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고운선생 유적지

강나루터 2019. 12. 1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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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유적지| 최치원문학관
지리산문학관.계간시낭송 | 조회 178 |추천 0 | 2016.04.16. 07:14



독서당(讀書堂)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53번지(산업로 3906-15)낭산 기슭에 위치한 이 곳은 고운선

생께서 당시 독서하시던 곳이라 전해오고 있는 곳으로 현재까지 수차의 중건을 거쳐 구형을

보존하있으며 뜰 앞에는 선생께서 쓰시던 고정(古井)이 그대로 있으며 담장 밖에는 늙은

향나무가있는데 전설에는 선생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고운 선생께서 심으신 <노향목>은 독서당 담장 밖에 천년의 영고성쇠를 간

채 산을 의지하고 비스듬이 누어 있었는데 본 노향은 1986년도 도벌꾼에 의하여 벌목 되었

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후손들의 성의가 아쉬울 뿐이다. 

 

 

 

 

상서장(上書莊)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7-2번지(서라벌대로 105-12)외 임야11필지 금오산 북쪽 기

슭에위치한 상서장은 고운선생께서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진성여왕

년(894) 갑인 이월에 구급시무책 십여조를 국왕에게 올린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상

장이라 불러 왔다.    이곳에는 영정각(영당)을 비롯하여 숭보당, 추원문, 화수정, 비각, 삼

간문등이 있으며 시조묘(始祖廟)인 영당에서

매년 양 4월 16일에 경주 고운최치원 유적보존회에서 향사하고 있다. 

                1984년 5월 21일 경북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있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번지(서악2길 23)선도산(仙桃山) 아래에 위치한 이 서

원은 유후 설 총 개국공 김유신 문창후 최치원을 배향한 사우로서 조선 명종 16년(1561)

창건하으며 매년 음 2월과 8월중 丁日에 유림향사하고 있다.

               1975년 12월 30일 경북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있다. 

 

 

고운사(孤雲寺)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116번지(고운사길 415)에 위치한 절은 신라 문무왕 원년

(681)에 의상대사가 등운산(騰雲山)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등운사라 하다가 신라말에 고운

선생께서 여지, 여사 두 대사와 함께 가운루, 이화루 두개의 루를 건립한 것을 기념하여 그의

호인「고운」을따라 고운사로 개정하였다고 불교사찰 사료집에 전해지고 있다. 


가운루, 우화루(駕雲縷, 羽花樓)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 고운사 안에 있는 가운루 누각은 고운사 근

계곡 위에 세워진 것으로 고운선생께서 직접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우화루 누도 동 시대 같은 장소인 고운사 주변에 있어 이 또한 고운선생께서

건립한 곳이라 전하고 있다.
 

  

강주빙산(剛州氷山)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0 빙계계곡에 위치한 산자수명한 얼음골은 과연 별천

혈(氷穴)에는 여름에 찬바람이 일고 겨울에는 더운 바람이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하며,

(동국여지승람) 고운 선생께서는 이곳을 즐겨 찾았다 한다. 고운(해운) 선생의 유적지인 안동

화의 경계인 청량산에 치원봉 치원대와 의성의 강주빙산은 산자수명한 얼음굴로 과연 별천

라 아니할 수없다.   天然記念物.

2011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 제​527호로 지정되어 의성군에관리한다.

   

 용강서원, 모덕사(龍岡書院,慕德祠)  

 

 

 

        경북 안동시 용상동 3구 79-2에 위치한 용강서원은 1671(현종12)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

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0년에 복원하였다.  문창후 고운(해운)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여 모덕사라 칭하고 있으며

매년 5월 (下丁)일에 유림향사가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에 위치한 지증대사 탑비는 신라말의 승려로서 구산선문의

인 봉암사의 개산조인 지증대사의 숙조비(寂照碑)로서 신라 경명왕 8년(924)에 고운

생께서 왕명에 의하여 글을 짓고 혜강스님이 글씨를 쓰고 각자도 했는데 저 유명한 고운선생

산비명나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월 4일 국보 제315호로 승격지정되었다.

백운대(白雲臺)  백운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에 있는 봉암사에서 서쪽으로 500m 지점에

 <백운대>(白雲臺)라고 새겨진 글씨가 있는데 고운선생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백운대

는 선경의 계곡이며 선생께서 즐겨찾던 곳이다.

 

야유암, 고산유수(夜遊岩, 高山流水)  

 

 

 

    야유암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봉암사에서 동쪽으로 약 1Km쯤 아래에

하며 넓고 아름다운 흰 반석이 있으며 그 위에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고운선

생께서 즐겨 찾던 곳으로 그 석벽에 「야유암」(夜遊岩)이라는 친필이 새겨져 있다. 또한 야유

암에서 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석벽에도「고산유수 명월청풍」(高山流水明月淸風)이라는

     고운선생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금운사(錦雲祠)    

 

 

 

          경북 영덕군 강구면 금호리(금호3동)에 위치한 이 사당은 금호산 기슭에 자리 잡고

영정각이 있으며 지난 1970년에 창건되어 영정각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매년 음 3월 10일에 유림향사하고 있다.

 

아산영당(鵝山影堂)    

 

 

 

          경북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 464번지(명도4길 70-4)아산동 아침마을에 위치한 아산

영당은 울진서 약 6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조선 고종 25년(1888)에 창건한 곳으로

문창후 고운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면암 최익현선생을 배향하고

       매년 음 10월 10일에 유림향사를 행하고 있다.    문화유적 0928-24-008호이다.
 

남서원(鶴南書院)  

 

 

 

     경북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183번지(구곡길 125-1)에 위치한 학남서원은 청도에서 서쪽

으로8km 지점에 있다. 고운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 계동사(일명 일곡영당 1916년에 창건)

가 있는 곳  으로 매년 음 2월 10일과 8월 10일에 춘추로 유림향사하고 있다.
 

벽송정(碧松亭)   

 

 

 

         벽송정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산88번지에 위치하여 있고 고운선생께서 기울

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노닐던 곳으로 정자의 판액에 고운선생의 시 한수가 남아 있다.

   < 暮年歸訛松亭下 一抹伽倻望裡靑 : 늙은 몸 소나무정자 아래 돌아 누웠으니 바라다 뵈

이 푸른 가야산 뿐이로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봉양서원(鳳陽書院) 거리뷰   지도보기 src

 

       본 문창사 사우는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봉산1리 에 위치하며 문창후 고운선생의 영

모시고 경주최씨 고령출신 종친들의 성금으로 창건하여 매년 춘추로 향사하는 곳이며,

경내에 봉양서원이 있어 이곳 유림들이 모여 향사를 지낸다.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번지(도평로 38길 51)에 위치한 이곳은 문창후 고운선생

 영이 있으며 조선 영조 31년(1755) 을해에 계림사로 창건되었으나 비행장의 부지로 편

입되게 으로 하여 이곳으로 이건되어 왔다. 매년 동지일을 맞아 향사하는 곳으로 동고조

촌이 넘는 촌 즉 족친이 모인다는 뜻으로 구회라 하였으며 매년 음 9월 9일에 인근 수동,

대명, 칠계지동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모여 숭조경친과 애족돈목을 기린다고 한다. 



대곡영각(大谷影閣)  

 

 

 

     대곡영각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 5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난 1971년에 창건

하였 으며 매년 음 3월 10일에 고운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하고 있다. 


청용대(靑龍臺)  지도보기 src 

 

 

 

     경남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 87-1번지(가주로35)에 위치한 청용대는 송죽이 울창한 산기

슭에 전답을 고 비스듬히 서있는 자연암석에 고운선생의 친필이라 하는「청용대」의 석 자가

서로 각자되어 있으며 바로 그 옆으로 치원서라 하여 역시 돌 위에 새겨져 있음으로 하여

선생의 친필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암석 옆으로 「문창후최선생청용대비」가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이곳도 해변이라 전하며 기암괴석으로 풍치 또한 절경이었으리라 짐작하게

하며 선생께서 유상하신 곳으로 모자람이 없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88호 (지정일 1997년 12월 31일)
 

 

임경대(臨鏡臺)  

 

 

 

     동국여지승람 22권 경남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산72번지 고적편에 「임경대는 홍 최공대

라고 도 하는데 황산역 서쪽 절벽위에 있으며 최치원이 놀고 즐기던 곳으로 고운선생의 시가

있다」라하였다.     그리고 고려때 최자(1188~1260)가 지은 보한집 권상(114p)에 「김해부

의 황산강이 흘러 6,7리쯤 내려가서 푸른 낭떠러지가 불끈 솟아 산봉우리를 앞에 두고 강을

낀 연촌 10여호가 모두 대울타리에 띳집으로 아름다운 그림 속에 있는 것 같다. 당나라 시어

사 최치원일찍이 돌을 모아 이 대를 짓고 임경이라 하였으며 석벽에 시를 새겼다.」 

        세월이 오래되어 대가 무너지고 석벽에 새긴 글씨가 없어짐에 뒷사람이 그 글을 황산

루에 옮겼다. 현재는 경부선 철도와 치수장 건설로 변형되어 옛 터를 찾을 길이 없다.


학사대(學士臺)   

 

 

 

        경북 김천시 황금2동 (학사대2길 18)에 위치하며 김천역에서 남으로 약 2km 지점에

있다.    김천향토사 제2장 풍토 전설「학사대에 고운선생이 이곳에 와서 인근 선비들과 교우

강학하던 곳으로 황금동 윗마을 산위의 넓은 곳을 학사대라 한다.」
        밀집된 인가 속에 지금까지 빈 공터만 남아 있는데 이곳 애들과 부녀자까지도 학사대

 모르는 이가 없다.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

 


통일신라시대 학자인 고운 최치원(857~?) 선생의 초상화이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당나라에 유학 가서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활약하였는데, 879년 

황소 의 난을 진압하고자 쓴『토황소격문』은 특히 유명하다.

 

초상화는 중국풍의 문인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가로 105㎝, 세로 74㎝의 크기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여러 곳

존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승려의 모습인데 반하여,이 그림은 각이 진 사방모를 쓰고 평상복을 입고서 편

로 부채를 손에 쥐고 앉아 있는 모습이어서 특별하다.양 옆에는 석류가 담긴 청자 그릇을 받쳐든 동자

와 파초선을 든 동녀가 서 있다. 화폭의 왼쪽 상단에는 ‘신라최선생고운지진영’이라는 제목을 써 놓았다.

 

얼굴의 묘사와 옷주름의 처리기법과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와서 원본을 본 떠 그

으로 보인다. 비록 다시 옮겨 그린 것이긴 하나, 우리나라의 일반 초상화가 화면 속에 주인공 한 사람만을

그리고 있는데 비해, 이 초상화는 동자가 등장하는 등, 화면구성이 특이하다는 점에서 초상화의 연구에 크게 주

목할 만한 작품이다.

 

최치원의 초상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리산 쌍계사 본과 가야산 해인사 본에 의해서이다. 이 상은 해인사 본

원래  해인사 나한상 가운데 섞여 있었던 것을, 구한말 왜적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최씨 문중으로 옮겨 놓

은 것으로, 작품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

경북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구곡길125-1)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

 

  통일신라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857∼?) 선생의 초상화이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가 18세 때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며, 879년 당나라의 황소

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그의 문장력을 세상에 알리었다. 유교·불교·도교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력이 뛰

며, 이후 ‘문창공’에 봉해졌다.

선생의 초상화는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는데, 이 그림은 조선 철종 11년(1860) 경에 해인사

을 겨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신선세계를 배경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며, 비단 위에 9가지 색

이용짙게 채색하였다.

최치원 선생을 신선으로 대하는 민간인들의 입장에서 그린 신선도 형식의 민화풍 초상화로, 커다란 의미를 지

고  는 작품이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번지(도평로38길 51)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산승(山僧)에게


"스님이여 말씀 마오 청산이 좋다고"<<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산이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山好河事更出山산호하사경출산>>

"저 뒷날 내 종적을 시험삼아 보게"<<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한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경불환>>

慶州崔氏 中央 宗親會

社團法人 孤雲國際交流事業會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스님이여 말씀 마오 청산이 좋다고"<<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산이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山好河事更出山산호하사경출산>>

"저 뒷날 내 종적을 시험삼아 보게"<<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한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경불환>>

慶州崔氏 慶南 宗親會

社團法人 孤雲國際交流事業會

증재곡난약독거승(贈梓谷蘭若獨居僧)


"솔바람 소리밖엔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除聽松風耳不喧제청송풍이불훤>>

"구름 속에 깊숙이 띳집 하나 지었구나"<<結茅深倚白雲根결모심의벡운근>>

"세상 사람 길 아는 것이 도리어 한스러워"<<世人知路翻應根세인지로번응근>>

"속된 신발자국 바위 이끼 더럽히네"<<石上莓笞汚屐痕석상매태오극흔>>

慶州崔氏 釜山 宗親會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석벽제시(石壁題詩)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미친 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하네"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고교류수진롱산故敎流水盡籠山>>"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慶州崔氏 大邱 花樹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석벽제시(石壁題詩)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慶州崔氏 慶南 宗親會

증금천사주(贈金川寺主)


<<白雲溪畔仁祠벡운계반창인사>>"흰 구름 시냇가에 절을 지으니"

<<三十年來此住持삼십년래차주지>>"서른 해 내리 이 절 주지로세"

<<笑指門前一條路소지문전일조로>>"웃으며 가리키는 문 앞의 한 줄기 길은"

<<纔離山下有千歧재이산하유천기>>"산 아래 닿자마자 천 갈래라오"

 

慶州崔氏 忠北 宗親會


해문,난야(海門,蘭若)의 버들을 읊은 詩


<<광릉성반별아미廣陵城畔別蛾眉>>"광릉재의 두둑에서 여읜 그임을"

<<기료상봉재해애豈料相逢在海涯>>"​또 다시 바닷가에서 만날 줄이야"

<<지공관음보살석只恐觀音菩薩惜>>"다만당 觀音님의 아낌 두려워"

<<임행불감절섬지臨行不敢折纖枝>>"떠날 제 실가지를 꺽지 못하네"

 

慶州崔氏 忠南 宗親會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침

 

"終日 머리를 숙여 붓 끝을 희롱하는데"<<終日低頭弄筆端종일저두농필단>>

"사람 사람이 입을 다물어 마음을 얘기하기 어렵다"<<人人杜口話心難인인두구화심난>>

"멀리 티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기쁠 만하지만"<<遠離塵世雖堪喜원리진세수감희>>

"風情이 즐기어 다하지 않았음을 어찌하랴"<<爭奈風情未쟁내풍정미긍난>>

"그림자는 개인 놀 붉은 앞길에 투영되고"<<影鬪晴霞紅葉逕영투청하홍엽경>>

"소리는 밤비 흰 구름 있는 여울에 하였다"<<夜雨白雲湍성연야우백운단>>

"시를 읊는 魂이 풍경을 대하여 매인 데가 없으니"<<吟魂對景無羈絆음혼대경무기반>>

"서해의 깊은 기틀은 道安 대사를 생각하네"<<四海深機憶道安사해심기억도안>>

 

慶州崔氏 湖南 宗親會

 

  운문사 지광상인(雲門寺 智光上人)



<<雲畔構精廬운반구정려>>"구름 가에 精舍를 짓고"

<<安禪四紀餘안선사기여>>"安禪한 지가 근 50년이 되었는데"

<<無出山步공무출산보>>"대나무 지팡이는 산을 걸어 나가본 일 없고"

<<筆絶入京書필절입경서>>"서울서 들어오는 편지 하나도 없다"

<<竹架泉聲緊죽가천성긴>>"대나무 사다리에 샘물 소리 급하고"

<<松欞日影疎송영일영소>>"소나무 창살에 해그림자가 성깃하다"

<<境高吟不盡경고음부진>>"경지가 높아서 다 못 읊겠노니"

<<瞑目悟眞如명목오진여>>"눈 감고 참선해서 眞如를 깨닫네"



장미꽃 src慶州崔氏 忠毅公 (諱)夢亮 宗中장미꽃 src



가족 촌수와 호칭 알아두기 알면좋은상식 

 


온 가족이 만나는 추석명절을 맞아 


가족 촌수와 호칭을 제대로 알아 봅니다. 
 
'나와 저 친척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고 또 어떻게 불러야 하지?  


자칫 잘 못 불렀다가 예의에 어긋날까? 요런고민 그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은근히 헷갈리는 친족간
호칭과 촌수 계산을 저장하셨다 명절에 쓰시자구요~^^


  


가족간호칭​ 





 

 

 



 


경주최씨 항렬표(慶州崔氏 行列表)

 


                                   


각파에서 자기네 파손을 알아보기 위하여 규정을 정하는데, 5행 金, 水, 木. 火. 土, 변을 반복하여 이름 2자 중 1자를 같이 쓰되, 이름 중간에 쓰느냐 이름 끝 자에 쓰는 것도 정합니다
즉 돌림자의 위치는 이름의 가운데와 끝으로 세대간 교대로 사용하는데 이를 반대로 하였을 때는


5대간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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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주최씨총대종회



항렬(行列)에 대하여

항렬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世系)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기위한 문중(門中)의 법을 말한다.
각기 가문과 파에 따라서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이름에 돌림자를 가지고 있다.
형제들은 형제들대로 아버지의 형제나 할아버지의 형제는 이름자 속에 돌림자를 가지고 있으며, 4촌, 6촌, 8촌이든 같은 돌림자를 씀으로써 형제관계를 표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자를 보고 그가 그 혈족의 방계에 속한 대수를 나타내는 돌림자가 곧 항렬자이다.

그런데 항렬은 장손(長孫) 계통일수록 낮고 지손(支孫)계통은 높은 것이 통례(通例)이다.
장손계통은 지손계통에 비하여 세대의 교체가 빠르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형제라도 일찍 태어나서 장가들고 막내는 나이차만큼 늦게 결혼하게 마련이다. 심하면 맏이가 손자를 볼 때쯤 막내는 겨우 장가를 들게 되는 일도 있다.
따라서 맏이에게 맏이로 이어지는 장손(長孫)계통은 지손(支孫)계통보다 세대의 교체가 빠르고, 항렬자의 사용 진도(進度)도 그 만큼 앞당겨지므로 항렬이 낮아지게 된다.
흔히 배 안에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는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항렬은 높아서 할아버지 뻘이 된다는 뜻이다.
항렬은 단순히 이름의 돌림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몇 세손이 되는가를 표시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집안에 따라서는 항렬을 나이에 우선시키고 있다. 나이에 관계없이 항렬이 높은 사람에게는 웃사람 대접하고 또 항렬이 낮은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른바 長幼有序라는 것도 동족간에는 항렬이 높은 사람이 長이며 낮은 사람은 幼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선인들이 정해놓은 항렬자는 원칙적으로 중도에 변개(變改)할 수 없다. 다만 글자가 조상의 이름에 저촉(抵觸)될 경우에 한해서만 변경이 용인된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바뀌는 수가 있었다.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리기도 일수였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기도 했고 또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저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동자들의 경우가 그랬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법, 서재필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의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안동김씨)의 균자 항렬자는 규(圭)로 홍영식(남양홍씨)의 植자 항렬은 杓로 박영효(반남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

그러면 이름에 항렬자를 쓰게 된 것은 문헌상으로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각 성씨의 족보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선조(先祖)의 이름자는 피하는 것이 좋다. 自己의 선조이든 남의 선조이든 이미 돌아간 이의 이름은 휘(諱)라고 해야 한다. 살았을 대는 名이요, 돌아간 분은 諱이다.
이름을 지을 때 조상의 휘자와 똑같은 글자는 되도록 안쓰는 것이 상책이다. 이를 기휘(忌諱)라고 한다.
만약 조상의 이름자에 저촉될 경우 변통할 수 있으며, 조상의 이름자와 똑같은 글자는 물론이고 음이 같은 글자도 쓰지 않는다.
항렬자(行列字)는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으로 사용하여 같은 세대를 나타내는 돌림자이다.

[참고 1] 이름의 항렬자(돌림자)는 같은 성씨, 같은 본관, 같은 파내에서도 지역이나 소문중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金水木火土, 甲乙丙丁..., 子丑寅卯..., 一二三四..., 天地玄黃...등의 문중에서 정한 기본 순서(항렬)를 지키면서 다른 글자를 쓸 수도 있습니다.

[참고 2] 항렬자와 돌림자
같은 항렬의 사람들이 항렬자를 돌려가며 쓰므로 항렬자를 돌림자라고도 하지만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하여 문중에서 정한 기본 순서(항렬)를 지키지 아니한 글자를 돌려가며 쓸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돌림자라 하지 항렬자라 하지 않습니다.

출처 : web surfing


 





 

세(世)와 대(代)

 

 

경주최씨대종회견해

시조를 일세(一世)로 하며 차례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 세이고,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를 차례(次例)를 따지는 것이 대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부자의 차이가 世로는 2세이지만 代로는 1代이다.

 

세(世)와 대(代)에 대한 이해

1세 = 시조 또는 派祖의

ㆍ5대조 (=세조)현조

2세

ㆍ1대손 (=세손)ㆍ4고조

3세

ㆍ2ㆍ3증조

4세

ㆍ3ㆍ2(祖)

5세

ㆍ4ㆍ1대조 (=세조)(父)

6세

ㆍ51세ㆍㆍㆍ= 본인의

7세

ㆍ62세ㆍ1대손 (=세손)(子)

8세

ㆍ73세ㆍ2(孫)

9세

ㆍ84세ㆍ3증손

10세

ㆍ95세ㆍ4현손

11세

ㆍ106세ㆍ5내손
자(子)→손(孫)→증손(曾孫)→현손(玄孫)→내손(來孫)→곤손(昆孫)→잉손(仍孫)→운손(雲孫)



그림출처 : http://dacheon.net 게시판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대=세 (대와 세는 같은 의미로 사용됨)
ㄱ. 시조, 중시조 또는 어느 기준인물로부터 몇번째 인물인가 하는 순서의미
ㄴ. 三代同堂 또는 四代奉祀 할 때등의 직계인물수의 단위
ㄷ. A와 B사이는 몇대이다 할 때의 간격의미("父子사이"는 1代이고, "父子"는 2代임)

※근래 들어 ㄱ,ㄴ은 世의 의미이고 ㄷ은 代의 의미라는 일부의 주장도 있습니다
(父子는 代로는 1代이고, 世로는 2世라는 주장. 위로는 代: 代祖. 아래로는 世: 世=世孫이라는 주장) → 이 주장은 世孫의 의미가 옛 조상님들의 각종 문헌 이나 비문과 달라

큰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대조=세조 (대조와 세조는 같은 의미로 사용됨)
조상 중에서 몇번째 조상인가(父부터 위로)=간격의미의 몇대 위의 조상인가

대손=세손 (대손과 세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됨)
자손 중에서 몇번째 자손인가(子부터 아래로)=간격의미의 몇대 아래의 자손인가

"世"와 "世孫"은 다르다 ("世-1"이 世孫으로 사용됨 : 주격제외)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각종 문헌이나 비문등에서 위와 같이 사용해 왔으나 서양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근래 들어 혼란이 있습니다
(예: "5世" 를 "5世孫" 이라 해도 된다는 해석이 있으나, 이는 예전에 해 오던 대로 "4世孫"(=4代孫) or "5世" 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이의없이 통용되고 있는 낱말은 "世, 代祖, 代孫" 정도입니다.
이세가지 낱말만 가지고도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世孫" 도 가문, 파, 사람에 따라 사용하고 있어 혼란이 있습니다.
빨리 용어의 의미통일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출처 : 경주최씨대종회

 

 

   성지 순례(聖地 巡禮)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춘향제 
  

 매년 양력 4월16일

 상서장(上書莊)
 경북 경주시 서라벌대로105-12(인왕동274) 
 
영정각 (影幀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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