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감상

[스크랩] 명필 한시 감상- 백낙천의 학

강나루터 2015. 10. 23. 23:55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시가 쓰여진 오래 된 족자 한 폭을 구입했습니다.

 

 

 

 

人各有所好  인각유소호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바가 있으나

物固無常宜  물고무상의     사물에는 애당초 꼭 그래야만 된다는 법도 없다네

誰謂爾能舞  수위이능무     누가 너를 일러 춤을 잘 춘다고 하는가

不如閑立時  불여한립시     한가롭게 서 있을 때만 못한 것을

 

백 마디의 웅변 보다 침묵이 금이라는 구절이 떠 오르는 시입니다.

 

이백, 두보, 왕유와 더불어 당나라 시절을 대표하는 네사람의 시인 반열에 오른 백낙천, 백거이의 학을 노래한 시입니다.

세 사람과 달리 관운도 좋아 평생 동안 늦게 까지 벼슬길에 있으면서 다작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시를 썼습니다.

평생에 도연명을 사모했고, 학을 좋아했으며, 거문고와 시와 술을 세 벗이라 하면서 삼천여 편의 시문을 지어 냈던 시인입니다. 

 

거문고를 좋아하면서 쓴 시 <비파행>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비파행을 짓게 된 사연은 이러합니다.

 

백낙천은 원화 10년(서기 815년)에 벼슬길에서 좌천되어 양자강의 한 지류가 흐르는 구강에서 사마 벼슬을 했다

손님을 전송하러 뱃길에 나와 전별연을 하던 중 어디선가 비파 소리를 들었고

격조 있는 그 소리를 찾아 비파를 타는 여인을 만났고, 거문고를 좋아했던 그는

다시 청해서 비파소리가 재차 구강의 밤하늘을 탔다

백낙천이 이에 감동해서 7언 88수 616글자의 비파행을 남기니 이 글이 천고에 전하는 바다

 

대주소주락옥반(大珠小珠落玉盤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구른다)

백낙천은 여인의 비파소리를 이렇게 비유했다

 

음악이란 그 음악을 들을 만한 사람이 들어야 하고 그 감동이 시문을 남긴다

백낙천이 비파를 탄 여인에게 청했다.

 

막사갱좌탄일곡 위군번작비파행(莫辭更坐彈一曲 爲君翻作琵琶行)

다시 한곡 연주함을 사양하지 마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다......

 

당시의 풍습이 그러했는지 그 여인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백낙천이 지은 시는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뭇 사람들이 애송하는 천고의 명시로 남겨져 있습니다.

 

<비파행 / 백낙천>

 

 

 

 

深陽江頭夜送客 심양강두야송객      심양강 나루에서 손님을 밤에 보내려니
楓葉荻花秋瑟瑟 풍엽적화추슬슬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 바람 쓸쓸하다
主人下馬客在船 주인하마객재선      주인은 말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고
擧酒欲飮無管絃 거주욕음무관현      술을 들어 마시려니 음악이 없구나

醉不成歡慘將別 취불성환참장별      취해도 즐거움 없는 이별을 하려 하니
別時茫茫江浸月 별시망망강침월      망망한 이별의 강에 달빛만 젖어 있네
忽聞水上琵琶聲 홀문수상비파성      그 때 물 위로 비파 소리 들려오니
主人忘歸客不發 주인망귀객불발      주인도 손님도 자리를 뜨지 못하네

尋聲暗問彈者誰 심성암문탄자수      소리 찾아 조용히 누구인지 물으니
琵琶聲停欲語遲 비파성정욕어지      비파소리 그치고 대답이 없구나
移船相近邀相見 이선상근요상견      배를 옮겨 가까이가 자리를 청하며
添酒回燈重開宴 첨주회등중개연      술 따르고 등 밝혀 자리를 잡아 앉네

 

千呼萬喚始出來 천호만환시출래      부르고 또 청해 겨우 나타났는데
猶抱琵琶半遮面 유포비파반차면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리었네
轉軸撥絃三兩聲 전축발현삼양성      꼭지를 틀고 현을 골라 두 세 번 소리 내니
未成曲調先有情 미성곡조선유정      곡조도 이루기 전 정이 먼저 흐르네

絃絃掩抑聲聲思 현현엄억성성사      줄 감싸쥐어 손 끝으로 누르니 소리 처량하고
似訴平生不得志 사소평생부득지      평생에 못다한 마음속 한 호소하듯
低眉信手續續彈 저미신수속속탄      눈 섶을 내리깔고 손에 맡겨 비파 타니
說盡心中無限事 설진심중무한사      마음속 숱한 사연 모두 털어 놓는 듯

輕롱慢撚撥復挑 경롱만연발부조      가벼이 누르고 비벼 뜯고 다시 퉁기니
初爲霓裳後六요 초위예상후육요      처음은 예상곡 뒤에는 육요구나
大絃조조如急雨 대현조조여급우      큰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 같고
小絃切切如私語 소현절절여사어      작은 줄은 가냘픈 속삭임 같이

 

 

 

 

조조切切錯雜彈 조조절절착찹탄      소란함과 가냘픔 섞어서 타니
大珠小珠落玉盤 대주소주락옥반      큰 구슬 작은 구슬 옥 쟁반에 떨어지듯
間關鶯語花底滑 간관앵어화저활      때로는 꾀꼬리 소리 꽃 가지 사이 흐르듯
幽咽泉流氷下灘 유열천류빙하탄      샘물이 어름 밑을 흐느끼며 흐르는 듯

氷泉冷澁絃凝絶 빙천냉삽현응절      찬물이 얼어 붙듯 줄을 잠시 멈추니
凝絶不通聲漸歇 응절불통성잠흘      멈추는 그대로 소리 또한 멎었네
別有幽愁暗恨生 별유유수암한생      그러자 깊은 근심 남모르는 원한 일어
此時無聲勝有聲 차시무성승유성      소리 없음이 있음보다 애절하네

銀甁乍破水漿병 은병사파수장병      갑자기 은병 깨져 술이 쏟아져 나오듯
鐵騎突出刀槍鳴 철기돌출도창명      철기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딪쳐 울듯
曲終收撥當心畵 곡종수발당심화      곡이 끝나 비파 안고 한번 그으니
粧成每被秋娘妬 장성매피추랑투      화장하면 미인들이 질투를 하였다 하네

 

五陵年少爭纏頭 오릉소년쟁전두      오릉의 젊은이들 다투어 선물을 주어
一曲紅초不知數 일곡홍초부지수      한 곡에 붉은 비단 수없이 받았었고
鈿頭銀비擊節碎 전두은비격절쇄      자개 박은 은빗을 박자 맞추다 깨뜨리고
血色羅裙飜酒汚 혈색나군번주오      붉은 비단치마 술로 얼룩졌었다 하네

今年歡笑復明年 금년환소부명년      웃고 즐기며 한 해 한 해 보내느라
秋月春風等閑度 추월춘풍등한도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는데
弟走從軍阿姨死 제도종군아이사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마저 죽고
暮去朝來顔色故 모거조래안색개      어느덧 나이 들어 얼굴빛이 변하니

門前冷落車馬稀 문전냉락안마희      문 앞은 쓸쓸하고 찾는 손도 드물어
老大嫁作商人婦 노대가작상인부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상인의 아내 되니
商人重利輕別離 상인중리경별리      상인은 이익보다 이별을 가벼이 여겨
前月浮梁買茶去 전월부량매다거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갔다 하네

 

 

 

 

去來江구守空船 거래강구수공선      강 어귀에 왔다 갔다 빈 배만 지키자니
繞船月明江水寒 요선월명강수한      배 비추는 밝은 달에 강물만 차가와
夜深忽夢少年事 야심홀몽소년사      밤이 깊어 문득 어린시절 꿈을 꾸면
夢啼장淚紅欄干 몽제장루홍난간      꿈도 울어 화장 눈물 얼굴을 적신다 하네

我聞琵琶已嘆息 아문비파이탄식      비파 소리 듣고 이미 탄식 했는데
又聞此語重즉즉 아문차어중즉즉      여인의 말 듣고 나니 다시 한숨이 나네
同是天涯淪落人 동시천애윤락인      우리는 같은 천애의 불행한 신세
相逢何必曾相識 상봉하필증상식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


我從去年辭帝京 아종거년사제경      나는 지난 해에 서울을 떠나
謫居臥病심陽城 적거와병심양성      심양성에 귀양와 병들어 누웠다네
심陽地僻無音樂 심양지벽무음악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어
終歲不聞絲竹聲 종세불문사죽성      한해가 다가도록 악기소리 못 듣고

 

住近盆江地低濕 주근분강지저습      분강 가까이 살아 땅이 낮고 또 습해
黃蘆苦竹繞宅生 황려고죽요택생      갈대와 대숲만 집을 둘러 무성 타네
其間旦暮聞何物 기간단모문하물      그 간 아침 저녁 들은 소리라고는
杜鵑啼血猿哀鳴 두견제혈원애명      피맺힌 두견새와 원숭이의 슬픈 소리

春江花朝秋月夜 춘강화조추월야      봄 강의 아침 꽃과 가을 밤 달빛 아래
往往取酒還獨傾 왕왕취주환독경      가끔 술을 얻어 홀로 잔을 기울이고
豈無山歌與村笛 기무산가여촌적      어찌 산 노래와 초동의 피리 없으랴 만
嘔啞嘲절難爲聽 구아조절난위청      조잡하고 시끄러워 들어주기 어렵다네

今夜聞君琵琶聲 금야문군비파성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如聽仙樂耳暫明 여청선악이잠명      신선 음악 들은 듯 귀 잠시 맑았네
莫辭更坐彈一曲 막사갱좌탄일곡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들려주오
爲君飜作琵琶行 위군번작비파행      내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니

感我此言良久立 감아차언양구립      나의 말에 느꼈는지 한 동안 서 있더니
객坐促絃絃轉急 객좌촉현현전급      물러앉아 줄 울리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凄凄不似向前聲 처처불사향전성      슬프기 그지 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滿座重聞皆掩泣 만좌중문개엄읍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座中泣下誰最多 좌중읍하수최다      그 중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는가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청삼습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흠뻑 젖어 있구나

 

 

<위의 시와 그림은 부채님의 블로그에서 옮겨 왔습니다.>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백낙천을 이야기 하면서 자주 임서하는 <백낙천 권학문>을 올립니다. 

이 글은 고문진보에 실린 명문입니다.

 

백낙천권학문

 

有田不耕倉廩虛(유전불경창름허) : 밭이 있어도 갈지 아니하면 창고가 비고
有書不敎子孫愚(유서불교자손우) :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들이 어리석어진다
倉廩虛兮歲月乏(창름허혜세월핍) : 창고가 비면 세월이 궁핍해지고
子孫愚兮禮義疎(자손우혜예의소) : 자손이 어리석으면 예의가 소홀해진다
若惟不耕與不敎(약유불경여불교) : 만약에 경작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면
是乃父兄之過歟(시내부형지과여) : 이것은 곧 부형의 잘못이라

 

또 하나, 백낙천의 일화 중에 빠드릴 수 없는 이야기는

 

나쁜짓을 하지 말고                               諸惡莫作

착한일을 받들어 행하며                         衆善奉行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청정케하면           自淨其義

이것이 곧 부처님이 가르침이다.             是諸佛敎

 

 

장소는 중국 당나라 항저우(杭州). 자사(刺史:검찰관)로 부임한 백낙천은

그리 멀지 않은 사찰에 도림(道林)선사라는 고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한번 직접 시험해 보리라' 작정하고 수행원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도림선사는 사람들이 새둥지같다고 할 정도로 나무가지 위에 올라 앉아 좌선하기로 유명한 스님인데,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는 도림선사를 쳐다보니 저러다 떨어지지나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인다.

‘선사의 모습이 너무 위험하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소리치니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 보며
‘내가 보기엔 자네가 더 위험하네..’ 백낙천이 어이없어 하면서
‘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또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요?’
‘티끌 같은 지식으로 교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불교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좋은 법문 하나 해주십시요’
‘나쁜 일 하지 말고, 좋은 일 많이 해라’ 이같은 대답에,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라며 신통치 않다는 듯 돌아서려는데, 선사가 말한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네.’
(이 일화는 <불교는 행복찾기 >카페에서 옮겨 왔습니다.)

 

<인물 탐구 ; 백낙천>

 

(병) Bo Juyi (웨) Po Chü-i. 772~ 846.

중국 중당시대(中唐時代:766~826)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歌行)·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출처 : i무릉도원/imrdowon
글쓴이 : 도원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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