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보덕각시 이야기

강나루터 2022. 9. 7. 07:33

산에서는 나무를 하고, 들에서는 김을 매고 모심기를 하며 아침과 저녁에는 독경(讀經)과 염불(念佛)로써 종교적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는 적막하고도 평화로운 한가한 어느 촌락(村落)에 이상한 여성이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꿈에도 생시에도 생각지 못하던 어여쁜 여성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이 촌락에 나타난 것입니다.

옛부터 전설에 내려오는 선녀(仙女)니 항아(姮娥)[달나라에 산다는 선녀의 이름]니 서왕모(西王母)[곤륜산에 살면서 불사약(不死藥)을 가지고 있다는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선녀의 이름]니 경국지색(傾國之色)[썩 뛰어난 美人]이니 하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대표해서 나타난 이 어여쁜 여성을 대하는 이 촌락의 젊은 사람들은 여간 큰 충동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요물(妖物)이라는 사람도, 마물(魔物)이라는 사람도 있고, 귀신이요 사람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혹은 하늘의 선녀로서 죄를 짓고 인간에 내려왔다는 사람도 있고 하여 산에 가나 들에 가나 이 이상한 존재인 미인(美人)의 얘기 뿐 이었습니다. 

더욱이 젊은 사내들이 모인 곳에서는 더 유난스럽게 떠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것 참 알 수가 없는데, 그렇게도 어여쁜 색시가 어디서 왔을까?"

"흥, 너도 빠졌구나. 그 색시를 보고서 하는 말이로구나."

"빠지기는 무엇에 빠졌단 말인가? 그전에 보이지 않던 어여쁜 색시가 이 동네에 왔으니까 하는 말이지."

"얘, 그만 두어라. 언청이가 아니면 일색이란다. 그 색시 때문에 병난 녀석이 몇 백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그렇기는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썩 많던 걸. 그런데 그 색시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그의 성명은 무엇일까?"

"남의 색시가 온 곳은 알아 무엇하며,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느냐?"

"좀 알고 싶은 걸. 나도 어리석은 남자라 그 색시 때문에 침식을 전폐한 지가 여러 날이야."

"너만 그런 줄 아느냐? 나도 실상은 죽을 지경이다. 피차에 같은 처지이니 시원하게 알려 주랴? 

그 색시가 온 곳은 보타낙가산(補陀落伽山)[중국의 남해안에 있는 관세음보살께서 머무시는 곳]이고, 이름은 보덕각시(普德閣氏)라고 부른다네."

"보덕각시, 보덕각시, 참 이름도 좋은데, 하여튼 인간계의 사람은 아니야. 인간 사람으로서야 그렇게도 어여쁠 수가 있나?"

청년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와 같이 보덕각시의 이야기를 주고받느라고 이야기의 꽃이 피고 보덕각시의 말만 나오면 사죽을 못쓰고 미쳐 날뛰는 광경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관세음보살의 신통(神通)이요, 그의 화현(化現)이라 괴이할 것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나라는 중국의 당(唐)나라, 임금은 헌종 황제(憲宗皇帝) 때로, 원화 십일 년(元和十一年)[신라 경덕왕 8년 병신 서기 816], 곳은 장안(長安)에서 멀지 아니한 섬서 일대(陝西一帶)인데, 이곳은 불교의 감화가 골고루 퍼져서 부처님을 믿는 신불자(信佛者)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십재일(十齋日)[일일(一日)은 정광불(定光佛), 팔일(八日)은 약사여래(藥師如來), 십사일(十四日)은 보현보살(普賢菩薩), 십오일(十五日)은 아미타불(阿彌陀佛), 십팔일(十八日)은 지장보살(地藏菩薩), 이십삼일(二十三日)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이십사일(二十四日)은 관음보살(觀音菩薩), 이십팔일(二十八日)은 비로자나불, 이십구일(二十九日)은 약왕보살(藥王菩薩), 삼십일(三十日)은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지키며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등의 오계(五戒)를 지키는 자가 많고, 특히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믿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늙은 여인 한 사람이 어여쁜 딸 하나를 데리고 보타낙가산(補陀落伽山)에서 왔다고 하며 돌연히 이 지방에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따님은 보덕각시라고 부르는 바, 어찌나 어여쁘고 곱고 아리땁고 기품이 높고도 얌전한지 이곳의 남녀노소 사람들은 이 보덕각시를 찾아와서 종일토록 앉아서 구경하고 논란하다가 가는 것이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보덕각시는 어여쁜 처녀였습니다. 요조선연(窈窕嬋姸)한 태도라든지 화용월태(花容月態)같은 얼굴에 반달 같은 눈썹이라든지 주홍같은 입술에 복스러운 코라든지 어느 것이나 세상의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천강지용(天降地湧)의[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속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미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덕각시를 휩싸고 미쳐 날뛰는 청년이 몇백 명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2. 신부 한 사람에 신랑이 수백 명 

보덕각시는 얼굴만 어여쁜 것이 아니라 바느질이라든지 반찬 만드는 요리 솜씨라든지 집안을 다스리고 거두는 살림의  지혜라든지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남의 어른에게 정성을 바치는 공손한 태도라든지 또는 그밖에 글씨와 문장이라든지 당시에는 둘도 없는 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나게 되었습니다.

보덕각시의 이름이 널리널리 선전되므로 그를 탐내는 청년은 수없이 늘어 그를 보지 못해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보덕각시가 번쩍하기만 하면 수십 명의 젊은 총각들이 사방에서 매복하였다가 그가 나오기가 무섭게 기웃거리고 따라 다니고 야단법석들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는 보덕각시 때문에 병이 나서 인사불성에 빠진 자들도 퍽 많은 고로 부모들은 보덕각시를 며느리로 데려가겠다고 하여 사방에서 청혼이 빗발치듯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서로 경쟁을 하며 보덕각시를 탐하되 혹은 금전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혹은 지휘로써 혹은 문벌로써 제각기 있는 재주를 다하여 보덕각시를 데려가려고 합니다.

만일 보덕각시가 어느 편이든지 치우쳐서 어떤 한 집으로 가게 된다면 그들은 돌팔매질을 하거나 방망이 싸움질을 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위험한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얘야. 이것을 어찌 하잔 말이냐? 신부 하나에 신랑이 수백 명이니 이게 될 수나 있는 말이냐?"

어느 날 보덕각시의 어머니는 보덕각시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보덕각시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어머니는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그려. 수백 명 아니라 수천 명이면 어때요?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규중처녀의 계집애로서 그게 무슨 소리냐? 얘, 행여나 남들이 들을라. 너 때문에 까딱하면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게 큰 일이 아니냐? 그런 소리 말고 조심을 좀 해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또 어디로 도망을 해야 되겠다. 사람이 마음을 놓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참, 어머니는 염려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보덕각시는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이렇게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 말만을 믿을 수가 없으므로 날로 근심하며 다만 그 딸의 동정만 살필 따름이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나자 매파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습니다.


3. 보문품 읽혀서 오십 명 선발

여러 매파들이 보덕각시 모녀에게 승낙하여 결정을 지어 달라고 문턱이 닳다시피 드나들기를 마지아니함은 이미 말하였습니다마는 보덕각시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퍽 여러 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보덕각시는 여러 매파에게 한꺼번에 모두 와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십 수백 명의 매파들은 무슨 기쁜 소식이나 들을 줄 알고 보덕각시의 집으로 몰려 왔습니다.

이때에 보덕각시는 그들을 보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규중처녀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끄럽고도 외람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시집을 갈 색시는 나 하나뿐인데 나에게 신랑이 되겠다는 사람은 이렇게도 수백 명이나 되며 그 가운데는 나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사람과 병이 났다는 사람과 지금도 곧 병이 나게 된다는 사람이 많다 하며 매파를 보내는 사람과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십 명씩 되니 이래가지고야 내가 어디 시집인들 가겠습니까?

만일 어느 집으로든 시집가기만 하면 그 집을 망해 놓겠다고 협박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참으로 송구스러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말할 것 없이, 내가 신랑 될 사람을 가리되 시험을 보여서 선택하겠으니 아무날 아무시에 신랑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하나도 빠지지 말고 전부 아무 장터의 큰 마당으로 와 달라고 일러 주십시오."

보덕각시가 이렇게 말을 했다는 소리가 여러 사람의 매파들 입에서 흘러나가니 수백 명의 청년들은 제각기 가슴을 울렁거리며 시각도 어기지 않고 그 장소로 모였습니다.

이때에 보덕각시는 높이 대(臺)를 모아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많은 군중을 향하여 집더미 같이 쌓아 놓은 보문품(普門品)이라는 불경 책을 내어 주면서 말하되,

"여러분이 이처럼 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위하여 많이 와 주시니 그 감사하온 말씀을 이루 다 어떻다고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소원을 다 이루어 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공평 정직하게 여러분에게 이 책을 나누어 드리는 것이오니, 누구든지 이 책을 오늘 한나절에 읽어서 외우도록 하십시오. 

누구든지 이것을 반나절에 다 외우는 이면 나는 그에게 백년을 의탁할까 합니다."

거기 모인 군중들은 보덕각시의 그 아름다운 태도를 보며 그의 낭랑한 음성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와서 옥쟁반에 굴러가는 구슬과 같은 향내 나고도 아름다운 말솜씨의 맑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신(心神)이 황홀하게 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보문품을 외우는 것은 물론, 물속이나 불속이라도 들어가라면 두말 않고 들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백 명이 보문품 읽는 소리는 마치 수백 명의 승려(僧侶)가 일시에 독경하는 소리 이상의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였습니다. 

참으로 불국세계를 이루었습니다.

시간이 되어서 징을 치고, 보덕각시가 한 사람씩 불러다가 확인하는데 그 수백 명 가운데 보문품을 모조리 외우는 사람은 오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에 불합격한 수백 명은 모두 낙제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4. 금강경 읽혀서 열 명을 선택

보덕각시는 다시 높은 대(臺) 위에 올라서서 말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미천한 저를 위하여 이렇게 경을 외워 주시니 감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을 다 외우지 못한 분은 남아 계셔도 별 도리가 없사오니, 섭섭히 생각지 마시고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경을 다 외우신 오십 분만 남아 주십시오."

그래서 수백 명의 낙제생들은 모두 비관하고 물러섰으나 그래도 보덕각시를 한 번 정면으로 보고 그의 음성을 친히 들은 것만 해도 영광으로 여기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만 비켜섰을 뿐이지 아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에 보덕각시는 다시 오십 명을 모아놓고 애교 있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이 보문품은 다 외우셨으나 이렇게 오십 명이나 되시니 내 한 몸을 오십 개로 나누기 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 번 더 수고를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내어주며 오늘 저녁 하룻밤에 이것을 다 외우는 사람이면 그 사람으로써 일생을 의탁하는 남편을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꽤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금강경은 보문품의 배나 되는 것인데, 이것을 하룻저녁에 외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숨을 걸고 보덕각시를 얻으려는 그들인지라, 밤을 세워 가면서 금강경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에 보덕각시 앞에 나아가서 외우는데, 여기에도 금강경을 다 외우는 사람이 열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덕각시는 다시 말하였습니다.

"또 미안한 말씀입니다마는, 나 한사람으로서 열 분을 섬기기는 이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무슨 좋은 도리가 없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하자 오십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묵묵부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5. 법화경 읽혀서 마서방이 당선

그러므로 보덕각시는 다시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 청년을 시험하여 고르는 데는 여러 권의 책을 외우게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덕각시는 그들에게 퍽 미안한 듯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없이 앉아만 계시면 되겠습니까? 어찌하든지 또 방책 하나를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일곱 권으로 된 법화경(法華經) 한 질을 드리겠사오니, 이것을 사흘 동안에 외우는 이가 있다면 최후에 그 한 사람에게 몸을 바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우리는 끝까지 무엇이라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책을 주십시오."

어떤 청년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그 밖의 아홉 사람의 청년들은 다 이구동성으로 말하였습니다.

"예, 그 말에 찬성이올시다."

그래서 보덕각시는 그들에게 법화경을 주었습니다. 

사흘만에 오는 사람은 마(魔)씨 성을 가진  마랑(馬郞)이라는 사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법화경 일곱 권을 다 외울 자신이 없어서 그대로 낙망하고 스스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마랑이 보덕각시 앞에서 법화경을 외우는데 마치 병에서 물 쏟듯 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랑이 보덕각시의 신랑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인근 동네에 모두 퍼졌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마랑이 천하에 재주 있는 사람으로서 보덕각시를 독차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마랑과 보덕각시는 전생과 금생의 배필이라고 하며 그를 위하여 축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씨 가문에서는 큰 영광이라 하여 온 가문이 모두 한 데 모여서 잔치 준비를 하며 성대한 화촉의 예식을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6. 신부의 변사와 금빛보살상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정한 남자와 결혼 예식을 하게 되니 가깝고 먼 동네에서 잔치하는 연회를 보러오는 사람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천 명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시각이 차차 가까워짐에 따라서 신랑과 신부가 예복으로 정장하고 혼인식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찰라였습니다.

신부는 별안간에 "아이고 배야."하며 폭 거꾸러집니다.

그래서 여러 시녀(侍女)들은 아가씨가 편찮은 모양이니 좀 쉬었다가 예식을 거행하자며 보덕각시를 별실(別室)로 모시고 가서 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신부는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푸르러져서 창백하게 질리며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는 사람 있는 것이 귀찮으니 다들 나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두 주저주저 하며 나가지 아니하니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본시부터 이처럼 가끔가끔 앓는 신병이 있어서 그러니, 놀라지 마시고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좀 미안하지만 모두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보덕각시가 모기소리같은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모두 나가기를 원하자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요를 펴서 뉘어 안정시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씨 집에서는 그대로 둘 수가 없는 사정이라, 의사니 약이니 침이니 하며 의사를 데려 왔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있는 방문을 열려고 하니 방문이 굳게굳게 걸려서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안에서는 난데없는 풍악소리가 요란하며 염불과 노래 소리가 높이 들려 왔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지금 죽게 되었는데 풍악소리가 다 무엇이며, 노래가 다 무엇이냐?" 하며 마랑의 아버지가 노기등등하여 고함을 치며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 방안에는 신부 혼자 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내가 진동하고 천상의 풍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경 속에서 신부는 미소를 띄고 눈을 감고 자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참으로 자나 하고 가까이 가서 숨소리를 들어 보았으나 숨소리는 끊어지고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을 들어오라고 해서 보덕각시의 손과 얼굴을 만져보니 싸늘하게 식어 있고, 코에 손을 대니 콧구멍에서는 찬바람이 나올 따름입니다.

그래서 마씨는 깜짝 놀라서 자기 아들 마랑을 불러 보이니, 신부의 얼굴이 각각으로 썩어서 그 아름다운 용모가 변해버리고 맙니다.

마랑은 이것을 보고 너무도 원통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며, "아! 보덕각시. 어쩌면 이렇게도 가고 말았소. 아! 보덕각시. 나를 버리고 어쩌면 이렇게도 허망하게 갔단 말이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부르짖으며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 결혼식에 왔던 사람들은 이 신부의 변사(變死)를 듣고 누구나 눈물을 아니 흘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마씨 집의 행복을 축복하려던 기쁜 장소는 별안간 장례식장으로 변하여 울음 판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더니, 그렇게 선녀같이 어여쁘고서야 요사(夭死)하지 않을 수가 있나."

군데군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서로 이런 말들을 하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가엾은 일입니까. 초로(草露)같은 인생과 부유(浮遊)같은 인생을 누구나 말하지만, 여기에 모여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이를 확실하게 깨치게 되었습니다.

보덕각시는 참으로 여러 사람에게 보문품과 금강경과 법화경을 외우게 하더니, 실지로 불법(佛法)을 믿지 않으면 아니 될 무상관(無常觀)과 부정관(不淨觀)을 여실하게 자기 몸으로 보여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혼인에 쓰려고 준비한 음식은 장례식에 쓰게 되고, 혼례에 입었던 예복은 그대로 수의(壽衣)로 하여 염습(殮襲)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조객과 같이 멀지 않은 동산에 매장하고 조그맣게 분묘를 돋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한 여러 청년들 가운데는 이 보덕각시의 무덤 앞에 와서 울며불며 탄식하고 보덕각시의 옛 모습을 말하며 서로서로 북을 돋우어주고 떼를 입혀주는 자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분묘가 길가에 있으므로 지나가는 행인도 아니 들여다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뒤였습니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학체(鶴體)와 같은 늙은 스님 한 분이 석장(錫杖)을 끌고 마씨 집을 찾아왔습니다.

"여보시오. 실례의 말입니다마는 이 댁에서 보덕각시라는 미인 한 사람이 죽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네!" 하면서 나가 보았습니다.

스님은, "나는 여기서 멀지 않은 절에 사는 중인데, 그 미인을 위하여 불경이라도 한 글귀 읽어주려고 찾아왔으니 산소에까지 안내하여 주실 수가 없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인도 고맙게 여기고 산소에까지 인도하니 그 노승은 석장을 짚고 염불을 하려는 것 같더니 묘하게 눈동자를 굴립니다.

그러더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서기(瑞氣) 어린 광명을 보십시오."

그러자 모여 있던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그곳을 보니, 분묘의 한복판으로부터 서기광명이 무지개같이 뻗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승은 이것을 보고 절을 하더니, 주인에게 괭이를 가지고 와서 무덤을 파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도 이상하게 여기면서 괭이를 가져다가 분묘를 파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모이는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분묘 주변에 가득 들어섰습니다.

인부가 가래와 괭이로써 분묘를 파서 헤쳐보니, 그 곳에는 보덕각시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어떤 보살(菩薩)의 금신상(金身像) 하나가 광명을 내며 나옵니다.

여기에 모인 군중들은 이 광명을 보고 모두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신보살상 앞에 합장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노승(老僧)은 여러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보시오. 이 금빛 불상은 그 보덕각시 미인의 해골이외다. 그러면 그 미인은 누구이며 금불상은 누구이겠소. 
잘 들어보시오.

대성자모관세음보살(大聖慈母觀世音菩薩)이 중생들의 업장(業障)이 깊고 두터움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미인의 상호[몸과 모습]로 화현(化現)하셔서 여러분에게 불경을 주어 읽혀서 수승(殊勝)한 인연(因緣)을 맺게 한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도 이 관음성모(觀音聖母)를 친견하였으니, 이 인연으로 더욱 더 분발하고 노력하여 대작불사(大作佛事)하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이렇게 간곡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군중들은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합장하고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부르며 다시금 신심(信心)이 복받쳐 끓어 나옴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승은 다시 말합니다.

"보덕각시는 관음보살이요, 보덕각시의 어머니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인데, 이 섬서성(陝西省) 일대의 사람들은 다른 곳 사람보다 불법에 신심이 장한 고로 이렇게 우리 삼성(三聖)이 왔다가 가는 것이요. 

그런데 마랑(馬郞)만은 해동 조선국에서 또 만나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오."

말을 마친 노승이 석장(錫杖)을 던지니 그 지팡이가 사자(獅子)로 변합니다. 

노승은 이 사자를 타더니 그만 공중으로 솟아서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천주(泉州)라는 곳에 찬화상(餐和尙)이라는 스님이 계신데,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노래하였답니다.

아리땁고 고운 자태, 그 누가 따르리.
여러 낭군 홀려서 법화경을 알게 했네.
황금상을 남기고 돌아간 그 뒤에.
알지 못하네, 밝은 달은 뉘집에 떨어졌노.

반자요조의빈사 겸살낭군염법화
半姿窈窕倚 斜 殺郞君念法華

일파골두도거후 부지명월낙수가
一把骨頭挑去後 不知明月落誰家


7. 회정대사의 천수기도

그러면 마랑(馬郞)은 그 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랑은 보덕각시의 변사(變死)를 보고 무상을 느끼고 출가하려던 차인데, 그 노승으로 인하여 금신의 보살상을 파내게 된 후부터는 아주 신심이 복발하여 자기 집을 고쳐서 절로 만들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그 관음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 수행으로 여생(餘生)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관음 불상을 모시고 수행하던 그는 다시 천하강산 유람을 나서 돌아다니다가 조선의 금강산까지 와서 어떤 석굴 속에서 기도 드리면서 염불과 참선수행으로 남은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연공덕으로 그는 신라시대(新羅時代) 왕의 왕사(王師), 국사(國師)가 되었으니 호(號)를 가로되 회정대사(懷正大師)라 불렀습니다.

회정대사는 왕사와 국사로서 번잡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이런 지위에 계속 머물렀다가는 업만 짓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왕사와 국사를 하루아침에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표훈사(表訓寺) 밑 송나동(松蘿洞) 송나암(松蘿庵)에서 천수주력공부(千手呪力工夫)를 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십년 동안을 하루같이 정성스럽게 하였습니다.

이 천수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의 상서(祥瑞)가 많았으니, 호랑이와 독사가 와서 지켜서 대사가 계신 암자에 침범하는 도적을 쫓아버린 일도 있었고, 혹은 죽게 된 병자가 대사를 찾아와서 천수주력하는 것을 듣기만 하고도 기사회생(起死回生)해서 병이 나은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는 캄캄한 밤중에도 이 송나암이 있는 골짜기가 대낮같이 환하게 광명이 가득차서 서기[상서로운 기운]를 내뿜는 일도 있고, 어느 때에는 대사의 육근문두(六根門頭)[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지칭]로 방광(放光)을 하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8. 몰골옹과 해명방을 방문

회정대사가 이렇게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공부를 하고 있노라니까 어느 
날에는 허공에서 벽력같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회정아. 회정아. 네가 대도를 성취코저 하거든 하루 바삐 이 암자를 떠나서 저 남쪽을 향해 가거라. 

그리하여 몰골옹(沒骨翁)과 해명방(海明方)을 찾아가서 대도를 묻고 배우라."

그래서 회정대사는 그 길로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江原道 楊口郡 方山面)에 있는 어느 산중으로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해 저문 산중에서 무단히 애를 쓰고 돌아다니다가 일간두옥(一間斗屋)의 집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짜고짜 그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한즉 선풍도골의 백발노인이 반갑게 맞아들이며 어서 들어오라고 합니다.

회정대사는 절처(絶處)에서 구사일생한 듯 들어가서 고맙게 인사하고 앉아 있으려니까 영감님이 손수 나가서 감자 삶은 것 한 그릇을 갖다 주며 먹으라고 합니다.

다만 물 한 그릇이요, 소금 한 접시요, 감자 한 그릇이지만 너무 허기진 뒤끝이라 그러한지 어떻게도 맛이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대사는 이렇게 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까 인사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서로 통성명을 못하였습니다. 

소승은 금강산 표훈사 밑 송나동 송나암에 있는 회정이라고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감님 덕분에 꼭 죽을 목숨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영감님이 계신 이 집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아슬아슬 합니다. 

그런데 영감께서는 이렇게 혼자서 계십니까?"

"예. 나는 이렇게 혼자 사는 늙은이요."

"자손은 아무도 없으십니까?"

"예. 나는 마누라도 없고 자녀도 없는 사람이오."

"아- 그러면 퍽 외롭고 적적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영감님의 성함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나같이 산중에서 땅이나 뒤지고 홀로 사는 사람이 무슨 성명이 있겠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부모와 같이 모시겠사오니, 일러주십시오."

"대사가 그렇게 간청하니 어찌 회피하겠소. 나는 본래 성명이 없는 사람인데, 남들이 부르기를 몰골옹(沒骨翁)이라고 하오."

"예! 몰공옹이셔요?"

회정대사는 의외의 대답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다시 일어나서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합장하고 말하였습니다.

"소승이 그저 선생님의 고명하신 도예(道譽)를 듣삽고 불원천리하고 왔사오니, 소승에게 대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아! 이 대사 보았나. 공연히 또 사람을 시달리게 하는구료. 나는 대도는커녕 소도도 모르는 사람이니, 그런 말은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

"그래도 제가 꼭 선생님의 이름을 듣고 왔는데요."

"그것은 잘못 듣고 온 게요."

"그러지 마시고 이 미혹한 중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아따, 이 중 보았나. 정 그렇게 귀찮게 굴면 오늘밤에 이곳에서 자지도 못하게 쫓아 버릴 테니 정신 차리시오."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대사는 그만 어찌하는 수가 없어서 다시, "그러면 선생님께 한 마디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늙은이는 "뭐요? 말하시오."

"선생님께서는 혹 해명방(海明方)이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아! 해명방 말이오. 그 사람은 나의 친구인데 저 동네에 있지요." 하며 손가락으로 문밖에 있는 산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회정대사는 몰골옹 댁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해명방을 찾아서 커다란 산을 넘어갔습니다.


9. 보덕각시와 결혼하고 살림을 차림

회정대사는 태산준령을 넘어서 해명방(海明方)이 있을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해가 다 넘어가도록 이 골짜기와 저 골짜기로 헤매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일간두옥의 집 한 채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사는 그 집을 찾아가서, 
"여보세요. 주인 어른 계십니까?" 
하고 싸리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명랑하고 쾌활한 듣기 좋은 음조(音調)의 여자 말소리가 들려 나옵니다.

"거기 누구십니까? 누구시기에 이렇게 늦게 찾아 오셨습니까?" 하며 과년한 노처녀가 나오더니 친절하게 대답합니다.

"예, 나는 금강산에 사는 중인데 탁발을 나왔다가 이렇게 길을 잘못 들어서 어둡게 댁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해명방이라는 어른댁이 어디입니까?"

"해명방이요? 해명방은 우리 아버님의 자(字)이신데, 바로 이 집입니다."

"그러면 지금 댁에 계십니까?"

"아니요. 지금 사냥을 나가서 안 계십니다. 그런데 그 어른을 어찌하여 찾으십니까?"

"예, 그 어른을 꼭 뵙고자 합니다."

"그러나 대사님이 잘못 오셨습니다. 우리 아버님 해명방은 본시 성품이 사나와서 대단히 뵈옵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그 어른의 비위만 거슬리는 날이면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는 어른이니까 스님께서는 우리 아버님을 뵐 생각은 아예 마시고 바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날이 이렇게 저물었으니 어찌 인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그야 그러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곳보다 바위굴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더 나으실 터이니 그렇게 하십시오."

처녀는 이같이 대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정대사는 이럴수록 도심이 더욱 간절하여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처녀를 이모저모 뜯어 보았습니다. 그 노처녀는 그리 어여쁘지도 않고 그리 밉지도 않게 숭굴숭굴하게 생긴 처녀인데 말씨마다 인정이 뚝뚝 떨어지고 동작할 때에 귀여운 애교가 담뿍 찼습니다.

그렇게 지성스럽게 아버지의 패악을 말하고 대사를 가라고 하던 노처녀도 대사가 도를 위하여 가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듯 대사를 불쌍하게 여기고 대사를 방안으로 안내하더니 부엌에 들어가서 달가닥 달가닥 하며 저녁상을 보아서 갖다 줍니다.

대사는 배고픈 차에 맛있게 다 훑어 자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해명방이 얼마나 사나운가를 머릿속에 그리고 앉아 있노라니, 금강야차(金剛夜叉)와 같은 늙은이가 구척 장신에 활과 창을 메고 노루와 사슴과 토끼며 너구리같은 짐승을 잡아서 칡줄로 동여매 가지고 질질 끌고 들어오는데, 위풍이 당당합니다.

대사가 기세에 눌려서 얼른 나아가서 절을 하자 그 늙은이는 노기탱천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웬 중이기에 남의 처녀 방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나오느냐? 이놈 죽일 놈같으니라고."

그래서 대사는 머리 조아려 백배로 사죄를 하고, "소승은 본시 금강산에 사는 중인데 선생님의 도가 높다는 말씀을 듣고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선생님께서는 안 계시고 저 따님께서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며 저녁을 차려주기에 지금 막 먹고 난 길입니다. 무슨 별다른 의미로 들어앉은 것이 아니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놈.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라고. 뭐 어쩌구 어째? 남의 색시방에 들어가서 함부로 자빠져있다가 나오면서 뭐 어쩌구 어째?"

해명방은 이렇게 언책하더니 귀에 불이 번쩍 나게 회정대사의 빰을 갈깁니다.

"아이고 빰이야." 하며 회정대사가 손으로 빰을 부비는데, 다시 발길로 차서 문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래도 대사는 굳게 닫은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 와서, "선생님, 그저 소승은 도를 위하여 온 사람이니 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소승은 본시부터 위법망구(爲法亡軀) ㅡ 법을 구하기 위해서 몸을 던짐 ㅡ할 결심을 가졌사오니 도를 일러 주셔서 혜안(慧眼)을 통하게 하신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하며 법문을 구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말하자, 그 늙은이는 다시, "그놈 꽤 쓸만한 놈이로구나. 그러나 이 중아. 들어봐라. 네가 나의 집에서 도를 배우고 있으려면 저기 앉은 나의 딸 보덕각시와 결혼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니, 네 마음에 어떠하냐?"
하고 말합니다.

"선생님, 그것만은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승이 출가 이후로 반평생을 계를 지켜면서 살아왔사온데, 이곳에 와서 파계해서야 어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놈, 죽일 놈 같으니라고. 뭐 어쩌고 어째? 결혼하기가 싫다? 그러면 이놈 내 손에 죽어 보아라."

그 노인은 회정대사에게 이와 같은 호령을 하며 주먹을 쥐고 일어섭니다.

이것을 본 처녀는 대사에게 눈짓을 하며 그러지 말고 어서 명령에 복종하라는 표정을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명령을 어기면 죽일 것이라는 것을 벙어리가 손짓으로 가르치듯 갖은 형용을 다해서 가르칩니다.

그래서 회정대사는 할 수 없다는 듯 그 노인에게 다시 말합니다.

"그저 소승이 미처 생각이 덜 돌아가서 그랬사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찌 감히 높으신 명을 어기겠습니까?"

이렇게 빌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러자 "진작 그렇게 할 일이지."

노인은 풀어진 듯 이렇게 말을 하며 그 날 저녁으로 소반에 물을 떠다 놓고 색시와 같이 서로 맞절을 하라고 하더니, 이것으로써 혼인잔치의 예식을 마치고 그대로 웃방에 올라가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사는 하는 수 없이 그 보덕각시와 같이 강제 결혼을 당하고 부부가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행한 것은 그 각시가 여느 색시와 달라서 고녀(鼓女)[생식기가 완전치 못한 여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세 식구가 한 집에 있으면서 산에서 먹고 살아가는데, 나무장사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대사는 나무 장사를 하여 가면서 그 집에 있는데, 장인 되는 영감님은 사위 되는 회정대사를 어떻게 심하게 들볶는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노인은 다만 사냥을 해다가 고기를 만들어서 술이나 마실 뿐이요, 가사(家事)를 돌아보지 않고 전부를 사위에게만 맡기고 괴로운 일만 시킵니다.

도대체 일이 고되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화전밭도 파야 되고 땔나무도 대야 되고 채마전에 딸린 밭도 파야 되고 그밖에 나무를 해다가 장에 나가서 팔아 와야 되는지라 몸이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삼 년이나 계속하는데, 그 노인에게 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아직 때가 멀었으니 기다리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대사는 몇 번이나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몇 번이나 도망을 가려고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숙하고 인자한 부인 되는 보덕각시의 따뜻한 인정에 끌려서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삼 년 동안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10. 만폭동에서 다시 만남


회정대사는 이렇게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느라고 천수주력(千手呪力)도 못하고 염불 공부도 못하고 참선 공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장인과 아내를 먹여 살리고 오막살이 살림이라도 그 살림살이에 빠져서 고생만 하였습니다.

대사는 이런 생활을 하다가 하루는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동기가 무엇이었더냐? 대도를 성취하겠다는 욕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곳의 해명방은 선지식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또 보덕각시도 심상치 않은 여자이나 나에게 도를 가르쳐줄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고용살이만 하다가는 일에 눌려서 죽지 않을까? 그리하여 업만 짓는 것이 아닐까? 

허허! 내가 귀신에 속았거나 도고마승(道高魔勝)으로 악마 굴에 빠진 것이다."

대사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금강산 송나암에서 천수 기도 하던 생각이 불현듯 나서 금강산이 그리워졌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그 장인인 해명방도 악마같이 보이고 그 인자하던 보덕각시도 나찰(羅刹)이나 악귀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 모습이 땔 농군같이 형용이 초췌하고 손가락이 갈쿠리같이 된 것을 볼 때에는 퍽 가엾고도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바삐 이 산중에서 빠져나갈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보덕각시에게, 
"여보, 부인. 나는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공부나 하다가 죽겠소. 

내가 이 곳을 찾아올 때에는 이렇게 장가나 들고 살림이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소. 

적어도 도통을 해보려고 온 것인데, 삼 년을 지내도 아무 도리가 없으니 더 있은들 무얼 하겠소?"

이렇게 슬픈 말로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자 보덕각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임자의 말씀을 들으니 그렇기도 하겠어요.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니 십 년만  채우고서 가시도록 하시구료.

아버님이 항상 말씀하기를, 십 년을 채워야 한마디 일러주거나 말거나 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이제부터 칠 년만 더 고생하고 기다려 보시구료. 

칠 년이 길거든 다시 삼 년만이라도 기다려봅시다 그려."

"내가 지금 이렇게 타락해서 삼 년을 그저 보낸 것도 분한데, 또 삼 년이나 칠 년을 더 보내야겠소? 

인정으로는 당신과 같이 해로를 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도를 위해서 그럴 수가 없소이다."

"당신이 그렇게 꼭 가겠다고 하니까 나도 어찌할 수가 없군요. 

그러면 우리 이 다음에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에서 다시 만나 봅시다." 하고 보덕각는 대답합니다.

대사는 부인과 애처로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명방에게 가서 떠나겠다고 인사를 하자, "미친 녀석 같으니라고. 가고 싶거든 가려무나. 그렇지만 한 삼 년만 더 있다가 가지 못하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사는 들은 체도 아니하고 길을 재촉하여 나오다가 그래도 삼 년이나 있던 집이라 옛정을 못 이겨서 한 번 휙 돌아다보니, 그 오막살이나마 온데간데 없고 장인과 부인도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고 다시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사는 너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며 태산준령을 넘어오니, 이 산에 들어올 때 보던 몰골옹이 짚신을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갑게 여기고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하니,
"이 중아, 이 어리석은 중아. 왜 삼 년만 더 있지 않고 벌써 오느냐?" 하며 퍽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대사는, 
"그들이 다 누구십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너의 장인은 문수보살이요  너의 처 되었던 각시는 관음보살인데, 네가 전생에 법화경을 외운 공덕으로 이곳에서 그렇게 삼 년이나 있은 것이다. 

그러나 네가 무슨 복에 그녀와 같이 육 년이나 지낼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사는 몰골옹을 보고,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다시 여쭈었습니다.

"오, 나 말이냐? 나는 보현보살인데, 너에게 길을 가르쳐 주느라고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인연이 다했으니 나도 나 갈대로 가야 되겠다." 하면서 곧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사는 이 말을 듣고 크게 통곡하며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역시 송나동에 있는 송나암에서 천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덕각시가 몹시도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서 그때에 약속한 말을 잊지 않고 만폭동이나 올라가볼까 하는 생각이 나서 만폭동을 찾아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아내였던 보덕각시가 흰 돌바위에 앉아서 머리를 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반가워서 쫓아가서 부인의 손목을 잡고, "임자가 보덕각시가 아니오?" 하니, 그 아내는 곧 파랑새가 되어서 날아갑니다.

그래서 대사는 새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죽을힘을 다하여 따라가자 그 새는 어떤 석굴(石窟)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대사도 굴속으로 따라 들어가니, 새는 온데 간데 없습니다.

이런 일을 본 대사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마음속에 화두(話頭)가 되어서 사흘 동안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참선 공부를 하여 홀연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자기는 전생의 마랑(馬郞)으로서 관음보살인 보덕각시 때문에 
보문품과 금강경과 법화경을 읽었고, 그 각시가 죽은 뒤에 스님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이 굴 속에서 공부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을 파 보니 보덕각시가 죽은 뒤 노승의 가르침에 따라 묘를 파서 얻은 금빛 불상을 모시고 다니다가 이곳에 두었던 것이 발견되며, 또 그때 쓰던 향로며 촛대와 경책이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회정대사는 이곳에다 절을 지어 다시 그 관음불상을 모시고 공부하게 되었으며, 관음보살의 응화신(應化身)인 보덕각시를 만나 본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보덕굴', '보덕암(普德庵)'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설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교 신앙이 아니고는 볼 수가 없는 신기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지나(支那)[중국] 당나라 섬서성(陝西省)의 한 지방에서 맺혀진 인연이 조선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楊口郡 方山面) 산중에서 삼 년을 살고 마지막 금강산 만폭동에 와서 그쳐질 줄을 알았겠습니까?

몰골옹은 그 당시 무덤을 파내게 하던 늙은 스님으로서 보현보살이요, 해명방은 보덕각시의 어머니라고 하던 문수보살이며, 보덕각시는 관세음보살이었습니다.

그런즉 문수보살은 전생에는 장모였으며 이생에는 장인으로서 회정대사를 제도하였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마하살 ( )

출처: https://buddha-mind.tistory.com/328 [부처님 마음 卍 불교의 향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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