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석봉 금강산 기행 서첩 |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한호를 가평군수로 임명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맘껏 글씨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였다. 대신 한호는 관리로서 재능은 없었던 듯하다. 사헌부에서는 연일 한호가 수령으로서 직무를 태만히 하는 바람에 백성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며 그를 파직할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조사해볼 것을 명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았다.
선조의 한호에 대한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선조37년(1604년) 3월 대마도 도주가 편액을 요청하자 예조에서는 당시 흡곡현령으로 있던 한호에게 쓰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선조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선조의 답이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 있겠는가? 서울에 있는 아무나 보고 쓰도록 해서 보내주어라.” 대명외교문서에만 한호의 글씨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선조로서는 아직 강화(講和)도 맺지 않은 대마도 도주에게 글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선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호종공신과 왜적을 맞아 전공(戰功)을 세웠던 선무공신을 책봉했다. 공신도감에서는 공신의 등급을 정하고 이들에게 일종의 인증서인 교서(敎書)를 내렸다. 당연히 한호는 교서를 쓰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한호는 빼어난 글씨와 달리 행실에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때도 사헌부에서 한호를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교서를 쓰기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는가 하면 일부러 글씨를 잘못 쓰는 등 일종의 태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역시 선조의 답변은 단호했다.
“한호가 글씨를 쓰기 싫어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고의로 오서까지 했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 이번에 교서를 한호 혼자 쓰게 했어도 한 번에 쓸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아마도 잘못 전해진 것일 듯싶다.”
이후 일종의 공신증이라고 할 수 있는 녹권을 쓰는 일에도 한호는 동원되었는데 이 때도 한호는 천재로서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가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결국 한호는 흡곡현령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조는 공신 녹권을 쓰느라 고생한 인물들에게 어린 말 한 필씩을 포상으로 내리는데 거기에 한호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한호는 이런 논란이 있은 다음해 1605년(선조38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1606년 8월 6일 선조는 명나라 사신을 한양에서 의주까지 접대하는 원접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제학 유근을 위로차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한호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대제학이 원접사를 맡은 이유는 조선을 찾는 사신 중에는 시를 좋아하는 인물이 많아 이 쪽에서도 시문에 능한 사람을 뽑아서 보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조가 묻는다. “사신이 한양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유람할 때 우리 재상이 지은 시는 모두 직접 지은 것인가?” 이에 유근은 직접 지은 것도 있고 자신이 대신 지어준 것도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은 글씨 획이 매우 약하고 중국은 필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글씨에 능통한 사람으로는 한호만한 사람이 없었으나 그도 미진한 점이 많았다.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은 작은 부채에 난정기(蘭亭記)를 썼는데 작은 글씨가 매우 정묘하였다. 우리나라의 글씨에 능통한 자라도 어찌 그에 미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