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공空의 실천(공,슈나 슈나타)

강나루터 2020. 2. 23. 07:08




空의 실천




앞에서 용수는, 인과因果는 연기緣起라고 하는 관계성에서만 성립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과 ‘과’를 각각 그 자체의 실체로서 파악하려 한다면 인과관계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용수는 인과란 환과 같다고 하였다. ‘환과 같다’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한다.


무자성이란 무엇인가? 씨앗[]은 흙이나 물 등 갖가지 조건[]들의 도움으로 싹[]을 피운다. 이 때 만일 씨앗이 씨앗으로 자부할 수 있는 자기 존재성[自性], 곧 변하지 않는 씨앗의 자아自我를 주장해서 썩지 않으려 한다면 씨앗은 결코 싹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 싹을 피우기 위해 씨는 썩지 않으면 안 된다. 썩는다는 것, 이것은 하나의 변화이다. 변화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자성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자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 무자성을 용수는 공이라 하였다. 공은 산스크리트어로 ‘수냐(sunya, 한)’ 또는 수냐타(sunyata, 한 것·空性)’라 하는데, 한자 공의 경우는 적어도 문자상으로는 구별이 어렵다. 여기서 공의 의미는 한자의 ‘빌 공’의 뜻을 생각해서 단순히 ‘비어 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공’을 단순히 ‘비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유의 반대 개념인 무, 즉 ‘없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므로,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공’의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무’란 ‘유’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실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이란 결코 사물을 ‘없다’ 곧 ‘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해 성립되므로 사물이 홀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어린아이를 보고 어떤 사람은 예쁘게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못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예쁘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예쁘다’·‘못났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 각자의 취향에 의한 것으로서,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예쁘다 못났다는 개념을 초월한, 단지 한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예쁘다·못났다는 판단은 오직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예쁘다·못났다 뿐 아니라, 선과 악, 길고 짧음, 더럽다·깨끗하다 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상대적인 의미를 초월한, 인간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연기緣起하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 이것이 ‘공’이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하여,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색’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 곧 만물을 의미하므로, 위의 내용은 ‘만물은 본래 선악·미추美醜 등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떠난 연기하는 무자성의 존재이며, 이 연기하는 무자성의 존재가 곧 만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반야심경」에는 다시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 하여 ‘이 공한 모습에는 생기고 없어지는 것도 없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나고 줄어듬도 없다’고 하였다.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공인데, 어찌 나고 죽고 더럽고 깨끗하다는 관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만든 개념에 집착하고 그것에 구속되어 결국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을. 이와 같은 공의 개념은 언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작용을 가지며, 사물에 대한 고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중도中道의 도리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용수는 「중론」권4에서, “모든 연기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 한다. 또한 그것은 가명名이며, 그것은 바로 중도中道에 지나지 않는다”(제24장18게)라 하였다. 연기緣起가 곧 공이고, 공은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념[언어]에 지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며, 그것은 ‘있다’·‘없다’ 라고 하는 긍정적·부정적 판단을 초월한, 다시 말하면 고정적인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중도中道의 실천임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용수의 공에 대한 개념을 간략히 정리하면, ‘어떤 것이 공’이라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것 그 자체의 고유의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무자성], 다시 말하면 존재의 진실한 본연의 자세, 곧 연기를 말하는 것이지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유實有라고 생각하여 집착하고 있는 ‘나’·‘내 것’이라는 관념을 제거해서‘나’·‘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사물을 올바로 보고 올바로 판단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공의 실천이다.

「반야심경」에서 만물의 불생불멸을 설한 것도 사물이 ‘생한다’·‘멸한다’ 고 하는 일상적인 판단을 깨기 위해서 이고, 또한 사물은 일상적인 언어가 예상하는 것과 같은 자성自性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여 모든 법의 공함을 설한 것도 사물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서 이다.

공을 실천할 때 우리는 열반에 들 수가 있다. 열반의 세계는 언어의 표현이 끊어진 세계로서 또한 ‘공’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공’에는 언어의 표현이 끊어졌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개념 규정을 부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공도 또한 언어상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열반의 경계를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행자를 희론적멸인 열반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흔히 큰 일을 성사시키고자 할 때면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의 실천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오성적悟性的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실천적으로 체인體認하는 것이다. 티끌 한점 없는 명경明鏡에 삼라만상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처럼 내 마음도 본래의 때 묻지 않은 투명하고 맑은 상태로 돌아갈 때 진정으로 마음을 비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