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실천유학의 대가,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산청사적지 답사 후기

강나루터 2017. 3. 5. 06:31

 

실천유학의 대가,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산청사적지 답사 후기

2015. 7. 21

 

대원사계곡 트레킹을 마치고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사상이 깃들어있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山淸郡 矢川面 絲里)에 위치한 산천재(山天齋)를 찾았다.

  

 산청재 위치도

 

산천재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비석이 우리를 반긴다. 이 비석은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조대왕이 내리신 제문을 국역하여 세운 것이다. 남명 조식은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현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톨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명선생은 1560, 수년간 독서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지리산 아래 덕산의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정했다. 선생은 아예 지리산을 스승으로 삼고 천왕봉(天王峰)이 올려다 보이는 덕산에 들어와 <경의(敬義)> 사상을 완성했다. 산천재는 경과 의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철학을 가르치신 교육의 산실이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 까지 평생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傳授)하던 유서 깊은 곳으로 경과 의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철학을 가르치신 교육의 산실입니다. 특히 선생이 표방한 천왕봉 같은 기개(氣槪)와 학문의 실천성은 그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을 때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길에 앞 장 섰다.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조대왕이 내리신 제문을 국역하여 세운 비석 

 

 선조대왕이 내리신 제문을 국역하여 세운 비문 내용

 

남명선생이 거처하던 공간

 

산천재(山天齋)

 

산천재(山天齋) 현판

 

남명선생은 조선 유학(儒學)의 종사(宗師)로서 경상우도(慶尙右道)에 주자학 일변도에 벗어나 음양(陰陽), 지리(地理), 의학(醫學), 관방(關防:국경을 지킴)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탐구하는 실용주의(pragmatism)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주자학 대세의 사조에서 벗어난 선진화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초상화 

 

남명선생의 기상을 나타내는 필치

 

퇴계(退溪)가 주자학의 이론 심화에 일생을 바친 반면, 남명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이 불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이론적 탐구보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윤리와 강상(綱常;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명분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산천재에서 천왕봉을 바라보아도 운무로 보이지않는다

 

산천재에는 산천재, 남명선생문집 책판 보관각과 남명선생이 기거하던 집으로 이루어 져 있고 산천재 앞에 남명선생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樹齡) 450여년을 자랑하는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이 매화나무는 해마다 꽃을 피운다고 한다. 산천재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기둥마다 남명 선생의 시가 주련(柱聯)으로 달려있다. 여기에 있는 주련시를 소개하면....

    

 

수령(樹齡) 450여년을 자랑하는 남명매(南冥梅)

 

남명선생 문집책판 수장각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 덕산 냇가 정자 기둥에 씀>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 천석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이 시는 산천재에 터전을 잡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인 시로서 남명선생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의 시   

 

<德山占居(덕산점거) : 덕산에 터를 잡고서>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白手歸來向物食(백수귀래향물식) :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 건가?

 

산천재 왼쪽 방문 위에 걸려 있는 시이다.
선생님의 도도한 기상이 지리산을 통해 사무치도록 잘 드러나 있다

 

산천재 기둥에  남명 선생의 시가 주련(柱聯)으로 달려있다

 

산천재 건너편에 있는 남명기념관을 찾게 되었다 출입문이 남명선생이 즐겨 차고 다니던 성성자(猩猩子)를 본떠서 성성문(猩猩門)으로 되어 있었다. 성성문 내부에는 남명기념관과 산청선비대학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경내로 들어가니 좌편에서부터 남명선생신도비문 국역비, 남명조식선생지상(南冥曹植先生之像), 선조대왕께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명종께 올린 상소문(上疏文)이 있다. 정면에는 남명기념관 건물이 나오는데, 들어가자마자 정면에 남명 철학의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는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나온다.

    

남명기념관의 출입문인 성성문(猩猩門)

 

 

남명조식선생지상(南冥曹植先生之像)

 

 

 

 

신명사도란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도덕의 주체인 인간 자신을 선성(善性)의 본체로 위치시키고, 그런 다음에 밖에서 유입되는 악()으로부터 그 선성을 보호하며, 나아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미리 잘라내고 아울러 악을 극복함으로써 선성을 인간의 생명활동과 도덕실천의 광장으로 확충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신명사도는 도덕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다툼을 전쟁에 견주어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은 신명사도를 자리 옆에 걸어두고 자주 보면서 수양을 하였다고 한다.

   

 

남명기념관 전경

 

신명사도(神明舍圖) 1

 

신명사도(神明舍圖) 2

 

남명선생의 철학을 딱 두 글자로 요약하면 경의(敬義) 이다. 이 말은 주역(周易)<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를 따온 말로 즉 군자는 경으로서 안을 곧게 하고 의로서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가 차고 다니던 패도(佩刀)<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썼다고 한다. 이 말은 즉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이 의라고 했다. 그래서 이 패도의 이름을 <경의검(敬義劍)>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남명선생은 <성성자(猩猩子)>라 이름 지은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움직일 때 마다 들리는 그 소리로 자신의 의식을 깨우는 수행을 생활화 하였다고 한다.

 

경의검(敬義劍)

 

성성자(猩猩子)

 

남명선생의 저술은 크게 나누어 시문집(詩文集)<남명집(南冥集)><학기류편(學記類編)>으로 나눌 수 있다. 시문집은 선생이 직접 지은 시()와 문()을 모아 편찬한 것이고 학기류편은 선생이 독서하는 과정에서 학문하는데 절실한 문구를 뽑아 기록해 둔 것을 문인(門人) 정인홍(鄭仁弘)이 유별로 모아 편찬한 일종의 독서기(讀書記)이다.

    

남명선생이 공부했던 좌전, 유유주문초 등의 서책

 

남명저서인 학기류편과 남명집

 

남명선생의 서한

  

 

  

남명기념관 전시장에는 남명선생의 일대기를 ,<과거공부와 학문의 대전환 시대>, <성리학에 침잠하던 산해정시대>, <직언을 서슴치 않던 뇌룡정시대>, <천도를 이루려한 산천재시대>, <남명이 추구하는길> 등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전시 설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단성소(丹城疏), 신명사도(神明舍圖), 왕실하사오경백편(王室下賜五經百篇), 사우록(師友錄), 덕천서원사우록(德川書院師友錄), 남명저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왕실하사오경백편(王室下賜五經百篇) 

 

사우록

 

덕천서원 사우록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위치한 산청덕천서원(山淸 德川書院)은 산천재에서 약 1.5km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에 대해서 알아보면, 조선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이자 유학발전에 공을 세운 대학자나 나라를 위해 충절(忠節)을 바친 선현(先賢)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덕천서원의 출입문인 시정문

 

 

 산청덕천서원(山淸 德川書院) 전경

 

덕천서원(德川書院)의 경의당

 

동재인 진덕재

 

서재인 수업재

 

덕천강 가까이 있는 세심정

 

이 곳 덕천서원은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돌아가신 4년 뒤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으나 지방의 유현과 진주목사 윤열(尹說) 등이 중건(重建)하였으며, 1609(광해군 원년)에 덕천서원으로 사액(賜額) 되었다. 이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다가 1870(고종7)에 다시 한 번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덕산서원 사우상량문

 

경의재 중수기

 

경의당 중건 상량문

 

덕천서원 중건기

 

서원의 배치형식은 앞에는 강학공간 뒤에는 사당을 배치하는 정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 공간의 중심 건물인 경의당(敬義堂)과 함께 유생(儒生)들의 생활공간인 동서재(西齋)가 있다. 경의당은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를 중요시하였던 선생의 학문 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다.

 

경의당(敬義堂) 뒤편에 있는 숭덕사(崇德祠)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南冥祭)를 지내고 있다.

    

 

남명선생을 제향하는 숭덕사    

 

 

 

 

출처 : 안동사범 11 회 동기회
글쓴이 : 에브노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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