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 .4] 맑은 마음과 깨끗한 기품 ‘금계 황준량과 소고 박승임
퇴계 “영주엔 소고가, 풍기엔 금계가 있다”… 청빈·애민의 닮은 꼴 두 제자’

금선정은 계곡의 맑은 물이 발 아래로 굽이치는 곳에 자리해 절경을 이룬다. 금계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짓고
이름을 금선정이라 붙였다.
#1. 영주에서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 선비
1517년(중종 12), 지금의 영주 땅에 두 아이가 태어났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훗날 퇴계 이황이‘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고,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 있다(榮有嘯皐 豊有錦溪)’는 말을 할 정도로
인품과 학문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난 것 말고도 공통점이 많았다.
황준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상하여 ‘기동(奇童)’으로 불렸다. 박승임은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고 특이하여 주위 사람들이 어릴 때 장난하는 모습에서조차 ‘장차 큰 인물이 될 기상이 느껴
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13세에 대학과 논어를 읽고 15세에 서경을 독파했으며 15세에 향시를 볼
수 있을 정도였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황준량은 약관에 생원시에 합격함으로써 학문적
재능을 드러내 보였다. 박승임 또한 20대 초반에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를 전후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퇴계는 특히 재능이
출중한 두 제자를 사랑했다. 황준량이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몸소 그의 생애에 관한 전기인 행장을
지었다. 또한 황준량이 남긴 글을 교열해서 문집을 만들었다. 특히 명정에 제자의 이름 뒤에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써 같은 유학자로서의 존중을 표시했다.
그런가하면 박승임은 소싯적부터 ‘논어’나 ‘주자대전’을 읽고 의문점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가
스승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시원하게 알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스승은 그의 남다른 열성과 이해력을
인정해 주었다. 퇴계의 저서 ‘계몽전의’는 난해하기로 유명했으나 박승임은 하나하나 연구해 그 뜻을
환히 꿰뚫어 알아냈다. 스승으로부터 맑고 깨끗함을 인정 받아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글씨를
받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바로 생김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니만큼 옷차림이나 장식이 화려할 리는 없었다. 황준량은 누가 봐도 잘생겼다 할
정도로 남다른 풍채에 박식함, 엄격함을 갖췄다. 박승임에게도 ‘준수하다’ ‘풍채가 뛰어나다’
‘태도가 단정하고 말이 적다’는 말이 늘 따라다녔다.
두 사람은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나란히 급제했다. 식년, 곧 자·묘·오·유(子·卯·午·酉)의
해에 한 번씩 전국에서 33명을 뽑는 시험에 동갑내기에 같은 스승을 모신,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선비가 동시에 합격한 것이다. 15세기 전반 문과 평균 합격 연령인 28.1세에 훨씬 못 미치는
24세였다. 게다가 일곱형제의 여섯째 아들이던 박승임은 셋째형 박승간과 같은 시험에서 급제함
으로써 과거 역사상 전례가 없는 진기록을 세웠다.
두 사람은 특히 문장이 뛰어나고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 황준량과 박승임은 나란히 ‘문장에 재기가
뛰어나다’는 평과 ‘문학(詞章)으로 당대의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들으면서 숱한 글 청탁을 받았다.
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성균관, 예문관, 홍문관처럼 문장과 책에 관련된 기관에 근무했다. 박승임은
호당의 사가독서를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다. 문장이 현란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기보다는 도도하고 단단하고 진실했다.
여러 가지로 다재다능한 두 사람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당대의 권력자나 그의 심복은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획책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절은 윤원형 같은
외척과 권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였고, 이들에게 희생 당한 관료와 선비로 사화가 잇따랐다. 두
사람은 ‘우리와 합세해 부와 권력을 나누자’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으로써 평탄한 인생,
벼슬길에 지장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지만 불의와 타협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의
기질과 성정에 맞지 않았다.
#2.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목민관 황준량
20대 중반에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 두 사람의 행로는 조금씩 달라진다. 황준량은 청요직인 성균관
학유, 학록, 양현고 봉사를 지내고 박사에 이어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공조, 호조,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미움을 받던 언관의 모함을 받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
으로 나갔다. 목민관이 되고 나서 황준량은 ‘백성이 관의 근본이고 관이 피폐한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바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천해 나갔다. 이어 단양군수를 지내고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가난한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폈고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주자서절요’를 간행하는 등 교육에 힘써서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명종 12년(1557) 5월7일, 단양군수 황준량이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렸다.
“세도(世道)가 변하여 민생의 피해가 더욱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당파는 수도 없이 많아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 수가 없고 법률은 범과 같이 사나워서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노역에 시달린
백성이 한탄하며 울부짖느라 길쌈할 짬도 없으며 흉년과 부역으로 백성들이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낫겠다고 한탄합니다. 천재지변과 괴변이 잇따라 나타나고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이 흩어져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임금이 그 폐단이 발생한 근원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팔짱
을 끼고 눈을 감고 앉아서 대책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대로 하여 제도를 변경하지 않는
다면 아무리 성군(聖君)과 좋은 재상이라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상소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폐한 민생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을 바탕으로 절박하게 개선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세를 나눠가지는
위정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끼리의 권력, 당파, 부의 세습은 백성이며 국민의
삶과 살림에 여전히 우선한다. 그러기에 460여년 전의 상소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자로 하여금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이게 만든다’.(당시 사관의 논평)
황준량은 20년간 벼슬을 지낸 사람임에도 숨을 거두고 나서 시신을 염습할 천이 없었고 관에 함께
넣을 옷이 없었다. 47세의 나이였다. 애제자를 먼저 보낸 퇴계는 슬픔을 가슴 끓는 시 한 구절로
토로했다.
‘시냇가에서 그대를 만나 의심하던 것 토론했네/ 막걸리 한 사발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3.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산 박승임
박승임은 ‘시월의 비(十月雨)’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평상시 모습을 카메라로 찍듯 그려냈다.
‘궁한 선비 가난하여 단벌 옷뿐이라/ 한 해가 저물어 가니 마음은 더욱 시리다/ 반 칸 방에 불 못
때니 얼음장 같고/ 깨진 잔에 거미줄 친 것 민망스레 본다/ 아내는 내가 생계에 소홀함을 꾸짖으니/
헛되이 밝은 창을 향해 좀 먹은 책 펼친다.’
가난한 중에도 꿋꿋하고 불행 중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유머의 코드마저 느껴지는 시다.
박승임은 40년의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서울에서만 30년을 살았으나 자신의 집조차 사지 못하고
셋방을 전전했다. 사람들이 그의 집을 재상댁인 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항상 조용했다. 그는 평생을
세력이 있는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시사에 함부로 논평하지 않았으며 공무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학문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중앙의 요직에 있을 때보다는 외직에 나갔을 때 그의 청렴성과 능력이 더 잘 드러난다. 현풍현감일
때 전염병과 흉년으로 백성이 죽어가자 시신 속을 드나들면서 많은 사람을 살렸다. 풍기군수를
지냈을 때 전임자가 재정을 탕진해서 창고가 빈 것을 보고는 ‘축난 것을 전임자에게 징수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도록 해서 창고를 채운
뒤에 관련 문건을 태워 버렸다. 굳이 데려다 곤장을 치지 않고 정사를 청정하고 정의롭게 처결하는
것만으로도 호족들이며 교활한 사람을 제어했다. 교육을 확충해서 유교문화를 진작했다. 박승임이
어느 고을에서 이임하거나 귀향하려 할 때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했다.
두 사람은 영주와 풍기에서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편안한 출세길
을 마다하고 평생 79번이나 사직서를 썼던 스승 퇴계의 개결함과 진정성을 물려받은 게 아닐까.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영주시

영주시 고현동에 있는 소고종택(오른쪽)과 사당.
이야기따라 그곳&
◆금계 황준량의 금양정사(錦陽精舍)·금선정(錦仙亭)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 있는 금양정사는 금계가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생전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지만 도중에 세상을 떠나 후손들이 완성했다. 왼쪽에는 종택이 있는데,
금양정사와 같은 시기에 지었다고 한다.
금계는 스승인 퇴계를 배향한 욱양서원(郁陽書院·영주시 풍기읍 욱금리에 있었던 서원)에 종향(從享)
됐다. 하지만 조정에 나아갔을 때 권문세가에 협조해 무고한 선비를 고통받게 했다는 오해를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욱양서원에 종향된 금계가 자칫 스승인 퇴계를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위패가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황준량은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써 퇴계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과 모든 일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져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욱양서원의 위패는 철거되었다. 욱양서원 역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금양정사 옆에 퇴계와 금계의 제단인 욱양단소(郁陽壇所)를 마련해 서원
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금선정(錦仙亭)은 금양정사에서 150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의 고즈넉한 모습과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금선정은 금계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이 건물을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금선정 아래에는 널찍한 반석이 대(臺)를 이루고 있는데, 금계가 ‘금선대(錦仙臺)’라 이름을 붙였다
고 한다. 금선대는 퇴계와 금계가 시(詩)를 읊은 장소로도 유명하다.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
(宋徵啓)가 금선대(錦仙臺)란 큰 글자를 바위벽에 새겼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
◆소고 박승임의 소고종택(嘯皐宗宅)·삼락당(三樂堂)
영주시 고현동에 있는 소고종택은 종택으로는 드물게 양옥 2층 건물이다. 물론 처음부터 양옥은 아니
었다. 지금의 종택은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기존의 한옥 종택이 너무 오래되어 양옥으로 새로
지었다. 종가에서 한옥의 경우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해 양옥으로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종택 바로
옆에는 소고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한옥이다. 인근의 다른 곳에 있었지만
수해로 터가 훼손되면서, 광복 이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삼락당은 소고종택에서 8㎞ 정도 떨어진 문정동 한정마을에 있다. 소고의 손자 삼락당 박종무를
기리는 곳이지만, 원래는 소고의 아들 취수헌 박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해서 ‘하한정(夏寒亭)’이라 했다. 너무 청렴결백
해 제대로 먹을 것조차 없자 아들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고는 삼락당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락당 앞에는 소고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00년의 향나무도 볼 수 있다.
[Copyrights ⓒ 영남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퇴계 “영주엔 소고가, 풍기엔 금계가 있다”… 청빈·애민의 닮은 꼴 두 제자’
![]() |
금선정은 계곡의 맑은 물이 발 아래로 굽이치는 곳에 자리해 절경을 이룬다. 금계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짓고 이름을 금선정이라 붙였다. |
#1. 영주에서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 선비
1517년(중종 12), 지금의 영주 땅에 두 아이가 태어났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훗날 퇴계 이황이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고,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 있다(榮有嘯皐 豊有錦溪)’는 말을 할 정도로
인품과 학문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난 것 말고도 공통점이 많았다.
황준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상하여 ‘기동(奇童)’으로 불렸다. 박승임은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고 특이하여 주위 사람들이 어릴 때 장난하는 모습에서조차 ‘장차 큰 인물이 될 기상이 느껴
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13세에 대학과 논어를 읽고 15세에 서경을 독파했으며 15세에 향시를 볼
수 있을 정도였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황준량은 약관에 생원시에 합격함으로써 학문적
재능을 드러내 보였다. 박승임 또한 20대 초반에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를 전후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퇴계는 특히 재능이
출중한 두 제자를 사랑했다. 황준량이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몸소 그의 생애에 관한 전기인 행장을
지었다. 또한 황준량이 남긴 글을 교열해서 문집을 만들었다. 특히 명정에 제자의 이름 뒤에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써 같은 유학자로서의 존중을 표시했다.
그런가하면 박승임은 소싯적부터 ‘논어’나 ‘주자대전’을 읽고 의문점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가
스승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시원하게 알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스승은 그의 남다른 열성과 이해력을
인정해 주었다. 퇴계의 저서 ‘계몽전의’는 난해하기로 유명했으나 박승임은 하나하나 연구해 그 뜻을
환히 꿰뚫어 알아냈다. 스승으로부터 맑고 깨끗함을 인정 받아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글씨를
받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바로 생김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니만큼 옷차림이나 장식이 화려할 리는 없었다. 황준량은 누가 봐도 잘생겼다 할
정도로 남다른 풍채에 박식함, 엄격함을 갖췄다. 박승임에게도 ‘준수하다’ ‘풍채가 뛰어나다’
‘태도가 단정하고 말이 적다’는 말이 늘 따라다녔다.
두 사람은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나란히 급제했다. 식년, 곧 자·묘·오·유(子·卯·午·酉)의
해에 한 번씩 전국에서 33명을 뽑는 시험에 동갑내기에 같은 스승을 모신,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선비가 동시에 합격한 것이다. 15세기 전반 문과 평균 합격 연령인 28.1세에 훨씬 못 미치는
24세였다. 게다가 일곱형제의 여섯째 아들이던 박승임은 셋째형 박승간과 같은 시험에서 급제함
으로써 과거 역사상 전례가 없는 진기록을 세웠다.
두 사람은 특히 문장이 뛰어나고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 황준량과 박승임은 나란히 ‘문장에 재기가
뛰어나다’는 평과 ‘문학(詞章)으로 당대의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들으면서 숱한 글 청탁을 받았다.
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성균관, 예문관, 홍문관처럼 문장과 책에 관련된 기관에 근무했다. 박승임은
호당의 사가독서를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다. 문장이 현란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기보다는 도도하고 단단하고 진실했다.
여러 가지로 다재다능한 두 사람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당대의 권력자나 그의 심복은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획책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절은 윤원형 같은
외척과 권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였고, 이들에게 희생 당한 관료와 선비로 사화가 잇따랐다. 두
사람은 ‘우리와 합세해 부와 권력을 나누자’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으로써 평탄한 인생,
벼슬길에 지장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지만 불의와 타협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의
기질과 성정에 맞지 않았다.
#2.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목민관 황준량
20대 중반에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 두 사람의 행로는 조금씩 달라진다. 황준량은 청요직인 성균관
학유, 학록, 양현고 봉사를 지내고 박사에 이어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공조, 호조,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미움을 받던 언관의 모함을 받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
으로 나갔다. 목민관이 되고 나서 황준량은 ‘백성이 관의 근본이고 관이 피폐한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바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천해 나갔다. 이어 단양군수를 지내고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가난한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폈고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주자서절요’를 간행하는 등 교육에 힘써서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명종 12년(1557) 5월7일, 단양군수 황준량이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렸다.
“세도(世道)가 변하여 민생의 피해가 더욱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당파는 수도 없이 많아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 수가 없고 법률은 범과 같이 사나워서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노역에 시달린
백성이 한탄하며 울부짖느라 길쌈할 짬도 없으며 흉년과 부역으로 백성들이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낫겠다고 한탄합니다. 천재지변과 괴변이 잇따라 나타나고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이 흩어져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임금이 그 폐단이 발생한 근원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팔짱
을 끼고 눈을 감고 앉아서 대책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대로 하여 제도를 변경하지 않는
다면 아무리 성군(聖君)과 좋은 재상이라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상소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폐한 민생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을 바탕으로 절박하게 개선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세를 나눠가지는
위정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끼리의 권력, 당파, 부의 세습은 백성이며 국민의
삶과 살림에 여전히 우선한다. 그러기에 460여년 전의 상소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자로 하여금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이게 만든다’.(당시 사관의 논평)
황준량은 20년간 벼슬을 지낸 사람임에도 숨을 거두고 나서 시신을 염습할 천이 없었고 관에 함께
넣을 옷이 없었다. 47세의 나이였다. 애제자를 먼저 보낸 퇴계는 슬픔을 가슴 끓는 시 한 구절로
토로했다.
‘시냇가에서 그대를 만나 의심하던 것 토론했네/ 막걸리 한 사발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3.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산 박승임
박승임은 ‘시월의 비(十月雨)’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평상시 모습을 카메라로 찍듯 그려냈다.
‘궁한 선비 가난하여 단벌 옷뿐이라/ 한 해가 저물어 가니 마음은 더욱 시리다/ 반 칸 방에 불 못
때니 얼음장 같고/ 깨진 잔에 거미줄 친 것 민망스레 본다/ 아내는 내가 생계에 소홀함을 꾸짖으니/
헛되이 밝은 창을 향해 좀 먹은 책 펼친다.’
가난한 중에도 꿋꿋하고 불행 중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유머의 코드마저 느껴지는 시다.
박승임은 40년의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서울에서만 30년을 살았으나 자신의 집조차 사지 못하고
셋방을 전전했다. 사람들이 그의 집을 재상댁인 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항상 조용했다. 그는 평생을
세력이 있는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시사에 함부로 논평하지 않았으며 공무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학문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중앙의 요직에 있을 때보다는 외직에 나갔을 때 그의 청렴성과 능력이 더 잘 드러난다. 현풍현감일
때 전염병과 흉년으로 백성이 죽어가자 시신 속을 드나들면서 많은 사람을 살렸다. 풍기군수를
지냈을 때 전임자가 재정을 탕진해서 창고가 빈 것을 보고는 ‘축난 것을 전임자에게 징수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도록 해서 창고를 채운
뒤에 관련 문건을 태워 버렸다. 굳이 데려다 곤장을 치지 않고 정사를 청정하고 정의롭게 처결하는
것만으로도 호족들이며 교활한 사람을 제어했다. 교육을 확충해서 유교문화를 진작했다. 박승임이
어느 고을에서 이임하거나 귀향하려 할 때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했다.
두 사람은 영주와 풍기에서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편안한 출세길
을 마다하고 평생 79번이나 사직서를 썼던 스승 퇴계의 개결함과 진정성을 물려받은 게 아닐까.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영주시
![]() |
영주시 고현동에 있는 소고종택(오른쪽)과 사당. |
이야기따라 그곳&
◆금계 황준량의 금양정사(錦陽精舍)·금선정(錦仙亭)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 있는 금양정사는 금계가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생전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지만 도중에 세상을 떠나 후손들이 완성했다. 왼쪽에는 종택이 있는데,
금양정사와 같은 시기에 지었다고 한다.
금계는 스승인 퇴계를 배향한 욱양서원(郁陽書院·영주시 풍기읍 욱금리에 있었던 서원)에 종향(從享)
됐다. 하지만 조정에 나아갔을 때 권문세가에 협조해 무고한 선비를 고통받게 했다는 오해를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욱양서원에 종향된 금계가 자칫 스승인 퇴계를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위패가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황준량은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써 퇴계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과 모든 일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져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욱양서원의 위패는 철거되었다. 욱양서원 역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금양정사 옆에 퇴계와 금계의 제단인 욱양단소(郁陽壇所)를 마련해 서원
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금선정(錦仙亭)은 금양정사에서 150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의 고즈넉한 모습과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금선정은 금계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이 건물을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금선정 아래에는 널찍한 반석이 대(臺)를 이루고 있는데, 금계가 ‘금선대(錦仙臺)’라 이름을 붙였다
고 한다. 금선대는 퇴계와 금계가 시(詩)를 읊은 장소로도 유명하다.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
(宋徵啓)가 금선대(錦仙臺)란 큰 글자를 바위벽에 새겼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
◆소고 박승임의 소고종택(嘯皐宗宅)·삼락당(三樂堂)
영주시 고현동에 있는 소고종택은 종택으로는 드물게 양옥 2층 건물이다. 물론 처음부터 양옥은 아니
었다. 지금의 종택은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기존의 한옥 종택이 너무 오래되어 양옥으로 새로
지었다. 종가에서 한옥의 경우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해 양옥으로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종택 바로
옆에는 소고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한옥이다. 인근의 다른 곳에 있었지만
수해로 터가 훼손되면서, 광복 이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삼락당은 소고종택에서 8㎞ 정도 떨어진 문정동 한정마을에 있다. 소고의 손자 삼락당 박종무를
기리는 곳이지만, 원래는 소고의 아들 취수헌 박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해서 ‘하한정(夏寒亭)’이라 했다. 너무 청렴결백
해 제대로 먹을 것조차 없자 아들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고는 삼락당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락당 앞에는 소고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00년의 향나무도 볼 수 있다.
[Copyrights ⓒ 영남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천연기념물 제527호 의성 빙계리 얼음골 (0) | 2015.08.22 |
---|---|
[스크랩] 묵자의 사상과 배경 (0) | 2015.08.19 |
[스크랩]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0) | 2015.08.18 |
[스크랩] 청자상감 (0) | 2015.08.17 |
[스크랩] 보석들 (0) | 201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