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기야 벚꽃 잎 난분분하는 봄날이 좋을 것이다. 개심사 늙은 벚나무가 피워내는 왕벚꽃이나 국내에 유일하다는 청벚꽃은 봄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긴 꽃 피는 계절에 어딘들 아름답지 않으랴. 하지만 그때는 가는 곳마다 꽃보다 사람이 더 많다. 이름 좀 알려졌다는 곳에서는 자칫 사람에 치이기 일쑤다. 진짜 보고 싶은 곳은 조금 한적할 때 찾아가는 법. 그런 이유로 꽃들이 흐드러지기 전에 서둘러 나선 길이다.
이번에 찾아가는 길은 숨겨놓고 조금씩 아껴가며 걷는 길이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에서 보원사 터를 지나 개심사로 넘어가는 길. 이곳에는 천 년 넘는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경주가 신라의 불국토(佛國土)였다면 이 일대는 백제의 불국토였기 때문이다. 골짜기를 따라가다 보면 백제의 이름 없는 석공을 만나기도 하고 저 멀리 서라벌에서 걸어온 젊은 승려들을 만나기도 한다. 봄이 오는 길목, 겨우내 얼어있던 마음을 푸근하게 녹여주는 백제의 미소와 개심사 심검당의 구부러진 기둥을 만나러 서산시 운산면으로 간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부처의 거처를 찾아가는 길은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한다. 티끌 가득한 속세에서 고요한 부처의 땅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다리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민다. 내에는 물이 제법 많다. 거기 추웠던 겨울도 녹아 흐른다. 길은 가파르되 멀지 않다. 계단의 끝에 관리소가 있고 불이문(不二問)을 지나면 저만치 세 분의 부처가 서거나 앉아 있다. 처음 온 것도 아닌데 가슴이 쿵쾅거리며 뛴다.
가운데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이 있고, 여래입상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입상, 왼쪽에 미륵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있다. 아래쪽이 파인 바위벽에 부처들을 새겼기 때문에 마치 우산을 쓴 것 같다. 백제 후기 작품이 지금까지 잘 보존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 부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세에서 찾아온 객을 맞이한다. 미소도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곳 부처들의 미소는 둥글다. 자비(慈悲)를 그림으로 그리면 바로 이 모양일 것이다. 그래서 각진 마음으로 올라와도 금세 눅지근하게 풀어지고 만다.
세 부처의 미소를 일러 오전에는 온화한 미소, 정오에는 근엄한 미소, 저녁에는 넉넉한 미소라고 말한다. 빛의 방향에 따라 미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계절 따라서도 달라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부처의 얼굴이 사나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뾰족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부처뿐이랴. 꽃 하나도 마음 따라 달라지는 것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곳 부처들은 그냥 부처가 아니다. 피붙이라도 되는 듯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나를 유난히 예뻐하던 오촌 당숙이다. 날마다 나를 업고 동네방네 마실 다니던 고모다. 백제의 시간을 살았던, 아니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는 민초들의 얼굴이다. 그가, 그녀가 벙긋벙긋 웃으며 손짓한다. 따뜻한 품에 부드럽게 안아줄 것 같다. 저 아래 세상에서 지고 온 고단을 부려놓고 돌 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기대놓는다.
#보원사 터 = 마애여래삼존상과 작별하고 내려와 다시 걷는다. 용현 계곡을 따라 보원사 터로 가는 길이다. 보통 차를 타고 올라가지만, 시간만 있다면 걸어가는 것이 좋다. 냇물 소리가 졸졸거리며 따라 걷는다. 걷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다. 마음의 얼룩을 하나씩 지울 수 있어서 좋다. 끝내는 빈 마음에 순정(純正)한 자연을 담는다. 흐려졌던 내가 다시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현대인의 고통은 ‘흐려지는 나’로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 대중 속에서 작은 존재로 전락한 나는 더 이상 본래의 내가 아니다. 자연 속을 걷는 것은 진짜 자아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이 길도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걸었을 것이다. 백제 시대 태안반도를 통해 중국과 부여를 오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재야 연구가 한 분은 이 길이 원효와 의상이 걸었던 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나라로 가기 위해 요동지방을 거치는 길을 택했다가 첩자로 몰려 실패했던 그들이 다시 잡은 길이 해로였고, 그렇다면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승려들이 먼 여행을 하려면 호환(虎患)과 도적을 피해야 하고 또 절에 들러 숙식을 해결해야 하니 길의 선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일대는 불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곳곳에 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원효가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내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깨달았다는 토굴(무덤)도 머지않을 터. 그런 가설이 사실인지 밝혀낼 능력도 없고 내 몫도 아니다. 다만 괘도로 걸려 있는 역사 속에 심장이 뛰는 사람을 대입시키는 순간 여행이 얼마나 윤택해지는지. 사실(史實)에 얽매이지 않고 묻고 대답하고 가설을 세우고 무너뜨리는 과정이야말로 길을 걷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재미다. 이 순간만은 까마득한 과거가 바로 어제 같다.
얼마 걷지 않아 항아리 모양의 개활지가 펼쳐진다. 보원사 터다. 보통은 폐사와 관련된 역사가 전해지기 마련인데, 이 절은 백제 때 창건되어 조선시대에 사라졌다고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이 일대에 아흔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는데, 100개를 채운다고 백암사라는 절을 짓는 순간 불이 나서 모두 태우고 폐사가 되었다는 전설만 전해올 뿐이다.
당당하게 서 있는 당간지주와 석조(돌확) 앞에서 이 절이 누렸던 영화를 가늠해본다. 석조는 국내에 남아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봄기운은 이 골짜기에도 그득하다. 비단처럼 고운 햇살이, 비어 있어서 더욱 넓어 보이는 절터를 흠뻑 적신다. 어느 순간 손뼉이라도 치면 풀마다 나무마다 우르르 꽃을 피워낼 것 같다. 내를 건너 중후한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오층석탑, 법인국사 부도와 부도비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개심사로 가는 길이다. 서산시에서 자랑하는 ‘아라메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개심사 =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 봄바람을 머금은 흙은 떡고물처럼 부드럽다. 허리 굽은 소나무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이 곱다. 햇살은 그예 길마다 결 고운 융단을 깔아놓는다. 온 산이 봄을 맞이하느라 꿈틀거린다. 개심사까지는 1.8㎞. 가까운 길은 아니다. 산길은 평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한참 걷던 능선길이 내리막으로 바뀔 무렵 개심사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경사가 제법 급하다. 낙엽이 그대로 쌓여있는 이 길은 유난히 곱다. 어느 순간부터 냇물과 동행한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가 바로 천상의 노래다. 한참 내려가다가 마지막 삼거리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니 저만치 개심사가 나타난다.
개심사로 들 때는 연못 위의 나무다리를 거쳐야 한다. 거기서 속진을 씻은 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開心) 부처의 거처로 들어야 한다. 보통은 누각을 끼고 오른쪽 해탈문으로 들어가지만, 왼쪽의 범종각을 거쳐 심검당(尋劍堂)으로 간다. 개심사에 올 때마다 선택하는 코스다. 구부러진 기둥을 먼저 만나기 위해서다. 두 곳 모두 심하게 구부러진 나무로 기둥을 삼았다. 구부러진 나무도 훌륭한 기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고른 것 같다. 그 가르침은 늘 무겁게 가슴에 얹힌다. 혹시 곧은 나무만 보려하지는 않았을까? 굽고 옹이진 나무를 경시하는 눈을 가진 적은 없었을까? 구부러진 나무 앞에 서서 마음을 씻는다.
개심사는 여느 절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고졸한 맛이 특별하다. 산벚나무, 느티나무, 배롱나무…. 그들도 허리가 굽어 하늘보다는 땅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심중에 감춰둔 절집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 개심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절들이 중창불사라는 이름으로 들썩거릴 때도 이 절은 고요하다. 대웅보전을 보고 내려오는데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저녁 공양을 알리는 소리다. 밑도 끝도 없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영상처럼 스친다. 석양이 질 무렵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고 고샅길을 지나 은행나무마당까지 달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리움은 모두 여기 숨어 있었구나. 목탁소리가 산을 넘는 순간 해가 설핏 서쪽으로 기운다. 탑돌이 하는 여인처럼 마당을 천천히 돈다. 이제 속세로 내려갈 시간이다.
#그 밖의 가볼 만한 곳 = 개심사와 가까운 곳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보존돼 있는 해미읍성이 있다. 왜구를 막기 위해 1417년(조선 태종 17)부터 1421년까지 축성했다. 남문인 진남문과 동문·서문이 있고, 성내에 동헌·옥사(獄舍)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1578년(선조 11)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해미읍성은 특히 천주교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처형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뒤늦게 알려진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마애삼존불로 불러왔는데 2010년 문화재청의 ‘국보지정 명칭 통일방안’에 의해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으로 이름을 바꿨다.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삼존상은 암벽을 약간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했다. 가운데 연꽃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통통한 얼굴에 큰 눈과 두툼한 입술을 하고 있다. 얼굴의 전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특유의 자비로운 상을 보여준다.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광배의 중심에 연꽃을 둥글게 새기고, 둘레에 불꽃무늬를 새겼다. 대좌로부터 광배에 이르기까지 2.8m이다. 여래입상의 왼쪽에 있는 보살입상은 한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려 반가부좌를 하고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뭔가 생각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여래입상처럼 얼굴이 통통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목걸이 장식만 있고, 하체는 치마가 발등까지 늘어져 있다. 여래입상의 오른쪽 보살은 키가 자그마한데 역시 연꽃대좌에 서 있고 두 손을 가슴께 모아 보주(寶珠) 같은 것을 쥐고 있다. 얼굴은 볼이 두툼한 데다 천진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마을사람들만 알고 있던 이 삼존상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9년이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편을 보면, 발견될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을 맡고 있던 홍사준 선생은 보원사 터를 조사하러 갈 때마다 나무꾼을 만나면 부처님 새긴 것이나 석탑 무너진 것을 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루는 한 나이 많은 나무꾼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 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개심사(開心寺)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象王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덕숭산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651년(의자왕 11)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라 부르던 것을 1350년 처능이 중창하며 개심사로 고쳤다고 한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명부전 등이 있다. ‘지혜의 칼을 날카롭게 갈아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의 심검당은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를 기둥으로 삼아 자연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개심사에서는 많은 고승들이 머물러 수행했는데, 특히 한국 선종의 중흥조라 불리는 경허 스님이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이 절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봐야 더욱 돋보인다. 산신각쯤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적송들 사이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전각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보원사 터에서 개심사로 넘어가는 길은 어지간한 체력이면 걷기에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서산한우목장과 내포평야의 전망이 무척 좋다. 차를 갖고 간 경우에는 개심사에서 다시 보원사 터로 넘어오거나, 절 입구 마을까지 내려가서 택시를 타고 원위치로 가야 한다. 마을 입구 슈퍼마켓에서 물어보면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운산·개심사 방향으로 우회전한 뒤 해미·덕산 쪽으로 좌회전해서 달리다 보면 고풍터널과 고풍저수지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묵을 곳·먹을 것 = 보원사 터 인근에 용현자연휴양림(041-664-1971)이 있다. 음암면 유계리의 김기현 가옥(041-688-1182)과 운산면 여미리의 유기방 가옥(041-663-4326)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곳곳에 모텔·펜션·민박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마애여래삼존상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있는 용현집은 어죽으로 유명해서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해미읍성 진남문 바로 앞에는 음식점 밀집지역이 있다. 가정식백반을 하는 보글보글식당에서는 밴댕이찌개를 맛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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