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봉화의 儒佛文化 답사:道伴들의 나들이
편집자주 ) 이번에는(2008 5월) 영주⋅봉화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곳에 있는 紹修書院과 浮石寺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교문화유산이며 불교문화유산이고, 봉화의 닭실마을은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주역의 이치에 의거해 갈고 닦은 道伴들의 실력으로 문화유산을 들여다보면 보다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어 나들이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입니다.
짧은 하루해의 일정이지만 風流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그 속에 담긴 우리 문화의 진수를 흠뻑 맛보기를 기대합니다. |
유교의 교육관
소수서원을 돌아보기에 앞서 유교문화권의 교육에 관해 먼저 알아보자.
예로부터 유교문화권에서는 교육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미 삼황오제시기부터 司徒와 典樂의 관직을 두어 사람들의 人性을 잘 갈고 닦도록 하였다.
사람이 갖고 있는 본연의 성품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그대로 眞實無妄하나 기질과 인욕에 의해 흔들리고 가려져서 天賦之性의 순수함을 잃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면 반드시 교육기관을 두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朱子는 大學章句序에서 이러한 교육의 유래와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三代之隆에 其法이 寖備然後에 王宮國都로 以及閭巷히 莫不有學하야 人生八世어든 則自王公以下로 至於庶人之子弟히 皆入小學하야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과 禮樂射御書數之文하고 及其十有五年이어든 則自天子之元子衆子로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와 與凡民之俊秀히 皆入大學하야 而敎之以窮理正心脩己治人之道하니 此又學校之敎 大小之節이 所以分也ㅣ라
(삼대가 융성할 때에 그 법이 점점 갖추어진 연후에 왕궁과 국도와 마을과 고을에 미치기까지 학교가 있지 않음이 없어서 사람이 나서 여덟 살이 되거든 곧 왕공부터 아래로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다 소학에 들어가서 물 뿌리고 쓸고 응하고 대답하고 나아감과 물러남의 절차(灑掃應對進退之節)와 예절과 음악과 활 쏘고 말 타고 글씨 쓰고 수놓는 것의 글(禮樂射御書數之文)로써 가르치고, 15세에 이르거든 천자의 맏아들과 여러 아들로부터 공과 경과 대부와 원사의 맏아들과 뭇 백성들의 준수한 이에 이르기까지 다 태학에 들어가서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로써 가르치니 이 또한 학교의 가르침이 크고 작은 절차가 써 나뉜 바이다.)
곧 옛날 성인의 政事와 가르침이 융성하였던 하⋅은⋅주 삼대에는 소학과 태학으로써 교육기관과 교육단계를 나누어, 소학에서는 쇄소응대진퇴의 절도와 예악사어서수의 글을 배우고 태학에서는 궁리정심과 수기치인의 도를 닦게 하였다.
즉, 여덟 살이 되면 소학에 들어가 6節과 6文을 공부하는데,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어릴 적에 절도 있고 올바른 습관을 익히지 않으면 나중에 고치기 힘들므로 먼저 자잘한 기본 행동부터 익히는 것이다. 또 배움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지 않으면 심원광대한 공부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기초학문부터 쌓는 것이다.
그리고 소학 과정을 마친 뒤에 열다섯 살부터는 태학에 들어가서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의 도리를 닦게 된다.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窮理이고 사물의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正心인데, 궁리로 인해 정심이 이루어지므로 궁리는 體가 되고 정심은 用이 된다.
궁리정심은 수기치인의 선결요체로서 대학 본문의 八條目 가운데 내적인 格物 致知 誠意 正心에 해당하고,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을 닦아 타인의 사표가 되어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 팔조목 가운데 외적인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에 해당한다.
소학과 태학에서 쌓는 학문의 높고 낮음을 주역의 괘로써 견주면 소축(風天小畜) 과 대축(山天大畜)이라 할 수 있다. 小畜괘 大象傳을 보면 “風行天上이 小畜이니 君子ㅣ 以하야 懿文德하나니라(바람이 하늘위에 부는 것이 소축이니 군자가 이로써 문덕을 아름답게 하나니라)” 하였고,
大畜괘 대상전을 보면 “天在山中이 大畜이니 君子ㅣ 以하야 多識前言往行하야 以畜其德하니니라(하늘이 산 속에 있는 것이 대축이니 군자가 이로써 전대성현의 말씀과 지난 옛 성인들의 행실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느니라)” 하였다.
곧 유교문화권에서 쌓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文德을 쌓는 일이며, 그것은 앞서간 성인의 언행을 익혀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에서는 공부에 앞서 반드시 성현에게 제를 먼저 올리는 것을 기본 예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 인문교육기관:유교의 경전을 가르쳐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물형을 만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 제를 지냈으며, 지방의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에서는 선현의 사당을 두고 제를 지냈다.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었고, 농번기에 방학을 주어 농사일을 돕도록 하였으며, 농한기에는 기숙사인 재(齋)에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대학 중등교육기관초등교육기관국공립성균관 4부학당(서울), 향교(지방) 서당사립서원
• 기술교육기관:의학 역학 산학 율학 천문학 지리학등으로 나누어 전의감, 사역원, 호조, 이조, 관상감 등 해당 관청에서 중인들을 자제들을 중심으로 세습적으로 가르쳤다.
[참조] 사액서원(賜額書院)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서원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써서 주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해 세금과 노역, 군역을 면제해준 지방사립대학을 말한다.
1543년(조선 중종38) 경상도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과 서적을 하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주세붕은 향교를 꺼리는 양반들을 위한 과거준비 기구로 서원을 생각하고 양반 자제들을 모집했으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서원을 도학(道學)하는 곳으로 생각한 이황이 군수로 부임하여 국가의 공인을 받자, 지역 士族들이 서원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기를 띄어 갔다.
이때 이황은 서원의 학규와 교과내용, 운영 등은 지역 사림의 자율에 맡기고, 관에서는 경제적 지원만을 할 것을 요청하여 국가는 관학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며 허용했다.
이에 힘입어 이황은 10여 곳의 서원 건립에 관여하여 조선 서원의 전형을 만들어갔는데 이후 서원은 학문, 교육이라는 보호막으로 관청의 견제를 피하면서 유교적 鄕村 질서를 확립하고 士林(관직에 나가지 않은 선비) 세력을 결집하는 기능을 확보해 갔다.
선조 때 사림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각지에서 사림을 중심으로 한 사족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朋黨(뜻이 같이 사람들끼리 모인 당)정치가 사림에 의해서 주도되자, 자연스레 학파와 연결되면서 크게는 이황 계열인 영남 남인계 서원과 이이 계열인 서인계 서원으로 나뉜다.
두 세력이 점차 재야 세력과 집권세력으로 나뉘고 정권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조선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순흥 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수 있는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인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성리학의 선구자인 문성공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중종 37년(1542)에 숙수사(宿水寺)를 헐어내고 세운 사묘(祠廟)로 출발해 이듬해 양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송나라의 학자인 주자가 세운 백록동 서원을 본떠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5년(1550)에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이란 현판을 하사받고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 인근에 선비촌을 조성해 숙박하며 옛 선비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한 서원이라 건물 배치 등에 엄격함이 없고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인데, 서원 앞의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그 예이며, 뜨락에 놓인 숙수사지 발굴 유물들이 오히려 불교문화와 유교문화의 교차라는 자연스러움을 더하게 한다.
하지만 이면에 담겨진 문화 교차기의 갈등은 죽계천 바위에 붉은 글씨로 ‘敬’를 쓴 내력이 잘 말해준다. 숙수사를 폐찰할 때 불상을 모두 죽계천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 이황이 공경의 뜻으로 썼다고 한다.
한편 이 터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신령스런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다는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으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신혼부부들의 나들이와 예비부부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 근처에는 단종복위운동과 관계된 금성대군과 순흥유생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제단인 금성단이 있으며, 근처 ‘제월교’라는 이름의 다리는 ‘청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유생들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 건물의 현판 이름을 읽어보며 그 출처와 함께 뜻을 알아봅시다.
영주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唐나라의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에게 가서 화엄사상을 공부한 뒤 돌아와 왕명으로 창건한 절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창건설화를 보면, 의상을 사모했던 당나라 소녀 선묘는, 의상이 중국을 떠나게 되자 몸을 물에 던져 용이 되었다.
의상이 봉황산에서 화엄종을 열려고 했는데 도둑떼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선묘용이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5백의 도둑 무리를 물리쳤다고 한다.용이 변한 바위 때문에 절을 지을 수 있었기에 절 이름을 부석사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하여 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7言 30句 210字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海印圖), 法性圖는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요약한 것으로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컨대,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 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화유적지가 그렇듯이 유적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보다는 그 주변 경관과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가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찰의 경우 대부분이 산에 푹 안겨 있으면서도 앞은 탁 트여 속세와의 거리와 인연을 헤아려보는 맛도 절집을 답사하는 또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부석사는 태백산 등줄기인 봉황산 중턱에 자리하였는데 아래에서 보면 그 위치가 별로 높다는 느낌이 없는데,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유려하게 펼쳐진 소백산 연봉을 바라볼 수 있어 마치 극락세계에 들어온 듯, 아니면 도교의 신선 세계에 몸을 담은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法性偈
法性圓融無二相: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나니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온갖 경계가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不守自性隨緣成:
자기 성품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더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중에 일체있고 일체 중에 하나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一微塵中含十方: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一切塵中亦如是: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無量遠劫卽一念: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일념이요
一念卽是無量劫: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九世十世互相卽: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섞였으되
仍不雜亂隔別成:잡란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初發心時便正覺: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生死涅槃相共和: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理事冥然無分別:이와 사가 그윽이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能仁海印三昧中: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繁出如意不思義:불가사의 무진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雨寶益生滿虛空: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衆生隨器得利益:중생들이 그릇 따라 이익을 얻음이라
是故行者還本際:이 까닭에 수행자들은 마음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叵息妄想必不得:망상을 쉬지 않곤 얻을 수 없네
無緣善巧着如意:인연 짓지 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쓰니
歸家隨分得資糧:마음자리에 돌아가매 분수 따라 양식 얻네
以陀羅尼無盡寶:이 다라니 무진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고서
窮坐實際中道床: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舊來不動名爲佛:억만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하느니라.
676년에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들어온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1천3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화엄종찰로 위엄과 기품이 두루 배어 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주심포 양식의 고려 건축물로 정갈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일주문에 들어서서 양쪽에 인삼밭을 끼고 천천히 천왕문을 거쳐 안양루와 무량수전(국보 제18호, 1376년에 원응국사가 고쳐 지음)에 들어서는 맛이 각각 다르다.
일직선으로 다가서다 우측으로 약간 비껴 서 정남향으로 자리잡은 안양루 아래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것은 바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해당한다.
석등을 바라보며 올라서면 무량수전의 앞마당이고, 그 왼쪽 옆 뒤로는 의상대사를 사모해 ‘뜬 돌[浮石, 부석]이 되어 들어온 선묘낭자의 혼이라는 돌과 오른쪽의 선묘각이 신비함을 더해준다.
무량수전에 들어가 동향한 아미타여래(소조 좌상불, 국보 제45호)에게 절을 하며 1천 3백년 전의 절집 분위기를 한껏 느껴본 뒤 오른쪽 길로 난 산길을 따라 조사당(국보 제19호, 1366년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세운 집)에 오르면, 조사당의 단아한 건축물과 함께 철조망에 갇힌 의상대사의 지팡이 나무라는 ‘골담초’의 신비한 생장을 볼 수 있다.
☞ 건축물의 구조와 명칭을 살펴보며 공부하는 것도 답사의 또다른 깊은 맛을 더해줍니다.
조선시대 건축물과 고려시대 건축물들이 어떻게 차이나는지 눈여겨봅시다.
닭실마을과 권충재유적, 석천정사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는 닭실마을은 ‘유곡(酉谷)’의 한글 풀이이다.
이곳 사람들은 흔히 ‘달실’로 발음하는데, 안동 권씨 중에서도 권벌을 중심으로 한 일가의 동족 마을이다.
이 마을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서남으로 뻗어 내린 백설령이 마치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고,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치는 모습이어서 마을 서쪽 산에서 바라보면 금계포란(金鷄抱卵) 곧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았다.이 마을에 충재 권벌(冲齋 權橃, 1478~1548)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권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균관 생원 권사빈과 파평 윤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7세 때인 연산군 10년에 대과에 급제했으나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내시 김처선의 ‘처(處)’자가 글에 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가 3년 뒤에야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중종에게 경종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조광조가 신진 사류의 대표로 왕도정치의 뜻을 펼칠 때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기호 사림파와 연결하여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거 밀어붙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여 어머니 묘소가 있는 유곡에 자리잡았다. 13년 뒤 복직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68세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인종의 외할아버지인 윤임의 대윤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의 소윤이 대립하다가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이 대윤 세력을 축출하는 외척간의 싸움 과정에서 일어난 사화)가 일어나 윤임 등을 적극 구하는 글을 올렸다가 파직되고, 1547년인 70세에 ‘양재역 벽서 사건’(을사사화의 연장으로 윤원형이 윤임 일파를 제거하려고 자신들을 비방하는 글을 조작하여 양재역에 벽서를 붙여 일으킨 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유곡의 유적들은 권벌이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로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택에 들어서면 서쪽으로 유물각과 더 안쪽으로 서재인 충재와 청암정이 있다.
유물각에는 충재일기, 중종이 하사한 근사록(近思錄, 고려시대인 1370년에 간행된 희귀본으로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인 주희와 여조경이 편찬한 일종의 성리학 해설서로 고려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수입되면서 들여와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충재는 1526년 봄에 자신의 집 서쪽에 재사를 짓고 다시 그 서쪽으로 사(榭, 대 위에 지은 정자) 6칸을 바위 위에 지어 물을 돌렸으며 이어서 동문 밖에 대를 쌓았다.
서재인 충재에서 공부하다가 바람을 쏘일 양으로 지은 청암정은 넓적한 거북 바위위에 지은 丁자형 건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건물이다. 돌다리를 건너 들어갈 수 있도록 꾸몄으며, 주위에는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 철쭉 등을 어우러지게 심어놓았다.
정자에는 권벌이 당대 영남의 주도적인 학자들인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23세 연하의 이황 말고도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등과도 교류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글씨들이 있다. 특히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현판은 미수 허목이 88세에 마지막으로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충재 유적을 돌다보면 중용 제14장 가운데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오 不願乎其外니라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군자는 현재 그 위치에서 행하고 그 바깥을 원하지 않느니라. 부귀에 있어서는 부귀대로 행하며 빈천에 있어서는 빈천대로 행하며 오랑캐에 있어서는 오랑캐대로 행하고 환란에 있어서는 환란대로 행하니 군자는 들어가는 데마다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느니라)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종택에서 나와 논길을 따라 창평천과 가계천이 합해져 봉화읍으로 흘러가 내성천이 되는 양수 합수 지점 쪽으로 돌아가면 계곡을 옆에 낀 풍광수려한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있다.
충재의 큰 아들인 청암 권동보가 1535년에 지은 정자로 권벌이 동문밖에 쌓았다는 대 위에 지은 건물이다. 지금은 노부부 두 분이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팔며 정사를 지키고 있다. 입구를 지키는 개들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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