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전쟁, 우리 모두의 전쟁 : 김용옥의 TV논어 찬반사태에 대해" <<아카필로>> 2호. 2001년 1-2월.
(성찰과 비평을 거부하는 짝패가 만났을 때 비난과 욕설이 시작된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문화현상으로서의 김용옥과 개신교>
전쟁이 벌어졌다. 김용옥의 TV 논어 강의를 둘러싸고 사이버 공간에서 전쟁이 한창이다. 전쟁은 김용옥이 강의 중에 예수의 처녀 탄생 이야기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개신교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이 김용옥의 사과와 KBS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 사태는 KBS가 오해의 소지를 인정하여 시정을 약속하고 김용옥이 다음 강의에서 자서전적 이야기를 곁들여 가며 자신이 기독교 매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해명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되는 듯했다.1)
하지만 전쟁의 불길은 이미 번진 후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의 대응에 성이 안 찬 개신교인들은 방송 중단을 요구하며 실력행사를 시작했고, 김용옥의 팬들 역시 이에 맞서 개신교인들의 옹졸함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여기다가 개신교인들 외에 김용옥의 학자적 능력과 인격적 자질을 의심하는 이들이 가세하고, 김용옥의 팬들 외에 개신교의 위선과 독선을 비난하는 이들이 가세하면서 전쟁은 김용옥이라는 인물과 개신교라는 종교에 대한 비방과 욕설로 뒤범벅된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더욱이 김용옥 팬클럽 내부에서 그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고 개신교 내부에서 문제는 김용옥이 아니라 개신교 자체라는 반성이 제기되면서 국지적인 내전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 동안 김용옥에 대해서는 그를 금세기 최고의 학자로 떠받드는 대중의 찬사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취급하는 학계의 무시라는 상반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또 개신교에 대해서도 신자의 맹신과 비신자의 혐오라는 극단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이버 전쟁은 김용옥과 개신교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비평을 요구한다. 김용옥과 개신교는 한 번쯤 검토되어야 할 새로운 문화현상의 핵심에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김용옥 개인이나 개신교라는 종교에 대한 무시와 찬사 그리고 비난과 욕설을 넘어서, 그리고 김용옥의 학문성에 대한 검증 요구를 넘어서,2) 김용옥과 그의 팬들 그리고 개신교인들이 함께 벌이고 있는 이 사이버 전쟁의 문화현상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일이다.
<김용옥의 실수>
김용옥의 논어 강의를 둘러싼 사이버 전쟁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종교논쟁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전에도 김용옥은 불교와 도교에 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한 바 있다. 또 이에 대해 그의 불교 이해와 도교 이해를 비판하는 책도 나왔다.3) 하지만 종교논쟁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유교경전을 다루면서 김용옥이 유림들의 비위에 거슬릴 법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마찰은 빚어지지 않고 있다.4) 그런데 기독교 자체를 다룬 것도 아니고, 그저 공자 이야기를 하다가 언뜻 예수 이야기를 한 것일 뿐인데도 개신교인들은 이를 물고 늘어지며 벌떼같이 일어서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왜 논어 강의가 엉뚱한 종교논쟁을 야기한 걸까? 나는 그 책임을 일단 김용옥에게 묻고 싶다. 유교경전을 무시하거나 떠받드는 풍토에 일침을 가하고 유교를 동양 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서양의 문헌비평 방법을 끌어온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는 으레 그래 왔듯 이번에도 지나쳤다. 그는 흔히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혀 다른 맥락의 것들을 끌어와 비교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면 독자와 청중은 그의 현란한 비교에 매료되어 ‘아! 그게 그렇다면 이것도 이렇겠지’ 하고 수긍하게 된다. 그가 공자 탄생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 탄생 이야기를 끌어온 것도 이런 전략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비교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공자와 예수가 유교와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차이를 무시했다. 유교에서 공자는 신적 존재나 숭배 대상이 아니다. 공자는 제사를 받기는 하지만 이는 퇴계나 율곡이 받는 제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성을 실현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표시지, 절대 신격에 대한 숭배가 아니다. 반면 기독교에서 예수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하느님과 동일한 신적 존재다. 그는 숭배 대상이다. 물론 공자와 예수는 흔히 4대 성인으로 나란히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유교와 기독교에서 그들이 존경받거나 숭배되는 내적 메커니즘은 전혀 다르다. 이런 내적 메커니즘의 차이를 무시한 채 모든 것을 ‘그게 그거’로 환원하는 동일화 전략에 근거한 비교는 비교자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사학적 장식일 뿐이다.
한편 김용옥은 기독교에서 마리아가 차지해 온 위상도 간과했다. 기독교에서 마리아는 그냥 여성이 아니다. 예수의 신성 교리는 마리아의 처녀성 교리에 근거한다. 카톨릭이 성모 마리아를 여신처럼 숭배해 온 것이나 개신교가 이런 숭배를 거부하면서도 마리아의 처녀성 교리를 포기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김용옥은 신화와 역사를 허구와 사실로 대비하는 이분법 속에서 기독교인들을 처녀 탄생이라는 날조된 비과학적 허구 따위나 맹신하는 바보들로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마리아가 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먼 길을 여행할 수 있었겠느냐며 배를 내밀고 우스꽝스런 몸짓을 해보임으로써 개신교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세상에 자기를 바보라고 놀리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을까?개신교인들이 숱한 욕을 먹어 가면서까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김용옥이 기독교의 교리를 부인하는 말을 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익명의 청중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허구로, 기독교인을 바보로 비치게 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제의 사태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현란한 비교의 수사로 청중을 사로잡기 위해 논지와 무관한 예수와 마리아 이야기를 끌어오다가 결국 엉뚱한 이들에게 모욕감을 준 김용옥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개신교인들의 실수>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김용옥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교리를 문제삼았다면 가만히 있지 말았어야 하는 것은 개신교가 아니라 오히려 카톨릭 쪽이다. 개신교는 비록 처녀 탄생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마리아를 신성시하지는 않는다. 또 바이블5)의 문자주의를 고수하는 한국 개신교 전반의 보수 성향과 무관하게 어쨌든 국내외 개신교계에는 예수의 신성이나 마리아의 처녀 잉태를 거부하는 다른 흐름이 존재한다. 하지만 카톨릭은 그렇지 않다. 교회의 바이블 해석 권위를 중시하는 카톨릭은 바이블에 대한 그 어떤 다른 해석도 거부한다. 설사 있다 해도 대부분의 신자는 이를 거의 모른다. 카톨릭 교인에게 예수의 신성성과 마리아의 처녀성은 절대 불가침의 교리다. 그런데도, 개신교보다 교리적으로 더 철저한 카톨릭인데도, 김용옥에게 시비를 건 것은 카톨릭이 아니라 개신교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일단 카톨릭과 개신교의 조직적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카톨릭은 단일한 중앙집권 조직을 갖고 있으며, 신자들의 신앙과 실천은 교회의 철저한 감독과 지도 아래 있다. 그래서 카톨릭 교인들은 사회활동 같은 데서는 능동적이지만 교리나 종교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수동적으로 교회의 지도를 따른다. 반면 개신교는 단일한 중앙집권 조직이 없다. 분열된 개신교계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이나 한국교회협의회 같은 조직은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신교인들은 카톨릭 교인들과 달리 교리나 종교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개신교인들이 사회문제보다는 교리나 진리 논쟁에 더 집착하고 따라서 몰사회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개신교의 특성 때문에 개신교인들은 그들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물론 이런 집착은 한때 카톨릭에서 더 심했었다. 중세 유럽의 이단사냥과 마녀사냥이 그 예다. 하지만 카톨릭은 오래 전부터 이런 과오를 반성해 왔고, 오늘날은 종교간 대화를 도모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카톨릭 교인들은 이런 교회의 지도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를 들어 교회 지도층이 단군상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신자들도 이에 대해 무관심하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진리논쟁과 이단논쟁의 대가다. 그래서 광적인 목회자와 평신도가 단군상의 목을 잘라도 개신교계는 은밀한 침묵으로 이를 수긍한다.6)
김용옥 논어 강의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카톨릭은 지도층이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신자들 역시 이에 무관심하다. 하지만 개신교는 목회자나 신자들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운다. 카톨릭의 침묵은 비록 경직된 중앙집권 조직과 신자들의 수동성 덕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덕분에 카톨릭은 의연함을 유지한 채 종교논쟁에 휘말리지 않는다. 반면 개신교는 분산된 조직의 유연성과 목회자나 신자들의 능동성이 있긴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모두가 조갈증 난 종교논쟁의 전사로 돌변한다. 그래서 나는 문제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김용옥 못지않게 개신교인들에게도, 문화적 변방에 거주하는 초조함 속에서 진리에 대한 집착과 과도한 종교적 열정에 휘둘리면서 모든 차이를 찢어 놓는 그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옥의 팬들과 개신교인들의 닮은꼴>
지금까지 나는 김용옥과 개신교인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빠진 것이 있다. 바로 김용옥의 팬들이다. 사이버 전쟁은 김용옥이 빌미를 제공하고 개신교인들이 본격화했지만, 전쟁터에는 정작 김용옥이 없다. 거기에는 김용옥의 팬들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김용옥의 팬들은 개신교인들과 교묘하게 닮아 있다. 그들은 그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의 학문과 인격에 흠이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김용옥의 학문적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김용옥이 화려한 학벌을 그의 학문적 후광으로 삼을 때, 그의 팬들은 이 후광을 지당한 권위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국내외에 김용옥에 비길 학자가 없다고 여기며, 학계가 그를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무능한 학계의 질투쯤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김용옥이 간혹 범하는 도덕적 실수를 천재의 치기 정도로 여기며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나무란다. 그리고 물론 방송 중단을 요구하는 개신교인들에게는 비난을 퍼붓는다. 또한 김용옥의 팬들은 논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김용옥의 글과 말은 일종의 바이블이다. 그 바이블의 권위에 대한 모든 도전은 가차없이 거부된다. 이 점에서 그들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개신교인들과 너무도 닮아 있는 짝패다. 결국 성찰과 비평을 거부하는 짝패가 만났을 때 비난과 욕설이 시작된다. 전쟁은 불가피하다.7)
어쨌든 논어 강의가 야기한 지금의 사이버 전쟁은 강의가 끝나는 날 종결될 것이다. 하지만 찬사와 비난만 있고 비평은 없는 현실이 김용옥을 둘러싼 문화현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팽배한 분위기라면, 전쟁은 언제 어디서든 또 다른 짝패들 사이에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이버 전쟁은 그들만의 전쟁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전쟁이기도 하다.
김윤성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1) 나는 일부러 ‘개신교’라는 용어를 썼다. ‘기독교’는 본래 하나님/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카톨릭, 개신교, 정교회를 모두 망라하는 용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개신교가 이를 독차지해 왔다. 대안은 두 가지다.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를 쓰고 개신교를 ‘기독교’로 지칭하는 것과 ‘기독교’라는 용어를 쓰고 개신교를 ‘개신교’로 지칭하는 것. 나는 후자를 택한다. 따라서 개신교는 ‘개신교’로, 포괄적인 의미의 그리스도교는 ‘기독교’로 쓰겠다. 또 나는 이 주석과 본문에서 ‘하나님/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쓰려 한다. 개신교는 ‘유일신’이라는 뜻에서 전자를, 카톨릭은 ‘천주’라는 뜻에서 후자를 사용해 왔다.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나는 둘을 병기하고자 한다. 순서가 왜 그러냐고? 가나다순일 뿐이다. 2) 이상수는 한때 김용옥의 팬이었던 자신이 왜 그에게 실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김용옥의 학문성을 검증할 것을 요구한다. 이상수,〈철학의 세속화인가 세속의 철학화인가:김용옥론〉《emerge새천년》, 2000년 3월호, 225∼240쪽. 3) 변상섭, 《김용옥 선생, 그건 아니올시다:도올 선생의 불교이해 비판》, 시공사, 2000;홍승균, 《김용옥이란 무엇인가?:알곡은 없고 쭉정이만 날리는 매스컴의 동양학》, 선, 2000. 4) 그 유림이 어떤 유림인가! 호주제도 사수를 외치고 종묘의 페미니즘 축제를 저지하던 막강한 유림 아니던가! 5) 종교학자 최준식과 장석만은 기독교 경전을 ‘성서’가 아닌 ‘바이블’로 부르자고 주장한다. ‘성스러운 책’이라는 보통명사가 기독교 경전의 고유명사로 독점될 수 없다는 그들의 견해에 나도 동의한다. 6) 나는 단군상의 목을 베는 개신교인들도 문제지만, 무리하게 단군상을 세우려는 단군종교계의 신자들이나 단군신화를 민족정신의 경전으로 당연시하는 풍토 속에서 이 문제에 내재한 종교적 갈등을 은폐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문제라고 본다. 7)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개신교인 전체와 김용옥 지지자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일부에 대한 것이었다. 글을 끝내는 마당에 꼬리를 내리느냐고? 그럼 꼬리를 다시 들겠다. 전체는 아니지만 그들 중 상당수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