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벽초 홍명희

강나루터 2021. 11. 20. 10:36
신정일, 땅끝에 서다스크랩 괴산 근처, 증평의 도안면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을 추억하다.
햇살편지추천 0조회 3421.10.27 07:4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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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근처, 증평의 도안면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을 추억하다.


전북 시인협회와 충북 시인협회가 주관한 문학 기행 차 충북 청주와 증평을 찾았다가 조금은 이상하게 만들어진 김소월 문학관이라는 곳에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와 김일성이 대동강에서 배를 타는 사진을 발견했다.
그래, 세상을 살다가 보면 문득, 불쑥, 뜻밖의 것을 예기치 않게 만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로구나.
괴산 읍내에 있는 홍명희 선생의 집을 찾았던 때는 90년대 초였고,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었다.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 선생이 1919년 괴산읍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뒤 어려워진 형편 때문에 이사해 잠시 살았던 제천리의 달천에는 푸르고 푸른 가을 강이 흐르고 홍명희의 생가는 괴산읍 동부리에 있다. 괴산교를 건너면 보이는 조선집이 홍명희의 옛집으로 본래는 1200여 평쯤의 대지에 50여 명의 식솔을 거느린 큰 저택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문에는 녹슨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채 팔려고 내놓았다고 한다. 옆집 대문을 지나 허물어진 담을 넘는다. 마른 밤 껍질이 길 아닌 길을 덮고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집 뒤 안을 지나 안채로 들어간다.
금세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싶은 집은 집이 아닌 듯싶다. 봄이면 봄마다 하얀 꽃을 피웠을 목련 나무가 마당 한켠에 서 있고 그 나무 가지가지마다 한삼 덩굴이 서리 맞은 채로 추욱 늘어져 있다.
방안에는 93년 4월의 달력이 펼쳐져있고 방안에는 사람이 살았던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장롱들이며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놓여 져 있다.
그뿐인가 방안의 먼지 얹은 소파 위에는 에드가 알란 포우의 소설「검은고양이」의 한 장면처럼 고양이 한 마리가 잠을 자듯 죽어있고, 나는 답답하다 못해 난감하다. 이 집에서 태어났던 홍명희는 누구인가. 대대로 중앙관직에 나아간 명문가의 후손이며 금산군수를 지냈던 풍산 홍씨 홍범식의 장남으로 1888년에 태어난 홍명희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한학을 배웠다. 열 세 살의 나이로 세 살 위인 아내와 결혼한 그는 서울의 종교 의숙에 들어갔다.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세이 중학을 다니며 문학작품을 위주로 독서를 시작했고,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더 좋아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술국치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 휘문학교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1927년에 민족단일조직인 신간회의 창립에 관여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홍명희는 1928년 11월 21일부터「조선일보」에 대하 장편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해 민중대회를 추진하다 대량 검거 투옥되었던 그 이듬해 중단되었고 다시 속개하면서 13년 동안에 걸쳐 집필했던 것이 임꺽정이었다.
장길산, 홍길동과 더불어 조선 3대 도적으로 꼽히는 큰 도둑 임꺽정을 내세워 조선시대 서민의 생활양식을 총체적으로 담아낸 이 소설은 일제 시대 최대의 문학적 성과로 꼽힌다. 임꺽정의 행적을 방대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귀족계층의 우월성이 배격되고 오히려 하층민의 활약을 당위론 적인 측면에서 그려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계급적 의식과 세계관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작품이 식민지 현실의 모순, 그 자체보다도 봉건사회체제의 모순에 더욱 비판적인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30년 신간회 주최 제 2차 민중대회 좌익운동에 가담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된다. 홍명희는 1948년 4월 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으로 갔고 그 길로 북한에 주저앉았으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을 거쳐 부수상을 지냈다.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거친 그는 1968년 80세로 별세한 뒤 북한 혁명열사 능에 묻혔다.
홍명희의 사상성향을 어떤 사람들은 배타적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제가 종말을 고한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해가는 상황에서 그는 고민 끝에 북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그의 시「허튼 소리」에서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제일이지만 이북에 가면야, 꼬래비지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제정신이 든 사람들은 북쪽으로 갔다는 사실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한참동안 금기시 되었던 그의 문학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생가에 문학기행 차 오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생가는 이렇게 폐허화되고 있으니...
그러다 이 집 또한 전북 김제의 독립유공자 이종희 장군의 생가와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을런지, 철기 이범석과 함께 독립군 지대장을 지냈던 이종희 장군은 8.15광복 후 귀국 도중 작고하였고 그의 집은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된 채 쓰러져가고 있었다. 김제시가 매입을 서둘렀지만 현 소유주는 자꾸만 가격을 부풀렸다. 행정자치부에서 생가 복원금을 타낸 김제시는 그 집을 살 수가 없자 생가에서 500m 떨어진 하천 부지를 매립한 후 이종희 장군의 생가라고 집을 지었으니 고인이 안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결구 그 집은 허물어지고, 그곳에 새로 지은 집이 낯선 모습으로 서 있으니, 그때 그 집을 그대로 보수하여 남았더라면 문화재청에서 중요민속자료나 지방 문화재로 남아 고귀한 문화재로 전해질 것인데, 언제쯤 이 나라는 좌나 우에 치우치지 않고, 대동의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돌아오는 내내 내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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