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년 신라 흥덕왕 때 개창(開創)한 최초의 선종 가람으로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소속의 전통 사찰이다.
사찰로 가는 도중 내를 건너기 전에 두 개의 장승이 서 있었는데 장승들의 높이는 대략 2.5m~2.9m, 너비 40~50Cm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 영조 1년(1725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 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 곳 장승은 무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궂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당지장(西堂知藏)선사로부터 6조 혜능의 남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홍척국사가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아 현재의 지리산인 남악(南岳)에 실상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창건 당시 실상사는 지실사(知實寺)로 불리었으며, 이후 홍척국사의 법을 이어 받은 수철화상이 실상산문 제2대 조사가 되었다. 수철화상은 왕실 사람들의 귀의를 받아 실상사를 크게 확장하였다.
조계종 실상산파로 종명을 개칭한 고려시대는 실상사의 최대 융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27년~113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도 창건 이후 약 300년이 지나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은 세종 재위 시에 불교계의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묶고 전국에 36개 사찰만을 남겨 놓았다. 당시 실상사는 본래 실상사의 말사였던 산내면 원천리 소재 원수사(源水寺)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말 이후 잦은 병화로 쇠퇴해지기 시작한 실상사는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되었다.
이후 200년간 절의 경역은 민간 경작지로 사용되어 왔다. 철불과 석탑만이 논바닥에 방치되어 오다가 1690년(숙종 16) 침허조사에 의해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36동의 건물을 중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침허조사가 중창한 대가람은 1883년과 1884년의 화재 사고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등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겨두고 모두 전소되었다. 1884년 월송대사가 대적광전이 불탄 자리에 지금의 보광전 건물을 새로 중창하였다.
1911년 전국의 사찰을 통괄하는 30본산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실상사는 1912년 법찰 대본산인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새로 제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에 의한 전국 24 교구제에 따라 실상사는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가 되었다.
1995년부터 실상사의 옛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절 주위의 경작지를 매입하여 56,198㎡의 옛 절터를 회복하였다. 1996년~200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창건 당시 가람의 규모와 역사적 변천을 확인하기 위하여 발굴 조사를 시행하였다.
[역사적 변천]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 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탑지 앞으로 정자나 탑 등에 많이 쓰이는 모임지붕(사모지붕)의 범종각이 자리잡고 있고...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약사전·명부전·칠성각·선리수도원·누각·천왕문·화엄학림강당과 학사,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과 부속 건물이 있다. 당우 가운데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고, 범종이 걸려 있다. 종은 1694년(숙종 20)에 만든 것으로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있다. 이것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문화재로는 백장암삼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하여,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 2기가 있다. 그리고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 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0호), 실상사약수암목조탱화(實相寺藥水庵木彫幀畵, 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832년에 의암이 중건하면서 부도전에서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실상사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으로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 탑을 본떠 복원하기도 하였다. 1980년 2월 2일 도굴꾼에 의하여 크게 파손된 것을 문화재관리국의 기술진들이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또한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수철이 4,000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이다. 이 불상은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에서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절에는 실상사위전개량성책(實相寺位田改量成冊,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이 있으며, 절 입구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중요민속자료 제15호)을 비롯한 석장승들이 남아 있어 장승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절 일원이 사적 제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실상사는 1998년에 문을 연 귀농학교로도 유명하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도법스님이 만든 학교로서 1997년 우리나라에 IMF로 인해 실직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농촌으로 돌아와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작물을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등 생태환경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보기에도 탑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정방형의 축대가 있다.
바로 실상사 목탑지이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가 소실되고 초석만 남아있는 실상사 목탑은
한변의 길이가 20.5m 로 황룡사 9층 목탑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한다.
목탑지에는 생명평화깃대와 세월호 희생자를 의미하는 304개의 빛을 두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시왕전이라고도 하고
지장보살이 주존으로 봉안되는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다.
남원 실상사 석등
보물 제35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석등은 기둥이 둥근 장고(長鼓)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고 다르다.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 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 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덜 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때까지 약 200여년간 부속 암자인 백장암에서 기거하였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실상사 동종
전북 유형문화재 제 137호
이 종은 조선 숙종 20년 (1694)에 만든 것으로 전체 높이 123cm, 넓이는 83cm이다. 종 머리에는 용뉴라는 용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옆에는 한국 종의 전통요소인 용통이란 굵은 관을 달았다. 종 어깨의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광이라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식 새겼다. 네 개의 유곽마다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으며,유곽들 사이에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용뉴와 용통의 장식이 간소하며, 종의 밑자락에도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몸통에 새긴 딱딱한 선녀상을 볼 때,조선 후기 종의 장식이 형식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이 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모습이다. 종 몸체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便手)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용두(龍頭)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형식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상대(上帶)는 표현하지 않고 대신에 범자(梵字)를 돌아가며 새겼으며, 유곽(乳廓)은 종 몸체 중간쯤에 치우치게 배치하였다. 유곽대에는 당초무늬와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있고, 보살상은 유곽을 중심으로 합장한 채 서 있다. 보살이 서 있는 아래 부분에는 명문(銘文)이 있고 당좌(撞座)와 하대(下臺)는 표현하지 않았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 온다. 즉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 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 37호
이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높이는 5.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 아래 면은 수평이나, 위면 모퉁이 부분은 위로 추켜올려졌다. 지붕 아래 면은 수평이나,
윗면 모퉁이 부분은 위로 치켜올려 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군영감은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
를 잃어벼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있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南原 實相寺 鐵造如來坐像)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10. Amore m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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