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감상

한산과 습득

강나루터 2021. 3. 2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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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 : 청나라 나빙(羅聘 1733〜1799)의 작품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는 사찰의 벽화나 선화(禪畵)로 잘 그려져 왔다. 우리나라에도 고창 선운사의 벽화에, 단양의 구인사 벽화에도 한산습득도가 그려져 있는데, 인물화로서 그려진 한산습득도는 현재 미국의 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나빙의 작품을 가징 잘 표현된 것이라고 평하여지고 있다.

 

이 그림에 쓰여진 화제시(畵題詩)의 내용 또한 풍자적이면서 교훈적이다. 나빙은 화가로서의 명망도 있거니와 시인으로서의 명망도 있는 사람이다. 특히 그는 청나라 중기의 건륭제 연간에 이름난 화가 금농(金農)의 제자로, 금농 또한 화가로서, 문인으로서, 서예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이 그림의 위쪽에 적힌 화제시(畵題詩)는 다음과 같다. 나빙의 작품 속에 쓰인 시문이므로 이 시문 또한 나빙의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寒山拾得二聖 降亂時曰 可可可

我若歡顔少煩惱 世間煩惱變歡顔

爲人煩惱終無濟 大道還生歡喜間

國能歡喜君臣合 還喜庭中父子聯

手足多歡刑樹茂 夫妻能喜琴瑟賢

主賓何在堪無喜 上下情歡兮愈嚴

呵呵呵

 

한산 습득 두 성인께서 이르시되,

어려움에 저 주면서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라시네.

걱정 않고 웃는 얼굴 번뇌 적나니,

이 세상 근심일랑 웃는 얼굴로 바꾸라네.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나니,

큰 깨달음의 도는 기쁨 속에 꽃이 피네

나라가 잘되려면 군신이 화합하고

집안이 좋으려면 부자간에 뜻이 맞고

손발이 맞는 곳에 안 되는 일 하나 없고,

부부간에 웃고 사니 금실이 좋을시고

주객이 서로 맞아 살맛이 절로 나니,

상하가 정다우며 기쁨 속에 위엄 있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라시네.

(번역 德田)

 

 

▲ 같은 그림의 틀 안쪽 면

 

위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에 한산과 습득의 관계를 알아둠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국청사의 풍간선사가 행각(行脚) 중에 길거리에서 불쌍한 아이를 주어다가 길렀는데 이 아이가 바로 주어 왔다는 의미의 습득이며, 한산과 친숙하게 지내게 되었다.

 

한산의 시가 유명하지만 습득의 시 또한 『전당시(全唐詩)』에 50여편이 전하여 오고 있다. 아래 습득의 시를 통하여 한산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산이 인간적으로 습득의 형의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시이다. 습득의 시 한 편을 감상하여 보자.

 

 

從來是拾得(종래시습득)

不是偶然稱(불시우연칭)

別無親眷屬(별무친권속)

寒山是我兄(한산시아형)

兩人心相似(양인심상사)

誰能徇俗情(수능순속정)

若問年多少(약문연다소)

黃河幾度淸(황하기도청)

 

원래 이 습득이란 부름이,

우연한 일컬음이 아니라네.

따로 친숙한 권속은 없으니,

한산 그이가 내 형이라네,

세상 인정을 어느 누가 호령하랴.

만일 나이의 많고 적음 물으면,

황하 물이 몇 번이나 맑았더냐고.

 

마지막 구절인 “황하기도청(黃河幾度淸)-황하 물이 몇 번이나 맑았더냐고” 하는 문장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한산의 시 「아견황하수(我見黃河水)」의 끝 구절과 같은 문장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 나빙(羅聘, 1733~1799)은 청나라 화가로 평생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자(字)는 돈부(遯夫) 호는 양봉(兩峰) 이외에 별호가 여럿이었는데 화지사(花之寺), 의운화상(依雲和尙), 금우노인(金牛老人), 사련노인(師蓮老人) 등등이었다,

 

조상들은 안휘흡현(安徽歙縣)에서 살아왔는데, 할아버지 대에 양주(揚州)로 이거하여 살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이고 어렵고 힘겨운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당대의 이름난 화가 금농(金農 -청나라 중기 건륭제 때의 화가, 문인, 서예가)의 수제자가 되 화법의 신수(神髓)를 이었다.

 

 

화가로서의 재기(才氣)가 뛰어나, 그 화법(畵法)이 대담하고 변형적이어서 못 그리는 그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내용의 그림을 그렸다. 산수(山水), 초상화(肖像畵), 화조(花鳥), 화훼(花卉), 매죽(梅竹), 불상(佛像) 탱화 등등 작품을 남겼다. 특히 당시 눈뜨고 볼 수 없는 사회적 추태를 풍자한 형형색색의 추악한 귀신의 형태를 묘사한 다양한 귀취도(鬼趣圖)를 잘 그렸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밝은 대낮에도 귀신이 보인다고 말하여 왔다. 그가 대낮에도 잘 보였다는 귀신은 아마도 추악한 죄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귀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러한 연유, 즉 쪽 빛 눈으로 귀신을 식별한다는 의미로 그를 남안식귀(藍眼識鬼)라 칭하여 왔다.

 

나빙의 필정(筆情)이 고일(古逸)하여 오묘함에 이르지 않음이 없어서 예술가로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 오는 사람 중에 나이가 가장 젊었다. 시문에도 뛰어난 재질이 있어 시문집 『향엽초당시집(香葉草堂詩集)』을 남겼다. ‘향엽초당’이란 나빙의 가족이 살던 집을 이르는 말로 나빙은 평생 동안 주초(朱草)를 좋아하며 길러 왔는데, 주초는 하루에 한 닢의 이파리가 피어나기 시작하여 15일 동안 열다섯의 이파리가 피고 난 다음, 16일째부터는 하루에 한 이파리씩 지는 기이하고 향기로운 풀이어서 이 풀을 기르면서 ‘향엽초당’이라 하였다고 기록에 전해 온다. 지금도 이 향엽초당은 보존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나방숙(羅芳淑)의 묵매

아버지의 부탁을 받들어 그렸다는 의미의 봉부명화(奉父命畵)라고 쓰인 화제가 보인다.

 

 

 

나빙의 처 방완의(方婉儀, 호 白蓮) 또한 화가였으며 매란죽석(梅蘭竹石)을 잘 그렸고, 시문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의 두 아들 윤소(允紹), 윤찬(允纘)과 딸 방숙(芳淑)까지도 그림을 그렸는데 그 가족 모두가 매화를 잘 그려, 당시 나가매파(羅家梅派)를 형성하였는데 오늘의 중국 회화사(繪畵史)에 그렇게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나빙의 딸 나방숙의 매화 그림 한 폭을 살펴보면(위) 아버지의 부탁을 받들어 그렸다는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직접 서술] http://blog.naver.com/bhjang3.do class='lime' target=_blank> 德田의 문화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