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소옹(邵雍, 1011~1077)

강나루터 2023. 5. 20. 07:48

글 교무부

 

  소옹(邵雍, 1011~1077)은 중국 북송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상수학자(象數學者)이며 시인(詩人)이다. 자는 요부(堯夫), 자호(自號)는 안락(安樂)이며, 강절(康節)은 사후에 내려진 시호(諡號)이다.

  소강절의 집안은 증조부가 송 태조(宋太祖)의 휘하에서 군관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나선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소길(邵吉, 989~1067) 또한 관직에 나가지 않은 까닭에 집안은 항상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과거에 뜻을 두고 추위와 더위를 참고 견디며 독서와 사색으로 밤을 지세우다 문득 탄식하였다. “옛 사람들은 지나간 것을 높이고 친구처럼 지냈는데 나만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하고는 제(齊), 노(魯), 송(宋), 정(鄭) 등의 옛 나라들을 오랫동안 유람하고 돌아와 말했다. “도가 여기에 있다.”01

고금(古今)과 천지만물의 변화가 결국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은 후 그는 입신양명을 향한 꿈을 접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소강절이 소문산(蘇門山) 백원(百源)에 있을 때, 북해 사람 이지재(李之才, ?~1045)가 소강절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소옹의 집을 방문하여 시험 삼아 물리(物理: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와 성명(性命: 인간 본성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의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지재의 물음에 소강절이 삼가 가르침을 청하자 이지재는 하도낙서(河圖洛書), 팔괘(八卦)와 64괘(卦)의 도상(圖象) 등을 전하였다. 그 뒤 소강절은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성(性)을 알았고, 성을 깨친 다음에 명(命)을 알았으며, 명을 안 뒤에 지극한 이치(理致)를 깨달았다.

  소강절은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인 상수학(象數學)을 창안하였다. 그는 역(易)이 음(陰)과 양(陽)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ㆍ양(陽)ㆍ강(剛)ㆍ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수리철학을 바탕으로 우주의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 일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우주의 일년인 일원(一元)에도 생성, 소멸의 순환이 반복된다고 보았다. 그는 해(日)의 경로는 하늘의 원(元), 달(月)의 경로는 하늘의 회(會), 별(星)의 경로는 하늘의 운(運), 신(辰: 시간)은 하늘의 세(世)라 하여 원회운세를 일월성신에 배당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일원에 12회가 있어 360운에 응하여 4,320(1세는 30년, 30×4,320=129,600년)세를 거느리며, 1세(歲, 1년)에 12월, 360일에 4,320(12×360)시간이 있음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강절은 젊은 시절 공성[共城,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범양현 (範陽縣)]에서 살았는데, 그의 나이 54세 때에 부친이 돌아가신 후 낙양의 천진교(天津橋) 가까운 곳에 정착하였다. 이 집은 고관 출신인 부필(富弼)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등의 벗들이 돈을 모아 그에게 집과 농토를 마련하여 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안락와(安樂窩)라 하고, 스스로를 안락선생이라 하였다.

  천진교는 소강절이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왕안석(王安石, 1021~1086)02의 출현을 예견하였다는 유명한 곳이다. 소옹이 천진교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서, “두견새는 남쪽에 사는 새인데 이곳 북쪽까지 올라온 것은 남쪽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쪽 사람들이 관직에 많이 진출할 것이다.”라고 예견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왕안석이다. 왕안석은 남쪽 강서성(江西省) 사람으로 그가 재상(宰相)이 되면서 남쪽의 동료들을 많이 기용함으로 소강절의 예견이 적중하였다. 이와 같은 일화로 소강절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앞날에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前知)”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봄가을이 되면 성안을 유람하였는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나가지 않았고, 출타할 때면 말을 몰아 어디든 갔다.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그의 말(馬)소리만 들리면 다투어 그를 맞이하려 하였고, 어린아이들이나 하인들까지도 “우리 집에 선생님이 오신다.”고 말하여 그의 성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호사가들은 소옹이 거처하는 집처럼 따로 지어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소강절은 덕과 기품이 순정하여 어질고 현명하였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또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향리 사람들은 소강절의 덕성을 흠모하여 부자(夫子) 형제들이 서로 조심하여 “나쁜 짓을 하지 마라. 안락선생이 알까 무섭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송거리가 있으면 반드시 소옹에게 먼저 갔다.

  소강절은 사마광(司馬光), 부필(富弼) 등의 구법당(舊法黨)03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북송(北宋)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초년에 걸쳐서 생존하였으며, 세수(歲首)는 67세였다.

  그의 저서로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강절관매법(康節觀梅法)』,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는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數理)로써 설명하고 있는데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극경세서』의 내용에 대해 후세 학인들의 평과 주석이 담긴 『찬도지요(纂圖之要)』와 『황극경세서』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관물내편(觀物內篇)」, 소강절 선생이 여러 학인들과 나눈 담론을 엮은 「관물외편(觀物外篇)」으로 되어 있다.

  소강절이 직접 편집한 『이천격양집』은 자신이 지은 천 오 백여 편의 시들이 시대 순으로 담겨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그의 철학사상을 운문의 형식을 빌어 자유로이 표출하고 있다.

  하늘에 앞서 일을 행하여도 하늘에 어긋나지 않았던 사람 소강절, 그는 학식이 풍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안으로는 성인의 경지에 가까웠다. 훗날 그는 남송(南宋) 도종(度宗)04 3년(1267)에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어 신안백(新安伯)에 추봉되었으며, 명나라 세종(世宗) 때는 선유소자(先儒邵子)라고 높여 불리어지게 되었다. 정호(程顥, 1032~1085)는 소강절의 묘비명에서 “소강절의 도(道)는 편안하였으며, 또한 학문을 이루었다(安且成).”라고 하였다.

  소강절은 역의 이치에 통철(通徹) 하였으며, 『주역』을 새롭게 해석하여 상수학이라는 새로운 역학의 흐름을 창안하였다. 그가 창안한 상수학은 주자학의 근본이념이 되었으며, 주돈이(周敦, 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더불어 동양우주론의 근원사상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ㆍ邵雍, 『황극경세서』, 대원출판사, 2005
ㆍ『儒敎大辭典』, 유교사전편찬위원회, 1990
ㆍ이창일, 『소강절의 철학』, 심산, 2007
ㆍ풍우란, 『중국철학사』, 까치, 2002
ㆍ소병선, 「邵雍의 宇宙觀」, 한국 외국어대학교 대학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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