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환난관(患難關). (이세상의 환난의 난관을 초월해야 된다 라는 가르침이니, 사람이 환난을 당하면, 대개, 자기가 세운 입지를 포기하고, 무너지게 됨을 경계한 글) 주역(周易)에는 말씀하기를 사람이 곤궁하게 생활을 하면서도 지킬 바의 형통한 예절을 잘 지켜서 실수하지 아니하면 오직 군자가 될것이라고 하였다. 중용(中庸)에는 말씀하기를 본데부터 환난속에 태어나서 환난속에 사는 사람은 환난에 대해서 지선(至善)의 도리를 실행을 하라고 하였고, 장춘진인(長春眞人)은 말씀하기를 자기가 병들은 것은 곧 다른사람에게 병들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되며 자기가 죽는것은 다른사람에게 죽는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을때에 이르르기 까지 하나에 집착해서 잡아야 될것은 도를 잘 살피되 어긋나지 말아야 할 것인바,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없어질것이라고 하니 이것은 다 말하자면 그 환난을 난리를 인해서 처음에 자기가 타고나고 생각하던 입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옳치 않다는 것이라. 무릇 우주의 대도(大道)라는 것은 하늘과 땅에 꽉 싸가지고 얽고 있어서 남모르게 천지(天地)조화의 변화를 탈취해서 죽음의 문에서 나와 사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고 범인의 경지를 초월해서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부처님도 될 수 있고 신선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큰 용기와 큰 힘을 가지고 하늘을 자기의 머리의 두정으로 삼고, 땅에서 서있을 때에는 철한(鐵漢)과 같아서 티끌세상을 벗어나고 이 풍속의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금강의 지혜가 있지 않다면 능히 이러한 도(道)라는 것을 실어가지고 있을 수 없고 일어나서 도를 잡아당길 수 없으며 이 도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 어떻게 하는 것이 큰 용맹이 되고 큰 힘이 되는 것인가. 아무리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능히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빈천하고 가난하게 살지라도 능히 자기 뜻을 옮기지 아니하며, 위엄스러운 무력에도 능히 정신적으로 굴복 당하지 아니하는 것이 대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은혜다 사랑이다 하는 것에 능히 꼬이지 아니하고, 자기의 명예와 이익에 대해서 능히 유혹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대력이 되는 것이다.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부터 한번이라도 자기 마음에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 이것을 대력이하고 하는 것이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심정에 제연히 끊어 버리고 한번이라도 방하(放下)해서 그런 마음을 내지 아니하는 것이 이것이 대력이 되는 것이다. 아주 곤고(困苦)히 살고 고초스럽게 살고 아주 위험하게 살고 어렵게 살아도 자기 마음을 움직이지도 않고 요동하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질병으로 병이들고 재앙이 일어나고 횡액이 일어나고 하여도 그 자연함을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을 순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 대용(大勇)이 되는 것이다. 아주 배고프고 몸이 추워서 벌벌 떨고 추워서 울고 배고픈 그런 경지에 자기 생명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기 심성이 변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 큰 대용(大勇)이 되는 것이다. 남한테 수치스러운 일을 많이 당하고 남한테 능멸을 당하고 업신여김도 당하고 욕을 받는 그런것에 대해서 그것은 마음에 인식도 않는다면 이것이 대용(大勇)이 되는 것이라. 그런 까닭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리왕이라는 사람이 와서 석가모니 살을 칼로 베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하고, 순양옹(純陽翁)이라는 신선이, 정양조(正陽祖)라는 신선에게 열번 시험을 보임을 만나도 거기에 실패가 되지를 아니하고, 자청(紫淸)이 큰소리로 꾸지럼 당하면서 나무람에도, 가르치다 야단치며 떠나가면서도 성을 내지 아니했다라고 하고, 장삼봉(長三奉)이라는 신선이 옷이 떨어지고 신이 떨어져도 그것을 뉘우치지 아니했다라고 하고, 장진(長眞)이라는 신선은 남들이 주먹으로 자기를 두드리더라도 싸우지를 아니했다라고 하고, 장춘(張春)이라는 신선은 남이 자기의 옆구리 갈빗대를 세번 부러뜨려도 돌보지도 아니했다라고 하니, 이상의 성현들은 다 환난을 만났을때에 자기 마음을 숫돌에 가는것같이 하고 단련을 해서 아주 무한한 한량이 없는 그런 고초를 다 받아주는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침내 능히 대법을 설명 듣고 대도(大道)를 밝혀서 범인을 초월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 까닭이 되니 그 참 드물게 볼 수 있는 그런 큰일을 성취하게 된것이라. 이 세상의 우물쭈물하게 그냥 배워 나가는 그런 사람은 환난이라는 이 난리가 이것이 참 진실함을 수련하는 큰 약이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도를 성취하는 난로가 되고 망치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도리어 환난과 난리를 두려워하게 되고 환난을 자꾸 피하고 피해서 혹 자그마한 배고프고 추운일을 만났을 때에 문득 별다른 법을 생기게 하고, 혹 자그마한 질병을 만났을 때에 곧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고, 혹 어떤 사람은 작은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에 곧 자기가 후퇴해서 물러날것을 생각하며 혹 어떤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능멸히 업신여기고 욕을 하는 것을 만났을 때에 문득 그사람과 더불어 다투고 싸워서 의논하게 된다. 참 진검(眞劍)은 아주 주요한 일이 큰 불속에 있을때에 그것을 잘 단련을 해서 나타낼 수 있고, 연꽃은 모름지기 더럽고 더러운 진흙속을 쫓아 있음에, 그속에 자라나고 연꽃을 잘 이룬다는 것을 알지를 못하니 불기운이 아니면 그 참 황금의 밝은 것을 볼수가 없는 것이고 진흙이 아니면 연꽃의 청정함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환난이 무슨 병이 되리오. 환난이 한번 지나간 연후에 그사람의 심금과 그사람의 높고 낮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고 환난연후에라야만 그사람의 뜻의 지위와 그사람이 참된 진실한 사람인가 거짓된 사람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내가 참마음으로 이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 권유하는 것은 속히 환난의 그 난관의 관문의 출입구를 꽉 잡아가지고 그것을 타파하고 이것을 통달해서 사람의 심성과 생명이라는 두글자를 아주 자기가 확인해서 그것을 잘 정해서 이세상에 살아도 저 한개의 심성과 생명이라고 하고 죽어도 저 한개의 생명과 심성이라고 해서 일체 모든 큰 재앙과 큰 난리와 어려움과 큰 아주 곤란한 일과 큰 횡액과 큰 위험한 일과 큰 검소한 일과 큰 험한 일을 다 하늘에 그냥 부처두어야 한다. 무심한 마음으로 처리할것 같으면 나날이 가고 오래오래 되매 자연히 흉한 것이 변해서 길한 것이 되고 재화가 변해서 복이 될 것이라. 그렇지 아니한즉 환난을 만나서 환난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기의 심성과 자기의 정신이 정하지 못하게 되며 자기의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디로 옮아가게 되겠구나, 어디로 이사를 가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환난이 없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자꾸 환난을 불러 이루게 되는 것이고 환난이 적더라도 큰 환난으로 변형을 하게 되어서 망령되게 생각을 하니 도를 밝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17) 괴사관(傀詐關). (속이고 속이는 그런 난관을 초월해야 된다) 주역(周易)에는 말씀하기를 씻으면서 드리지를 마라고 하였고, 시전(詩傳)에는 말하기를 귀신이 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가히 싫어할까라고 하며, 옥추경(玉樞經)에는 말하기를 정성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였고, 참동계(參同契)에서는 말하기를 효자가 마음쓰는 방법은 상극(相剋)의 경지를 감동을 시킨다 라고 하였다. 상량자는 말씀하기를 하늘이 혹시 어길지라도 마땅히 재물과 보배를 가지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구해보라고 하였다. 이것을 말하자면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에 활용해야 될 것이니 조금이라도 속이고 간사하고 거짓의 마음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무릇 배우는 사람들은 도를 배우는 것이 참 마음보다 귀중한 것이며, 이뜻은 자기 몸을 낮추어야만 능히 참 스승님을 감동시킬 수 있고, 믿음을 가지고 좋은 벗을 만나서 그 유익됨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내가 참 마음을 두어야만 스승과 친우들이 참 마음으로서 대접을 하게 되고, 내가 참 뜻을 두어야만 스승이나 친우가 참뜻으로서 상대를 해주는 것이다. 내마음을 감동되게 해야만 상대방이 서로 응해주게 된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사실이며 바꿀 수 없는 이치인 것이다. 참 마음과 참 뜻을 아니 둔다면 도리어 남을 속이고 귀휴하고 거짓을 함으로써 일을 삼는다. 얼굴로는 다 옳다옳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르다고 비방을 한다. 자기 스스로가 말하기를 속이고 또 여러말로 떠들고 지껄이면서 고명하다고 한다. 참 스승님은 밝은 거울로 멀리 비추어서 한번 보더라도 곧 그사람의 참 진실한가 거짓인가를 알 수 있으니 남을 속인다는 것은 진실로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이며 남을 속이는 것이 진실로 자기를 속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하는 데에 유익함이 없을 뿐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일을 무너지게 하니 속이고 간사한 일을 어찌할 수 있으리요. 이 세간에 사는 호도(糊塗) 학인(學人)들은 아무 집을 나와서 출가 입사를 한다고 하고 아무 정함도 없이 맹목적으로 도를 배운다고 하니, 장차 이 심성과 생명을 보통 평상의 물질됨과 같이 본다고 하고, 장차 도 배우기를 보통 평상의 일과 같이 보게 되며, 참 스승님을 만남에 곧 스승님에게 원관이 무엇인가를 묻고, 도를 하는 친구를 볼 때에 자기 스스로가 깊고 현묘하고 오묘하다고 자랑을 한다. 높은 스승님의 도리와 공경하는 벗의 도를 알지 못하며, 혹은 황언을 하고 귀어를 해서 말을 속여서 업신여기고 거만하게 하다. 혹 어떤 사람은 거짓 뜻으로 가지고 허세를 부리고, 헛된 정성을 가지고 겉으로는 화장을 하고 모든 몸을 꾸며댄다. 혹 어떤 사람은 간교하고 재주있는 말을 하면서 얼굴 위에 웃으면서 아주 좋게 보이려고 해서 도무지 남들이 즐거워하는 일만 하려고 한다. 혹은 동쪽을 가리키면서 서쪽을 그림 그리고 남을 자기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유인해서 잘 속여가지고 그사람의 본 속의 말을 겉으로 말을 노출되게끔 하며 혹 비슷하니 옆으로 누워서 어기는 것을 의지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지 아니한다. 어려운 일을 동정한체 묻기도 하며 혹 한번 읍을 하고 또 한번 밥을 먹으면서 어떤것이 핵심입니까 신선에게 구견을 구하며, 혹 어떤 사람은, 상대해서 높은 것은 이야기하면서 분변하고 구별하고, 혹 어떤 사람은, 조금 갈고 닦고 단련함을 두어서, 한스럽고 한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혹 어떤 사람은, 우연스럽게도 고초스러운 일을 만나면, 피해서 지나가려고 하고, 혹 어떤 사람은, 경서를 보아 가지고, 대략 큰 뜻을 관찰해서, 한번 글을 읽어봐서 지나가서 뜻을 대략 끝마쳐서 알게 되고, 혹 어떤 사람은, 스승의 말을 듣고서, 일찍이, 그것을, 아주 자문을 붙이지 아니하고, 겨우 말머리를 기록을 하며, 혹 어떤 사람은, 밖으로는, 비록, 도를 배운다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또, 별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도모하고 계획을 한다. 이미 자기가 수련해 행동을 하고 자기가 몸을 궁그린 것을 상상을 하나 또한 풍속의 인정에 얽히고 물들리게 되니 이와 같은 폐단의 병이 하나가 아니고 너무 많거늘 어찌해서 적실히 참 스승의 가르쳐주는 지점과 어진 친구들이 부지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리오. 내가 참마음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 권유하는 것은 속히 남을 속이고 간사하고 하는 난관의 출입구를 가지고서 그것을 타파하고 소통하게 해야한다. 낱낱이 지성으로 심장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바꾸어서 참 진실로 떨어져서 멈추는 그곳을 좇아서 점점 더 진보해서 나가면 만번 생각해도 실낱과 같이 터럭과 같이 작은 속이고 속이는 마음을 두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인 것이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양심을 속여서 그릇되게 자기 앞길을 끝마치게 되니 대개 정성이라는 한 글자는 능히 정성을 가지고 능히 하늘과 땅도 소통을 시켜서 귀신을 감동되게 하고 사람과 모든 만물을 감동되게 하니 어찌 스승과 벗이 있으면서도 능히 감동을 아니할 수 있으리오. 이미 능히 스승과 도우들을 잘 감동시킨 즉 대도는 가히 바라볼 수 있는 일이라. 그렇지 아니한즉 조금이라도 헛되고 거짓되고 속이고 거짓하는 생각을 둔 즉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게 되고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방촌의 마음속에 또한 큰 병이 생겨나게 되니 다만 능히 참 진실함을 구하지 아니함이 아니지만 그래도 도리어 참된 것이 어둡게 되니 망령된 생각을 하여서 도를 밝히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 (18) 시의관(猜議關). (의논하고 시기하고 그러한 난관을 초월해야 한다) 고경(古經)에 이르시길 스승의 적실한 가르침이 없다면 천상의 신선들도 거주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오진(悟眞)에 이르되 그대를 살찌우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예전의 안자를 능가한다 할지라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억지로 의심하고 시기한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긴요한 일은 구결(口訣)을 알아야 하며 으뜸 되는 것을 통하는 데에는 반드시 신선들과 함께 자세하게 의논을 해야된다라고 하였다. 장삼봉(長三奉)이라는 신선은 말씀 하시길, 하늘의 달이 둥근 것은 구결(口訣)하는데 있는 것이고 시기가 현묘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마음으로 정해 두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밝은 스승에게 절해서 묻는 것은 바야흐로 어린애가 손을 내려서 일을 하는 거와 같은 것이며, 속히 수련을 하려고 하니 오히려 더디게 된다고 하였다. 도(道)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스승이 전하는 것이니 가히 망령되게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고 사사로이 의논을 해서 아는 것은 아닌 것이라. 대개 큰 도라는 것은 오묘하고 그윽하고 깊어서 크다면 우주에까지 충만하는 것이고 작다고 한다면 세세하여 털끝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어서 그 크기야말로 바깥이 없는 것이고 적은 것이야말로 속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능히 잘 수련을 한다면 천지(天地) 조화도 뺏을 수 가 있으며 음양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심성과 생명도 아주 요달하게 끝마쳐서 신선과 부처를 이룰 수가 있어서 하늘과 땅으로 더불어 함께 길이길이 장구할 수 있고 하늘의 해와 달로 더불어서 함께 빛나고 광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보다도 먼저 내가 일을 하였으되 하늘이 내가 한 일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하늘보다 뒤에 하게 될 때에는 하늘의 시기를 내가 받들어야 되니 일체 모든 정도(正道)가 아니고 방문(旁門)의 경지로 공부한 사람들 외도(外道)를 공부한 사람들 이라면 가히 이루지 못할 일이라. 마음속에는 음양의 도가 있는 것이지만 몸밖에도 음양의 도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진실한 것도 있지만 거짓된 것도 있는 것이다. 참 진실함 속에도 거짓됨이 있으며 거짓된 속에도 참 진실한 것이 있어서, 참 진실한 속에 또 진실한 것이 있고 거짓된 속에도 거짓이 있게 된 것이라. 이것을 수련으로 해서 닦음으로 해서 "화후법" 이라는 것이 있고 차례와 질서가 있으며 우리가 몸으로 실천하는 "유위법"(有爲法)도 있고 우리가 심성으로 생각해서 해야되는 "무위법"(無爲法)도 있는 것이다. 처음시작의 일도 있고 끝마침의 종결[有終]도 있으며 채약(採藥)이라는 수련 방법도 있고 약을 합하는 합약(合藥)의 수련 과정도 있으며, "금단"(金丹)이 맺혀지는[結丹] 그런 일도 있고, 금단(金丹)이라는 약을 복용하는[服丹] 것도 있으며 이 도 수련에 대해서 태가 응결이 된다는 결태(結胎)의 경지도 있고 태를 벗어난다는 탈태(脫胎)의 경지도 있다. 그 일이야말로 여러 가지가 있어서 법을 지닌다는 것은 한결같지 아니하니, 진실로 밝은 스승님이 첫머리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분별을 하고 세세히 가르치고 암시하지 아니한다면 스스로 알아서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미 지나간 모든 단학과 도교에 대한 경전과 여러 저서에는 천 가지 방법으로 서로 비유하고 만 가지의 모양으로 그것을 형용을 하니, 약물(藥物)이라는 수련법과 화후(火候)라는 수련법을 구비하지 아니함이 있더라도 그러나 도의 으뜸이 되는 현묘한 것은 그것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자자하고 세소하고 아주 미소하여 말로 하자고 하더라도 말로는 나타낼 수 없으며, 도를 의논하려고 해도 의논이 말로 이를 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형상이 있는 것을 가지고 형상이 없는 것을 깨달아서 비유할 수 있을 것인가. 형상이 있는 것을 가지고 형상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뒷세상에 더함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조사님들의 이름을 빌려서 망령되게 그것을 짓고 망령되게 집착을 해서 성인의 도덕(道德)을 헐어버리고 비방을 한다. 신선의 글을, 문란히, 어지럽게 하며, 참 것과 거짓된 것을, 서로, 섞여두게 되니, 만약에 자기의 식견에 의지해서 내게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다시는 고명한 사람에게 묻지도 인정도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어두운 그물 속에 들어간다면 자기 일평생 그곳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마침내 종신토록 총명한 어진 재주로 분별하는 그 옳고 그르다 하는 것과 간사하고 바르다하는 그런 곳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이라. 대략 휘통해서 깨달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머리는 있고 결말의 꼬리는 없는 것이고 이것 같으되 옳은 것 같지만 이것이 아닌 것이니 어찌 능히 참 깨달아 알아서 확실하게 하나를 요달해서 백가지를 감당함을 볼 수 있겠는가. 세간의 호도(糊塗) 학인(學人)들은 도의 깊고 얕은 것을 알지를 못하고 자기의 생명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깨닫지 못해서 공중에 날아가는 반딧불의 밝은 불빛을 가지고 하늘을 미욱하게 하는 그 그물을 다 타파하기를 하고자 한다. 참 스승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에게서 그것을 구하며 혹 어떤 사람은 방문에 거짓되게 조작한 그 글을 보아서 작은 희롱을 운반하는 공부를 기록을 하고 자기 일평생 종신토록 그것을 지탱해 가지고 아주 견고하게 굳세게 해서 그것을 깨뜨리고 치지 못해서 자기 일평생을 그르치게 된다. 사람들은 조사님들의 바른 경서를 보고서 밤낮으로 외우고 읽되 참 뜻은 연구를 아니하고 다만 상상적인 것을 인정을 한다. 약물(藥物)이라는 수련법과 노정(火盧鼎)이라는 수련법의 설명을 보고 이것이 살아서 태우는 것이 수련이 되는가를 의심한다. 남자와 여자의 음양의 설명을 보고 규중에 금단(金丹)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고 시기를 하며 용이다 범이다 거북이다 뱀이다 그런 설명을 보고 이것이 바로 심장과 신장과 간장과 폐장을 의심하며 그것이 전도되고 거스린 운명을 거스리는 그런 설명을 보고 뒤에서 올라서 앞에서 내린다라고 의심하고 시기를 한다. 보배 구슬이라는 설명을 보아도 이것이 바로 기(氣)가 있는 물체인가를 의심을 하며 성인의 태(聖胎)라는 설명을 보고 기운과 혈액이 응키고 응결함이 된다라고 의심을 한다. 아주 청정하게 맑은 설명을 보고 이것이 바로 정신을 존속시키고 기운을 안정시키는 것인가 하고 의심을 하며, 우리가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유위법(有爲法)에 대한 설명을 보고, 무엇이든지 지어 가지고 만들면 된다라고 의심을 한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과 신성으로 하는 무위법(無爲法)의 설명을 보고 허공의 고요한 적적함이 된다라고 의심을 하니 이와 같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은 가히 낱낱이 열거해서 말할 수 없으나 다 수수깨끼와 같은 의심을 타파했지만 마침내는 허망함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참마음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 권유하니 시기하고 의심하고 의논하는 난관의 출입구를 타파하고 소통시켜서 자기가 일평생 살아온 시기에 자기 스스로가 자부해서 자랑하고 자기의 기량을 손으로 꽉잡아서 제거하고 참 스승을 찾아가서 구해서 그 깊고 오묘한 뜻을 열어 밝혀서 만번 이라도 가해서 자기의 거짓된 총명과 망령된 의논과 의심으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 스스로 떠들어대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모든 사람에게 정득을 얻을 수 없고 다만 자기에게서 구하게 되니 이는 자기 몸밖에서 찾아보고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며 문득 이것은 몸속에서 짓는 것이라 하는 것으로 망령되게 생각하니 도를 수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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