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여초 김응현(如初 金應顯),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承), 학남(鶴南 鄭桓燮) 등이 타계한 이후 오늘의 한국 서예계를 대표할만한 서예가들은 과연 누구일까? 우선 80대의 서예가 두 분이 눈에 띈다. 첫째로 동강(東江 趙守鎬) 선생이다. 이 분은 아직도 매년 개인전을 열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원래 회화를 전공한 동강은 서예로 전환하여 현재 예술원 회원이며 아직도 후학 지도에 열성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으로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선생을 들 수 있다. 우죽은 일찌기 소전 손재형 선생의 지도를 받았고 74년에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서예협회 1. 2 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작년 8월에는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상으로 원로급 서예가들을 마감하고나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60대의 서예가들이 눈에 띈다. 그 첫번 째 인물이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이다. 초정 권창륜(1943- )은 1943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에 일중 김충현선생에게 사사하여 국전 입선 10회, 특선 4회의 기록을 세우고 국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국전초대작가및 심사위원,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서예가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상의 화려한 경력에서 보듯 그는 여초 이후에 한국을 대표할만한 서예가로 평가 받는듯 하다. 그는 五體(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다 섭렵하고 사군자, 문인화, 전각등 다양한 분야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서예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초정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서예가는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이다.
 초민 박용설(1947~ )은 대구의 계성중학교, 서울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사대 체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그는 학남 정환섭의 문하에 들어가 서예 수업을 받았다. 학남 정환섭은 소전 손재형의 제자이므로 계보로 본다면 박용설은 소전의 계보를 잇는 셈이다. 초민은 미술대전에서 8번의 입선과 2번의 특선을 거친 뒤 1986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는 이화여고에서 15년간 교편을 잡았고 1990년 9월부터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금까지 지도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五體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습(博習)에 대한 신념을 지금까지 견지해 오고 있고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예컨대 제자들이 고윤서회(古胤書會)를 결성하고 작품전을 할 때 그들에게 중국의 최신 자료를 제공하며 각 서체별로 연찬해 나가도록 지도하고 있다. 현재 고윤서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시헌(是軒) 남두기(南斗基, 1953~ )는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도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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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을 들어야 하겠다. 194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정도준은 10살 때 처음 붓을 잡았다. 그의 부친은 해인총림 현판을 쓴 유당(惟堂) 정현복(1909~1973) 선생이다. 그는 상경하여 건국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친의 소개로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본격적인 서예수업을 받으며 대학 공부보다 서예 공부에 전념했다.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작품 `조춘(早春)`으로 대상을 차지했고, 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전을 시작으로 한국 서예의 깊고 은은한 멋을 유럽에 알려왔다. 2000년 독일 KIST 유럽 초대전, 2001년 프랑스 파리 미로갤러리 초대전, 2002년 프랑스 레임 초대전 등 지금껏 25차례 해외전을 여는 등 해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2001년에는 경복궁의 흥례문 현판 휘호를 비롯해유화문 현판과 창덕궁의 진선문 숙장문 현판, 규장각 그리고 덕수궁의 덕홍전 중수기 등 숱한 문화재를 복원하며 그의 글씨를 남겼다.
그는 한글서예에도 독창적인 필치를 구사하여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으며 90년 9월부터 초민 박용설과 함께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도교수를 맡고 있다. 그의 제자 한얼 이종선도 서예아카데미에서 한글부문 서예 지도교수로 활동 중이다. 



네번째로 한사람을 더 뽑는다면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학정 이돈흥은 1947년 담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송곡 안규동 선생을 사사하고,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호남계열의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나름대로 독창적 서체인 鶴亭體를 이뤄내는 등 한국 서단에서 활약중이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광주시립미술관 초대 ‘학정 이돈흥 서예술 40년전’을 열었다. %200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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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서예가들 외에도 醉墨軒 인영선, 何石 박원규 등 동년배의 많은 서예가들이 있으나
모두 거명하는 것은 생략하고저 한다. 끝으로 재야 서예가로 릴반에 널리 알려진 쇠귀(牛耳) 신영복(申榮福, 1941~ )을 들고 싶다. 신영복은 오랜 기간 영어생활을 한 극적인 인생체험을 통해 독특한 서예관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서예가로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우선 그의 이름은 한국서예가협회에 등록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연유로
해서 웬만한 서예가 이상으로 활발한 서예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어려서 조부에게서 한문과 글씨을 배웠고 20여년에 걸친 교도소 생활을 하는 동안 교도소측에서 주선해준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선생과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선생 두 분으로 부터 서예교육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두 분 중에도 정향 조병호(1914~ )는 일중, 여초에게서도 존경을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서예가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 전서로 부터 예 해 행 초에 이르기까지 五體를 7~8년에 걸쳐 지도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글 서예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우려 궁체, 고체를 토대로 탐구하여 그 나름대로 한글체를 개발하여 한자와 한글을 겸용한 독창적인 '신영복체'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글씨외에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즐겨 서화를 함께 구사하고 있다. 하여간 그는 정통 서단의 작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력면에서는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有脚陽春 - 서예작품집『손잡고더불어』1995년 다리가 달린 따뜻한 봄
宋璟愛民恤物朝野歸美 時人咸謂璟爲有脚陽春 言所至之處 如陽春照物也(開元天寶遺事)
송경(唐 宰相)은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껴 온 나라의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일컫기를 송경은 다리가 달린 따뜻한 봄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봄볕이 만물을 포근히 감싸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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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走馬看山격이나마 한국 현대서예가 편람을 마칩니다. (2011. 3. 18. 鶴軒 이 연 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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