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양명학에 따르면 마음은 어느 누구나 똑같이 선악이 없고, 양지 또한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춰진 것이다. 군자가 되는 수양 또한 주자학에서는 오랜 공부와 덕행을 필요로 하지만, 양명학에서는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하다. 따로 어려운 책을 읽으며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수인은 “경전은 단지 참고하기 위한 자료이며, 경전을 읽는다고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신분제가 뚜렷했던 전통사회에서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양명좌파”라고 불리는, 왕수인의 계승자 중 가장 급진적이었던 이지(李贄, 1527~1602), 하심은(何心隱, 1517~1579), 나여방(羅汝芳, 1515~1588) 등은 “배움이 많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 배우지 않는 편이 치양지에 유리하다”, “글공부를 한다고 성인이 되겠는가? 대장장이가 되든지, 장돌뱅이가 되든지, 성인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내 마음에 악이란 없으니, 부귀영화를 욕망하거나 미녀를 욕망한다고 그것이 어찌 잘못이겠는가” 등의 주장을 쏟아내었다. 이런 주장은 양명을 오도한 것이라고 보았던 당견(唐甄), 황종희(黃宗羲, 1610~1695) 같은 사람도 황제나 명문족벌이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근대의 여명이었나?  오늘날 이런 양명학의 특성에서 “근대성”의 실마리를 찾는 사람도 많다. 경전이나 스승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마음에 선악을 선택할 권리를 준 것은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와 전통이 권위를 잃고 개인의 의지가 모든 것의 중심에 서게 된 사상적 전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분제의 사상적 토대가 부정되고 만민평등 사상이 재조명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욕망까지도 긍정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왕수인 본인은 근대적 사상의 소유자였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후대의 일부 양명좌파는 몰라도, 왕수인은 주희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목표를 도덕적 완성에 두었다. 이 때의 도덕이란 충, 효, 예의염치 등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도덕을 말한다. 또한 근대적 정신의 핵심에는 일체의 권위를 의심하고 거부하는 회의주의가 자리하는데, 양명학은 회의가 아닌 포용을 했다. 사람의 마음 밖에 실재하는 객관적 존재를 모두 무시하고는,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이고 주관적으로 풀이해버린 것이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사물의 이치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주자학에 있었다. 서구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타원형 우주, 뉴턴의 물리법칙, 나아가 다윈의 진화론 등을 통해 세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신을 고려하지 않고도 해명된다는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왕수인은 “나는 대나무의 이치를 따로 궁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대나무는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바로 본다면 대나무의 이치는 저절로 알게 된다”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양명학이 명나라 말기, 중앙정부의 권위가 점점 의심받는 가운데 서민들의 경제력과 자립심이 늘어가던 시대에 큰 호응을 받았던 사상임은 틀림없다.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그것은 서구 근대화 초기의 공화주의적 발전으로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양명학은 동아시아의 실제 근대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나카에 토오쥬, 구마자와 반잔 등이 양명학을 받아들여 도쿠가와 막부가 관학화한 주자학에 대항했으며, 이시다 바이칸이 양명학을 참고하여 ‘세키몬 심학(心學)’을 만들어냈다. 중국에서는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담사동(譚嗣同, 1865~1898),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까지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개혁과 민주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한국은 동양 3국 가운데 양명학의 영향이 가장 적었으나, ‘실학’에서 주자학과 다른 목소리를 내려 했던 데는 어느 정도의 영향이 보인다. 그리고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박은식(朴殷植, 1859~1925)처럼 양명학을 기초로 새로운 ‘자주적 공화정치사상’을 이룩하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