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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도덕경 일기| ♣ 자유게시판
삼도류 김인철 | 조회 21 |추천 0 | 2019.06.18. 11:31


6월 18일 도덕경 일기

도덕경 일흔두째 장.

 

백성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진실로 큰 위엄이 설 것이다.

그들의 거처를 핍박하지 말 것이며

그들의 삶을 힘들게 하지 말라.

힘들게 하지 않으면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자신을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을 아끼지만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백성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진실로 큰 위엄이 설 것이다.

= 제왕의 위엄이 아닌

백성 스스로의 위엄으로 생각하면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속병을 치유할 수 있다.

백성들이 백성들 스스로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진실로 큰 위엄위에 설 것이다.

백성들 스스로의 존엄을 넘어서 위엄을 따진다.

사람은 위엄이 있어야 돼.

위엄있는 사람이 되야 해.

나는 위엄있는 사람이야.

위엄있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고

위엄이 없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야.

위엄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향한 비난이

백성들의 마음속에 속병을 유발한다.

속병은 혈관을 수축시키고

몸 속의 혈액순환을 막아서 구석구석에 신선한 산소공급을

차단해 버린다.

몸이 곪기 시작한다.

몸이 곪으면 체내 찌꺼기들이 유유상종하면서

뭉친다. 뭉친 기름 찌꺼기들은 다시 모세혈관부터 막기 시작한다.

모세혈관을 막으면 ‘담’이 온다.

담이 오면 그 부분이 더 곪기 시작한다.

곪아서 터지는 경우는 밖으로 빼내지 않으면

더 이상 손쓸수 없을 정도로 그 부분이 변질되었다는 증거이다.

뇌경색, 뇌출혈, 심근경색, 당뇨부터 시작해서 모든 부분에서

제일 먼저의 뿌리는 마음의 병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고구마 줄기를 살살 더듬어가서 그 뿌리를 찾아서 뽑아야

고구마 수확을 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시작점을 찾으려고 서양 심리학자들은

계속 고구마 줄기를 더듬었다.

더듬다가 더듬다가 드디어 뿌리를 찾았다.

자기들 나름데로 그 이름을 붙였는데

‘아들러 심리학’이다.

그 심리학에 기초한 책이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다.

‘프로이트’는 잠재의식을 말했다.

억눌린 자아, 그 억눌린 자아가 받는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인간에게 행복은 없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억눌린 내면 자아가 어디서부터 억눌리기 시작했는가?

무엇이 잘못되어서 쓸모없는 암세포같은 게 압축되기 시작했는가?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된 사람의 특징은

바늘로 살짝만 찔러도 터질 것만 같다.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 따로 없다.

술만 쳐 마시면 돌변하는 사람은 100%이다.

이들의 특징은

“술만 마시지 않으면 그렇게 사람이 좋을 수가 없는데”

라는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다.

칭찬을 받기 위해서 시한폭탄의 무게를 늘리는 사람들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 제목을 보면 제목만 보더라도

‘칭찬받고 싶어 미친 내면 자아’와 반대되는 내용임을 알 수있다.

‘칭찬받을 용기’는 넘쳐나면서

‘미움받을 용기’는 하나도 없느냐?

‘아들러’ 처럼 해야지 프로이트의 내면아이가 구속에서 풀린다.

나쁜 놈이 되어라.

나쁜 녀가 되어라.

그래서 미움을 받아라.

미움을 받아도 괜찮은

진정 미움에 대한 용기를 장착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 사람들의 욕

세상 사람들의 수근 거림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세상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되야 한다고 강요한다.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그러하지 않으면서...... ”

본인은 그러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강요하는

찌질이 내면을 가볍게 찔러주면 양심을 강타당한

그와 그녀는 바로 무너져 버린다.

속수무책으로 백전백패할 행을 하면 한번씩 크게 당할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자.

겉으로 아무리 착한 척 해봐야 물거품이요, 헛개비이다.

속으로 착해야 되는데

속으로 착한 행동이 어느 정도라야 착하다고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도덕경의 예와 응은 그 차이가 얼마이겠는가?라는 문장.

예의 있는 자와 예의 없는 자는 그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무슨 기준으로 예를 따질 것인가?

착한 놈과 안 착한 놈은 그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선행이 아차하면 악행으로 변질되는게 세상이라는 기물이다.

착한 행동을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면

깊이 있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 사람이다.

스스로의 내면아이에게 속고 또 속는다.

나를 알아주세요, 나만 봐주세요.

나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요 내면아이의 요구에 충족시켜주면

조증이 오고 충족을 못 시켜주면 우울증이 온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한다.

내가 괴로워서 죽었는데 내 내면의 결핍아이가 원인이다.

결핍아이를 단속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자살로 내몬다.

이게 공식이다.

그렇게 괴로워서 자살했는데 그 원인이 결핍아이 때문이더라.

그 엿같은 아이에 속아서.......

빙의.

귀신 씌이는 현상.

빙의 중에서 결핍아이에 의한 빙의가 피해가 가장 크다.

엿 같은 아이는 사람을 귀하게

스스로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

스스로를 귀한 물건으로 만드는 집단지성주의 때문에 발생한다.

예로부터 모든 종교에서는 이 잘난 내면아이를

죽이는 대상으로 여겼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는데 이 아이의 힘은 점점 더 커져간다.

거부하는 것은 계속되고 끌어안으면 사라진다.

이 아이 때문에 이런 이상한 말이 출몰했다.

내 속에 사회적인 문화 때문에

기이한 내면아이가 생겼다.

본래 없던 것이 생겼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로 들어가면

이렇게 형성된 나 그 자체가 나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안 적힌 처음의 도화지 그건 나가 아니다.

그건 無(무)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그기다 그린 그림이 나이다.

태초에 모두는 無(무)였다.

그기다 그림을 그려서 나가 되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귀한 물건을 만들지마라.

도덕경 초반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심리의 오류를 무참히 부수기 시작한다.

불상현, 현자를 높이치지 마라.

같은 말들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진짜 부질없이 하찮음을 기반으로 해서

그래도 고귀하고 예쁘게 살려는 탑을 쌓아 올린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그게 그냥 좋으니까!

누구의 강요나 요구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스스로의 내면아이이고

그 다음은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부모는 양날의 검으로 제일 먼저 나를 보호하지만

가장 먼저 나를 찌른다.

정작 부모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자신들도 아팠으면서 자신들이 당한 것 이상으로

자식들을 찌른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마라고 강요하고 또 강요한다.

쓸모없는 인간과 쓸모있는 인간은 그 차이가 모호한데

어찌되었건 쓸모있는 인간이 되라고 한다.

그런 부모에게 자녀들은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당신은 쓸모있는 사람입니까?

그럼 부모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니 너는 나처럼 되지마라.

그럼 자녀는

니도 못한 것 나한테 강요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마음의 대화

속마음의 대화는 오고간다.

 

그들의 거처를 핍박하지 말 것이며

그들의 삶을 힘들게 하지 말라.

힘들게 하지 않으면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 그들의 거처와 그들의 삶은

내 쉴 곳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안심하고 쉴 공간을 핍박하지 마라.

쉴 공간에서 쉬는 그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

쉬고 있는 그들을 인생 도박장이나 인생 경기장으로

내몰지 마라. 1등이 되라고 내몰지 마라.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지 마라.

그들을 사랑한다면.....

 

이런 이치로 성인은

자신을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을 아끼지만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나는 스스로가 아주 존귀한 생명임을 안다.

나는 모든 생명이 존귀함을 안다.

모두 존귀하고 모두 비천하다.

나 하나만 존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들라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행할 것이다.

거피취차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저 높은 열반 저 높은 지점이 ‘저것’이다. 저곳이다.

반야심경에

“가자 가자 저 열반의 언덕으로......”

저 언덕을 버리고 이 언덕을 취한다.

거피취차.

저 높은 존귀한 나를 버리고 이대로의 나를 취한다.

가자 가자 저 열반의 언덕으로와 반대되는

노래가 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지금 이대로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고생한다.

번뇌 즉 보리.

혼돈 즉 질서.

원리전도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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