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칠곡의 두운조사와 희방사 전설

강나루터 2015. 11. 12. 06:28

지금부터 근 1300여년전 신라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두운대사는 태백산 심원암 이란 암자에서 수도를 하다가,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자리를 옮겨 초막을 짓고 수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초막이 있는 산기슭은 숲이 우거질대로 우거져 낮에도 무시무시하였고,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무서운 산 짐승들이 마구 쏘 다니는 곳이었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날, 그 날도 오직 수도에 여념이 없는 대사 앞에 암범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는 눈치를 보였으므로 대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산기(産氣)가 임박해 있으므로 부엌에 검불을 깔아 새끼를 낳게 해 주었더니 범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후 대사는 어린애처럼 알뜰히 거두어 주었더니 눈이 녹기 시작하는 초봄이 되자 새끼를 데리고 나갔다.

 

어느 날 저녁 문밖에 기척이 있어 내다보니 그 범이 와서 얼굴을 찡그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엇을 호소하는 듯 하였다. 대사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냐? 어서 입을 벌려 보라"하고 입안을 살펴보니 목구멍에 커다란 은비녀가 걸려있지 않는가? 이것을 본 대사는 크게 꾸짖으며 "너같은 날랜 짐승이 무엇이 먹을 것이 없어 이런 못된 짓을 하는냐? 두 번 다시 이런 것을 먹지 말라"고 타이르니 범은 사과하는 듯 사라졌다. 

 

 며칠 후, 이번에는 문밖에 쿵 하는 소리가 나므로 내다보니 그 범이 큰 산돼지 한 마리를 갖다 놓고 대사에게 드리려는 눈치였다. 이는 자기가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 인줄 알았지마는 대사는 "내가 술과 고기를 금하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 이런 부정한 물건을 가져왔느냐? 이런 짓을 할려면 두 번 다시 찾아 오지 말아라"하고 야단을 쳤더니 범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지 사라졌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달 밝은 어느 깊은 밤, 범이 또 찾아와서는 문을 흔들었다. 대사가 문을 열자 장삼을 물고 당기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 처녀가 누워 있지 않는가? 대사는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는 18, 19세쯤, 녹의 홍장에 곱게 단장한 절색이었다. 그는 급히 처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부터 떨어져있는 움막으로 처녀를 옮긴 뒤 물을 끓여 먹이고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이렇게 된 연유를 물은 즉 "저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戶長)의 무남독녀로서 오늘 결혼식을 치른 후 저녁에 막 신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불덩이 같은 것이 몸에 부딪히더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 후에는 어떻게 된지 모르겠사옵니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주는 4백리가 넘는데 비호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로구나, "너희 집에서 얼마나 걱정 하겠느냐? 며칠 쉬었다가 곧 돌아가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그 뒤 대사는 그 여자에게 남복을 입혀 총각처럼 꾸며 경주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유 호장은 며칠을 두고 딸을 찾았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온집안이 머리 푼 초상집 같았으나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왔으니 온 집안이 기쁨의 울음 바다로 변하였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유 호장은 대사에게 감사의 듯을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대사님은 딸의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이니 불민한것이오나 거두어 인연을 맺게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하고 은근히 사위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대사는 "나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는 몸이요, 이미 따님과는 남매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시요."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유 호장은 대상의 수도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대사에게 큰 절을 지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신라의 훌륭한 문화의 자취와 고적이 많으니 한 3개월 동안 조용히 순례하면서 유해 주시오." 간청하므로 그는 순순히 응락 했다. 3개월이 지나자 화창한 봄날이 왔다. 유호장과 대사는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풍기읍에서 소백산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새로 닦은 큰 길이 되었고 동구 앞 여울에는 쇠다리까지 놓아졌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던 초막은 없어지고 단청도 새로운 큰 법당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즐비하였다.

 

그제야 유 호장은 사람을 보내어 3개월 동안 절을 지어 놓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희방사라 절 이름을 지었고, 저 아래 다리는 수철교, 풍기 서문밖에 놓은 다리는 유다리라고 이름하였다."고했다. 또 유 호장은 대사와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도솔봉 아래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유석사라고 하고, 백여 두락을 사서 공양미를 드리게 했던 것이다. 

출처 : 할 말 하는 대한민국
글쓴이 : 용화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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