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정(松江亭)
정철이 선조 17년(1584) 대사헌 재직 시에 동인의 탄액을 받아 물러난 뒤 담양으로 돌아와 4년 동안 은거생활을 하며 머물렀던 초막을 ‘죽록정(竹綠亭)’ 이라 하였다.
현재의 정자는 1770년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고 ‘송강정’이라 고쳤다. 송강 정철은 임금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심정을 님과 이별한 여인의 심정으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정철의 삶, 정철을 품어준 담양, 그 인연은 할아버지의 산소가 지실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양의 김윤제(환벽당의 주인)가 송강 정철을 제자로 삼게 된 인연이다.
1551년 명종 6년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별당 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그 소년에게 달려가 보니 기상이 좋고 재기가 넘쳐 보였다. 그래서 제자를 삼았는데 그가 바로 정철이었다. 정철은 김윤제를 만날 즈음에 순천에 사는 둘째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용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던 길이었다. 김윤제의 안목처럼 정철은 어떤 글이라도 세 번을 읽으면 능히 암송하였고 학문에 정진했으며 특히 시문을 잘 했고 글씨에 능했다. 김윤제는 이런 인연으로 만난 정철을 환벽당에서 지내게 되면서 16세 소년시절부터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가르쳤으며 훌륭한 스승을 불러 공부를 시키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정철은 환벽당에 머물면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 성흔, 송익필과 같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과 사귀었다. 김윤제는 정철의 됨됨이가 마음에 들어 외손녀의 사위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김윤제의 사위 유강항(柳强項)은 외동딸을 객지에서 온 정철과 혼인시키는 걸 탐탁지 않았다. 그러자 김윤제는 화가 나서 사위와 절교를 선언했다. 유강항은 이런 장인의 행동에 놀라 결국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 정철은 17세에 유강항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1년(명종 16년)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오늘날 칭송받는 정철의 학문과 국문가사, 한시 등은 김윤제가 품어 주지 않았다면 얻지 못할 결실이었다. 정철은 담양의 환벽당에 머물면서 실력을 쌓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한명의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마을하나가 통째로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담양이라는 고을이 정철을 품어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훌륭하게 키워내고 스승이도 한 김윤제의 안목과 베품이 시처럼 뭉클하게 다가온다.
정철의 삶을 살펴보자. 어린 나이인 10세부터 6년간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며 공부도 하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으며 매를 맞아 죽는 큰형을 보면서 한없이 불행하기만 했다. 조선시대 선비중에서 정철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도 흔하지 않다. 그는 서울 장의동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정유침의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어린시절 유복한 생활을 했다. 큰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둘째 누나가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인척으로 위세가 대단했다. 궁중에 출입하면서 어린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둥갑이었던 정철은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왕에 오르자마자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이 연루되어 처가인 정철의 집안은 큰 곤란을 겪는다.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큰 형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를 간다. 정철의 나이 12세 때 양재역 벽서 사건이 나자 그의 아버지는 영일로 유배되고 큰 형은 붙잡혀와 매를 맞아 죽는 슬픔을 맞는다. 정철은 1545년 을사사화 이후 1551년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정철과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지실마을로 이사를 온다.
거의 매일 한 두끼 식사를 같이 하고 차도 같이 마시고 낙동문화원에서 같이 숨쉬고 사는 정혜경 선생님, 죽록정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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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이 심은 나무라고? 믿거나 말거나...
전우치의 고장 담양, 황금 들녁과 추월산도 보이고... 심청전의 고장은 곡성으로 자리매김했을까?
면앙정[ 免仰亭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신(侍臣)이었던 송순(宋純)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그는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면앙정삼언가 俛仰亭三言歌〉를 지어 정자이름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고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동남향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으며 주두(柱頭)조차 생략되고, 처마도 부연(浮椽: 처마 끝에 덧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없는 간소한 건물이다. 주위에는 상수리나무·굴참나무·밤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속에는 아름드리나무도 간간이 서 있다. 주된 전망은 후면에 해당하는 서북쪽으로 평야 너머로 연산(連山)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면앙정의 풍류운치는 당대에 명사들에게 흠모되었는데, 송순이 지은 잡가(雜歌) 2편에서 그 풍취를 살펴볼 수 있으며, 이 글은 또한 《청구영언》 등 가집(歌集)에 무명작으로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십년을 경영해야 초당삼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대 업스니 돌려두고 보리라.” 이 노래는 만년에 이 정자를 두고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담양탐방에 따라 나선 37명의 선생님들!
더위속에서 무리한 탐방을 진행해 너무 고생을 시키는 건 아닌지 마음이 쓰이고, 시간을 착각해 못 오신 신청자선생님도 마음에 걸리네요. 너무 덥지요? 그래도 적극 참여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무사안전 답사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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