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지경존성(持敬存誠)

강나루터 2024. 7. 23. 15:29

 

지경존성(持敬存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고 정성을 간직한다.

持 : 가질 지
   敬 : 공경할 경
存 : 있을 존
誠 : 정성 성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서,

오늘날 그 학문적 명성은 세계적 반열에 올라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완성된 단계인 군자로서

대학자를 겸한 모습만 보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완성된 인간상을

형성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많은 고뇌와 위기를 겪었다.

가정적 측면에서 퇴계는 다른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고뇌를 겪었다.

 

생후 7개월에 부친이 별세하여,

부친의 얼굴도 모른다.

 

33세에 홀로 된 모친이 직접 농사일을 하며

어렵게 가정을 꾸려 나간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27세에 초취부인

김해허씨(金海許氏)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46세에 재취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 사별하였다.

 

친정이 사화(士禍)를 겪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부인에 대하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단명에 인생을 마감하니,

퇴계의 마음은 편할 리가 없었다.

48세 때는 둘째 아들 채(寀)가 22세로 사망했다.

50세 때 넷째 형 온계(溫溪) 이해(李瀣)가

간신 이기(李)에게 몰려서 장형(杖刑) 끝에 사망했다.

70세 때는 증손자

창양(昌陽)이 3세로 숨을 거두었다.

 

초취 장인 진사 허찬(許瓚)은

1535년 김안로(金安老)에게

무단(武斷)으로 몰려 옥사했다.

벼슬길에서는 을사사화 때는

권간 이기(李)에 의해서 삭탈관작 당했다가

여론에 의하여 이기가 다시 복작(復爵)시켰다.

 

이기는 자신을 탄핵해 파직시킨 적이 있는

형 이해의 아우인 퇴계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벼슬길에서 퇴계를 괴롭힌 사람은

간악한 권신 김안로(金安老)였다.

 

처가가 있는 영주(榮州)가 고향이라

퇴계를 잘 알았다.

 

김안로가 인사하러 오라는 것을

퇴계는 가지 않았다.

퇴계가 자주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나는 것을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물러나는 것을 통해서 벼슬이

더 올라가게 한다고 비웃었고,

나왔다가는 도로 산으로 들어가는

산새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람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가정적인

어려움이나 사환생활에서의 어려움을,

퇴계는 한평생 뜻을 확고히 세워

성현의 가르침을 약석(藥石)으로 삼아,

수신에 힘쓰고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출처(出處)의 대절(大節)을 지켜 나갔다.

무슨 대단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바로잡아 최선을

다하는 정당한 방법 밖에 없었다.

 

바로 ‘경건함을 유지하면서 정성스러움을

간직하는 방법(持敬存誠)’이었다.

우리 몸은 그냥 두면 동물적인 본성대로 살게 되는데,

이를 마음을 가지고 단속해야 한다.

 

마음도 주인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물욕에 끌리거나 환경의 영향을 받아

삐뚤어질 위험이 항시 존재한다.

 

이 마음을 단속하는 힘이 경건함이다.

성실함은 이 경건함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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