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장가 주인공,신사임당.신재효.신익희 |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107) 평산신씨(平山申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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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에 새겨진 평산신씨 유래> ▸ 平山 申씨의 시조는 신라 말에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난 申崇謙 장군으로써 시호는 壯節公 이시다.사당과 묘역은 춘천시에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申將軍은 서기 918년에 太祖 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함으로써 開國元勳 대장군이 되었으며 또한 인품과 무예가 출중하여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특히 평산(平山)에서 보여준 무인으로서의 기예는 太祖 王建 이 감탄하여 平山 申씨로 사성하였다. 서기 927년 후백제와의 전쟁에서는 태조왕건이 위급한 처지에 이르자 왕을 대신해서 죽음으로 그 충성심과 살신성인의 고결함을 높이 평가해서 원래 태조의 묘소로 잡아놓은 곳을 신 장군의 禮葬地로 하였으며 宗廟에 配享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15세에 이르러 19개 파로 분파되어 대성을 이루어 내려오고 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나라를 이끌어가는 文·武의 많은 인재와 국가, 사회발전에 공헌한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근세에 와서도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이자 화가이며 효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겨레의 어머니라고 하는 신사임당이 있고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투사요 건국 후에는 한국 민주발전의 초석을 이룬 해공 申翼熙 선생등이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한국 경제발전과 선진문화 발전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한 전 국무총리 申鉉碻 등 각계각층으로 국가 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분들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 <김진우 해설>
평산신씨(平山申氏) 도이장가 주인공,탄금대의 신 립,겨레의 어머니 신사임당 의병장 신돌석,판소리 신재효,신익희,신현확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고려개국공신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고려 태조가 940년에 통일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제정됨,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그곳에 공신당을 세우고 동.서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벽에 그려진 공신을 말함)에 책록되었으며,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때의 정1품 문산계 1308년(충렬왕 34년)에 정1품으로 제정하였고 뒤에 벽상삼한을 덧붙였음)의 품계로 태사(太師:삼사의 하나로 정1품)에 오른 인물이다. 문헌에 의하면,그의 초명은 능산(能山,삼능산 三能山)이며, 전라남도 곡성(또는 광해주(光海州:현재의 춘천)출신)으로,태봉(泰封:신라 52대 효공왕때 궁예가 송악에서 세운 나라)의 기장이었다. 신숭겸은 태봉(泰封,후고구려)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서기 918년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더불어 당시 시중(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이었던,왕건에게 왕창근,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한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올라,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날 태조 왕건이 장군들과 평주(평산 平山)에 사냥을 나가, 삼탄이라는 곳을 지날때 세마리의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 있는가" 하고 묻자,능산이 자신이 쏘겠다고 하여, 왕건이 활을 주면서 쏘라고 하자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히겠다"고 하고 날아가는 세번째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쏘아 떨어뜨렸다. 이에 태조 왕건이 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00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그 지역인 평산(平山)으로 삼게 하였으며, 이름을 숭겸(崇謙)이라 사명(賜名)했다고 한다.신숭겸은 서기927년(태조10)현재의 대구 공산동수의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하자, 태조와 용모가 비슷한 그는 태조를 피신케하고, 대신 어거(御車)를 타고 출전하여 용전하다 전사 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 왕건은 춘천에 예장(禮葬)하고, "벽상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대광위이 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戴匡衛怡 輔砥節底定功臣) 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장절이라 했으며, 신숭겸의 아들인 신보장(申甫藏)을 원윤(元尹:고려때 훈신의 작호,충렬왕때는 훈신 종2품,또는 향직 6품,태봉때의 벼슬)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달성군 공산면 지묘동)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다.
서기 1120년(예종15)에는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김낙(金樂)과 신숭겸의 공(功)을 추도하였다. 도이장가(悼二將歌)는 고려 제16대 예종이 지은 경기체가(景幾體歌)로 태조 왕건을 위해 순사한 신숭겸과 김낙(金樂) 두 장수를 찬양한 작품이다. 도이장가 [悼二將歌] -고려 제16대 왕 예종(睿宗)이 1120년에 지은 노래 1120년(예종15) 왕이 서경(西京:平壤)에 행차하여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김낙(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참석하게 한 것을 보고,예종이 그들의 공을 추도하여 지은 노래이다. 평산신씨고려대사장절공유사(平山申氏高麗大師壯節公遺事)에 전하는 가사에 "①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②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인데, 이것을 양주동(梁柱東)은 “① 니믈 오 신숭겸의 묘는 강원도 춘성군 서면 방동리에 있으며,매년 음력 3월3일과 9월9일에 향사(제사)한다.
장절공 신숭겸 묘역(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신숭겸 장군의 묘역에는 묘와 묘비,신도비,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 안동김씨(신안동)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조선 후기에 세력을 떨친 대표적인 명벌이다. 역사속에 이름난 인물로는 세종때 궤장(几杖:국가에 공이있는 원로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을 지낸 대신들이 왕과 함께 들어간 일종의 '원로회의 격'으로 태조와 숙종,영조대왕이 여기에 참여했음)에 들어간 신개(申槩)가 종부시령(宗簿寺令:왕실의 계보를 찬록하던 관청의 벼슬) 신안(申晏)의 아들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고, 동생 신효(申曉)는 태종때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종때 교수관(敎授官:조선때 문과출신으로 파견된 향교의 교관)이 되었다.
우참찬(右參贊:의정부 정2품)을 지낸 신영(申瑛)은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품)에 올랐고, 학자로 유명한 신명인(申命仁)과 신준미(申遵美),신계성(申季誠)은 서예(書藝)에 능통한 신효중(申孝仲)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여류문인이자 화가이며, 효와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상으로 겨레의 어머니라고 하는 신사임당이 평산신씨다.신사임당(申師任堂)은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신개(申槩)의 현손녀(玄孫女)이며 진사(進士:소과인 진사과에 급제한 선비) 신명화(申命和)의 딸이다. 신사임당은 효성이 지극하였고,문장(文章).침공(針工).자수 등에 뛰어났다.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뛰어난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서기 2008년에는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도안인물로 선정되었으며, 5만원권은 2009년 6월23일 첫선을 보였다.아들인 율곡과 함께 모자(母子)가 지폐의 도안인물로 선정되었다.
한편 무신(武臣)으로 명성을 떨친 신립(申砬)은 선조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5품).경력(經歷).진주판관(晉州判官:판관은수령의 지휘받아 사법.행정을 관장한 종5품)등을 거쳐 온성부사(府使:정3품수령)가 되어 북변에 침범해온 나탕개를 격퇴하고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병사.절도사)에 올랐다. 임진왜란때는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왕명으로 군무를 띠고 변경을 순찰하던 특사)로 출전하여 충주(忠州)의 탄금대(彈琴臺)에서 적군과 대전했으나 참패하고 부하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여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되었으며,평원부원군(平山府院君)으로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오른 아들 신경진과 부사(府使:정3품수령)를 지낸 신경희(申景禧),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지방에 두어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절도사)를 지낸 신경유(申景裕) 부자(父子) 3형제가 이름을 날렸다.
신립(申砬)의 형인 신급은 임진왜란 때 어머니와 함께 이천으로 피난을 가던 도중에 적을 만나 모친이 벼랑에 투신하자 그도 따라 뛰어들어 어머니를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 숙종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오른 신완(申琓)은 장군(將軍) 신립(申砬)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으로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글을 읽었으며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병년(丙年)마다 보는 과거)에 급제하고 서기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득세한 사건)때 남인(南人)인 허목(許穆)등의 죄과를 탄핵했다. 그 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을 지낸 신민일(申敏一)과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간원의 정3품)에 오른 신면(申冕)이 뛰어났고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 신정(申晸)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정2품서울시장)을 지낸 신후재(申厚載),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법무장관)를 역임한 신여철(申汝哲),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장관)를 지낸 신임(申銋)등이 유명했다. 영조때 알성문과(謁聖文科:왕이 성균관에서 알성한 뒤 보던과거)에 급제한 신만(申晩)은 찬수 당상(纂修堂上)으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편찬했으며 신집(申鏶)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일을 맡아보던 중추부의 종2품)를 신광이(申光履)는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장관)를 역임하여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신회(申晦)와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현재의 검찰총장)을 지낸 신위(申暐),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절도사) 신홍주(申鴻周)등과 함께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학자인 신작(申綽)은 학문에만 전력하고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으며한말에는 신재효(申在孝)가 판소리를 연구하여 계통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春香歌),심청가(沈淸歌),적벽가(赤壁歌)등 여섯마당의 체계를 세워 판소리 사설문학(辭設文學)을 대성(大成)하였으며 신정희는 고종 때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법무장관)를 지냈다.
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申乭石)과 독립운동가 신팔균(申八均),신태식(申泰植),신석구(申錫九),신우현(申禹鉉),신숙(申肅),신정백(申正栢),신현구(申鉉九) 등이 가문을 크게 빛냈으며,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투사,건국후에는 한국민주발전의 초석을 이루었으며 국회의장을 지내고 대한민국(大韓民國) 제2대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申翼熙)선생도 평산신씨가 배출한 거목으로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이 수여되었다. 현대에는 한국경제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고,보사부장관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등장 후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申鉉碻,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등 각계각층으로 국가 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평산(平山)은 황해도에 위치한 지명으로, 940년(고려 태조 23)에 평주(平州)로 바꾸었고 성종 때 방어사(防禦使:경기 이북의 각 도에 두어 병권을 장악하고 요지를 지키게 했던 종2품 무관)를 두었다.1413년(태종13)에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서부의 일부를 연백군에 이속시켰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조선시대에 178명의 문과(文科:대과)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는 90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기 위한 과거)에 560명,역과(譯科:중국어.여진어.몽고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5명,의과 2명,음양과 1명 등 83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2000년 인구조사에서 평산신씨는 총 154,612가구에 496,87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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