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역관 홍순언

강나루터 2019. 12. 1. 08:05



스크랩] 조선의 외교관, 역관 홍순언 이야기| ◈…임진왜란 역사자료

咸李사랑 | 조회 107 |추천 0 | 2015.05.20. 02:18


1592년 4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임진왜란이다. 미처 준비되어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겨우 수 일 만에 경상도 전역이 함락되고, 결사항전을 다짐하던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뒤를 끊어주고, 육지서는 권율 장군이 분전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선조가 북으로 피난 갈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이다. 특히 이것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역관 홍순언이다. 어떻게 역관의 신분으로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었을까?                                                                      

                                                                     

                       통문관지 : 조선시대 외교통상관계를 수록한 책으로 홍순언과 그 여인의 일화 또한 담겨져 있다

 

조선의 외교관 역관, 그리고 중인

  오늘날의 외교관은 그야말로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지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몇 개 국어는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만큼의 지위도 인정받는다. 조선시대의 실질적인 외교 업무를 담당했던 역관들 역시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외교관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일설에는 6개에 걸친 외국어가 가능해야 했다고 한다)과 시대를 뛰어 넘는 국제적 감각, 상대국 관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학문적 능력에 세련된 매너까지, 그야말로 모든 재능이 요구되는 전문직이 역관이었던 것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 : 조선 사신을 전송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이러한 역관이 되는 것은 아주 어려웠거니와, 역관이 된 후에도 공부와 시험은 계속됐다. 외국으로 갈 때 마다 역관들은 매번 시험을 치러야 했으며, 통과하지 못했을 경우 출장은 물론 월급도 없었다. 이렇게 걸출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 역관이었지만 다들 잘 알고 있듯이그에 합당한 대우는 받지 못했다. 역관 합격자는 철저히 문과 합격자와 구별되었다. 오를 수 있는 관직의 한계가 있었음은 물론이고 사는 지역까지 달랐다. 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고급관료와 중신들이 살았고 남쪽에는 선비들이 살았다고 한다. 중앙인 지역은 중촌이라 하여 전문기술직 관료들이나 역관, 의원들이 살았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중인이다. 홍순언 역시 중인 신분인 역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 여인과의 인연으로부터

  그럼 어떻게 역관이 임진왜란의 정세에 미치는 일을 수행해 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홍순언과 한 여인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역관의 주 업무는 통역이었지만 국제 무역도 함께 하고 있었다. 홍순언 또한 마찬가지로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며 무역을 해왔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역을 위해 명나라로 가던 홍순언은 북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통주에 이른다. 통주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기생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빼어난 미모의 여인을 보고, 기생집 주인에게 그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홍순언이 있던 방으로 여인이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흰 소복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그 연유에 대해 궁금해진 홍순언은 그녀에게 사연을 물었다.

 

류씨 : 제 부모는 본디 절강 사람으로 명나라 북경에 와서 벼슬살이 하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관이 객사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외동딸이고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마지못해 이곳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홍순언을 기록한 각종 문서를 보면 그는 성격이 호탕하면서도 불쌍한 이를 어여삐 여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연을 얘기하는 그녀가 너무도 가여웠다. 여인이 필요했던 돈은 300금(지금으로 약 1000만원). 그의 성격에 그녀를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전해 주는 그와 끝까지 홍순언의 이름을 묻는 류씨. 홍순언은 성이 홍씨라는 것만 알려줄 뿐, 그 이상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련 없이 기생집을 나왔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눈치 빠른 분들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대명회전 : 종계변무에 관해 실려 있는 명나라 법전

 

조선왕조 200년 외교적 난제. 종계변무

  조선 선조 시절, 아니 조선 왕조 초기 200년 동안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조선이 막 생겼을 무렵, 조선 왕조는 이 문제로 조정이 발칵 뒤집혀 진적이 있다. 명나라가 조선 왕실의 가계를 잘못 기록했던 것이다. 즉, 이성계가 그의 정적 이인임의 아들로 명나라의 법전에 잘못 게재된 것. 유교 국가로서 정통성을 아주 소중히 여겼던 조선 왕조는 즉시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과 함께 필요한 시점에 이것을 외교 협상용 카드로 써 먹겠다는 것이 명의 의도였다. 이렇게 명나라에게 명나라의 법전에 잘못 실린 태조 이성계의 가계를 고치기 위해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며 요구했던 것을 ‘종계변무’라고 한다. 이 문제는 세월이 흘러 200여 년이 지나 선조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홍순언 역시 이 종계변무를 해결하기 위해 1574년 명나라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수확이 없었다. 200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역관 홍순언이 해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1584년. 이번에 가서 시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반드시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겠다는 선조의 엄명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홍순언의 운명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무거운 짐을 진 채, 홍순언은 비장한 각오로 북경을 향한다.


 

                                                                       동 악 문                   조 양 묘

 

반전

  사실 홍순언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책임만이 아니었건만, 지난 200년 간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에 대해, 자신이라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종계변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한 홍순언은 동악묘에 제례를 지냈다. 중국에 간 사신들은 대개 성문으로 가기 전, 동악묘에 들러 자신의 여정이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 성문을 들어선 홍순언 일행은 생각지도 못한 일행을 만나게 된다. 바로 명나라의 예부시랑 석성이었다. 예부시랑이라 함은 오늘날의 외무부 차관 정도의 직책을 말하는 것으로 일개 역관의 일행을 위해 마중까지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조선의 어느 관료가 명나라를 갔어도 그 정도 직책을 가진 인물이 마중을 나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마중을 나온 석성 옆에는 홍순언이 거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바로 류씨, 홍순언이 지난 날 기생집에서 구해 준 인물이었다. 류씨는 홍순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혜에 보답하여 절합니다. 군의 높은 은혜 덕분에 부모님 장례를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연경성시도(일부) : 당시 북경의 모습이 그려진 지도

 

   석성은 홍순언을 향해 의로운 선비라 추켜세우고, 극진히 대접했다. 종계변무의 목적 때문에 홍순언이 북경에 왔다는 것을 전해 듣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마침내 홍순언 일행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명나라의 법전 <대명회전>의 내용이 드디어 조선의 요구대로 변경된 것이다. 무려 200여 년 만의 일이다.


 

 

                                              광국공신 칭호를 받은 신하 : 홍순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와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혀졌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홍순언이 해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은 누구보다도 조선의 왕 선조가 각별했다. 종계변무의 성공은 왕실의 계보를 바로 잡고 외교적 자신감을 회복한 것임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떳떳하게 왕가의 정통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의미가 컸다. 종계변무의 성공으로 홍순언은 일약 공신의 대열에 오른다. 19명의 광국공신 중 유일한 역관이 홍순언이었다는 점은 누구보다 높은 그의 활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처음 명이 생각했던 왜군의 진로                           평양성 전투를 그린 그림

   

명나라 파병까지...

  홍순언과 석성의 인연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이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명 황실 역시 조선 파병에 대해 줄기차게 논쟁을 하고 있을 무렵, 석성은 국방을 담당하는 병부상서의 위치에 있었다. 석성은 ‘순망치한-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의 논리로 파병의 정당성을 외쳤지만, 명 조정에서는 조선이 왜와 손잡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진 대신들이 많았다. 이에 석성은 홍순언에게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금 명 조정에서는 조선의 의도를 의심하는 대신들이 많소. 나 혼자서 파병을 위해 대신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조선이 직접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한다면 일은 성사될 것이오

 

  홍순언은 석성의 메시지를 급히 조선의 조정에 전달했고, 결국 명은 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그의 외교적 역량과 채널이 파병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파병 문제로 명을 찾았던 홍순언은 석성의 힘을 빌려 무기재료를 구입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통역관이 되어 평양성 탈환에 일조하는 등, 전쟁을 함께 치렀다. 7년 동안 계속 되던 전란에서 명은 21만 명의 군사와 882만의 은화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가고, 임진왜란이 종결할 때까지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홍순언은 왜란이 끝난 1598년, 편안히 눈을 감는다.

   

석성의 초상화

 

아직 끝나지 않은 인연

  조선에서의 전쟁은 무사히 끝났지만, 명 조정은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조선 파병이 국력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책임 논쟁이었다. 이로 인해 파병을 주장했던 석성은 투옥되었다가 옥사한다. 석성은 죽기 직전, 가족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래도 명나라에 계속 머물렀다가는 큰 화를 당할 것이야. 조선으로 떠나는 것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유언대로 그의 두 아들과 부인은 조선으로 넘어왔고 선조는 그들에게 해주 땅을 주어 정착하게 했다. 해주 석씨의 시초인 것이다. 이후 그들은 지금의 지리산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짧은 한 순간의 인연으로 조선 200년 최고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전란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일조한 역관 홍순언. 냉엄하고 현실적일 것만 같은 국제 관계에서 보여준 홍순언과 류씨의 인연은 힘의 논리에 의해서만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오늘날에 큰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역사와 외교를 접목시켜 보는 재미도 바로 이런 것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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