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6대 종교 간 대화 시도…끝내 통일조국에서 성묘 가는 꿈 이루지 못해”
한국 개신교계의 원로이자 시대를 걱정한 스승인 강원용 경동교회 명예목사(평화포럼 이사장)가 지난 8월 17일 생을 마감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종교인이자 사상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강원용 목사. 한평생 ‘나’보다 ‘우리’를 생각한 시대의 어른 강원용 목사의 빈소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조문 행렬
한평생 한국 교회 발전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강원용 목사가 지난 8월 17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강원용 목사는 8월 10일 강남삼성병원에 요양차 입원한 뒤 11일 오전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고 말았다. 함경남도 이원군 출생인 강원용 목사는 한국 최초로 ‘대화 운동’을 태동시켜 한국사회에 소통의 장을 열었다.
고인은 지난 60~70년대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통해 종교 간 대화 운동과 중간 지도력 양성에 힘썼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또 세계교회협의회(WCC) 실행위원과 아시아기독교협의회 회장,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명예의장 등을 역임하며 세계 종교와의 갈등 해소와 대화 노력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현재 이사장으로 몸담고 있는 평화포럼을 설립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강원용 목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사회 각계에서 애도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8월 18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에 차려진 강 목사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정부를 대표해 고인에게 최고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는 추서식을 가졌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평화와 사랑, 그리고 대화를 위해 언제나 선구자로 사신 분이었다. 자신의 편안한 삶을 뒤로 미룬 채 항상 조국의 평화를 먼저 생각하며 종교, 사회 각 분야의 통합에 앞장서신 분이셨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 총리는 이어 “강 목사님이 떠나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텅 빈 것 같다”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조국의 평화와 미래를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애통해했다. 강원용 목사가 자신의 큰 스승이라고 말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 한 총리는 지난 40여 년간 강 목사와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지난 1960년대 중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를 통해 강 목사와 첫 인연을 맺은 한 총리는 강원용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간사로 활동하다 1979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같은 날 빈소를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훌륭하시고 성공적으로 일생을 사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어 “국민으로서, 원로 지도자로서 한국의 민주화, 사회 정의, 문화 발전, 남북 화해 협력, 세계 평화 문제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셨다”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빈소에는 이외에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비롯해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이종석 통일부장관, 김명곤 문화부장관, 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원 등 많은 정치인과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김성수 성공회 주교, 김철 전 천도교 교령, 조용기 목사 등 종교인들이 강 목사의 빈소를 찾아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빈소를 찾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사회 민주화에 끼친 고인의 남다른 정의감과 열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루는 밀알이었다. 종교 간 화합이나 분단된 민족 갈등을 통합하는 데 종교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했다”고 고인의 업적을 되새겼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 역시 “30년 동안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존경하던 어른이었다. 강 목사님은 개신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민중,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 종파, 노사간 대화를 이끌고, 대화와 평화적 방법으로 평화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려 노력한 민족의 스승”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강원용 목사는 평소 예술, 문화계 지인들의 공연도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빈소를 찾은 연극인 박정자씨는 고인을 회고하며 “평소 아끼는 지인들의 공연을 빼놓지 않고 관람할 정도로 예술, 문화 발전에도 열성적이었다. 열린 자세 때문에 때로는 비판도 받으셨지만 문화 예술인에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시대를 걱정한 나라의 어른
1935년, 당시 열여덟 살이던 강원용 목사는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만주 용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와 인연을 맺은 강 목사는 학창 시절 농촌 계몽 활동을 하며 암울한 조국 현실을 깨달았다.
강 목사는 그곳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재준 목사로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해 큰 영향을 받았다. 강원용 목사는 1945년 해방 이후, 서울 장충동에 지금의 경동교회를 설립하며 인생의 큰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와 그 유명한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를 정립했다. 그의 철학은 양극의 대립과 갈등 지점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 상호 이해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그의 입장은 늘 양쪽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심지어 이단으로 몰리는 아픔도 맛봐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강원용 목사는 1965년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대화 중심의 아카데미 운동’에 전념했다. 입장이 다른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숙식하는 아카데미 대화 모임은 분단과 대립으로 경직된 당시 우리 사회에서 유일한 소통의 장이었다. 강 목사는 같은 해 한국 역사상 최초로 6대 종교가 참여하는 ‘종교 간 대화’를 시도했는데, 훗날 이 모임은 세계적인 종교 간 대화 운동으로 확산됐다. 강 목사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니와노평화상’ ‘만해평화상’ 등을 수상했다.
강 목사는 70년대 양극화와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한 중간 집단 육성 강화 교육을 비롯해 민주화, 노사간 대화, 성 평등 실현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또 이 같은 다양한 사회 운동을 통해 숱한 인재를 배출했다. 당시 강 목사의 사상을 접한 한명숙 총리를 비롯해 유재건 국회의원,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아카데미 그룹’ 출신이다.
한국 정치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강원용 목사. 그는 70년대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독일 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제커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에 이바지했다.
방송윤리위원장, 방송개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방송의 공정성과 자율성 확보를 위해 헌신한 강원용 목사는 2000년 이후,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 과업에 여생을 바쳤다.
한평생 한국 교회 발전과 사회 민주화에 헌신한 강원용 목사는 시대를 걱정하는 나라의 어른이었다. 끝내 통일된 조국에서 북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성묘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강원용 목사. 비록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참사랑의 큰 뜻은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 글 / 김성욱 기자 ■ 사진 / 박원태
한국 개신교계의 원로이자 시대를 걱정한 스승인 강원용 경동교회 명예목사(평화포럼 이사장)가 지난 8월 17일 생을 마감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종교인이자 사상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강원용 목사. 한평생 ‘나’보다 ‘우리’를 생각한 시대의 어른 강원용 목사의 빈소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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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는 8월 10일 강남삼성병원에 요양차 입원한 뒤 11일 오전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고 말았다. 함경남도 이원군 출생인 강원용 목사는 한국 최초로 ‘대화 운동’을 태동시켜 한국사회에 소통의 장을 열었다.
고인은 지난 60~70년대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통해 종교 간 대화 운동과 중간 지도력 양성에 힘썼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또 세계교회협의회(WCC) 실행위원과 아시아기독교협의회 회장,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명예의장 등을 역임하며 세계 종교와의 갈등 해소와 대화 노력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현재 이사장으로 몸담고 있는 평화포럼을 설립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강원용 목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사회 각계에서 애도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8월 18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에 차려진 강 목사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정부를 대표해 고인에게 최고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는 추서식을 가졌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평화와 사랑, 그리고 대화를 위해 언제나 선구자로 사신 분이었다. 자신의 편안한 삶을 뒤로 미룬 채 항상 조국의 평화를 먼저 생각하며 종교, 사회 각 분야의 통합에 앞장서신 분이셨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 총리는 이어 “강 목사님이 떠나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텅 빈 것 같다”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조국의 평화와 미래를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애통해했다. 강원용 목사가 자신의 큰 스승이라고 말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 한 총리는 지난 40여 년간 강 목사와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지난 1960년대 중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를 통해 강 목사와 첫 인연을 맺은 한 총리는 강원용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간사로 활동하다 1979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같은 날 빈소를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훌륭하시고 성공적으로 일생을 사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어 “국민으로서, 원로 지도자로서 한국의 민주화, 사회 정의, 문화 발전, 남북 화해 협력, 세계 평화 문제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셨다”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빈소에는 이외에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비롯해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이종석 통일부장관, 김명곤 문화부장관, 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원 등 많은 정치인과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김성수 성공회 주교, 김철 전 천도교 교령, 조용기 목사 등 종교인들이 강 목사의 빈소를 찾아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 역시 “30년 동안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존경하던 어른이었다. 강 목사님은 개신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민중,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 종파, 노사간 대화를 이끌고, 대화와 평화적 방법으로 평화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려 노력한 민족의 스승”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강원용 목사는 평소 예술, 문화계 지인들의 공연도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빈소를 찾은 연극인 박정자씨는 고인을 회고하며 “평소 아끼는 지인들의 공연을 빼놓지 않고 관람할 정도로 예술, 문화 발전에도 열성적이었다. 열린 자세 때문에 때로는 비판도 받으셨지만 문화 예술인에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시대를 걱정한 나라의 어른
1935년, 당시 열여덟 살이던 강원용 목사는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만주 용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와 인연을 맺은 강 목사는 학창 시절 농촌 계몽 활동을 하며 암울한 조국 현실을 깨달았다.
강 목사는 그곳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재준 목사로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해 큰 영향을 받았다. 강원용 목사는 1945년 해방 이후, 서울 장충동에 지금의 경동교회를 설립하며 인생의 큰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와 그 유명한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를 정립했다. 그의 철학은 양극의 대립과 갈등 지점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 상호 이해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그의 입장은 늘 양쪽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심지어 이단으로 몰리는 아픔도 맛봐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강원용 목사는 1965년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대화 중심의 아카데미 운동’에 전념했다. 입장이 다른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숙식하는 아카데미 대화 모임은 분단과 대립으로 경직된 당시 우리 사회에서 유일한 소통의 장이었다. 강 목사는 같은 해 한국 역사상 최초로 6대 종교가 참여하는 ‘종교 간 대화’를 시도했는데, 훗날 이 모임은 세계적인 종교 간 대화 운동으로 확산됐다. 강 목사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니와노평화상’ ‘만해평화상’ 등을 수상했다.
강 목사는 70년대 양극화와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한 중간 집단 육성 강화 교육을 비롯해 민주화, 노사간 대화, 성 평등 실현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또 이 같은 다양한 사회 운동을 통해 숱한 인재를 배출했다. 당시 강 목사의 사상을 접한 한명숙 총리를 비롯해 유재건 국회의원,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아카데미 그룹’ 출신이다.
한국 정치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강원용 목사. 그는 70년대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독일 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제커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에 이바지했다.
방송윤리위원장, 방송개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방송의 공정성과 자율성 확보를 위해 헌신한 강원용 목사는 2000년 이후,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 과업에 여생을 바쳤다.
한평생 한국 교회 발전과 사회 민주화에 헌신한 강원용 목사는 시대를 걱정하는 나라의 어른이었다. 끝내 통일된 조국에서 북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성묘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강원용 목사. 비록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참사랑의 큰 뜻은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 글 / 김성욱 기자 ■ 사진 / 박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