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스크랩] 군왕의 묘호(廟號)에 붙는 종(宗)과 조(祖)

강나루터 2015. 11. 4. 08:08

이따금 군왕의 묘호(廟號)에 붙는 종(宗)과 조(祖)에는 어떤 차이기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묘호란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다.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명확한 기준은 모른다. 학창시절에 祖는 나라를 창업했거나 중흥시킨 공이 있는 군왕 에게 쓰고, 宗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문물을 융성하게 한 군왕에게 붙인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그런 것도 아니라서 애매모호하다. 결국 당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례를 올리는 인조(이덕화 분)

 

그 예로 인조를 살펴보자. 그가 창업을 했는가,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는가.

오히려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자초해 수만 명의 백성이 죽거나 다치고 50만인가 60만인가는 노예가 돼 차디찬 만주 땅으로 끌려갔었다.

 

원래 그의 묘호는 열종(烈宗)이었다. 매울 烈자엔 '맵다', '기세가 대단하다' 외에 '사납다', '포악하다'는 뜻도 있으니 딱 들어맞는 묘호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효종이 자기 아버지에겐 호란을 극복한 공이 있었다며 묘호를 고쳤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촌을 몰아내고 훔친 왕좌를 혹 넘보는 자가 없나 해서 모든 종친과 대신들을 의심하고, 후궁의 베개송사로 아들 내외와 손자들까지 사지(死地)로 내 몰았던 사람에게 어질 仁을 붙여 인조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다.

 

인조처럼 묘호가 나중에 바뀌거나 처음엔 없었다가가 나중에 받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이 일찍 죽어 맏이노릇을 해온 정종은 아우 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세자로 책봉돼 태조의 양위로 2년 동안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 아우 태종에게 양위했었다.

 

정종은 1419년 63살에 타계한 뒤에도 묘호도 없이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다가 260여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야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재위기간은 2년에 불과했으나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외에 후궁을 아홉이나 두었고, 자식도 17남8녀나 낳았다.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됐던 문종(文宗)의 아들도 역시 숙종 때 복위되며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선조(宣祖)는 애초엔 (宣宗)이었으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는 일부 신료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 때 선조로 바뀌었다.

 

정조는 의빈 성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문효세자 文孝世子)을 두 살 때 세자로 책봉했으나 다섯 살 때 죽자, 1800년(정조 24)에 수빈 박씨 소생 둘째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난 뒤 얼마 안돼 서거하는 바람에 그 세자는 11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가 바로 순조다. 그의 묘호도 처음엔 순종이었으나 철종 때 순조로 바뀌었다. 1811년(순조 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인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약 5개월 만에 수습하여 종묘사직을 지켰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역대 군왕 중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던 영조와 '미완의 개혁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도 처음엔 영종, 정종이었으나 고종 때 바뀌었다. 두 군왕의 묘호가 바뀐 까닭은 고종이 순조의 아들인 효명(孝明)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보위에 오른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영종과 정종의 묘호를 영조와 정조로 바꾸고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추존했다.

출처 : 현곡의 역사산책
글쓴이 : 현곡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