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순(歐陽詢, 557 - 641)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당대의 4대가(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중의 한사람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닦았다. 후진 지도를 맡다가 정고 십오년 팔십사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 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 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 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그가 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인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체가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구양순의서풍 당 시초에는 왕희지의 서를 배웠고 후에는 서풍이 변하여 필력이 강하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의 서는 굳세고 늠늠하며 잘 정돈된 남파의 특징과 칼로 베듯 도끼로 찍 은 듯한 굳센 북파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구양순 체(歐陽詢體)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 순의 서체.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 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구양순체의 특징 당대 해서 중에서 가장 세련미를 지니며 귀족적이 서체가 바로 구양순체이다. 구양순은 젊어서 왕희지 부자의 서체를 공부하여 그이 결체는 강건하면서도 세차고 잘 정돈된 형을 취하여 준엄하고 세찬점 즉 붓을 댈때 면도날도 베고 도끼로 찍는 듯한 명쾌한 날카로운 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구양순은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 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구양순체의 기본글자의 취하는 형태는 안진경체의 향세와 달리 배세구조를 취한다. ★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구양순이 황제(太宗)의 명에 의하여 76세에 서하여 정관육년에 각하였다. 이 비는 구성궁에 있는 泉을 예찬, 즉 임금의 음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심경이 높고 품격이 좋다. 특징으로는 점, 획이 가늘고 직선적이고 자형이 길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점, 획의 간격이 고른 가 운데 변화가 있다. 方筆이 많아 다소 모가 나고 단정하고 근엄하며 背勢에 의해 점, 획이 중심으로 모아지며 긴장감이 돈다. "근심 걱정이 병이 되니 살갗이 포(脯)와 같이 된 요임금과 같고, 심하기가 발에 굳은살이 박힌 우임금 같네."라는 뜻이다. 구성궁예천명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구성궁이라는 궁궐 안에서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이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으로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고, 구양순(歐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구양순에 관련 된 성어 ▶능서불택필 能書不擇筆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 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 저수량(遂良)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 (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不擇筆紙]' 마음대로 글 씨를 쓸 수 있었다 [能書] 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 "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②주현종(周顯宗) 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 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 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 書)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 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출전] 唐書 歐陽詢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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