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푸토의 ‘약한 신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 비교 연구 (4)
▲ 민중신학자 안병무 |
전통 신학 비판
민중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것도 아니고, 그것을 특정한 현장에 적용한 사례도 아니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도 아니다. 사실 한국의 민중신학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흐름과는 무관하게 형성·전개되었다. 민중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전통 신학에 정통했고 70년대 민중운동의 열기 속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독자적으로 구성해나갔다. 따라서 민중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이 조우하는 지점에 대한 본 연구를 통해 같은 방법론을 활용함으로써 같은 지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신학과 약한 신학이 다른 노정을 선택했지만 같은 지점에 이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병무는 서구적 방법론으로는 당시 한국 상황에 맞는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리고 민중 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을 구상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민중신학은 서구 전통 신학의 문제점과 한계를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먼저 그는 서구 신학이 현장과 괴리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전통 신학에 대한 반(反)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을 제기한다.(1)
그에 따르면 전통 신학이 성서라는 텍스트를 기준으로 해서 삶의 맥락과 자리를 해석하는 반면, 민중신학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준거로 하여 성서를 해석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교리에 성서가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서구 신학은 대전제를 가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성서를 해석해 왔다고 안병무는 지적한다.
그는 성서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비판한다. 성서의 일자일획 모두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서무오설이 심화되어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안병무는 말한다. 축자영감설이 성서의 활자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활자 자체도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결국 그것을 해석하는 지도자의 해석권을 절대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2) 성서를 보는 시각이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안병무는 성서를 교조적인 이야기로 읽지 않으려면, 성서 속의 민중사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3) 그는 성서의 중심이 민중사건이라고 보았다. 약속과 성취, 구속사 같은 개념으로 성서를 보는 전통 신학의 성서 해석은 민중사건을 포착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성서는 ‘그리스도론’의 전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민중사건을 보도하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입장이다.(4)
민중신학에서 성서가 중요한 문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민중사건을 담고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민중신학에서도 여전히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병무가 성서만을 유일한 ‘정경’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자리에서 나온 어떠한 이야기라도 민중사건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병무에게는 성서가 민중사건으로서 예수사건의 가장 확실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모든 사건 해석의 전거(典據)인 것이 분명하다.(6)
또한 민중신학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한 내용과 그의 실천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으면서,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고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야기만이 기존 전통 신학에서 중시되어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예수의 삶을 보고 메시아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상(像)에 예수를 끼워 맞춘 꼴이다.(7)
서구의 그리스도론은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내려온 것이 예수라고 보고 예수의 신성과 구세주로서의 능력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고난당하는 예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강조한다. 안병무가 보기에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존재로서의 ‘우주적인 그리스도론’, 즉 신성이 강조되는 그리스도론은 성서적이지 않다.(8)
이러한 민중신학의 예수관은 신관으로도 이어진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존재로서의 신 존재는 거부된다. 안병무는 유신론과 무신론 모두 신을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객관화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9)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신은 삶과 유리된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삶 안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힘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카푸토가 절대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해체하는 것과 동시에 무신론도 부인한 것과 민중신학의 신관이 유사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민중신학의 민중 편향성
안병무는 성서에 나오는 민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오클로스(ὄχλος)’에 주목한다. 그는 오클로스가 권역 밖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특정 집단 내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라오스(λαός)’에 대비되는 이들이다. 성서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이 오클로스였다고 안병무는 밝힌다.(10)
이 ‘권역’이 성서에서는 ‘성문 밖’이라고 설명된다. 안병무는 성문 밖에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민중이 곧 예수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많은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예수가 민중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민중이 예수라는 것은 거부한다. 이에 대해 안병무는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데, 이는 정치적 · 경제적 모순으로서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민중과 유비된다고 설명한다. 세상 죄라는 것은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병무는 예수가 민중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주장한다.(11)
민중신학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 곧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예수는 처참하고 버림받은 외로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이것은 카푸토가 십자가의 예수를 근거로 들어 하나님의 약함을 설득하는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고난당하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상은,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상황에서 힘을 기르거나 초인적인 메시아가 등장해 복수를 해 주기를 염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수난당하고 있는 민중이 세상을 위해 메시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2)
고난 받는 민중이 세계를 위해 고난당한다고 여김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이 끊어진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자 메시아라는 의식을 가지고 수난을 기꺼이 수용하면 권력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 받는 민중이 메시아일 수 있는 것이다.(13)
이러한 민중신학의 논리에 따르면 구원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 민중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인 것이다. 힘없는 민중이 세상의 고난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러한 민중관은 카푸토의 약한 신학이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강한 신학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안병무는 ‘구원’보다는 ‘해방’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때 해방은 영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세계, 즉 이 세상 안에서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성서에 나오는 해방 이야기의 정점은 히브리들의 이집트 탈출이다. 해방하는 하나님은 히브리 편에 서 있고 그러므로 편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신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민중신학의 하나님은 분명히 편파적인 하나님이라고 안병무는 인정한다.(14) 이어서 그는 예수도 가난하고 눌린 자, 불우한 자, 다시 말해 민중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죄에 대해서도 안병무는 죄가 구조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죄로부터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은 구조악에 의해 속박당하고 그로 인해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구조악의 핵심은 성(性), 재산, 권력의 독점이다.(15) 그렇기 때문에 죄의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독점되어 있는 권력이나 재산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에게 세상의 모든 권력과 능력을 응집시켜놓는 전통 신학의 하나님 이해는 민중신학에서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