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忍字(인자) 권구(權榘1672-1749)

강나루터 2018. 12. 1. 05:50


忍字(인자) 권구(權榘1672-1749)


工夫須向一忍求(공부수향일인구) 

 

忍到熟時方自好(인도숙시방자호)

 

看他衆人煩惱處(간타중인번뇌처)

  

自家胸中還浩浩(자가흉중환호호)


공부란 모름지기 참을 인자를 찾아야 해

참는 것이 익숙하면 참으로 좋은 거야.

저 많은 사람들은 번뇌 속을 헤매지만

내 마음은 도리어 넓고 넓은 바다 같애.

병곡 권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병곡(屛谷) 권구(1672~1749)

■ 권구 약력
△ 1672년 안동 지곡 출생, 안동 권씨 △1716년 병산으로 이주 공부 △1723년 다시 고향으로 와 후학 지도, 1739년 후학 공부 공간 '시습재' 건립 △1749년 별세 △1891년 이조판서 증직 

대표작 '서원 뜰에 국화를 심다(種菊院庭)'. '홀로 앉아서(獨坐)'


'홀로 앉음이 꼭 나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속객이 문에 이르지 않아 일실이 늘 한적하고/ 연기는 나서 산촌을 날며 햇빛은 빈 창을 밝히네/ 책을 펴고 책상 앞에 정좌해 잠자코 깊은 뜻을 찾으니/ 흡사 옛 성현이 좌우에 나열한 듯하네/ 때로 문을 열고 바라보니 산천은 어지럽게 눈에 차고/ 반가워하며 맵씨 내는 모습들 내 쓸쓸하고 적막함을 위로하듯 하니/ 깊이 생각하여 뜻을 자득하고 흥구(興句) 자주 얻어 수심(愁心)을 잊네/ 심기는 자연히 고요하고 세상 근심 모두 사라진다.'

병곡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시들이다. 병곡은 종신토록 마치 세상을 잊은 것처럼 문을 닫고 지낸 선비였다. 그는 벼슬 않는 선비의 삶의 모델을 보여주는 듯하다.

"가난에는 삼락이 있으니, 입은 거친 밥과 소채(蔬菜)를 익혔으니

음식이 만족하기 쉬워 고량(膏粱)을 원치 않으며

몸은 베옷을 익혔으니 의복이 편하기 쉬워 비단을 원치 않으며

거처는 비좁은 곳을 익혔으니 쉽게 편하므로

화옥(華屋)을 원치 않는다" -병곡의 글 '가난의 三樂'

◆가난의 三樂 즐긴 병곡

그의 아들 권보 등이 남긴 기록들이 병곡이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게 한다.

병곡의 부인이 아들에게 한 말이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의 아버지는 음식물의 감고(甘苦)와 의복의 편부(便不) 여부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평소 음식을 먹는데도 정수(定數)가 있어서 비록 악초라도 덜함이 없고 좋은 반찬을 만나도 더함이 없었으며, 입을 옷도 새 것·기운 것을 가리지 않았으며 다만 제삿날에는 웃옷을 빨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는 거처하는 방이 겨우 무릎을 펼 만큼 비좁아도 고치지 않고, 종일 정좌(靜坐)해 춥고 더운 용모를 보이지 않았다. 또 추워도 땔감은 더하지 않고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노복이 온돌방에 불을 너무 과하게 지펴서 매우 뜨겁자 나무판을 깔고 종일토록 앉았으니, 한 문인(門人)이 "이러다가는 병이 날까 두렵습니다" 하자 "옮길 만한 곳이 없기에 여기 있노라. 그러나 뜨거운 줄 모르니 어찌 병이 생기랴. 한열(寒熱)에 처하는 도가 있으니 고요하면 외환(外患)이 자연히 못 들어오느니라" 했다.

여름에 지나는 손님이 있었는데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 일어나 "덥고 옹색하기가 이런데 주인은 밤이 새도록 온수(穩睡)하시니 무슨 도를 얻어서 이러합니까" 하니, 웃으면서 "별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위에 익숙한 까닭이다"고 답했다.

손수 다음의 글을 써서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가난에는 삼락이 있으니, 입은 거친 밥과 소채(蔬菜)를 익혔으니 음식이 만족하기 쉬워 고량(膏粱)을 원치 않으며, 몸은 베옷을 익혔으니 의복이 편하기 쉬워 비단을 원치 않으며, 거처는 비좁은 곳을 익혔으니 쉽게 편하므로 화옥(華屋)을 원치 않는다.'



◆모든 행위는 定規 벗어나지 않아

평소 용모는 화평하고 동작에 모두 정규(定規)가 있어 황망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며, 자고 일어나는 시각도 이르거나 늦음이 없이 항상 그 시각이 일정했다. 방 안의 잡물도 두는 곳이 정해져 있고 일용법도가 엄해 털끝만치도 덮어 자신을 용서치 않는 행동이 오래므로, 마음이나 손 모두 편안해 비록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도 남과 다름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조석 식사에 씹고 마심의 다소와 수저 놀림은 정식(定式)이 있어 종신토록 변하지 않았으며, 비록 작정한 일은 아니나 자연히 절도에 맞았다. 중용·대학·주역 정문(正文)을 묵송(默誦)하는 날이 일과로 정해져 있어서 질병이나 빈객, 출입하는 말 위에서도 지켰다.

몸이 피곤하면 혹 눈을 감고 앉아 정신을 집중시키기도 하고 바깥에 나가 산책도 하며, 기대어 앉거나 번듯이 눕는 일이 없었다. 벗과 더불어 있으면 대화나 웃음은 정겨움이 우러나게 하고, 자랑이나 남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일이 없었다.

병곡은 노복을 대함에 있어서도 인정이 곡진하며, 고의로 범한 죄는 용서치 않았으나 그 질병과 노고를 살피고 사소한 선행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을 행하고 악은 부끄러운 줄 알도록 가르쳤다. 집안 할아버지 통덕공(通德公)이 병곡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때부터 너희 집과 이웃해 살았는데 너희 집에는 사람을 무는 개가 없었고 싸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은 화기에 응한 것이다"라고 했다.

병곡은 자식에게 이르기를 "인사(人事)는 사람과 더불어 상접(相接)함에 지나지 않으니, 진실로 사람을 대할 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버릇과 허위의 생각이 있으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느니라"고 강조했다.



◆평생 은둔하며 수신, 후학 지도

병곡이 어떤 인물인지 말해주는 일화다. 병곡의 문인 류세경(柳世經)이 어느 모임에 참석했더니, 밀암(密庵) 선생이 좌석 멀리서 "자네 지곡(枝谷: 병곡이 살았던 안동 가일) 사람 아닌가" 하며 불러서 각별히 대했다. 이를 보고 누가 묻자 "지곡 사람은 멀리서 봐도 군자향(君子鄕)의 사람임을 가히 아노라"고 했다 한다.

그는 공부할 때 정밀히 생각하고 조용히 거듭 숙독해 융회관통(融會貫通)하기를 기다리며 급박하게 구할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경서를 읽고 몸을 돌이켜 실천을 안한다면 진실한 선비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병곡은 평생 향리에서 조용히 지낸 선비였다. 당색이 치열하던 때라 벼슬을 단념했고, 한 때 병산서원 서쪽 적곡(跡谷)마을의 한 가옥을 빌려 집으로 삼으면서 동네 이름도 병곡(屛谷)으로 개칭하고, 이것을 자호로 삼았다. 1723년에 다시 지곡으로 돌아왔고 1725년에 거실에 현액(懸額)하기를 환와(丸窩)라 했다.

10세 전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글을 지은 그는 10대 초반에 과거와 관련 없는 책도 많이 보아 음양, 산수, 가례, 병법, 음률 등에도 해박했다. 간혹 침식을 잊으며 사서 등을 공부하던 그는 세상에 도의가 없음을 보고 그 현실을 바룰 수 없음을 탄식하며, "어찌 벼슬길에 나서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기만 같지 못하다"며 과장(科場)에 나갈 뜻을 끊고 문을 닫고 학문에만 독실했다. 병곡은 일찍부터 갈암(葛菴) 이현일의 문하에 출입, 그 학맥을 이었다.

별세하기 얼마 전 혈기의 운행이 거의 중지되어 능히 자력으로 기동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자가 신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는데, 하루는 홀연히 눈을 뜨고 미소지으며 "중용과 대학(庸學正文)은 내가 평생 외우던 것이나 이제 구독(句讀)의 착오가 있으니 정신이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구나" 하자 비로소 신음소리가 아니고 중용을 외우는 소리였음을 알았다.

1739년에는 마을 젊은이들이 병곡에게 배우는 처소로 삼고자 집 남쪽에 몇칸의 집을 지었는데, 병곡은 그 이름을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게시했다. '일신에는 마음이 주가 되고 한 마음에는 경(敬)이 근본이니 경으로써 마음을 간직한 뒤에야 바야흐로 덕의 문에 듦을 알리라.' '사람이 능히 사람됨은 다만 이 한 개의 마음이다. 혹시라도 그 마음을 잃어버리면 들짐승이 되고 또 날짐승이 되게 기르는 것이니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권구 불천위'이야기

분황고유때 士林의 公議로 불천위 봉해져

음력 1월28일 단설로…밤12시 10분 출주

병곡종택이 있는 가일(佳日)마을(안동시 풍천면 가곡1리)은 병곡이 태어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당시에는 지곡(枝谷)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가곡 또는 가일이라 불린다. 안동시 풍산읍의 하회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오른쪽에 표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바로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병곡종택의 불천위 사당은 종택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 마당에는 사당 건립 때 심은 회양목이 자라고 있다. 원래 두 그루가 똑같이 자라고 있었는데, 수년 전 한 그루가 죽어버리자 종손(권종만)이 2세 나무를 심어 키우고 있다. 불천위 사당에는 불천위 신주와 4대조 신주를 함께 봉안하고 있으나, 가장 서쪽에 있는 불천위 신주 옆에 칸막이를 해 다른 신주와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병곡은 1891년에 이조판서로 증직(贈職)되었으며, 당시 분황고유(焚黃告由)를 할 때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불천위가 되었다. '분황(焚黃)'이란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추증할 때 조정에서 사령장과 황색 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주면, 그 자손이 추증을 받은 선조의 무덤에 고하고 황색 종이의 부본을 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불천위 제사(음력 1월28일)는 단설로 지내며, 밤 12시10분쯤 출주(出主)를 시작으로 진행된다. 제관은 40명 내외이며 사위와 외손, 갈암 이현일 후손도 참석한다고 했다. 병곡은 갈암의 제자다. 불가피한 일이 있는 사람은 낮에 사당을 찾아 참배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 제사 음복 후 문회를 열어, 문중의 일과 문중 장학금 관련 사안 등을 논의한다. 김봉규기자
병곡 권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출처 : 풍악서당 남해
글쓴이 : 남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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