

당태종은 홍문관을 두고 학생들을 뽑아서 서법을 연구하게 했는데 詢은 우세남과 함께 으뜸가는 서도가로서 그 학사직을 겸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후에 발해남의 작위가 수여되고 전관 15년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 태자솔경령 이란 벼슬은 황태자담당관으로 구양순이 태자송경령을 지냈기 때문에 그의 자를 信本과 함께 率更이라 부르기도 한다.

 

 

歐陽詢의 書風

 

구양순은 隨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정관초에는 蘭亭書마저 배웠다. 따라서 그 결체가 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男派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로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의 영향이다.

 

그가 쓴 방언겸의 비는 그가 북파의 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 한 것 같은 서체 칼을꺾듯한 落筆法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현존하는 구양순의 글씨인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서풍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렇듯 구양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같은 구양순의 서풍은 그가 비록 초기에는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글씨에는 굳세고 늠늠하며 잘 정돈된 남파의 특징과 칼로 베듯 도끼로 찍은 듯한 굳센 북파의 특징이 함께 잘 버무러져 나타나고 있다.

 

구양순 글씨의 뛰어남은 당세에 이미 널리 알려져 당시 사람들이 그의 편지 등을 입수하면 다투어 교본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특히 고려에서는 그의 글씨를 소중히 알아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그의 필적을 구해 갈 정도였다고 한다.)

 

 

歐陽詢體의 特徵

 

구양순체(歐陽詢體) 또는 구성궁체(九成宮)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순의 서체'를 말하는 것이다. 

양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그가 쓴 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후세 사람들에게 불후의 명작으로 칭송받고 있는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서체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구양순체(歐陽詢體)는 당대(唐代) 해서 중에서 가장 세련미를 지니며 귀족적인 서체로서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젊어서 왕희지 부자의 서체를 공부하여 그의 결체는 강건하면서도 세차고 잘 정돈된 형을 취하여 준엄하고 세찬점 즉 붓을 댈때 면도날도 베고 도끼로 찍는 듯한 명쾌한 날카로운 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구양순은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 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결국 구양순 書의 특징은 왕희지 부자의 기법에 북위파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별체)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그는 이렇듯 남북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서법예술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길 "글씨를 쓰는데 온순하기는 쉽고 기발하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기발하면서도 온화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구양순의 글씨는 기발하면서도 온화하게 보인다. 奇가 그 極에 이르러 正이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서(書)가 흔치않는 대단히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그는 글씨의 結構를 깊이 연구하고 그러한 실천 속에서 비로서 자기의 것을 창조해 낸 것이다.

 

구양순체의 기본글자의 형태는 안진경체의 향세와 달리 배세구조를 취하는데, 點과 ?의 俯仰向背 分合聚散이 힘의 균형에 맞고, 빽빽한데 빈 곳,, 곧은데 휜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

 

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 서(書)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 데 있다.

 

 

 

구성궁예천명(구양순 서) 탁본

 

九成宮醴泉銘(구성궁예천명)

 

구양순이 황제(太宗)의 명에 의하여 76세에 서하여 정관 육년에 각하였다. 이 비는 구성궁에 있는 泉을 예찬, 즉 임금의 음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심경이 높고 품격이 좋다.

 

특징으로는 점, 획이 가늘고 직선적이고 자형이 길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점, 획의 간격이 고른 가 운데 변화가 있다. 方筆이 많아 다소 모가 나고 단정하고 근엄하며 背勢에 의해 점, 획이 중심으로 모아지며 긴장감이 돈다.

 

구성궁예천명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구성궁이라는 궁궐 안에서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이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으로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황제의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고, 구양순(歐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구양순에 관련된 성어

 

能書不擇筆(능서불택필) [출전- 唐書 歐陽詢傳]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 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 저수량(遂良)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 (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不擇筆紙]' 마음대로 글 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 "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②주현종(周顯宗) 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 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 書)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니 르 바 나
글쓴이 : 니련선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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