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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릇 숨은 동기가 아름다워야

강나루터 2015. 12. 24. 20:42
“어떤 장님 한 사람을 맞은편 인도에까지 이르도록 도와준 다음 헤어지면서 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모자를 쑥 쳐들며 인사하는 동작은 분명 그 장님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님은 그걸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럼 누구한테 한 것일까요? 관객한테지요. 역할을 끝내고 퇴장하면서 인사를 한다, 이거 괜찮지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전락’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가는 우리들의 표면적인 선행의 안쪽에 숨겨져 있는 이기심과 허영심을 고백의 형식으로 고발한다. 사실 모든 고백록은 고발장에 다름 아니다. 자기를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타인을 고발하게 된다. 고백은 자신을 고발함으로써 타인들을 고발하는 방식이다. ‘전락’은 그와 같은 고백투 말하기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겸손의 요란스러움이라니>

작은 선을 행하고 크게 홍보하거나 보잘 것 없는 공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장은 쓴 약이다. 가령 수행원들을 잔뜩 데리고 복지원 같은 곳에 나타나 과일 몇 개로 생색내고 악수하고 사진 찍고 후딱 돌아가는 정치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또 국정 보고라는 걸 하는 자리에서 임기 중에 그 지역구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내세운다. 왜 정치인들만 그러겠는가. 본질적으로 사람은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이름을 내기 좋아하는 존재이다.    

한양대 정민교수가 옛글을 추려 펴낸 ‘죽비소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조정에서 이정암 공이 왜적에게 포위당했다는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위태로움을 근심하였다. 이겼다는 보고가 도착했는데, 단지 “적이 아무 날에 성을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갔나이다.”라고만 했지, 일체의 장황한 말이 없었다. 논의하는 사람이 말했다. 적을 물리치기는 쉽다. 공을 자랑하지 않기가 더욱 어렵다.(김육,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그 공을 자랑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는 이 문장은 사람의 본성을 간파하고 있다. 작은 공도 크게 과장해서 자랑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적을 물리치고서 그냥 ‘적이 물러갔다’고만 쓰기가 어디 쉽겠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할 것이다. 거기다가 앞에 인용한 카뮈의 글은 자랑하기 위해서 선을 행하기도 한다는, 자랑할 수 없다면 선을 행하지도 않는다는 피하고 싶은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거나 혹은 어떤 이익을 기대하고 그렇게 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때 그 선행은 연기에 다름 아니다. 선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 불행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을 의식한 연기로서의 선행은 우리의 삶을 연극으로 만든다. 눈먼 장님을 도와주고 모자를 벗어 정중히 인사하는 이 사람은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지적은 뜨끔하다. 우리 역시 예외없이 위선자들이거나 연기자들이기 때문이다. 고백으로서의 말하기가 듣는 사람을 고발하기에 이르는 장면이다. ‘요란스럽게 겸손해 하는 비법’이라는 표현을 다음 문단에 씀으로써 작가는 위선과 허위의식에 대한  꼬집기에 성공한다. 겸손의 요란스러움이라니.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의 시선으로, 혹은 자기 내부의 신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아야 한다. 그러면 남이 보지 않는다고 행동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이 없을 때도 누군가 보고 있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고 있지 않는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도 내부의 시선도 아니고, 숨은 동기의 아름다움이다. 동기의 아름다움에서 비롯하지 않은 표면적인 선행은 타인의 시선이나 자기 내부의 시선을 의식한 연기이기 쉽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만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시선에 대한 의식도 연기를 하게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것은>

상황 윤리자들은 절대적인 규범을 부정한다. 그리고는 유일한 규범은 사랑이다, 라고 말한다. 동기가 사랑이면 그 행동은 선하다는 말이 그 다음에 이어진다.

가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부금을 내거나 달동네에 쌀을 배달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본다.  

몇년 전에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 ‘요술 쌀단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내용인즉 이렇다.

10여년째 쌀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이 혹시나 쌀이 떨어져 밥을 굶는 이웃들이 있을지도 몰라 가게 앞에 쌀단지 하나를 내놓은 것. 그 지역은 기초생활수급자는 물론 장애인, 혼자사는 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생활형편이 딱한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네였다. 쌀단지를 내놓은 후 누군가가 쌀 한 사발을 퍼가면 쌀가게 주인은 다시 쌀단지를 채워 놓았다.

 

쌀가게 주인은 이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쌀 단지에 ‘다들 어려우시죠. 뜨거운 밥 지어 드시고 힘내세요. 절대 미안해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세요’라고 적어 놓고, 또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퍼갈 수 있게 쌀단지를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가게 모퉁이에 내놓는 배려도 베풀었다. 그런데 얼마후부터 주인은 쌀을 채워넣지 않아도 되었다. 쌀을 사러 온 사람들이 구입한 쌀 가운데 일부를 단지에 붓고갔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감동적인 것은 그 행동의 동기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공을 드러내지 않고 선을 행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연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요란스럽게 겸손을 떨거나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하거나 작은 공을 크게 떠벌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떤 행동이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의 감춰진 동기가 그 행동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한다.

출처 : 소창대명(小窓大明)
글쓴이 : 바람난 공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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