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이 사약을 받고 사사 당했다는 소식은 곧 능주 땅에도 전해졌다. 먹고 살기 힘든 양인들은 관심이 없었지만 능주의 향교 교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특히 정여해의 제자들은 스승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굉필과 정여해는 한 스승 밑의 문인이자 도우이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걱정대로 정여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공자의 문하에 안자가 있어 종일토록 함께 도를 말했고, 주자에게 채원정이 있어 미묘한 이치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에 공이 있어 스승의 도가 더욱 밝아졌으니 어찌 천년 만에 한 번 만난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얻기가 어렵고 알기도 어려운 것이 도일 것입니다.
정여해의 제자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붓끝을 응시했다. 제문의 시작은 정자와 주자와 같이 심원한 도리와 광대한 조화의 근원을 파헤쳐 홀로 밝고 넓은 도체를 깨달은 스승 김종직을 찬탄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유학을 무작정 추종하고 연모하는 자세가 아니라 조선 도학의 정맥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정여해의 자주적인 견해였다. 그러고 나서 정여해는 김종직을 공자에, 김굉필을 안자에 비유하여 조선 도학의 계보를 확실하게 밝혔다.
<아아, 스승님과 문답을 하는 여가에 물러나와 여러 벗들과 더불어 조용히 토론하고 화락하는 모습과 친절하고 간절한 인정은 혼연히 봄바람의 따뜻한 기운처럼 온화했으며, 우리 족형 일두 옹과는 더욱 친하고 성심껏 화합하여 한 사람이 앞에서 부르면 한 사람은 뒤에서 응하여, 상성(商聲)과 궁성(宮聲)이 내는 음률의 어울림보다 나았으며, 질나팔과 저(壎箎; 형제을 비유하는 말)를 부는 것보다 화합함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유도가 크게 밝혀지기를 바랄 수 있었고, 백성들이 그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김굉필과 정여창의 우정을 기술하고 있었다. 오음(五音) 중에서 상성과 궁성의 화음처럼 화합하여 지낸, 질나팔과 저의 음률과 같이 서로 어울렸던 사이가 김굉필과 정여창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하늘이 현인(賢人)을 돕지 않고 간인(奸人)들이 악을 나타내어 마침내 스승이 사후에까지 헤아릴 수 없는 화란(禍亂)을 입게 되었고, 문하의 제자들도 멀리 귀양을 가 학문의 문호(門戶)가 빈 것 같고 육경(六經; 시경, 서경, 역경, 춘경, 예경, 악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한데, 공도 또한 세상을 버리게 되니 모든 일이 이로부터 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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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김종직이 사후에까지 헤아릴 수 없는 화란을 입었다는 것은 부관참시 당한 것을 말했고, 영호남과 서울에 거주하던 동지들이 한꺼번에 귀양을 가버리니 문호가 비고 육경이 사라져버린 듯하다는 토로였다.
<아아, 함양(涵養)이 완고하고 실천이 독실했으며, 본 바와 도달한 바가 이미 고명한 경지까지 이르렀는데도 몸소 청소하는 일과 진퇴하는 예절에 임하면서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는 공부를 떠나지 않고도 위로는 천리(天理)에 도달하는 묘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사물(事物)을 벗어나지 않고도 태극(太極)의 심오한 이치를 궁구하였습니다.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 소학을 배우는 어린이로 처신하면서 지식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지식이 실하면서도 빈 것 같이하여, 많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적은 지식을 가진 이에게 묻고, 잘하면서도 잘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묻는, 훌륭한 덕행을 어디 가서 보겠습니까.
지리산과 쌍계사 사이와 섬진강과 악양정 위에 봄꽃이 난만하고 가을달이 명랑할 적에 소요하고 배회하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러, 가슴 속에는 속기가 없고 마음의 궁극은 장원(長遠)하여 개연(慨然)하고 천년을 지나도 다하지 못할 느낌을 품었으며, 간곡하게 강의 토론하여 많은 성현들이 서로 전승한 비결을 알아낸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하건대, 저는 변변치 못한 자질로서 15세의 나이에 점필재 스승을 모셔서 의지하게 되었고, 또 공을 만나 튼튼한 보호(輔護)로 삼아서, 공이 삼이 되고 나는 쑥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공에게서 도움을 받은 일이 헤아릴 수 없었던 바, 내가 돌이라면 공은 옥이었으니 혹시 돌이 옥을 연마하는 도구가 된 적은 없었는지요.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해파리가 새우를 만난 듯이 했는데, 정인(正人)이 시속에 영합하지 않음으로써 문인의 모임을 맺지 못한 채 한 사람은 남쪽, 한 사람은 북쪽으로 떨어져서 숨어 살고 귀양살이를 하다가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저승과 이승으로 영원히 갈려질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지난번 병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나아가 방문했을 때 친절히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것입니까. 한편으로는 유도를 위해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사정(私情)을 위해 슬퍼하니 눈물이 줄줄 흘러 동해 바닷물을 기울인 듯합니다. 허둥지둥 치전(致奠)을 드리니 천지가 캄캄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바라옵건대 흠향(歆饗)하소서.>
억령에게 아버지 정여해는 부자간이라기보다는 사제간이나 다름없었다. 억령의 꿈은 아버지를 닮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억령의 사서삼경 실력은 정여해의 제자 중에서 으뜸이었다. 진사시와 달리 사서삼경을 주요 과목으로 시험을 치르는 생원시는 언제 보아도 합격할 만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시부(詩賦)를 짓는 실력도 아버지 정여해의 문재(文才)를 닮아 능주에 들르는 벼슬아치들을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억령은 <논어>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좌우명 삼아 도학에 정진할 뿐이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억령이 공부하는 궁극은 서울로 올라가 과거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숨어 살면서 군자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억령은 처마 밑에 내어걸린 돈(遯) 자를 새삼스럽게 보았다. <주역>의 33괘에 나오는 '물러남의 지혜'를 말하는 글자였다. 아버지 정여해의 마음과 기개와 뜻이 단 한 글자로 함축된 돈(遯) 자였다.
우의정 허침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입궐하지 않았다. 성종 때 세자인 연산군을 가르치는 시강관을 지낸 인연으로 승승장구하여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늘 명치끝에 무엇이 들어앉은 듯 편치 못한 그였다. 어제는 동궁에서 연산군을 함께 가르쳤던 조지서(趙之瑞)가 참형을 당한 후 강물에 시신이 던져졌다는 소식을 연산주에게 직접 들었던 것이다. 연산주는 자신을 가르쳤던 조지서를 그렇게 죽임으로써 갑자년 사화의 참극을 마무리 지을 모양이었다.
허침은 취기로 몸이 무거웠으므로 느지막이 일어나서 누나 집으로 갔다. 늙은 말은 말고삐를 잡아당기지 않는데도 길에 익숙하여 뚜벅뚜벅 나아갔다. 허침의 누나는 백세까지 살았는데 식견과 지혜가 넘쳐 도인의 별호처럼 사후에도 문중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백세할머니'로 불리었다.
사실, 허침이 김일손의 사초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무오년에 이어 갑자년을 무사히 넘긴 것도 누나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허침의 형 허종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에 큰 일이 생기면 반드시 형제가 누나를 찾아가 지혜를 구했던 것이다.
성종이 윤비(연산군 생모)를 폐하려 할 때도 형제는 누나를 찾아가 처신의 지혜를 구했는데,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그 어머니를 죄 주고서 훗날 어찌 무사하겠느냐'고 하였으므로 허종은 신병을 핑계하여 입궐하지 않았고, 허침은 폐비 논의를 하는 조신들에게 이의(異議)를 제기함으로써 당시에는 체직을 당했으나 연산주가 폐비사건에 참여한 선비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죽일 때 화를 면했던 것이다. 허침은 누나 집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리자마자 큰소리로 말하였다.
"누님, 제가 왔습니다."
그래도 대문이 열릴 기미가 없고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토방에 누나의 신발이 놓여 있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허침은 누나가 낮잠을 자나보다 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불렀다.
"누님, 동생 허침이 왔습니다."
그제야 방문이 열리고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이 늙은이의 좋은 꿈을 깨트리는 놈이."
"대낮에 꾸는 개꿈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누님."
"개꿈을 꾸든 용꿈을 꾸든 입궐에서 일을 보아야 할 놈이 왜 여기를 왔느냐."
노파가 대문을 열며 짜증을 냈다. 그러자 천성적으로 부딪치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허침이 코를 벌름거리며 동문서답을 했다.
"누님, 국화꽃 향기가 좋습니다."
"노국(老菊)이라 며칠 후면 사라질 향기다. 좋아하지 마라. 향기 때문에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목이 꺾여져 죽는 게 꽃이 아니더냐. 사람도 마찬가지다. 네가 폭군 밑에서 화를 당하지 않고 이만큼 산 것도 남보다 재주가 빼어나지 않아서이다."
허침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누님, 폭군이라니요. 전하를 폭군이라 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폭군 밑에 있는 우의정 허침이라는 말입니까."
"호호호."
노파가 입을 벌리고 웃자 노파의 얼굴이 참으로 볼품없이 변해버렸다. 이가 듬성듬성 빠진 데다 잇몸마저 문드러져 있어 괴기스럽기조차 하였다.
"누님, 입을 벌리시니 쥐꼬리만한 정마저 떨어지겠습니다."
"그렇다면 입을 닫고 있을 테니 돌아가거라."
노파가 돌아앉은 후 벌렁 드러누워 버리니 난감해진 허침이 그녀를 달랬다.
"누님 농담도 못합니까. 누님을 극진히 섬기는 사람이 우리 형제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우리 형제가 무오년, 갑자년을 무사히 넘기고 있는 것도 모두 누님 덕분이 아닙니까. 그런 누님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노파가 다시 호호호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기는 알고 있군. 그래, 오늘은 무엇 때문에 왔느냐."
"전하가 조지서마저 죽였습니다. 그것도 시신을 강물에 던져 자손들이 찾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놈아 그래서 폭군이라고 했다. 세상이 자기를 가르친 스승을 죽인 임금을 폭군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부르겠느냐."
"그래도 제 입으로 그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그러겠지."
"누님, 요즘 전하가 더욱 난폭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궐하는 것이 죽을 맛입니다.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직을 하고 싶습니다."
연산주 아래서 보아도 보지 않은 것처럼,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처신해 온 허침이었지만 조지서의 죽음만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누나의 말대로 연산주는 삼강오륜을 무너뜨린 폭군이 틀림없었고, 자신은 폭군 밑에서 빌붙어 연명하는 기생충 같은 벼슬아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허침은 고지식한 조지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백부(伯符; 조지서의 자), 이 사람아. 성질 좀 죽이고 살지. 곧은 나무는 부딪치면 부러지지 않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재주가 너무나 아깝단 말일세. 우리 누님의 말이 맞아. 향기가 빼어나 목이 꺾여버린 꽃이 바로 자네일세.'
성종 때 어린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허침과 조지서는 시강관이 되어 동궁으로 나아가 연산군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학문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날마다 유희에 빠져 놀기를 좋아했는데, 부왕인 성종의 엄한 훈계가 두려워 마지못해 동궁의 서연(書筵)에 억지로 나올 뿐이었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가 마음을 다하여 강의를 하여도 모두 귀 밖으로 흘리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지서는 연산군의 그러한 태도를 용서하지 않았다. 천성이 굳세고 곧아 어떤 날은 강의를 하면서 연산군을 크게 나무란 적도 있었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선비가 고작 고자질이나 하겠다니 한심하구려."
"고자질이라니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저하께서 어찌 고상하지 못한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 지금 저는 저하를 가르치는 동궁의 관원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제자에게 책망하는 말을 듣는 선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조지서는 화가 나 연산군 앞에 강의하던 책을 던져버리고 서연을 나와 분을 삭였던 반면에 허침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 허침은 부드러운 말로 연산군을 달래어 책상 앞에 앉아 있게 하였다. 연산군이 강의가 따분하여 졸더라도 허침은 책장을 넘기며 진도를 나갔다. 그러다 보니 연산군은 조지서와 있을 때는 몹시 고통스러워하였고, 허침과 있을 때는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았다. 어느 날은 서연의 벽에 연산군이 이런 낙서를 써 붙여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지서는 큰 소인(小人)이요
허침은 큰 성인(聖人)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에게 소인이라고 불리는 치욕을 당했다. 군자를 삶의 목표로 사는 선비에게 소인이라고 함은 능멸에 가까운 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난기 섞인 연산군의 낙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고 넘어갔다. 성종은 조지서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사 세자를 가르치는 동궁의 시강관으로 계속 임명하였던 것이다.
조지서.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자는 백부이며 호는 지족정(知足亭)이었다. 성종 갑오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진사시에 2등(실제로 1등이었으나 생원시에 1등을 하였으므로 관례에 따라 2등을 줌), 기해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벼슬이 시강관인 보덕(輔德)에 이르고 호당(湖堂)을 거쳐 응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조지서는 시험 때마다 세 번이나 삼장원(三壯元)을 한 천재였으나 연산주의 폭정에 회의를 느껴 내직에서 외직 지방관으로 자청하여 나갔다가 그것마저 버리고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 10여 년을 야인으로 묻혀 지내다 갑자년에 화를 당한 인물이었다.
갑자년 여름에 진주에서 성종 때 승지를 지낸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압송되어 올라올 때 조지서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줄 직감했는데, 함께 잡혀가는 정성근의 죄명이 너무나 어이없기 때문이었다. 성종이 승하하자 3년상을 행했다는 '괴이한 행실'이 정성근의 죄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자신은 세자 연산군을 성군의 싹을 틔우고자 원칙대로 엄하게 대했기 때문에 극형에 처해질 것이 뻔했던 것이다.
"누님, 요즘에는 정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피를 두어 되씩 토합니다. 전하께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니 화병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직하려고 합니다."
"네 혼자만 살려고 그러느냐."
"날마다 피를 토하며 동생이 죽어 가는데 누님은 어찌 그리 무심하십니까."
"너는 지금의 너에게 만족해야 한다. 지족(知足)이란 말을 생각하거라. 폭군 밑이라 하더라도 네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비록 조정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지는 못해도 의정부에 앉아 죄인들의 죄를 논죄할 적에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조지서마저 목이 베이니 조정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누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나를 찾아올 것이 아니라 조지서의 부인을 찾아가 위로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며칠 후, 허침은 누나의 조언대로 조지서의 아내에게 연산주 몰래 사람을 보내어 위로를 했다. 그 사람이 들려준 조지서의 아내는 대대로 산음(오늘의 산청)에 터를 잡아 살아 온 정몽주의 증손다웠다. 조지서가 압송되기 전 헤어지면서 술잔을 들고 '내가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조상의 신주를 어찌 하겠소' 하니 그의 아내가 울면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전하겠습니다' 하였다는 말에 허침은 가슴이 먹먹했다. 더욱이 재산을 몰수당한 후 친정아버지가 '시집이 망했으니 친정으로 돌아와서 사는 것이 어떠냐' 하고 말하자 '남편이 저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저는 죽음으로써 보전하겠다고 했으니 어찌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또 남편의 첩에게 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의지해 살겠습니다' 했다는 말에 허침은 과연 정몽주의 피가 흐르는 충신의 후손이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허침은 정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또 목에서 피를 넘겼다. 진언하는 일도 지치어 자신의 무력감을 견디는 것마저 고역이었다. 아까운 선비들이 하나 둘 죽어갈 때마다 허침은 송곳으로 온몸을 쑤시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갑자년은 일년 내내 고통스러운 날이 계속됐다. 폐비 윤씨를 종묘에 모시자고 논할 때 '일이 불가하다(事不可)'는 주장을 폈던 전력으로 사형을 당한 교리 권달수(權達手)의 죽음도 허침을 괴롭혔다. 김안로(金安老)가 권달수를 만난 얘기를 세세하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권달수가 '일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편 죄로 용궁으로 귀양 가 있다가 서울로 압송돼 오면서 가족이 사는 영순리(永純里)에 들렀을 때였다. 김안로가 술병을 가지고 가서 권달수를 위로했는데, 그때 이렇게 부탁의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죽거든 시신에서 내 두 눈을 뽑아 주시오."
"통지(通之; 권달수의 자), 그게 무슨 말이오."
"옛날부터 참소하는 간사한 자가 임금의 악함을 막지 않고 어떻게 선비들을 해치고 제 몸을 보전하였는지 죽고 난 후라도 보고 싶소."
이에 김안로가 대답을 못하고 술잔을 기울이자, 권달수가 다시 강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사한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게 해주시오."
의금부 감옥에 들어가자, 심하게 고문을 당하여 옷이 피로 얼룩진 이행(李荇)이 먼저 와 있었다. 다음 날, 권달수가 국문 중에 고문을 당하고 들어오더니 이행의 손을 잡아끌면서 '햇볕 아래 흰 기운이 공중에 뻗친 것을 자네도 보았는가' 하고 말했다. 이행이 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하자, 권달수가 '아, 난 죽을 것이네. 흰 기운은 햇빛을 가리고자 나에게 이른 것이라네'라고 말했다. 그 뒤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거제도로 귀양을 갔는데, 이행은 꿈에 권달수가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므로 시를 한 수 지었다.
칼날을 무릅쓰고 혼자 나아가니
하늘이 요기로 햇빛을 가리네
밤중의 꿈속은 평일과 같은데
두어 줄기 눈물이 요를 적시네.
橫衢白刀獨能前
天遺妖氛翳日邊
半夜夢魂如宿昔
數行淸淚濕寒氈
김안로가 허침에게 전해준 또 다른 이야기는 성종을 위해 3년상을 치렀다는 '괴이한 행실'로 죽음을 맞은 정성근의 개결한 성품에 관한 것이었다. 정성근이 일찍이 대마도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 매림사(梅林寺)라는 자못 맑고 깨끗한 절을 지나치게 되었다. 일행이 정성근에게 청하기를 '배 안에서 오랫동안 답답하게 지냈으니 외국의 절이라도 한번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정성근은 이렇게 거절하여 일행이 공무에 전념하도록 일깨워주었다는 것이었다.
"가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갈 것이지 나는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앉아서 다 상상하고 있다. 법당을 깨끗이 쓸고 부처를 놓고 향을 피우고 뜰에는 귤나무와 치자나무 따위의 과실수를 심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우리나라의 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윽고 대마도 도주(島主)의 집에 이르렀는데, 도주가 문밖에 나와 조선 임금의 왕명을 받아야 할 터인데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했다. 이에 정성근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통역을 시켜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하게 받도록 재촉하여 그러도록 하였고, 돌아올 때 도주가 그림부채, 차는 칼, 후추, 판향(瓣香) 등을 폐백으로 바쳤으나 정성근은 하나도 탐하지 않고 접대하던 왜인에게 주어 도주에게 돌려보내버렸다. 도주가 조선에 사람을 보내 받기를 청하니 성종이 허락했으나 정성근은 성종에게 아뢰기를 '신이 그곳에 가서는 받지 않다가 여기서 받으면 앞뒤 마음이 다르게 되니 원치 않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종도 별 수 없이 왜인에게 물건들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정성근의 성품이 이렇게 까다로우니 연산주가 좋아할 리 없었다. 자연히 정성근은 연산주 시대에는 합당한 벼슬을 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보내면서 나라걱정을 할 뿐이었는데, 이때 그가 부른 시를 김안로가 한시로 번역했던 것이다.
내가 님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아
님은 내 마음 같지 않도다
님의 마음이 진실로 같을진대
세상이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비록 생각은 아니하나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以我思子心 子無我心似
子心苟可似 天下寧有是
思之縱無能 無嫉猶可已
복숭아와 오얏은 봄바람에 아첨하여
아름다운 빛깔을 다투도다
늦은 국화도 마침내 꽃이야 피련만
외롭고 쓸쓸하니 누가 보아 주려나
서리 바람이 풀잎을 싹 쓸어 없앨 제
의로운 향기만 가을 동산에 의탁하리.
桃李媚恩光 競此色婉娩
老菊終赤花 寂歷誰省玩
霜風掃卉空 孤芳托秋苑
허침을 괴롭히는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온 나라가 연산주의 음행을 저지르는 놀이터로 변하고 있었다. 성균관마저 연락(宴樂)의 장소가 되어 공자 이하 모든 위패가 다른 곳으로 옮겨져 방치되고 강당과 사당은 음탕한 유흥장소로 변한가 하면 태학을 비워 무당을 모아 난잡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란한 행동거지를 두고 논박하는 홍문관에 이어 간언하는 사간원마저 폐지하였다.
이러한 연산주의 패악을 보다 못해 하루는 환관의 우두머리인 김처선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심정으로 나섰다. 입궐하려던 김처선은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으므로 집안사람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띠를 건네주며 무심히 듣고 있던 아랫것 하나가 물었다.
"대감님, 왜 죽습니까. 오래오래 사셔야죠."
"세종대왕으로부터 지금까지 일곱 임금님을 모셨으니 이만하면 환관으로서 누릴 바를 다 누린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환관으로서 정 2품 벼슬에 오른 김처선은 이미 목숨을 버릴 것을 작심하고 있었다. 이 무렵 연산주는 김처선이 보거나 말거나 숙원의 품계에 오른 장녹수를 불러 온갖 음행을 즐겼다. 침소를 나와 수조(水槽)에서도 서로 발가벗고 뒹구는가 하면 망측한 자세로 짐승처럼 교합했다. 일찍이 내시가 될 때 거세당한 김처선은 그때마다 심한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늙은 나이와 상관없이 온몸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은 김처선뿐만 아니라 연산주의 눈을 끌지 못한 후궁이나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지못하여 같은 성(性)끼리라도 밤마다 은밀하게 음란해지기 일쑤였다.
연산주는 직언하는 김처선에게 그런 식으로 고문을 하고 보복을 했다. 김처선은 무오년과 갑자년에 죽은 선비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연산주 앞에 홀로 나아가 작심하고 말했다.
"늙은 놈이 여러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였지만은 고금을 통하여 전하처럼 악행을 저지른 분은 없었습니다."
"이제야 네가 이빨을 드러내는구나.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과인의 활을 가져오너라."
연산주가 가져오라는 활은 부왕인 성종이 애지중지하던 사슴을 맞혀 죽였던 바로 그 활이었다.
"이 늙은 내시 놈이 나를 능멸하는구나. 네 모가지가 몇 개이더냐."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연산주는 화가 치밀어 숨을 쉬기도 힘든 듯 헉헉거렸다.
"네, 네 놈이 정 2품 상선에 오르더니 이제는 보이는 것이 없구나."
"전하, 고정하소서. 이 늙은 내시의 목숨은 전혀 귀하지 않사옵니다."
"이놈이 나를 능멸하더니 이제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구나."
연산주는 당장에 화살을 쏘아 김처선의 가슴을 맞혔다. 그러자 김처선은 가슴에 박힌 화살을 붙잡은 채 피를 흘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전하, 저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전하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주는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활을 놓고 벌떡 일어나 칼을 들었다. 잠시 후에는 김처선에게 다가가 칼을 휘두르니 김처선의 다리 하나가 단칼에 잘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하니 서서히 죽여주마. 다리 하나를 마저 자르겠으니 내게 가까이 오라."
"전하, 전하는 다리 하나가 베어져도 다닐 수 있사옵니까."
"이제 보니 내 다리가 베어지기를 바라는 놈이 바로 네 놈이구나. 이번에는 네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겠노라."
연산주는 내시들에게 김처선을 붙잡게 하여 혀를 뽑아 칼로 끊어버렸다. 그런 다음에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놓고 김처선의 입을 주시했다. 그래도 김처선은 연산주를 위하여 웅얼거리고 있었다.
'전하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주는 그러한 김처선에게 침을 뱉으며 승지에게 명했다.
"저 시체를 산에 버려 범의 먹이가 되게 하라. 나를 능멸한 김처선의 처(處)자를 앞으로는 조정이나 민간에서 쓰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김처선의 전 재산을 압수하고 김처선에게 양자로 들어온 이공신(李公信)과 7촌까지도 연좌시켜 처형케 하고, 그의 본관인 전의란 지명도 없애버리라고 명했다.
김처선이 죽고 난 후, 허침은 마침내 조정의 정무에서 받은 고통이 원인이 되어 퇴궐하여 집에 돌아와 피를 쏟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어의를 부를 겨를도 없었다.
그가 쏟아낸 피가 마침 마당에 내려쌓인 흰눈을 적시어 연산주 아래서 영화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초라하고 허허롭게 했다. 하인들이 나와 그를 들어올렸을 때는 이미 맥이 끊어져 있었고, 시신은 새털처럼 가벼운 상태였다.
허침은 마지못해 조정에 나가느니 그렇게 죽기를 원한 듯했다. 오장육부와 명치끝에 삭였던 간언들을 연산주가 있는 곳을 향해 하나도 남김없이 토해내듯 많은 양의 붉은 피를 눈 위에 토하고 죽었던 것이다.
연산주가 백성들에게 주자가례를 비웃듯 3년상을 금지시켰지만 조광조는 부친을 용인의 심곡리에 안장한 후, 상례에 따라 묘소 밑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첨사(僉使; 종3품 무관) 이윤형(李允泂)의 딸인 한산 이씨를 맞아 결혼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남편 조광조가 집종 하나를 데리고 여막으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소녀티를 갓 벗어난 한산 이씨는 3년 동안 독수공방을 보내야 했다.
새댁인 한산 이씨 처지에서는 남편인 조광조가 외롭고 무서운 밤에는 서울 집으로 올라와 자신을 감싸 안아 주기를 바랐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조광조가 서울 집을 떠나 부친이 안장된 용인의 선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조광조에게 아버지 조원강의 존재는 남달랐다. 평안도의 큰 길인 어천도(魚川道; 개천에서 의주까지의 도로) 찰방을 지낸 아버지가 마침 희천에 유배와 있던 도학자 김굉필에게 아들의 스승이 될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 조원강은 유학의 진면(眞面)이라 할 수 있는 도학의 문을 열어준 첫 안내자나 다름없었다.
조광조는 3년 시묘생활을 마치고도 서울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부친의 묘 앞에 아예 초당을 짓고 살았다. 부친이 원했던 도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는 것보다 시골에 남아 도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조광조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에게 못다 한 효도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독 무서움을 잘 타는 조광조의 아내 한산 이씨는 3년상을 마치고도 사울 집으로 올라오지 않는 남편이 야속했지만 밤마다 허전한 잠자리를 견뎌내야 했다. 그녀는 집종을 데리고 조광조가 좋아하는 인절미나 밑반찬거리를 장만하여 한 달에 두어 번 용인으로 내려갈 뿐, 초당에 신혼살림을 차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초당의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특히 갑자년에 김굉필이 순천 유배지에서 사사 당한 이후, 조광조는 캄캄한 세상에서 등불 하나가 사라진 듯한 절망감으로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여 초당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산사의 수도자처럼 하늘의 도를 화두 삼아 하루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세수는 물론 세끼 밥 먹는 것도 잊고 스스로에게 하늘의 도를 묻고 또 묻다가, 허기가 지면 방문을 열고 나와 샘가로 가서 찬물을 한 바가지 들이킬 뿐, 밥그릇에 담아 올려지는 낱알 하나 목구멍으로 넘긴 적이 없었다. 밤중이 되어도 등을 방바닥에 대고 잠을 자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새댁인 아내와 친인척들이 몰려와 걱정했지만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어 말을 붙이지 못했다. 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듯 그가 스스로 방문을 박차고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을 마시러 샘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야 했다.
'아, 아무 탈이 없으시구나.'
그런데 스승 김굉필의 부음을 들은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조광조의 얼굴에 미소 같은 것이 비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선 듯했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그 무엇을 얻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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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하루째 되는 날에는 방문을 박차고 나와 입을 열었다.
"도란 행할 때 살아 있는 도가 되는 것입니다. 유도(儒道)란 유학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 한훤당 선생을 도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도를 밤낮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도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조광조는 우울한 마음을 털고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자 아내는 서울 집에서 용인 초당으로 이사할 용기가 났고, 지인들도 예전처럼 멀리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조광조는 초당 앞에 집종을 시켜 연못을 파고 김식이 구해온 연꽃을 심기도 했다. 연꽃은 한여름이 되자, 희고 붉은 꽃을 피우면서 향기를 뿜어냈다.
'도학의 문인 가족들을 조문하여 마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갑자년에 참극을 당한 선비의 가족들을 서둘러 찾아가 조문을 했다. 뒤늦은 조문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빚을 덜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혼자 가는 것이 망설여질 때는 적극적인 성격의 김식을 불러 동행했다. 상례에 따라 조위(弔慰)를 하는 것도 도학의 수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과 정여창 가족에게 가장 먼저 조위의 글을 보냈고, 연산주 아래서 영의정을 지낸 허침의 빈소에는 가지 않았다. 조광조는 가려고 하였으나 김식이 제지하고 나섰다.
"효직(조광조의 자), 허정승 집에 나는 가지 않겠네. 그 사람이야 연산주 아래서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 아닌가. 목숨이 다했다고 해서 허물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은가."
"귀먹고 눈먼 임금 아래서 얼마나 고통이 컸으면 피를 토하고 죽었겠는가. 대감의 양심이 먼저 단죄했으니 그의 혼백이라도 위로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가 영상으로 있는 동안 화란이 일어났네. 동지들이 사사를 당하고 귀양을 갔어. 난 소인배 혼백 앞에서 곡을 할 수 없으니 자네나 가게."
허침을 소인배라고 단정하는 김식의 말에 조광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학의 입장에서는 소인과 군자의 구분이 행동의 기준이었다. 소인과 군자가 타협하여 어울리는 중간 경계나 그것들을 초월하는 중도(中道)의 가치는 없었다. 따라서 도학에서는 소인과 군자라는 이분법의 칼날이 언제나 예리했고, 행동 기준이 명명백백하여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여관의 주인은 평안도 희천 출신의 초설이라는 여인이었는데, 조광조의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난 후 지인들을 불러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초설이 주인으로 있는 여관에서 차를 시켜 마신 적이 있고, 그때 초설은 자리가 파하고 난 다음 조광조의 종을 은밀하게 불러 자신의 비녀를 빼어 주었으나 조광조는 거절하고 말았던 적이 있는데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때의 일을 까마득히 잊고 또 그 여관 앞에 서 있었다. 문을 들어서기 전에 삿갓에 쌓인 눈을 털고 있자, 앳된 여인이 나왔다.
"나으리, 누구를 찾으시옵니까."
"초설이 주인인가."
"그렇사옵니다."
"혜화문 선생 댁에 갔사옵니다."
"혜화문 선생 댁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구나. 누구를 보고 혜화문 선생이라고 하는 것이냐."
"소녀는 단 한번 보았사옵니다. 선비의 행색은 아니고 혜화문 밖 낙산 산등성이 마을에 사는 백정들 중에서 덕이 높은 늙은 갖바치이옵니다."
"봉두난발의 갖바치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배움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구나."
"그렇사옵니다. 초설 언니는 한훤당 어르신도 모신 적이 있사온데 그 어르신보다 갖바치 선생의 도력이 더 높다고 말했사옵니다."
"네 주인이 한훤당 어르신을 모신 적이 있다는 말이냐."
조광조는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놀랐다. 초설이 한훤당을 모셨다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스승 김굉필을 초설이 모신 적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조광조는 차를 거푸 두어 잔을 마시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했다.
"나으리, 왜 그리 놀라십니까."
"한훤당이라면 김굉필 선생의 호이니라. 나의 스승을 네 주인이 모시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느냐."
"한훤당 선생에게 무얼 배웠다고 하더냐."
"<소학>을 조금 배웠으나 갖바치 어른에게서 배운 것에 비하면 그것은 말 그대로 '작은 배움'일 뿐이라고 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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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문득 혜화문 밖 낙산 산등성이에 산다는 갖바치를 만나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조선 제일의 도학자 김굉필이 깨달은 <소학>의 경지를 '작은 배움'이라고 폄하하다니 기가 차기도 했다. 조광조는 옷이 다 마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소리쳐 말했다.
"네 주인에게 일러라. 나의 스승 한훤당 선생께서는 30세까지 오로지 <소학>만을 읽어 소학동자라고 불렸느니라. 작은 배움 속에 큰 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그러신 것이 아니겠느냐. 혜화문 선생인지 갖바치 선생인지가 나의 스승을 알지 못하고 네 주인을 현혹시킨 것 같구나. 머잖아 갖바치를 만나 직접 얘기를 나눠보면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니라."
조광조는 당장 혜화문 쪽으로 가 갖바치를 만나고 싶었지만 남대문 밖 주막거리에서 기다릴 김식을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홍귀달 가족을 만나 조문하고 그들을 위로하려고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낸 홍귀달은 갑자년에 이르러 경원으로 귀양을 가자 단천에 도착하여 사사를 당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연산주 때 직언을 자주하여 연산주는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경기 감사로 내보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의 기개는 날뛰는 호랑이 앞에 다가선 듯하였으니 한 선비는 그가 죽은 후 백년이 지날 무렵에 이러한 글을 남겼던 것이다.
'내가 허백당(虛白堂; 홍귀달의 호) 홍공의 글을 보고 대절(大節)을 알았으니 (연산이) 신하의 간하는 것을 거부함과 사냥하는 것을 논한 두 장의 상소문을 보고나서였다. 연산이 한참 음란하고 포악하던 때에는 사람을 희롱감으로 삼아 죽이기를 장난처럼 하여 옥당의 신하들을 내쫓고 간관을 파면시키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떼죽음을 시키어 그 흉포한 위엄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으니, 그 위세가 마치 날뛰는 호랑이가 이를 갈며 입을 벌리고 사람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바른 의논을 굽히지 않고 (임금의) 욕심을 막으려 한 것이 태평스런 조정에서 홀(笏)을 단정히 잡고 밝은 임금과 의논하는 것 같이 하였다. 지금 백년이 지난 뒤에도 공이 붓을 잡고 상소문을 적을 때 신색(身色)이 태연자약하고 죽음의 마당에 있는 형틀을 오히려 편안한 수레처럼 생각하는 기상이 우리 눈앞에 보인다. 아, 장하다.'
두 장의 상소문이라는 것 중에 그 하나는 호랑이처럼 날뛰는 연산주에게 간관을 두둔하는 상소문이었는데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임금이 어디에도 굽힐 데가 없사오나 오직 대간에게는 굽혀야 할 것이니 굽혀서 그 말을 좇아 정치의 업적이 백대의 제왕 중에서 뛰어난다면 그야말로 잠깐 굽혀 영원히 편 셈이옵니다.'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대간의 말이라도 잠시 굽힘은 영원히 펴는 것이라는 주장이었고, 또 하나의 상소문은 사냥을 자제하라는 내용이었다.
'안으로는 우레, 우박 등의 천재가 있고, 밖으로는 외적들이 트집을 잡고 있으니 마땅히 상하가 서로 덕을 닦아 재앙을 소멸시키고 환란을 막는 데 힘써야 할 것인데 사냥은 비록 종묘에 제사지내기 위함이라 하오나 지금 죽이고 사로잡힌 것들이 모두 선왕과 선후(先後)의 적자(赤子; 임금의 어린 자식)들이옵니다. 사냥하는 것만으로 효도를 다하려고 한다면 조상들이 그것을 운감(殞感)하시겠습니까.'
홍귀달은 경기 감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왔으나 또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연산주의 사랑을 받는 궁녀 집에서 무리한 청탁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궁녀가 모함을 하였던 것이다. 귀양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자식들에게 홍귀달은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본래 함창의 한 농사꾼으로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그것은 본시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다. 또한 출세한 것도 내가 한 것이요, 실패한 것도 내가 한 것일 뿐이다. 다만 옛날의 나로 돌아갈 뿐이니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단천에 이르렀을 때 어명을 받든 도사가 말을 타고 달려와 한 장의 공문을 홍귀달 앞에 던졌다. 그때 홍귀달의 태도는 집을 떠날 때와 같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공문을 앞에 놓고 절을 한 뒤 홍귀달은 도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임금께서 나에게 죽으라고 명하셨다."
홍귀달은 공문대로 목 조르는 형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사를 당한 후 그의 네 아들들도 모두 절해고도로 귀양을 갔다. 특히 둘째 아들 언방(彦邦)의 딸이 용모가 수려하여 연산주가 왕자 빈(嬪)으로 삼고자 했으나 홍귀달이 끝내 듣지 않아 연산주의 미움을 크게 사 가족 전체가 극형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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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은
조광조에 비해 조실부모한 김식의 학문은 분명 조광조를 한참 앞서 있었다. 그는 사서삼경을 앞뒤로 줄줄 외울 수 있는데다 이미 주역 점에도 달통하여 도인의 풍모를 풍기기까지 하였다. 다만 조광조가 과묵하여 실수가 적은 반면에 김식은 능란한 화술에 스스로 도취되어 다변(多辯)으로 빠지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정자의 한 기둥에는 홍귀달이 쓴 시 한 구절이 주련으로 걸려 있었다. 네 기둥 중에서 단 한 기둥의 주련이었으므로 정자처럼 개결하고 소박했다.
산비 솔바람이라도 역시 시끄러움을 싫어하노라.
山雨松風亦厭喧
김식이 말한 성 대감이란 무오년에 영의정을 지낸 성준(成俊)을 가리켰다. 원래 창녕 사람으로 성준 역시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갑자년에 직산으로 귀양 갔다가 69세에 사사를 당한 강직한 인물이었다. 연산주는 무인 기질이 강한 성준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했으나 속으로는 송충이를 보듯 꺼려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준이 영상이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정전 옆의 누각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연산주가 재상들이 보는 앞에서 기생을 껴안고 음란한 추태를 벌인 일이 있었다. 임사홍과 유자광이 다투어 술을 올리며 비위를 맞춰주자, 연산주는 더욱 노골적으로 추태를 부렸다. 기생의 저고리를 벗기고 나서는 젖꼭지가 드러나게 하여 손가락으로 퉁기더니 지목하는 재상 앞에 가서 음부를 보여주도록 하는 추행이었다.
그때 성준이 죽기를 각오하고 꼿꼿하게 서서 아뢰었다.
"노신은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께서는 결코 이러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순간, 연산주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뒤따라 기생의 젖가슴을 만지던 임사홍과 유자광의 손이 멈춰지고 눈치를 보던 재상들이 헛기침을 해대니 잔치는 싱겁게 파해버렸다.
여러 재상 앞에서 모욕을 당한 연산주는 성준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폐비윤씨 사건에 경미하게 연루된 그를 연산주는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연산주는 성준의 충직함을 마지못해 존경하는 체 해 왔기 때문이었다.
김식이 성준의 집 부근에서 말했다.
"성 대감의 배짱에 전하도 꼼작 못했지. 총명이 출중하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명상이었어."
"자네 말이 맞아. 성 대감만큼 그릇이 웅위한 재상도 앞으로 드물 것이네."
"무오, 갑자년에 현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소인배들만 날뛰는 세상이 돼버렸어."
"망할 징조지 뭔가."
"뭐가 망한단 말인가."
김식이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조광조에게 되물었다.
"노천,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는가. 방금 한 말을 누가 듣고 고자질한다면 무슨 죄가 씌워지는 줄 아는가."
"난언죄에 대역부도죄."
"삼족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네."
"삼족은 물론이고 팔촌까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네."
농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걷던 조광조와 김식은 성준의 집 앞에서 갑자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성준의 집은 홍귀달의 집보다 더 흉하게 변해 있었다. 흙담은 무너져버렸고, 방문은 누군가가 뜯어갔는지 뻥 뚫려 있었다. 사사 당한 정승의 집이라 하여 살 사람도 없는지 폐가로 변해 방치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조광조와 김식은 성준의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이극균의 집으로 갔다. 이극균 역시 갑자년에 사사 당한 인물로 성준보다 한 살 아래의 강골로 초년에는 무인으로 공을 세웠고, 연산주 때는 좌의정까지 올라 연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극균이 인동으로 귀양 가서 사사당할 때의 일화를 조광조와 김식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도사가 도착하여 어명을 전하기 전에 이극균이 아랫사람을 추궁하듯 엄하게 물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러는가."
도사가 대답 대신에 서둘러 어명을 읽어 내려가자, 이극균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애써 누르며 사약을 단숨에 마셨다. 그런 다음 죽기 위해 불을 지핀 유실(幽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소리쳤다.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돌아가거든 임금께 반드시 아뢰어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넋이 너를 반드시 벌하고야 말 것이다."
이 말을 한 후, 이극균은 장작불에 점점 더 뜨거워진 유실로 들어가 몸에 사약의 독이 퍼지자 피를 쏟고 죽었다. 도사가 돌아가 연산주에게 이극균의 말을 사실대로 전하자마자 연산주는 즉시 형벌을 더 가중시켰다. 도사에게 다시 명한즉 시신의 해골을 쇠망치로 부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연산주 때에 이르러서도 이극균이 좌의정에, 그의 조카 이세좌가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지만 그의 가문은 일시에 멸문의 화를 입고 말았으니 김식과 조광조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극균의 서울 집은 여섯 명의 하인과 다섯 명의 소복 차림의 여인들이 잘 지키고 있었다. 여섯 명의 하인이란 이극균이 두만강변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 정벌의 공으로 3등 공신이 될 때 받은 노비였다. 그리고 다섯 명의 소복 차림의 여인이란 이극균의 아내와 조카 이세좌의 아내, 그리고 이세좌의 세 아들들의 부인이 함께 있으니 그러했다. 이세좌의 세 아들 모두 홍문관 관원으로 수형(守亨)은 사인(舍人), 수의(守義)는 한림(翰林), 수정(守貞)은 수찬(修撰)으로 있다가 귀양을 갔기 때문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은 빈소로 들어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했다. 곡을 하는 동안 소복 차림의 여인들은 빈소로 들어와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눈물을 뿌렸으며, 하인들은 빈소 밖에서 고개를 숙이고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빈소는 마당가에 초가로 대충 지어져 있었고, 상례에는 맞지 않으나 두 사람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극균의 위패 앞에는 그가 여진족을 정벌할 때 입은 갑옷과 칼이 놓여 있었고, 이세좌의 위패 앞에는 그의 관복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연산주가 정전에서 음란한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 자리에서 입었던 관복으로 부끄럽다 하여 다시는 입지 않고 벗어버린 것이었다.
곡을 마친 김식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김식은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잘 드러냈다. 그는 소복한 여인들을 보더니 끝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송구합니다.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왔는데 그러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다니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랩니다. 저희 집에 오면 피해를 입을까 봐서 그런 듯합니다. 그러 함에도 이렇게 조문을 와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지난 가을 이후 몇 분 안 됩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조광조도 한 마디 했다.
"패악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대감의 충직을 표창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겨울을 반드시 견디셔야 합니다."
초가의 빈소를 나와서 김식이 허허롭게 말했다.
"대감 같은 분들이 안 계시니 세상이 텅 빈 듯하네. 이제는 서울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어렵게 되었어. 서울은 이미 적막강산이 돼버렸단 말일세."
이극균의 아내가 뒤늦게 이름을 물었다.
"어디서 온 뉘신지요."
"용인에서 온 조광조라 합니다."
"서울에 사는 김식이라 합니다."
조광조와 김식은 이극균의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서면서 김식이 조광조에게 말했다.
"효직은 소복한 다섯 여인을 보고 나니 무슨 생각이 나던가."
"울컥 치미는 것을 참아냈다네. 선비의 집들이 폐가가 되고, 집들마다 소복한 여인들이 넘쳐나니 이런 세상을 무어라 할지 기가 막힐 뿐이네. 어느 왕조에 이런 비극이 있었더란 말인가."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네. 태평성대에 태어나지 못하고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말일세."
"일찍이 이런 세상은 없었지."
"효직, 이런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하겠는가."
"두 가지의 길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하나는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에서 숨어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효직의 말이 옳은 것 같으이."
"나처럼 생진사시에 아예 나가지 않았다면 몰라도 4년 전에 진사시에 합격한 자네야말로 고민이 되겠구먼.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더 하든지 아니면 벼슬길을 포기하든지 말이네."
김식이 17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자 선비들 사이에서는 천재가 출현했다 해서 화제가 분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김식의 출현은 화려했으나 어쩐 일인지 김식은 벼슬길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주춤거렸다. 진사시 합격 이후에는 용문사를 들락거리며 주역 공부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효직, 자네의 실력이면 생진사시에 장원 합격을 하고도 남을 텐데 자네야말로 왜 나서지 않는 것인가."
"나야 한훤당 선생의 제자가 아닌가."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들은 벼슬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것보다는 도학으로 자신을 담금질하여 군자처럼 고고하게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벼슬에 관심이 없는 효직 같은 사람만 있다면 이 세상을 누가 바로잡겠는가."
"군자란 굳이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다 해도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했네. 깊은 산속의 매화나무가 스스로 꽃을 피워 계곡 아래로 향기를 내려보내는 것처럼 말이네."
"나는 도학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네."
"노천, 어서 말해 보게."
"산속의 매화나무처럼 고고하게 사는 것도 군자의 삶이요, 저잣거리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쌀이 되는 것도 군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노천, 세상으로 나서겠다는 말이군."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네. 전하 밑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전하의 황음과 패악에 동조하는 것밖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대사성 어른이 성균관에 입학하라고 몇 번이나 권유했지만 나서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네."
"그러고 보니 노천은 주역을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렸던 것이구먼."
"사계절 중에서 지금은 죽은 듯 움츠려야 하는 한겨울이라네."
세설도 계속 내리다 보니 신발이 빠질 만큼 쌓였다. 두 끼니를 거르며 걷고 있자니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기운이 떨어지고 추위까지 겹치니 어깨와 턱이 떨렸다.
"술기운마저 떨어지니 더 걷지 못했겠네. 노천이 요기를 시켜주게나."
"좀더 가면 유 정승 댁이 있네. 유 대감은 남부학당 출신으로 내 선친과 죽마고우였다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대감의 성격이 맘에 들지 않지만 오늘은 배가 고프니 고개를 한번 숙여 보겠네."
"연산주 아래서 눈치만 보며 '네, 네'만 일삼아 영의정까지 오른 유 정승 댁에 가자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배가 고프긴 고픈 모양이군."
"그래도 유 정승이 임사홍이나 유자광보다 나은 것은 영상이 되어서도 밤을 새며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지. 어느 날은 한 책을 읽고는 '노부(老父)가 하마터면 이 책을 알지 못하고 죽을 뻔했다'고 한 적도 있다네. 책을 보고 이 정도로 감탄할 줄 안다면 썩 괜찮은 벼슬아치가 아닌가 말이네."
"노천, 자네는 예부터 박학다식한 사람을 좋아했다네."
"밤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양심을 아주 팔아치운 사람은 없지 않은가."
영의정 유순(柳洵)은 흥인문에서 성균관 가는 길에 살고 있었다. 말을 다시 탄 김식이 앞서고 조광조가 뒤따랐다. 유순도 허침이나 안동 출신의 김수동(金壽童)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해치거나 해코지한 일은 없었다. 유순은 허침보다 부드럽고 김수동보다 가벼운 성격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산주 아래서 벼슬과 목숨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자기주장을 내야 할 때도 어름어름하고, 연산주가 무슨 지시를 내리든 '네, 네'만 할 줄 아는 정승이라고 험담을 하였다.
대감 집 행랑채에는 늘 식객이 붐비기 마련이었다. 유순의 솟을대문 앞에는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미끄러운 눈길인데도 한 사내가 말을 빠르게 몰고 와 솟을대문 앞에서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래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대문을 발로 걷어찰 듯이 가까이 다가가 소리 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솟을대문 앞에서 위엄을 부리며 행랑채 아랫것을 부르던 사내가 뒤를 돌아보자 모두들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였다. 다만 김식과 조광조만이 바로 서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연산주에게 팔도를 돌아다니며 반반한 처녀를 뽑아 올리는 채홍사가 되어 권세를 잡은 임사홍이었다. 김식이 투덜거렸다.
"재수 없는 놈을 보았으니 돌아가세."
"저 자가 누구인데 그런가."
"효직은 천하의 간신 임사홍도 모르는가."
"그렇다면 저 자가 팔도를 돌며 닥치는 대로 연산주에게 여인을 잡아 올려 아부한 임사홍이란 말인가."
"저 자뿐만이 아니네. 저 자의 아들도 채홍사가 되었다네."
"헌데 말이네, 알다가도 모르겠거든. 저 임사홍의 아들 중에는 점필재 선생의 제자도 있잖은가. 무오년에 귀양을 갔던 임희재(任熙載) 말이네."
무오년 이후 임희재도 역시 연산주의 미움을 더 사게 되어 화를 입었는데, 임희재가 글씨를 쓴 병풍을 집안에 펼쳐놓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연산주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임사홍 집에 들러 그 병풍을 보았던 것이다. 임희재가 병풍에 쓴 절구는 연산주를 희롱하는 글이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난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 막으려고 만리장성 쌓았구나.
祖舜宗堯自太平
秦皇何事苦蒼生
不知禍起蕭墻內
虛築防胡萬里城
누가 보아도 연산주를 진시황에 빗대어 비웃는 절구였다. 연산주는 임사홍에게 노기를 띠며 물었다.
"누가 쓴 것이오."
임사홍은 사색이 되어 사실대로 말하였다.
"신의 아들이 썼습니다."
"경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오. 내가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의사는 어떠한가."
임사홍은 등골이 오싹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대었다.
"자식의 성질과 행실이 온순하지 못한 것은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주에게 아들을 죽여도 좋다고 아부하였는데, 아들과는 이미 정적이 되어 있었던 바, 임희재가 비록 아버지이긴 하지만 임사홍의 잘못을 연산주에게 죄주기를 바라며 간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김식과 조광조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므로 그 길로 헤어졌다. 김식은 조문을 더 하겠다고 성현(成俔)의 집으로 갔고, 조광조는 떨어지는 해를 붙잡는 심정으로 혜화문 밖의 갖바치 집을 서둘러 찾아 갔다.
"갖바치 어른께서는 지금 좌선 중이라 합니다요."
"좌선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조광조는 부엌에 있는 여인이 초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비녀를 주려다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났을 때 호의를 베푼 초설이라고 믿었다.
"도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여색을 경계하고자 한 말이다. 여인을 무시해서 한 말이 아니니라. "
갖바치는 안방을 자신의 선방(禪房)으로 삼아 수도를 하고, 손님을 맞이하거나 마을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사랑방으로 건너오는 모양이었다. 사랑방에는 선비의 독서당처럼 서책들이 벽에 의지하여 가득히 쌓여 있었다.
조광조는 네 벽을 가득 채운 서책을 보고는 질려버렸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장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불경은 한 벽을 채우고 있었고, 유서와 노장(老莊) 및 제자백가들의 서책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들어차 있었다.
"이게 네 선생이 읽은 책이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요. 어떤 책은 앞뒤로 달달 외우신다고 했습니다요."
"너는 무엇을 배우고 있느냐."
"<천자문>은 배운 지 오래 됐고요, 요즘은 <반야심경>을 배우고 있습니다요."
"<반야심경>이라 하면 불경이 아니더냐."
"네, 선생님께서는 <반야심경>만 3천독(讀)을 하면 세상 이치를 통달하여 걸림 없는 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요."
"그것이 네 꿈이냐."
"도인은 늙어서 되고 싶고요, 젊어서는 역관(譯官)이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요. 그리하여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중국을 거쳐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천축에도 가보고 싶습니다요."
"역관이 되려면 중국어가 기본이 아니겠느냐."
"나으리, 역관이 되고 싶습니다요. 도와주신다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요."
아이가 엎드려 조광조에게 큰절을 하며 말했다.
"도와줄 기회가 온다면 힘이 돼주겠다만 너 스스로도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보아하니 저 <홍무정운(洪武正韻)>이 중국의 음운서다. 저 책을 독파하다 보면 중국말을 하게 될 것이다. 틈틈이 선생에게 배우고 익혀두어라."
"너를 만난 것도 인연이다. 네 이름을 지어줄 터이니 평소에 너를 부를 때 무엇이라 하느냐."
"쇤네가 태어난 곳이 찬새미골이었는지 사람들이 쇤네를 찬새미라 부릅니다요."
"찬새미라면 한자로 한천(寒泉)이다. 앞으로 너를 한천이라 부를 것이다. 네 마음에 드느냐. 말해 보거라."
"찬물을 들이킨 듯 정신이 번쩍 나는 이름입니다요. 나으리, 고맙습니다요."
아이가 일어나 조광조에게 다시 큰절을 하였다.
"앞으로는 신분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야."
"왜 그렇습니까요."
"하늘의 녹을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다면 왜 굶어죽는 사람이 있습니까요."
"천도는 평등한 것이나 사람이 천도를 어기니 그런 것이다."
"천도가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요."
"한천아, 천도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아라.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풀이 있더냐. 독풀이건 이로운 풀이건 간에 다 이름이 있다. 그러니 사람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천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느냐."
"네 선생의 밥은 왜 없느냐."
"아닙니다요. 선생님은 도인이라서 하루에 한 끼만 드십니다요."
"나으리, 쇤네는 따로 먹겠습니다요. 그러니 먼저 드십시오."
한천은 조광조가 겸상을 하자는 데도 여전히 물러나 앉아 거절했다. 양반과 상민이 겸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를 두고 혼자 먹을 수가 없구나. 그러니 이리 와 앉아라."
"나으리,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요."
"무엇이냐."
"제 밥을 들고 부엌으로 가 먹고 오겠습니다요. 그러면 나으리께서도 편히 드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요."
"네가 원한다면 그리 하여라."
조광조는 또 한번 한천의 지혜에 놀랐다. 한천에게는 거칠게 자란 백정 마을 아이답지 않게 막히면 돌아가 흐르는 물 같은 지혜가 있었다. 실제 나이는 14살이나 15살 정도일 것이지만 언행은 2, 3살이 더 들어보였다. 갖바치는 한천을 수제자로 생각하고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불도(佛道)를 가르칠 리 없었다. 유도(儒道)가 대접을 받는 세상에 불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의 분신쯤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갖바치는 한천에게 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우리 같은 천민들에게는 불도가 의지할 만한 것이다. 유도는 군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고, 또 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양반일 뿐이다. 허나 불도는 누구나 다 깨달으면 부처다. 양반이건 상놈이건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되는 것이 불도이니 그렇지 않겠느냐."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도 말했다.
"부처는 인생을 고(苦)라 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선비들의 인생도 고요, 우리 같은 백정들의 삶도 고인 것이다. 그러니 고를 받아들여야만 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무엇 때문에 고인지를 깨달으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정이 아무리 천한 것이라 하더라도 백정의 신분을 받아들여야만 백정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선비가 백정의 행동을 하면 백정이 되는 것이고, 백정이 선비의 행동을 하면 선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도의 요체이니라."
~~~~~~~~~~~
"선생님은 아직도 좌선 중이시느냐."
"막 사랑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요."
한천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갖바치와 조광조는 오랜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한 사람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어 누군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소이다."
"불도를 닦으면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까."
"금강산에는 수도하는 중이 많습니다. 웬만큼 수도하면 백리 밖의 것들도 보이지요. 더러는 천리 밖의 것들을 보는 도인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어다 하지요."
"대사께서 제가 올 줄 알았다니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다 나중에는 선비의 행색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뚜렷해졌습니다. 다만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한 개로 줄어들었는데, 혹시 두 분이 오시다가 헤어진 것은 아닌지요."
"대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루 종일 함께 움직이다가 헤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김식이라는 서울친구입니다."
조광조는 이미 갖바치에게 압도되어 숨이 막힘을 느꼈다. 갖바치는 얘기를 바람이 불어가듯 허허실실 끌어갔고, 조광조는 맞장구를 치며 속으로 놀랄 뿐이었다.
"우리 아이 이름을 한천이라 지어주었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한천이라, 아이의 사주와 딱 들어맞는 이름입니다. 아이의 팔자가 목마른 사람들에게 한 모금의 물 같으니 말입니다."
"한천이가 선생의 법을 잇는 명민한 제자가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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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한 임금이라도 간하는 신하가 5명만 있어도 나라를 잃지 않는다는 <소학>의 한 구절을 말하더니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하는 신하가 없으니 무도한 임금 밑의 양인이 불쌍하고, 그보다는 양인에게서조차 손가락질을 당하는 백정들이 더 불쌍하다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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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갖바치는 한천이 대견하여 헛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버럭 고함을 쳤다.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만 사람은 세 치 혀 때문에 화를 입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공부가 깊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입이 근질근질해도 입을 닫고 있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술상이나 봐 오거라, 이놈아!"
한천이 나가고 없자, 갖바치가 화제를 바꾸어 소리를 죽여 나직이 말했다.
"지금 나라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조광조가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갖바치가 잘라 말했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은 지 오랩니다. 간하는 신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오, 갑자년의 참극 때문입니다."
"참극은 참극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하지 못하는 선비들의 입은 입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막혔다가도 극에 치달으면 뚫리고, 뚫렸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막히고 뚫리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순리나 이치는 막히고 뚫리는 현상 너머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막혔다고 고통스러워 할 것도 없고, 뚫렸다고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집착이요 좋아하는 것도 집착입니다. 사람은 집착을 버리고 순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순리라고 생각되면 가을바람에 미련 없이 낙엽이 지듯 때로는 목숨을 던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빈도(貧道)가 왜 이러한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조광조는 어렴풋이 갖바치의 의도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의 얘기를 끊고 싶지 않아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갖바치가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한훤당 공(公)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숨어 사는 것을 도학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인정(仁政)를 펴던 성종조의 일이니 그것이 그때는 순리였습니다. 허나 패악의 시대에 도학을 닦는다고 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도학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도학이란 숨고 나오는 것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숨는다거나 나온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부름, 즉 순리에 응하는 것이 바로 초월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불가에서는 시절인연이라 하오. 빈도가 보기에는 지금은 도학자들이 세상에 나와 간하는 신하가 되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때라고 보오."
"공부가 깊지 못하다면 더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부를 하다 보면 스스로 힘이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지요. 그때가 바로 나설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한훤당 선생께서 사사를 당하신 후였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그 무엇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세상에 나아갈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 불가에서는 초견성(初見性)이라 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성품, 즉 무한한 가능성, 힘을 본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확철하게 자신의 성품을 볼 때까지 더 밀고 나가야 합니다."
갖바치의 얘기는 당장 세상에 나가기보다는 더 공부를 한 후 나가라는 말이었다. 조광조는 갖바치의 얘기에 반해버렸다. 벼슬길에 있어서 나아가는 진(進)과 물러서는 퇴(退)를 지킴이 군자가 행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는 있었지만 갖바치의 얘기는 차원이 달랐다. 진과 퇴는 다르면서도 같은 불이(不二)한 것이니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순리를 따르라는 말에 반해버렸던 것이다.
사위가 캄캄해지면서 바람은 그치었지만 이따금 눈송이가 나붓나붓 내리었다. 낮처럼 눈발이 거세게 흩뿌릴 기미는 아니었다. 초설은 방문 밖에 서서 갖바치와 조광조가 나누는 얘기를 엿듣곤 했다. 그러한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가 점점이 얹혀졌다가 스러지곤 했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방문 밖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조광조는 천민인 갖바치에게 시종 예를 갖추어 말하고 있었다. 조광조의 공손한 말투 속에는 갖바치에 대한 존경의 마음까지 담겨 있었다.
"대사께 양반들이 가끔 찾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불안해하지요. 너나없이 앞날을 알고 싶어 그러합니다."
"그럼, 대사께서는 사람의 앞날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광조가 취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흥미 있어 하자, 갖바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통(神通)을 얻지 않은 선남선녀라도 누구나 알 수 있지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술 한 잔을 더 강권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조광조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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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주를 마셨으니 대사께서는 숨김없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제가 술잔이 아닌 큰 막사발에다 벌주를 내리겠습니다."
"허허, 무슨 비법이 있어서 앞날을 아는 것이 아니지요. 맑은 물 밑의 돌멩이가 보이듯 사람의 숨은 운명이 보이는 법입니다."
조광조는 서투르게 합장하며 말했다.
"대사께서는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왜 저에게는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어렵지 않다니까요. 오늘의 내 운명을 알고 싶으면 어제의 나를 돌아보면 보일 것이요, 내일의 내 운명을 알고 싶으면 오늘의 나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불가에서는 인과(因果)라고 합니다."
"인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씨앗을 심었으니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지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고작 이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허나 손님들은 자신이 자기의 운명을 만드는 줄 모르고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합니다. 답답하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말합니까."
"할 수 없이 사주(四柱)라는 방편을 쓰지요. 태어난 시(時)와 일(日), 월(月), 연(年)을 사주라 하지 않습니까."
"사주는 정해진 운명입니까."
"태어난 사주를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사주입니다."
"사주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데도 왜 사주를 보는 것입니까."
조광조는 취기를 가까스로 누르며 막힘없이 얘기하는 갖바치에게 묻곤 했다.
"바꿀 수는 없다 해도 조심을 하면 그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대사의 변재(辯才)를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외람되지만 저의 사주를 보아 줄 수는 없겠습니까."
"정암의 사주를 빈도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대사께서 저의 사주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조광조는 몹시 놀라 들었던 술잔을 놓으면서 갖바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갖바치는 초설이 서 있는 방문 밖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초설은 들키기라도 한 듯 움찔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설에게 물어보았소. 한훤당의 제자 중에 나라의 동량이 될 만한 사람의 사주를 알아 오라고 했던 것이오."
"초설이 저의 사주를 알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초설이는 정암을 사모하고 있지요."
"대사님, 저는 이미 내자가 있는 몸입니다. 선비들이 첩을 두기도 하나 저는 도학을 더 깊이 닦기 위해 여색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초설에게 사모의 정을 거두라고 전해주십시오."
"전해주겠소만 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해 보지 않고 어찌 백성을 사랑할 수 있겠소. 그렇지 않습니까."
"초설에게 인(仁)으로 대할 수는 있지만 남자로서 흐트러짐을 경계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암은 깊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오. 어찌 빈도의 말 한 마디로 초설이의 오래 된 정이 끊어질 수 있단 말이오. 낮과 밤의 기운이 만나 안개가 피어오르듯 사랑도 짝이 있으니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갖바치가 놀리듯이 말하자 조광조는 화제를 바꾸었다.
"초설이 알려준 제 사주는 어떤 것입니까. 틀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노천에게 들은 것이니 정확할 것입니다."
"노천이라면 김식에게 전해 들었단 말입니까."
"정암은 초설이가 노천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그러고도 어찌 가까운 동지라 할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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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時)는 무어라 했습니까."
"시는 모른다고 했지요."
"제가 태어난 일은 무어라 했습니까."
"10일이라 했소. 그러니 신유(辛酉) 일이지요."
"제가 태어난 월은 무어라 했습니까."
"8월이라 했소. 그러니 무신(戊申) 월이지요."
"제가 태어난 연은 무어라 했습니까."
"성종 13년이라 했소. 그러니 임인(壬寅)년이지요."
조광조는 자신의 사주를 알고 있는 갖바치에게 항복하듯 술잔을 올렸다.
"잠시 의심했던 것을 대사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여전히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왜 하필이면 저의 사주를 보았던 것입니까."
"지금 우리 조선은 혹독한 겨울에 접어들었소이다. 이때는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나서지 말아야 할 때이지요. 허나 봄에 입을 옷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때이기도 하지요."
"대사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의도는 없지요. 제 눈에 보이는 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어찌 도 닦는 사람이 거짓을 말할 수 있겠소. 빈도는 천민입니다. 세상의 운을 얘기할 수는 있으나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없는 천민이지요. 허나 정암은 빈도와 출신이 다릅니다. 장차 정암의 말 한 마디는 칼이 될 수 있지요. 조정에 나아가 낡고 바르지 못한 구악(舊惡)들을 베어버리는 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사주를 보았던 것입니까."
"정암뿐만 아니지요. 정암이 앞에 설 때 수족이 될 만한 동지들을 이미 모두 보았소."
"누구를 보았단 말입니까."
"남의 사주를 알아 어찌하시려고 그러시오. 정암 자신의 운명만도 헤쳐가기가 버거울 텐데 말입니다."
조광조는 취중에도 방금 들은 갖바치의 말이 자신의 목덜미를 차갑게 낚아채는 것을 느꼈다. 갖바치는 지금 자신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갖바치의 얘기대로라면 자신의 운명은 바뀌는 세상의 중심에 서게 돼 있었다. 갑자기 조광조는 자신에게 다가올 앞날이 불안했다. 그런 운명이 버거웠다. 자신이 낡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베어내는 칼이 된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역할이었으므로 어리둥절하였다.
김굉필을 시봉하면서 보았듯 도학자는 무릇 세상을 떠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학처럼 고고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낡고 바르지 못한 구악들을 도려내는 것이 조광조의 운명이라니.....
초설은 평안도 희천에서 도둑고양이를 지키지 못하여 말리던 꿩을 잃어버렸을 때 김굉필에게 야단을 맞고 있던 중, 김굉필의 제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조광조가 나서서 자신을 두둔했고 결국 김굉필은 노여움을 풀었던 것이다.
'정암님을 가까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암님의 동지들을 도울 수는 있을 것이야. 갖바치 어른께서도 정암님이 두령이 되면 정암님에게 사람들이 몰린다 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돕는 것도 정암님을 돕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야. 정암님이 나를 어찌한다 해도 원망하지 말자.'
초설은 도무지 자신을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 조광조에게 섭섭한 마음을 거두었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어 초설은 다시 밖으로 나가 갖바치와 조광조가 나누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천은 이미 곯아떨어졌는지 코를 고는 소리가 뒷방에서 들려왔다.
갖바치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넘쳤으나 조광조는 술에 취한 듯 했던 말을 반복하곤 했다.
"대사님,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제 사주의 운명을 말입니다. 성종 13년, 8월 10일에 태어났으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을 테고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로 접어드는 백로를 사흘 앞둔 임인년(壬寅年) 무신월(戊申月) 신유일(辛酉日)일 것입니다."
"듣잘 것 없는 빈도의 얘기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오. 빈도가 초장에 불가의 인과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앞날의 운명은 오늘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오늘의 내 모습에 달린 것이지요."
"사주의 운명을 안다면 적어도 가시밭길은 피해갈 수 있는 지혜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것과 다르게 말씀드리겠소. 태어난 달과 일이 강한 금(金)의 기운, 즉 쇠의 기운을 받고 있어요."
"금의 기운은 무엇을 말합니까."
"강하고 구부러지지 않는 것이 쇠가 아니겠소. 하늘의 뜻을 땅에 관철시키려는 기세가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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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일의 운명에서는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강직한 사람에게는 추진력이 있지요. 허나 양보와 타협을 모르니 자신이 고독해질 수 있소이다. 부딪히면 갈등이 생기고 도전을 받고 시련을 겪게 되겠지요.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정암은 호랑이해에 태어났습니다. 허나 태어난 달은 원숭이달입니다. 두 짐승은 공생을 못하지요. 먹고 잡혀 먹히는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잡혀 먹이는 짐승에게 한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 운명에는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내가 무엇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지요.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원숭이는 원숭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무엇을 가리려는 시비를 버려야 합니다. 유도는 불도와 달리 시비에 집착하는 바가 큽니다. 선비들은 군자냐 소인이냐 하고 밤낮으로 가리지 않습니까. 시비를 가리는 데는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충돌이 생기면 불꽃처럼 서로의 기를 소모하다가 재가 되어 스러질 따름이지요."
갖바치는 조광조가 알 듯 모를 듯한 운명의 얘기를 한동안 계속 이어나갔다.
"태어난 해는 금(金)의 기운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헌데 태어난 달은 목(木)의 기운이 있습니다. 마음속의 쇠붙이와 나무가 부딪치면 어떠합니까. 처음에는 나무가 꺾이겠지만 나중에는 쇠붙이도 부러지고 맙니다. 충돌하면 결국에는 상극이지요."
어느새 조광조는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양극단을 모두 가지고 있는 화약고 같은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이었다.
"대사님, 상생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시비를 떠나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요."
"시비를 가리는 것이 선비의 근본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유도의 울타리 안에서는 시비를 초월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인(仁)을 유도의 중심에 내세웠을 것입니다. 시비도 산과 같은 너그러움의 인(仁) 앞에서는 스치는 빗방울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소."
"정암은 바위 같은 사람이야. 정암의 관심은 오로지 도학일 뿐이야."
"평안도 희천에서의 일을 말하는구나."
"그때 정암님이 나서서 저를 감싸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한훤당 선생의 적소에서 쫓겨났을 것이고, 배우고 싶었던 <소학>도 공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갖바치는 초설의 마음이 이미 조광조에게 굳어져 있음을 느끼고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선생님, 정암님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시오."
"정암은 너의 도움을 거절할 터이니 그의 동지들을 도와주는 방법이 있겠구나. 언젠가 그들은 한 배를 타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한 배를 타다니요, 무슨 배를 탄단 말입니까."
"이 나라에 무너진 삼강오륜을 바로세우는 개혁의 배다."
"힘없는 소녀가 그들을 어떻게 돕는단 말입니까."
"너의 힘이야말로 절대적일 것이다."
"선생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넌 용인에서 다장(茶莊)을 하여 부(富)를 얻었다. 이제 용인은 너에게 운이 다한 땅이다. 정암에게 마음이 끌려 용인으로 내려갔지만 이제 운이 다한 땅이니 떠나야 마땅할 것이다. 정암의 동지들이 자주 모일 수 있는 서울에 다장을 마련하거라. 그리하다 보면 자연히 너에게 정암의 동지들이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다행히 노천이 너를 믿고 좋아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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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미 서울에 다장을 마련할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을 뵈러 온 것도 다장의 장소를 구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래, 자리는 정했느냐."
"심정(沈貞)이 소개해 주어 집을 한 채 마련했습니다."
"심정이라면 정암과도 교유가 잦은 사람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는 전생에 바르게 수행한 비구니였어. 그래서인지 속세의 남자 복은 없지만 살아가는 데 도무지 걱정이 없는 팔자다. 전생에 쌓은 공덕이 크기 때문이야."
"선생님, 혼인의 인연을 맺어야만 남자의 복이 있는 것입니까. 일찍이 한훤당 선생에게 <소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금강산 도인이라 불리시는 선생님을 뵙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정복(淨福)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하하."
"선생님, 정암님의 동지들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너나 나나 인과를 믿는 사람이다. 정암의 동지들이 네 다장에 들리거든 술값이든 찻값이든 받지 말거라. 아낌없이 주되 훗날을 생각하여 외상으로 달아 놓아라."
"무주상보시란 주었다는 생각마저 지우라는 보시가 아닙니까. 헌데 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외상으로 남기라니요. 무슨 말씀인지요."
"모두가 여여(如如)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정암의 동지들 중에는 누군가 배반할 사람도 나올 것이야. 얄궂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야 할 인생사다. 그러니 술값 찻값을 돌려받아야 할 못난 사람도 있을 것이야."
"조금 전에 심정이라 했더냐."
"그렇사옵니다."
"그 자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거라."
"정암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입니다."
심정은 성격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말솜씨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오르지 못할 산 같은 존재라면 심정은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봄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김식은 학식을 드러내놓기 좋아하여 상대를 주눅이 들게 하곤 했지만 심정은 그런 적이 없었다.
갖바치가 혀를 끌끌 차면서 중얼거렸다.
"예부터 교언(巧言)에 능한 사람을 경계하라 했거늘, 쯧쯧."
그러나 초설의 마음은 이미 조광조에게 가 있었으므로 심정에게 기울질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심정이 조광조보다 상대하기가 편할 뿐이었다.
입춘 날.
초설은 혜화문 밖에다 심정의 소개로 사두었던 폐가를 개조하여 다장을 차렸다.
심정은 뒷짐을 진 채 공자의 말로 여겨지는 주련의 글을 보더니,
밝은 거울은 얼굴을 살펴보는 수단이고,
지난 일은 지금을 아는 수단이다.
明鏡所以察形
往者所以知今
하고 소리를 내어 읊조렸다. 그런 다음 초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탁이 있으면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말하시오. 그래도 관복을 입고 대궐을 출입하니 세상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이 관복을 벗고 하루만 지난다 해도 우리 집 앞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것이 세상 인심이라니까. 하하하."
심정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관복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말했다.
"나으리, 입춘이라지만 춥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집에서 보낸 아랫것들이 시키는 말은 잘 듣습니까. 일손이 더 필요하다면 내일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제 손 볼 데는 다 보았사옵니다. 오늘 하루 도와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부담스럽사옵니다."
"허허. 초월이는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까. 내 도와주고 싶어서 기꺼이 마음을 내어 그런 것인데 부담스럽다니,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시오. 섭섭하오."
"나으리,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죄송할 것까지야 있겠소."
심정은 자신의 집에서 온 하인들을 보더니 냅다 소리를 지르며 마루로 올라섰다.
"피죽도 못 먹은 가난한 집 아랫것들같이 비실비실 해서는 안 될 것이야! 마당이 패이도록 쓸고 마루에 얼굴이 비치도록 닦거라. 알겠느냐."
심정이 소리치는 것은 초월에게 자신의 호의를 더 드러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하인들은 이미 집안일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다.
"나으리, 종일 쉬지 않고 일했사옵니다. 이제 돌아가 쉬어야 할 것이옵니다."
"일을 더 시키다 달이 뜨면 보내지 그러오. 아랫것들의 버릇을 잘 알지요. 주인이 없으면 너구리처럼 꼼짝 않고 죽은 체하고 있는 놈들이오."
방으로 들어와 앉아서도 심정은 자신의 관복을 이리저리 건드려보며 만족해했다. 연산주 8년에야 별시문과를 급제하여 품계는 높지 않았지만 명망 있는 선비들이 모두 사화를 당하거나 초야에 숨어드는 바람에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에 올라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30대 초반의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심정은 20대의 조광조와는 10여 살의 나이 차이가 났고, 나라의 녹을 먹은 지 몇 년밖에 안된 신진 벼슬아치였다.
심정은 문과를 급제한 문반이면서도 무과 출신의 무반의 벼슬아치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무과 출신들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배포가 세서 심중의 말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뱉는 경향이 있었는데, 심정은 그러한 무과 출신들을 좋아했다. 생각이 단순하여 의심하는 마음이 적고 늘 솔직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무과 출신들은 심정의 계책이나 빠른 머리회전을 부러워했다. 심정을 '꾀주머니'라고 부르며 친분을 유지하려 했던 것도 심정에게 바로 그런 재주가 있어서였다.
무반의 벼슬아치들은 심정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고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특히 채홍사가 되어 연산주의 신임을 얻은 임사홍이나 벼슬아치 장사를 하여 갑부가 된 윤필상은 그들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임사홍을 비호하는 연산주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저수지의 둑이 터질 때는 조그만 들쥐 구멍에서 시작하듯 모반이란 것도 같은 이치였다. 불만이 지속되다 보면 동조자들이 모이게 되고 마침내 역모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머리회전이 빠른 심정은 벌써 무인들에게서 모반의 냄새를 맡고는 머잖아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무반의 벼슬아치들 가운데 박원종은 연산주에 대해서 유독 한을 품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박원종이 마련한 술자리에 심정도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술에 취한 박원종이 피를 토하듯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에게 원한이 하나 있다네. 내 누이가 월산대군의 부인이 아니었는가. 왕족의 부인을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몹쓸 짓을 한 군주를 무어라 불러야 하겠는가. 삼강오륜이 뭔지도 모르는 시정의 잡배만도 못하지 않는가 말이야. 나는 반드시 자살한 누이의 한을 풀어주고 말 것이네. 억울한 여인들이 어찌 내 누이뿐이겠는가. 이런 패악질을 충동한 놈이 바로 임사홍이란 똥걸레가 아닌가. 지난해 임사홍이란 놈이 각 고을에서 3백 명의 처녀를 운평(運平; 기생)이라 하여 서울로 뽑아 올려 연산에게 바치지 않았는가. 간을 빼내어 씹어 먹어도 이 박원종이의 분은 풀리지 않을 것이네. 이보게 심정, 말 좀 해보게.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놈이 임사홍 일당이 아닌가. 어찌 임사홍 일당에게 나라를 맡길 것인가. 우리가 나서 임사홍 같은 천하의 간신들을 처단하고 나라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겉으로는 임사홍을 욕하고 있으나 사실은 역모에 동조하라는 얘기였으므로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심정도 이미 박원종의 배포는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대범한지는 알지 못하였으므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심정이 조광조를 만나 그런 낌새를 슬쩍 띄운 것은 훗날 조광조가 반드시 필요하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벌써 조광조의 학문은 소리 소문 없이 팔도로 퍼져 젊은 사림 중에서 단연 앞서가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심정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 중에는 동갑지기 남곤(南袞)도 있었다. 남곤은 성종 20년에 생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한 문장가로 제법 명망이 높아 연산주 초기까지만 해도 홍언충, 박은, 이행 등 소위 일류 선비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김종직의 문인인 남곤은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출세의 도구로만 삼았기에 벼슬하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청류 사림들에게 은근히 따돌림을 받곤 했다. 더욱이 그의 눈동자는 겹(重瞳)이어서 어디를 쳐다보는지 애매하여 첫인상부터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남곤은 타고난 재주에 비해 관운도 따르지 않는 편이었다. 김종직의 문인들에게 늘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인데도 김종직의 문인이란 이유로 갑자년에 서변(西邊)으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유배 중인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김종직의 문인들이 아닌 심정이었으므로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참 재수 없는 사람이지."
"나으리, 누가 재수 없다는 말씀인지요."
"초월이, 남곤을 아시는가. 자가 사화(士華), 호는 지족당(知足堂)이고."
"그 어른께서 왜 재수가 없다는 것입니까."
"임사홍을 찾아가 엽전꾸러미를 던져주고 조금만 사정을 했어도 갑자년의 고비를 잘 넘겼을 텐데 유배를 가 지금 생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오."
"형벌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옵니까."
"돈으로 안 되는 것이 무에 있겠소. 어서 술이나 한 잔 따르시오."
심정은 초월이 묻는 말을 피해갔다. 세 치의 혀 때문에 몸을 망칠 수도 있으므로 세상의 말을 함부로 전할 수 없었다. 심정은 엉뚱한 말을 꺼내 화제를 돌렸다.
"정암은 행복한 사람이오."
"왜 그러하옵니까."
"초월이가 사모하고 있으니까."
"나에게 정암을 도와주라고 했는데,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소."
"특별하게 생각해 두었던 것은 없사옵니다. 다만 도와줄 기회가 온다면…."
"초설이 부탁한 것인데 여부가 있겠소. 걱정 마시오. 부탁을 잊지 않고 그리하겠소."
"나으리, 약조하셨으니 술 한 잔을 또 받으셔야 하옵니다."
"술 한 잔뿐이겠소. 초설이가 주는 술이라면 밤새라도 마시겠소. 다만."
"다만 무엇이옵니까."
"내 진심도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소."
"호호호. 나으리 은혜를 어찌 잊겠사옵니까. 이 다장도 나으리께서 소개해 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얻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초설이 하는 일이라면 무슨 부탁인들 들어주지 못하겠소."
"나으리, 감사하옵니다."
"헌데 초설이는 무엇을 하려고 다장을 하는 것이오. 혼인을 하면 이런 장사를 하지 않고도 편히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첩으로 오라는 데가 더러 있었사옵니다. 허나 저의 팔자는 남자 복은 많으나 혼자 살아갈 운명이라 하옵니다."
"남자 복이 많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편단심 한 남자에게 지조를 지키며 살아갈 얼굴이오."
"나으리, 관상을 볼 줄 아시옵니까."
"관상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해본 말이오."
초월이 짓궂게 물었다.
"나으리, 제가 지조를 지켜야 할 남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오. 그 자가 누구인 것이오."
"호호호."
초월은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인 셈이었다. 그러나 심정은 초월이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를 조광조라고 생각했다. 심정은 취기를 빌어 말했다.
"초월이의 사랑이 누구인 줄 나는 알고 있소. 바로 정암이 아니오."
"틀렸사옵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이오."
"나으리,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설령 제가 그분을 좋아한들 그분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어찌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사옵니까."
"하하하."
"나으리, 웃지 마십시오. 초월이는 슬픈 소녀이옵니다. 저더러 사모하는 감정마저 거둬달라고 하는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짝사랑마저 가져가라고 하니 말이오."
"나으리, 그래서 초월이는 외롭고 고독합니다."
초월이의 고백을 들은 심정은 술을 한 잔 더 자작으로 따라 마셨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참으로 기분 좋은 술이었다. 초월이와 조광조는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초월이 짝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짝사랑이란 세월이 흐르거나 더 끌리는 상대가 나타나면 불길처럼 뜨겁다가도 차가운 재처럼 식어버리는 법이었다. 심정은 초월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승사자 같은 연산에게 허리를 굽혀 무오, 갑자사화에도 살아남은 위인이 누구인가. 천길 낭떠러지 길을 한 걸음도 조심, 두 걸음도 조심하며 목숨을 부지해 온 심정이 아닌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여기까지 살아 온 심정이 아닌가. 초월이가 나를 좋아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닌가 말이야.'
심정이 술에 취해 벽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계속하자 초월이 심정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으리, 무슨 사연이 그리 깊사옵니까. 저에게 무엇을 숨길 것이 있어 혼자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초월이."
"나으리, 말씀하십시오."
"내가 살아 온 얘기를 좀 해야겠소. 사람들은 나보고 비겁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말이오. 늪에 빠졌을 때 어찌 해야 살아남겠소.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지는 늪에 서 있다면 말이오. 그때는 빠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무슨 말인지 초월이는 이해하리라 믿소. 나는 그리 살아 왔소. 나에게 재주가 하나 있다면 끝없이 기다리는 것이라오. 그것을 함부로 비겁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늪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도 자신의 목숨만을 지키고자 보고만 말 것이옵니까."
"내 그릇은 크지 않소. 군자가 될 수 없는 내 운명을 어찌 하겠소. 살아남아서 내 가족이라도 굶지 않게 하고 내 가문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소."
"형제분이 없사옵니까."
"과거에 급제한 의(義)라는 동생이 있지만 의는 벼슬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로 자처하며 숨어 살뿐이오."
실제로 심정의 동생 심의는 선비들이 왕담(王湛)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진나라 왕제(王濟)의 숙부 왕담이 젊었을 때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재주를 감추고 세상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바로 그 고사(古事)를 들추며 심의를 조선의 왕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실제로 심의가 벼슬을 버리고 바보처럼 행세하여 사화를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하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정은 동생을 만나면 너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면박을 주었다. 자신처럼 벼슬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왜 벼슬을 버리고 숨느냐는 꾸중이었다. 그래도 심의는 끝까지 형인 심정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믿었다. 어느 날인가 심의가 심정의 집에 들러 쥐구멍을 가리키며 '이것은 형이 다음날에 나가고 싶어도 찾지 못할 것이니, 오늘 시험 삼아 한번 나가보는 게 어떠시오' 하고 말한 적도 있었다.
심의가 말한 쥐구멍이란 사지에 이르러서도 살아날 구멍, 즉 지금은 폭군의 시대이니 벼슬을 버리고 숨어살라는 말이었으나 심정이 동생의 말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심정 나름대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처럼 그렇게 훌훌 털어 버리고 사는 것이 편하기야 하겠지만 나는 지금도 의를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소."
"나으리, 동생 분은 결코 어리석지 않사옵니다.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해 어리석은 체할 뿐이옵니다. 좋은 시대가 오면 반드시 동생 분에게 살아갈 지혜를 구할 것이옵니다."
"초월이의 생각이 정녕 그러한 것이오."
"제 생각이 아니옵니다. 낙산 선생님께서 선비가 세상에 나가지 않을 때가 있고 나서야 할 때가 있다고 했사옵니다. 동생 분께서는 지금은 숨어야 할 때라고 여기고 계신 것이옵니다."
"듣고 보니 초월이의 말이 옳은 것도 같소."
심의와 친하게 지내는 성세창, 서경덕, 홍사부 등을 결코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들 모두 벼슬하기를 꺼리어 세상에 나서지 않을 뿐 재주가 비범하고 학문에 능한 인물들인 것이었다.
초월은 뒤늦게 다장의 상호를 명경(明鏡)이라 짓고 간판을 내어걸었다. 무엇이라고 지을까 고심하다가 주련의 첫 자가 마음에 들어 명경이라 했던 것이다. 다장의 이름이 없으니 손님들이 찾아오는 데 불편해 했던 이유도 있었다.
명경은 날로 벼슬아치들에게 알려져 번창할 조짐을 보였다. 처음에는 심정의 지인들이 드나들더니 차츰 조광조의 동지들이 모여들어 휴식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손님이 늘어나면서 명경의 건물도 한 채 두 채 늘었다. 이웃의 민가를 사들여 다실을 한 채 더 마련했고, 연못가에 조그만 정자도 지었다.
명경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의 모양새도 다양했다. 벼슬아치들이 관직을 얻거나 품계가 높아져 벌이는 축하연, 지방 외직으로 나가거나 좌천을 당하여 모이는 위로연, 삭탈관작 당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모이는 전별연, 귀양을 가게 되어 눈물바다를 이루는 술자리,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울분을 토해내는 술자리 등등 명경의 등롱불은 날마다 밤늦도록 꺼질 줄 몰랐다.
명경을 찾아온 손님 중에는 초월이 보기에 기개 있고 은근히 무게를 잡는 성희안(成希顔)이란 벼슬아치도 있었다. 심정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술자리에서 처음 보았는데, 연산주에 대한 배신감이 목에까지 찼는지 연산주의 얘기만 나와도 얼굴이 일그러지곤 하여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심정은 자신의 탁월한 기억력을 자랑하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새 손님을 데리고 올 때마다 반드시 그의 자와 호, 가족 사항까지 세세하게 말했다.
"자는 우옹(愚翁)이시고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창녕이요, 세조 7년(1467)에 태어나셨으며, 성종 1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성종 1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신 분으로 홍문관에 계실 때 선왕(성종)의 총애를 받아 선왕의 정사에 많은 자문을 드린 분이지요. 바뀐 왕조에서도 군기시부정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셨으며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오셨고, 형조참판에 이어 이조참판으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뿐만 아니지요. 선친께서는 돈녕부판관을 지내셨으며 모친은 종실인 덕천군의 따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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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성희안이 분을 삭이지 못했던 것은 하루아침에 종2품의 이조참판에서 무관의 말단직인 종9품의 부사용으로 강등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초월은 눈을 내리깔고 눈치를 살피며 성희안의 술잔에 조심조심 술을 따르곤 했다. 심정이 방에 들기 전 다가와서, '잘 모셔야 할 분이네. 분기탱천하여 화풀이를 어디다 할지 모르거든' 하고 귀띔을 해주었던 것이다.
심정은 술자리 내내 성희안의 분을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썼다.
"전하께서 대감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홍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이런 치욕이 어디 있겠는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네. 칭병하고 양화도 망원정(望遠亭)에를 따라가지 말걸 그랬어."
"대감, 거기서 무슨 시를 지어 올려 전하의 노여움을 사셨습니까."
"이 늙은이가 충심에서 유락에 빠진 전하를 좀 훈계하는 시를 지었지."
망원정의 주연 자리에서 성희안이 올린 시 가운데 '성주(聖主)의 마음은 원래 청류(淸流)를 사랑하지 않는도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술에 취한 연산주는 시를 보자마자 자신을 비방한다고 크게 노했고, 다음 날로 성희안은 참판에서 종9품인 부사용으로 좌천되고 말았던 것이다.
"대감이 아니고서 그 자리에서 누가 전하를 훈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보게, 더 이상 그 얘기를 끄집어내지 말게. 대감이란 자가 하루아침에 부사용이라니 이런 능멸이 어디 있겠는가."
눈치 빠른 심정은 성희안을 위로하는 말을 꺼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대감의 태몽을 보면 가문에 복록이 머잖아 일어날 것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자네가 내 태몽을 알고 있다니 자네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일세."
성희안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어리었다. 지금은 비록 곤경에 처했지만 앞으로 복록이 있을 것이라니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이었다. 심정은 성희안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꾼 태몽을 사람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성희안의 어머니가 태몽을 꿀 적에 한 신선이 다가와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 지팡이를 짚으면 네 집안에 복록이 일어나게 되리라' 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희안에게는 길할 징조로 여겨지는 얘기 하나가 더 전해지고 있었다. 성희안 역시도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상을 당하여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사는데, 하루는 아우와 함께 마를 캐다가 피곤하여 바위에 누워 자게 되었던 바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놀라 깨어 보니 과연 큰 범 한 마리가 앞에 와 어슬렁거렸다. 형제가 돌을 던지니 범은 곧 사라져버렸다.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호식(虎食)을 면한 이를 두고 사람들은 형제의 효성에 범이 감동한 것이라고들 말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대감을 흠모하고 있으니 그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하오니 작금의 치욕에 너무 연연해 마십시오. 공연히 마음과 몸을 상할 뿐입니다."
심정의 말은 위로할 목적의 아부가 아니었다. 세간을 한때 시끄럽게 했던 사실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정승의 종에게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다. 발단은 유생들이 먼저 주인의 세도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갈지자로 걸어가는 종에게 '아랫것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삿대질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종이 갑자기 유생들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던 것이다. 사건은 크게 확대되어 유생들이 연명으로 국법에 의해 폭력을 휘두른 종을 죽여야 된다고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유생들의 상소에 동조하지 못했다. 종은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이 총애하는 아랫것들의 우두머리였고, 좌의정 이극균이 데리고 있는 여종의 남편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조판서 한치형은 사건을 판결하기가 부담스러워 칭병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이에 이극균의 동생 이극돈이 형조참판 성희안을 찾아가 잘 봐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희안도 역시 병을 핑계 삼아 사건의 판결을 미루어버렸다. 그러자 신승선과 이극균이 성희안을 벼르고 있다가 성희안이 조정에 나오자, 헛기침을 해대며 유감의 말을 하였다.
"흠흠, 엄밀하게 따지자면 국법에 따라 종이 죽어 마땅하나 사건의 단초가 된 유생들도 잘한 것이 없으니 적당하게 얼버무리면 어떻겠소."
"어떻게 말입니까."
"종에게 곤장을 살살 치게 명하여 유생들의 체면도 세워주고 종도 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자 이겁니다. 새파란 유생들에게 끌려 판결하다 보면 전례가 세워져 앞으로 난감한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 말입니다."
"대감, 저는 그리 못합니다."
"어허. 인재(성희안의 호)가 기개 있는 줄 알고 있소만 이번에는 내 얼굴을 봐서 한 번 봐달라는 데도 그리 고집을 피우십니까."
"천한 종이 여러 유생들을 폭행했으니 마땅히 죽여야 될 것입니다. 국법으로 정해진 일인데 어찌 대감들을 위해 고친단 말입니까."
"어허, 누가 국법을 몰라서 한 말입니까. 법이란 사람을 살리고자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번에는 공이 융통을 부려 달라는 것이지요."
"아니 됩니다. 국법대로 하지 않고서는 임금님께 아뢰고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성희안이 단호하게 나오자 두 정승은 헛기침만 하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열해 있던 신하들도 모두 도리질을 하며 송구해 했다. 다음 날 성희안은 형조판서 한치형이 끝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집행관이 되어 이극돈의 종을 문초한 다음 나장에게 명하여 곤장을 거칠게 쳐 죽게 하였다.
명경에 자주 나타나는 사람 중에는 장정(張珽)이란 무과급제 출신도 있었다. 몸이 근육질로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보이고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었다. 수원부사로 있을 때 장녹수에게 밉보여 파직을 당한 그는 오갈 데가 없어져 최근에는 심정과 명경에서 술친구를 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성희안처럼 좋은 편이었다. 변방에서 수원부사가 되어 올라온 후, 장녹수에게 빼앗기다시피 한 수원 땅의 농토를 양인들에게 돌려주어 명관으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너무 상심 마십시오. 인재에게 유생들이 있다면 부사께는 수원 땅의 농민들이 있잖습니까. 언젠가 그들이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래도 궁궐을 지키는 어영청(御營廳)의 장관(將官)보다는 수모가 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정이 궁에서 장녹수를 호위하는 어영청의 부장(部將)을 들먹이자, 장정은 심한 욕설을 해댔다.
"천하에 요망한 장녹수 년을 호위하다니 사타구니에 달린 남근을 떼어버릴 일이지. 아니 그렇습니까. 사내놈들이 할 짓이 없어 종 출신인 장녹수의 호위 장교가 된단 말입니까. 이건 의리에 죽고 사는 무반들의 치욕입니다."
"어영청의 그 자들인들 좋아서 하는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전교가 있으니 사가에서 궁으로 들어오는 장녹수를 경호하고 있겠지요. 보세요, 그런 그 자들에 비해 비록 파직되었다고는 하지만 부사께서는 얼마나 다행입니까."
"음, 그건 정지(貞之; 심정의 자)의 말이 옳습니다."
"더구나 부사께서는 수원 농민들에게 명관이란 칭송을 듣지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것이 언젠가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난 그 장녹수 년이 전하를 꼬드겨 사가의 이웃에 있는 민가들을 헐더니 간덩이가 커질 대로 커져 수원 땅까지 욕심을 내 사들였다고 믿소. 이 장정이 수원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것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말입니다. 힘없는 농민들이 겁을 먹고 판 것이지요. 이 장정이는 부사를 못할 망정 그런 꼴을 보고 참지 못하는 성미지요."
누구라도 꾀주머니라 불리는 심정을 만나고서는 분기를 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심정은 사람을 교묘하게 요리하는 재주가 있었다. 장정이 명경을 자주 찾는 이유도 바로 심정이 자신의 울분을 달래주기 때문이었다. 심정은 사람들의 장점을 살리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으므로 한약재의 감초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심정이 모든 사람들을 명경으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는 인물들은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군기시부정 신윤무(辛允武)나 군자시첨정 박영문(朴永文)과는 술 한 잔 나눈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행동에는 어딘지 의심스러운 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신윤무가 연산주에게 불만이 큰 박원종과 성희안의 집을 드나드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정은 신윤무의 수상쩍은 행동을 두 가지로 추측했다. 그 하나는 연산주의 첩자 노릇일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연산주의 몰락을 냄새 맡고 미리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 편 저 편에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양다리를 걸쳐둔 식이었다. 어느 시대이건 양다리를 걸쳐두고 세력을 좇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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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김식의 동지들은 아직 권력의 맛을 모르는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명경에서 만나는 그들은 도학이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같은 것을 화제로 삼았다.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불만은 없었으나 현실에 안주하는 벼슬아치들에 대한 비판은 컸다. 그래서 김식 등은 심정과 함께 오는 무리들과 한 자리에서 마주치는 것을 꺼려했다. 특히 얼굴이 황소처럼 우락부락한 박원종이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운 장정을 만나면 자리를 급히 피하거나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루는 김식이 초월에게 심하게 불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저 자들이 명경을 찾는 한 우리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오."
"왜 그렇사옵니까."
"그 자들은 임금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들이오. 임금님께 직언을 할 것이지 왜 이 명경에서 소인배처럼 뒷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오."
"박원종 대감이나 장정 부사님이 임금님께 직언을 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좌천 당하고 파직 당한 것이 아닙니까."
"난 그 자들하고 마주치는 것이 싫소. 그 자들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 무언가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오."
할 수 없이 초월은 후문을 내어 김식의 지인들이 오면 별채를 내어주었다. 그런 후부터는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정문은 혜화문 쪽으로 길이 나 있고, 후문은 청계천 쪽으로 길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후문을 만들어 낸 날, 김식보다 두세 살 아래로 보이는 김정(金淨)이 처음으로 명경에 들었다. 초월은 김정의 첫인상이 나이에 비해 석상처럼 무뚝뚝하다고 느꼈다. 말과 웃음이 지나칠 정도로 적었던 것이다. 그런 탓에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고, 김식이 옆에서 과묵한 그를 소개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상을 알 수 있었다.
"충암(沖庵; 김정의 호)을 소개하겠소. 본관은 경주이고 경순왕의 후손이지요. 3세 때 할머니에게 공부를 시작하였고, 소싯적에 이미 <대학>을 능히 외웠고 14세에 초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복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과거(科擧)의 문장은 족히 배울 것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고 하오. 이후 경(敬)과 정(靜)을 익히는 공부를 주로 하였으며 노장 사상에도 깊이 심취하여 식견이 실로 남보다 한 등 높은 분이라오."
이처럼 과찬을 했는데도 김정은 별 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보기에 따라 상대를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초월은 김정의 그런 무뚝뚝함이 매력으로 보였다.
김정은 초월이 술을 따라 올렸을 때도 말없이 받아 마시기만 했다. 김식이 농을 걸어와도 마찬가지였다.
"자네의 언행은 성인 같이 너무 맑단 말씀이야. 맑은 곳에 고기가 모일까. 좀 탁해지면 어떻겠나."
"형께서는 탁한 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맑은 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노장(老莊)을 읽었다는 사람이 왜 그리 고지식한가. 탁한 물, 맑은 물이 섞이는 드넓은 바다가 되라는 것이지. 아니 그런가."
"바다가 썩지 않는 것은 맑은 강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자네 말도 맞고 내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네."
"지금은 맑은 강물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세상이 너무 썩어 냄새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까닭도 바로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 아닌가."
조광조의 동지들이 명경에 모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잃어버린 하늘의 도를 되찾자는, 즉 과거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되기보다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사단(四端; 仁義禮智)을 실천하는 도학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공감대였다. 그런 신념 때문에 김식 등은 혁명을 하여 세상을 바꿔보자는 것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세상을 혁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개혁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무인이 앞장 서는 것이 쉽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문인이 나서 주도하는 것이 쉬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인에게는 변화를 담아 낼 이념과 준비가 부족하고, 문인에게는 새롭게 바꾸어갈 추동력과 일사불란한 결집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김정은 초월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명경을 나서기 전에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한 뒤 두 마리의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는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 초월에게 주었다. 초월은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표구를 하여 침실에 걸어두고 매일 쳐다보다가 어느 날 그림을 떼고 말았다.
두 마리의 다정한 새를 보고 있으려니 조광조를 사모하는 자신이 문득 초라하고 외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조광조는 여전히 명경을 찾지 않고 있었다. 그를 위해 명경을 내었건만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초월은 짝을 찾는 한 마리의 새처럼 사모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조광조의 동지들이 명경에 들를 때마다 조광조의 소식을 기다리곤 했다.
조광조의 동지 중에서 김식과 김정, 그리고 박훈(朴薰)이 명경을 자주 찾아주었는데, 박훈은 김정과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말수는 적었으나 얼굴에는 늘 온화한 화기가 돌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도 역시 과거 공부보다는 행실을 닦아 의리와 지조를 지키는 데 관심이 컸기에 조광조와 통하는 바가 많았다.
초월은 마음이 너그럽고 덕스러운 박훈에게 마음속의 말을 꺼내기도 했다.
"정암님은 서울에 언제 오십니까."
"정암은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이오. 정암은 아직도 자신의 공부가 깊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오."
"낙산 도인께서는 정암님이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될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라면 서울이 아니겠습니까."
"초월이 정암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려."
"맞습니다. 정암님을 그림자처럼 뒤에서 돕고 싶어 그렇습니다. 한훤당 어른의 적소에서 쫓겨날 뻔했던 나를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써주면 내가 전해주겠소."
"소용없는 일입니다. 정암님은 저를 대할 때 얼음처럼 냉정하십니다."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으니 그럴 겁니다."
"서울에 들러 문인들과 탁마하는 것도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명경을 차린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헌데 정작 명경의 주인공인 정암님이 오시지 않으니 문득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편지를 하지 않겠다면 방금 얘기한 말을 반드시 정암에게 전해주겠소. 아니, 전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월이의 맑은 마음이 어찌 전해지지 않겠소. 반드시 응답이 있을 터이니 너무 성급해하지 말구려."
박훈의 말은 하나도 거슬리는 데가 없었다. 말씨의 부드러움은 봄바람 같았고, 언행은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초월은 박훈에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러자 박훈은 초월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내주며 타일렀다.
"정암을 이해하시구려. 정암이 우리처럼 나서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인 줄도 모르겠소. 세상에 더 크게 쓰이기 위해 하늘이 그를 더 숨어 있게 하는 것이 틀림없소.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 드오. 그러니 정암을 돕는 것은 그가 더 숨어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겠소."
그날 이후 초월은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박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냈고, 또한 박훈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훗날 조광조의 동지가 된 사람들 중에서 서울 인수방(人壽坊)에 살면서도 명경에 가장 늦게 출입한 사람은 김구(金絿)였다. 그는 조광조보다 6살 아래였으나 16세에 한성시에 장원으로 뽑힐 만큼 천재였으므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명경에 늦게 나타난 것은 왕희지의 필법과 문장에 대한 자존심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명경에 드나드는 김식이나 박훈을 만나지 않고도 스스로 도학을 일구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초월은 자신보다 어린 김구였으나 예를 다 갖추어 대했다. 그러자 김구는 초월이 마음에 들었던지 즉석에서 왕희지의 필법을 본받은 서체로 글을 한 점 써내려갔다.
順天者存 逆天者亡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에 거역하는 사람은 망한다.
김구는 하늘을 '하늘의 도'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도학의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붓을 벼루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김구는 방금 쓴 글의 뜻을 자신의 방식대로 중얼거렸다.
'하늘의 도에 순종하는 자는 살고, 하늘의 도에 거역하는 자는 망하도다.'
용인 심곡리.
연산주가 궁에서 내쫓겨 폐주가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초월이 운영하는 명경에 막연하게 퍼져 있을 무렵, 용인 심곡리 조광조의 초당은 도학의 열기가 한여름의 더위처럼 꺾일 줄 모르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조광조의 동지들이 점심 후 짧은 휴식을 취한 뒤 <근사록>과 <소학> 중에서 각자 의심나는 대목을 가지고 토론에 열중해 있었고, 초당 뒤의 느티나무 가지에서는 제철을 만난 매미가 한껏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맴맴맴, 맴맴맴.
각자의 복장은 어디서나 몸과 마음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조광조의 제안에 따라 비록 방 안이지만 외출할 때처럼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갓끈을 맸으며 무명 바지저고리를 정갈하게 입고 있었다.
조광조의 부인 한산 이씨가 가꾼 텃밭의 상추와 무 잎도 아침나절에 지나간 소나기를 맞아 더욱더 푸르게 자란 느낌이었다. 이씨는 텃밭에서 오줌을 누고 나와 초당 댓돌에 놓인 짚신들을 가지런히 했다. 그런 뒤에야 마을 앞의 샘터로 나가 밀린 설거지를 했다. 마침 마을의 늙은 아낙이 빨래를 하다가 말했다.
"또 손님 왔구먼요.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요."
"팔도에서 온 사람들이지요."
"선비들 맞지요."
"그렇답니다."
"나이들도 다 찼던데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답니까."
"고상한 공부랍니다."
"무슨 공부가 고상한 공부간요."
"과거공부도 아니고 도술공부도 아닌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서 책만 보는 공부지요."
이씨는 남편인 조광조가 연마하고 있는 것을 고상한 공부라고 얼버무렸다. 과거를 위한 공부도 아니고, 신통(神通)을 위한 공부도 아니니 이씨가 보기에는 목에 걸린 체증처럼 늘 답답하게 여겨지는 공부였던 것이다. 가끔 아버지 첨절제사 이윤형이 서신으로 사위인 조광조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고상한 공부라고 답하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에게는 뜬구름을 두고 논하는 고상한 공부가 아니라 군자의 길을 밝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부였다. 아침저녁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닦는 유도(儒道)를 실천하는 공부이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출세하여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하고 밝히는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씨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돌아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초당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가가 보니 남루한 옷차림의 손님이 초당의 말구종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씨 눈에는 손님의 몰골이 비록 거지 행색이었지만 눈빛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공부하는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손님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뒷짐을 진 채 큰소리로 말구종을 나무라고 있었다.
"어서, 네 주인을 불러 오렷다."
"신분을 알려주셔야 말씀 드릴 것이 아니옵니까."
"쯧쯧. 공부하는 선비집의 문턱이 이리 높아서야. 네 주인의 인품을 욕되게 하지 말고 어서 말씀드리지 못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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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구종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조광조의 지시이기도 했다. 동지들이 사랑방에 모여 공부할 때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하였던 것이다. 이씨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난 뒤 말했다.
"어디서 온 뉘신지요."
"능주 고을에서 온 양팽손이라 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씨가 초당 마루로 안내했다. 그러나 양팽손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정암께서 나를 모를 것이오.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허나 만나면 마음과 뜻이 즉시 통할 것이니 걱정 마시오."
양팽손은 하인의 융통성 없는 접대에 기분이 나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다. 누더기를 입은 차림새와는 딴판이었다. 이씨에게도 말투가 자못 권면하는 식이었다. 이처럼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이씨가 사랑방 앞에서 조심스럽게 조광조를 불렀다.
"손님이 왔습니다."
"뉘라고 하던가요."
"능주에서 온 양팽손이라 합니다."
조광조는 처음 듣는 이름이어선지 방으로 들라 하지 않고 자신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가 보아도 양팽손은 제법 양반 흉내는 내고 있었으나 다분히 촌티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머리에 얹힌 낡은 초립은 삐딱했고, 누더기 바지저고리는 땀과 먼지에 절어 냄새가 나고 지저분해 보였다. 홀쭉한 개나리봇짐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조광조를 대면한 양팽손이 고개를 먼저 숙였다. 대여섯 살 정도 어리게 보이는 양팽손이었다. 조광조가 예를 갖추어 서울 말씨로 물었다.
"저를 찾아온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정암 선배를 찾아 천 리 길을 걸어왔습니다."
"능주라면 천 리 밖에 있는 고을이니 그리 될 것입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먼 길을 나선 것입니까."
"유도를 바로 세우고자 힘쓰는 분이 이 나라에 정암 선배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고견을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조광조는 양팽손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누더기 옷에서는 쉰 땀 냄새가 진동했으나 그의 생각에서는 난초의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조광조는 양팽손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어서 드시지요."
방 안에는 김식과 김구, 박훈 등이 있었다. 양팽손이 방에 들자마자 김식이 코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조광조가 말했다.
"능주에서 온 양팽손 동지를 소개하겠네."
김구가 의외로 반갑게 양팽손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구라 하오. 선대가 광주(光州)에서 살았소. 능주라 하면 광주의 무등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고을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광주의 무등산 남쪽에 있습니다. 능주에서 대유(大柔; 김구의 호) 형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김구는 양팽손과 동갑이었으나 이미 16세에 한성시에 장원을 했고 이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재원이었다. 그런데 천재는 천재가 알아주는 법이었다.
김안국은 7세 때 독서할 줄을 알았고, <소학>의 '효자로다. 민자건(閔子騫)이여'라는 장에 이르러 "내 마땅히 이것을 본받겠다"고 다짐했으며 12세에 유학의 대의를 깨닫고 무슨 글이든 세 번을 넘지 않아서 능히 외운 천재로 소문 난 사람이었다. 바로 그 김안국이 일찍이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장원한 적이 있으나 방(榜)을 낼 때 한 사람을 두 장원으로 낼 수 없다 하여 진사시는 2등이 되었는데, 이를 평생 한으로 여기던 김안국이 자신보다 어린 김구가 생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됐을 때 시관들이 또 전례를 들자,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고 분연히 말하여 김구를 두 장원으로 뽑았던 것이다.
김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능주까지 소문이 나 있다니 부끄럽습니다. 재주는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도와 덕이 우리보다 앞선 정암 형이 으뜸이지요."
김구는 팔도의 젊은이들에게 천재로 소문 난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김식도 재주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었다. 비로소 김식이 찡그렸던 얼굴을 펴며 말했다.
"과거로 임금을 뽑는다면 이 김식이도 빠지지 않을 것이오. 하하하."
농담으로 말했지만 사실이었다. 김식은 도학뿐만 아니라 음양(陰陽), 이수(理數), 문장 등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 시험으로써 임금을 뽑는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농담을 했던 것이다. 그제야 양팽손이 좌중을 둘러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야 한미한 집안의 서생이오만 스승은 송흠이라 하오."
"송흠이라, 송흠이 누구시더라."
박훈이 송흠을 떠올리지 못하자 인물백과사전으로 불리는 김식이 말했다.
"송흠 선생이라 하면 세조 5년에 영광에서 태어나시고 성종 24년에 홍문관 정자(正字; 정 9품)가 되신 분이오. 이후 낙향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찌 되었소."
"찾아온 제자들을 가르치다 선친의 상을 당하여 상기(喪期)를 마친 뒤 남원교수(南原敎授; 종 6품)로 제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런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스승 김굉필과 송흠 간에 교유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해 내고는 다시 한 번 더 양팽손의 손을 잡았다. 당시에도 초면에 통성명할 때 스승을 묻고 선친을 소개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선생의 지인이 송흠 선생이고, 송흠 선생의 제자가 학포(學圃; 양팽손의 호)인데 어찌 반갑지 않겠소. 동지들 아니 그렇습니까."
조광조는 양팽손에게 정여해의 안부도 물었다.
"능주 해망산의 돈재 선생도 안녕하신지요."
"한훤당 선생의 부음을 듣고 몸이 더욱 상하셨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재 선생도 우리 한훤당 선생과 지음의 동지였지요. 더욱이 점필재 선생께서 돈재 선생을 일러 상례가 으뜸인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돈재 선생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능주의 유도(儒道)가 융성할 것이니 그곳의 풍속이 아름답겠습니다."
조광조는 세조 때 능주 교생들이 혁명군처럼 과격한 행동으로 양인들을 선동한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향교의 교생들이 유도를 현창한다 하여 능주 현령의 비호 아래 절과 암자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이다.
"능주의 유도는 아직 미미합니다. 돈재 선생이 해망산에 독서당을 짓고 고군분투하시고 있으나 건강상 많은 학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저는 장성으로 가 송흠 선생 문하에서 배움을 구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능주 교생들의 열기를 감안할 때 제자들을 가르칠 선생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때도 지역정서라는 것이 있었다. 정여해는 길재에서 비롯하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져 온 영남도학의 문인이었으므로 호남도학을 추종하는 교생들과는 거리감이 자못 있었다. 호남출신의 교생들은 선대가 영남에 뿌리를 둔 정여해보다는 호남에서 태어나 공부하여 선비가 된 최부와 송흠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땀을 연신 닦던 박훈이 세족(洗足)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날이 사뭇 더울 때는 토론하는 것을 멈추고 피서를 하게 마련인데, 계곡으로 나가 찬물에 발을 담그고 쉬는 것을 세족이라 했다.
"여보게들, 멀리서 손님이 왔으니 오늘은 그만 토론하는 것을 접고 세족을 나가면 어떻겠소."
방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표시했다. 조광조가 하인에게 미숫가루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항아리에 미숫가루를 담아 가져오너라."
이에 술을 좋아하는 김식이 말했다.
"정암, 세족에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신선이 되지 않겠는가."
"노천, 맑은 계곡 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술 냄새까지 묻혀야 하겠는가."
"정암, 나는 때로 군자가 되기보다는 신선이 되고 싶으이. 이처럼 더운 날에도 초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나들이를 해야 하는 군자의 고지식함 나는 참을 수 없단 말이네. 허리에 술이 든 호리병을 차고 벌거숭이가 되어 바람처럼 훠이훠이 거니는 신선의 자유로움이 부럽지 않은가."
김구가 하인을 시켜 거문고를 챙겨 오느라 뒤늦게 합류하여 물었다.
"정암 선배님, 어디로 갑니까."
"오 리쯤 가면 함제봉 계곡이 있지요. 심곡리에서 가장 가까운 계곡이라오. 서울에서는 무엇을 하며 피서를 하오."
"요즘엔 봉희(棒戱)라는 것이 유행입니다."
"봉희라구요."
조광조로서는 처음 듣는 놀이 이름이었다.
"세조 임금이 즐겨 보던 왕실 놀이로서 타구(打毬) 혹은 격봉(擊棒)이라 하는데, 요즘에는 서울의 양반들까지 즐기는 놀이가 됐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봉희는 숟가락(匙)처럼 생긴 기다란 봉으로 계란 크기만한 공을 때려 사발 모양의 와아(窩兒; 움집)에 넣는데, 한 번에 공이 들어가면 산가지 2개를, 두세 번 쳐서 들어가면 산가지 1개를 얻는 놀이였다. 산가지를 많이 얻기 위해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는 등 여러 방법으로 공을 요령껏 넣지만 타수가 적은 사람이 이기는 규칙의 놀이였다. 공이 멀리 날아가므로 넓은 장소가 필요한 봉희는 왕실이나 높은 벼슬아치들만 즐겼는데 최근에는 차츰 퍼져 서울의 양반이나 돈 많은 장사치들까지 하게 된 모양이었다.
"대유(김구의 자)도 봉희를 해보았소."
"어찌 제가 봉희를 하겠습니까. 양인들의 논밭을 사들여 벼슬아치들이 즐기는 놀이가 봉희가 아닙니까. 헌데 어찌 제가 그것을 즐기겠습니까. 저는 평생 봉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밭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봉희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김구가 봉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자 김식도 한 마디 거들었다.
"대유의 생각에 나도 동감이오. 논밭이 부족하여 흉년이 들면 양인들이 굶는 세상에 멀쩡한 논밭을 봉희장(棒戱場)으로 만들어 봉희를 즐기다니 그것을 즐기는 벼슬아치는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내가 조정에 나가는 일이 있다면 전하께 모든 벼슬아치들이 봉희를 금하도록 주청을 드리겠소. 내가 알기로는 세조께서도 비가 오는 날 봉희를 구경하다가 환관 백충신(白忠信)이 벼락을 맞고 쓰러지자 하늘의 꾸짖음이 이와 같으니 피거(避居)하여 스스로 경계하겠다고 한 적이 있소."
그러나 박훈은 온건하게 반대했다.
"봉희 자체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치는 벼슬아치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광조가 웃으며 말했다.
"형지(馨之; 박훈의 자)의 말이 옳습니다. 때를 모르는 것을 철부지라 하지 않습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봉희를 즐기는 철부지, 즉 소인배들이 문제지요."
"정암, 봉희란 놀이를 국법으로 금하지 않는 한 먼 훗날에도 소인배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봉희만을 즐길 것이오. 그것도 가보나 금전을 걸어놓고 내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백성들 생활이야 어찌 됐든 소인배 벼슬아치들은 자신들만 배부르고 즐거우면 그만이니까."
이윽고 함제봉 계곡 어귀에 도착하니 산의 청랭한 기운이 다가왔다. 한여름의 불볕더위도 찬 계곡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조광조와 김구, 그리고 양팽손은 반석을 찾아가 앉았고, 박훈과 김식은 웃옷을 훌러덩 벗고 천진한 아이처럼 자맥질을 해댔다.
김식은 박훈에게 장난을 걸곤 했다. 물속에서 박훈의 남근을 슬쩍 잡아당기고는 박훈이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자, 천연덕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미안하이. 내 다리인 줄 알고 잡았다네."
이번에는 박훈이 능청맞게 보복을 했다. 김식이 숨넘어가듯 소리치자 박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것이 맞는가. 갑자기 오그라든 내 다리가 걱정되어 잡아당겨 보았다네."
김식과 박훈이 어깨동무를 하고 물속에서 나오자 양팽손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의 우정이 부럽습니다."
사실 그들의 모습에서 십수 년 후에 불어 닥칠 살생의 그림자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뿐 아니라 반석에 정좌하고 앉아 있는 조광조도 마찬가지였다. 조광조의 풍채는 이미 도학으로 갈고 닦여져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했고, 그의 태도에는 한 점의 위선이나 위악이 없었다. 음률에 달통한 김구가 두 손으로 거문고 줄을 뜯으며 시를 읊조렸다.
홀로 한가한 곳에 있으니 오가는 이 드물고
오직 달을 부르니 가난하고 외로운 나를 비추네
그대 생각으로 나를 묻지 말게
넓은 바다 안개 물결, 첩첩 산들이 가득하다네.
處獨居閒絶往還
只呼明月照孤寒
憑君莫問生涯事
萬頃煙派數疊山
김굉필의 <書懷>, 즉 '회포를 적다'라는 시였다. 김굉필은 조광조의 스승이었으므로 조광조는 김구가 거문고를 뜯는 동안 시종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였다. 일찍이 김일손이 신금(神琴)이라 하여 거문고를 잘 탔으나 김구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반석에 앉은 일행들이 재청을 하자 김구는 다시 거문고를 잡았다. 이번에는 남효온의 시를 읊조렸다.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을 올리니
뭇 사람의 평판이 자못 시끄럽구나
부질없이 손자(孫子; 당나라 손창윤)의 호를 얻었고
짤막한 도롱이 걸치고 추강(秋江)에 왔도다.
소릉 복위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사람들이 당나라 손창윤과 같다 하고 미치광이라 불렀던 바 이에 남효온은 굴하지 않고 시를 한 수 지어 남겼던 것이다. 함제봉 계곡으로 피서를 나온 조광조 일행은 세족의 시간을 스스럼없이 보내고 있었는데, 능주에서 올라온 양팽손도 어느새 그들과 쉽게 어울렸다.
"정암 형이 허락한다면 초당에서 며칠 간 머물다 가구려."
"모두 만나고 싶었던 분들이오. 정말 그러고 싶소."
"도학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 중에 무엇이 가장 크겠소. 권력을 쥐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쥐는 것도 아니고, 부를 얻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일이 아니겠소."
그 이후 양팽손은 나이가 같은 김구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동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함제봉 계곡을 더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세족의 즐거움을 접어야 했다. 서울 쪽의 하늘에서 먹구름장이 몰려오고 있었다. 장대비를 쏟아 부으려는 듯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연산주의 미움을 사 하루아침에 참판 직에서 물러나게 된 성희안은 명경에 나가거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솟구치는 화를 다스렸다. 그날은 집에서 재산과 가노(家奴)들을 관리하는 사인과 함께 술을 마셨다. 사인은 성희안의 고향인 창녕에서 올라와 이십여 년 동안이나 충복 노릇을 해 왔으므로 성희안의 마음을 환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성희안은 그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먼 조카뻘이었으므로 창녕조카라고 예우해 주었다.
"창녕조카, 신윤무라는 자가 있지 않는가."
"군기시부정 신윤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오늘도 우리 집에 와 한 잔 하고 가겠다고 하네. 헌데 난 그 자가 아직도 믿기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난 나에게 줄을 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찾아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네."
"대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신윤무는 임금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인이 성희안더러 경계하라고 한 것은 신윤무가 연산주에게 충성하기 위해 주고받은 이야기를 고자질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 눈에는 그리 비치는가."
"대감, 그렇지 않습니까."
성희안은 수염에 묻은 술을 손으로 닦더니 말했다.
"그 놈의 정체를 알 수 없단 말이야. 내 앞에서 전하를 비난할 때도 있으니 도대체 놈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말이네."
"그것은 대감의 생각을 떠보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까. 날 안심시키고자 위장한 것일까."
"아무래도 신윤무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그 사람 겁이 없는 사람이야. 감히 전하를 비방하다니. 내가 고변한다면 그 자는 물론 삼족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사인은 성희안더러 신윤무를 더욱 경계하라고 말했다.
"대감, 신윤무를 믿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대감의 속마음이나 생각을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네. 한 마디로 신윤무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 민심이 전하를 떠나 있음을 간파하고는 전하와 박 대감과 나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이네."
"세를 규합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혁명은 사람 숫자가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닐세. 혁명에 밑그림을 그리는 지략가가 한 사람,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우두머리 한 사람, 조정에서 인망이 두터운 높은 벼슬아치 한 사람이면 천하를 능히 바꿀 수 있는 것이네."
사인이 성희안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물었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인적이 끊기고 멀리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성희안은 해질 무렵부터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에 사인과 얘기를 나누다가도 가끔 입을 다물곤 했다.
"대감께서 말씀하신 그 세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흠,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본다는 영리한 자네가 맞춰보게나."
사인은 망설이다가 성희안이 뭘 꾸물거리느냐는 듯 의뭉스런 미소를 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밑그림을 그리는 지략가는 대감이옵니다. 소인이 알기로는 때를 알고, 그것을 손에 쥘 줄 아는 사람은 대감이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옵니다."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우두머리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평성부원군 박원종 대감입니다. 실제로 박원종 대감은 무부(武夫)들의 주군이나 다름없습니다. 무부들은 박원종 대감의 명이 떨어지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놓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인망이 두터운 사람은 누구인가."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기대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만 그래도 인망이 있는 한 사람 정도는 가담해야 세상의 인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유순종 대감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희안은 만족하여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나의 복심(腹心)일세. 아니 그런가. 내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임금 정도야 능히 폐위시킬 수 있을 것이네."
성희안에게 칭찬을 받은 사인은 새삼 감격하여 말했다.
"대감을 모신 지 이십 년도 넘었습니다. 어찌 대감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래그래. 이 술이나 한 잔 더 받게. 헌데 신윤무를 미행하는 일은 어찌 되었는가."
"대감님의 명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제도 신윤무는 박원종 대감댁에서 나와 바로 이리로 왔다고 합니다."
"전하의 총애를 받는 신윤무가 수상해. 전하에게 홀대를 받는 박원종 대감과 내 집을 오가는 것을 보면 말이야."
"대감, 박원종 대감을 한 번 만나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면 신윤무의 정체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신윤무가 그러는 것은 대감과 박 대감 사이에 뭔가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박원종 대감과 나 사이에 특별하게 원수 진 일은 없네만 난 그 자가 왠지 내키지 않아. 우락부락한 얼굴을 보면 사나운 맹수 같아 오금이 저릴 정도야. 그래, 조정에서도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네."
"그래도 대장부다운 기질과 의리가 있으니 무부들이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분께서 만나면 밀고 당기는 것 없이 바로 의기투합하실 것입니다."
"자네는 그리 보는가."
"두 분의 장점을 합치면 힘이 배가될 것이 뻔한데 만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 같으면 진즉 찾아가 만났을 것입니다."
성희안은 사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내심 그리 결정하고 신윤무를 기다렸다. 신윤무는 어김없이 밤중에 나타나 사인의 안내를 받았다.
"대감께서 군자부정 어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네."
"군자부정 어른, 은밀한 일은 잘 돼가고 있습니까."
사인이 궁금하여 찔러 물었으나 신윤무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대꾸를 안 했다. 그러더니 나무라는 투로 한 마디 툭 던지고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입을 잘 간수하시게. 어찌 천기를 함부로 말하려 하는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게나."
사인은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므로 장검을 하나 가져와 사랑방을 지켰다. 성희안의 성격도 고집이 세고 불같이 급했으므로 두 사람 간에 격론이 벌어진다면 혁명할 세(勢)의 규합은 고사하고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서는 사인의 기우와는 달리 간간히 웃음소리가 났고, 거친 고성은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사인은 차가운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도둑고양이처럼 가만가만 사랑방 뒤로 돌아가 창호에 귀를 댔다.
술이 몇 잔 돌고 난 후에야 성희안이 시시껄렁한 객담을 접고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박원종 대감 댁에서 바로 오는 길입니다."
성희안은 신윤무의 대답을 듣고는 조금 안심했다. 그의 동태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바 그의 말은 사실이던 것이다.
"박 대감은 요즘 무슨 일로 소일하고 있소."
"대인이라 다릅니다. 세상을 걱정하며 소일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걱정스러우니 요즘은 술을 더 많이 드시겠구먼."
"대감뿐만 아닙니다. 어디를 가나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군자부정도 그중에 한 사람이오."
"비록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어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장녹수와 김자원과 신수근, 임사홍 등의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눈이 멀고 귀가 멀어 있습니다."
김자원은 내시로서 김처선이 죽고 난 후 내시의 우두머리에 오른 자였고, 신수근은 외척으로서 최고의 세도를 부리고 있는 자였다.
"박 대감은 이런 세상을 어찌 말하고 있소."
"어찌 저에게 천기를 말하겠습니까. 아마도 박원종 대감께서는 대사(大事)를 함께 의논할 사람으로 대감을 지목하여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평성부원군 박원종 대감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신윤무가 자세를 가다듬고 말하자 그의 진심을 확인한 듯 성희안이 화답했다.
"사실은 나도 박원종 대감을 기다리고 있었소. 세상은 지금 박원종 대감이 나서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 같소. 박원종 대감은 이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오."
"지금 궁궐 안팎으로 전하께 원한을 품은 이가 많습니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전하를 따르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대감께서 좌천된 이후 모두가 전하를 떠나버렸습니다."
신윤무의 말은 아부가 아니었다. 연산주에게 작은 목소리로나마 할 말을 해 왔던 박원종이나 성희안 같은 강직한 신하들이 하나 둘 제거되자,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목숨이 두려워 조정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일 박원종 대감을 만나보겠소."
"대감, 이 신윤무는 대감께서 움직이시는 것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것이 천하를 살리고 백성을 살리는 길입니다. 다행한 일 중에 하나는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장곤이란 자가 조정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장곤의 지금 귀양을 가 있지 않소."
"거제도로 귀양 갔다가 전하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어느 때 그가 무리를 모아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쳐들어오면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장곤이 그리 대단한 사람이던가요."
"임금님께서도 늘 이장곤을 경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세상이 어찌 한 사람의 힘으로 바뀔 수 있겠소."
"일당백으로 대적할 수 있는 이장곤이기 때문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장곤은 확실히 무부들에게 경계의 인물이었다. 문과 무를 고루 갖춘 데다 대소신료들로부터 고루 신망을 받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므로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는 벼슬아치들에게 늘 반정할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뒤따랐던 것이다. 따라서 신윤무가 이장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장곤(李長坤).
그의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재(琴齋)라 했고, 김굉필의 문인이었으며 연산주 1년에 생원시에 장원한 재원이었다. 그는 풍채가 기걸스러워 어린 시절부터 훗날 장수감이라고 불렸고, 홍문관 교리 때 김굉필의 문인이라 하여 거제도로 귀양 갔다가 그를 시기하는 간신들이 장차 반정할 인물이라고 끊임없이 모함했기 때문에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어 육로와 뱃길을 이용해 어디론가 도망쳐버린 인물이었다.
"이장곤이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니 그 자라면 안심해도 되네. 도망친 위인이 군사를 일으켜 봐야 도적놈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자의 뒤를 따르겠는가."
성희안은 신윤무가 걱정하는 말을 무시해버렸다. 신윤무가 돌아가고 나자, 사인이 다시 들어와 말했다.
"대감, 이제 신윤무를 믿어볼 생각이십니까."
"박원종 대감과 나 사이를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믿지 못할 사람은 아닌 것 같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위험한 일을 자처해서 하겠는가.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네. 내일 박원종 대감 댁을 찾아가 만나고 오겠네."
"제가 준비할 것은 무엇입니까."
"집안에 아껴둔 오래 된 술이나 한 병 마련해 두게. 목숨을 내거는 일로 마시는 술이니 심장의 피만큼이나 귀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분부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다음날.
신윤무가 군자시에 들러 결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는 말을 타고 서둘러 박원종의 집을 찾아가 간밤에 성희안을 만났던 얘기를 꺼냈다.
"대감, 간밤에 인재(성희안의 호) 대감댁을 다녀왔습니다."
"요즘 인재 대감은 어떻게 지내시던가."
"망원정 사건으로 참판 직에서 물러나 가슴 속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했습니다."
"원망이 어찌 인재 대감 한 사람뿐이겠는가. 나도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일세."
"인재 대감의 댁과 내 집을 오가는 자네의 요즘 기분이 어떤가."
"비로소 과실이 무르익어가는 듯합니다."
"과실이라. 제법 그럴 듯한 표현일세. 그래, 인재 대감은 세상을 어떻게 읽고 있던가."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감을 만나야겠다고 했습니다."
"이보게. 난 오리무중을 좋아하지 않아. 분명하게 말해 보게. 왜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것인가."
"대감, 그것은 함께 혁명을 하자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혁명이라."
박원종은 소매를 펄럭이며 벌떡 일어나 신윤무를 쏘아보았다. 신윤무는 갑자기 일어난 박원종의 행동에 당황하여 움찔했다. 그러나 박원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는 밤낮으로 내가 쌓은 뜻이네. 혁명을 생각해 왔단 말이네."
신윤무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두 분이 의기투합하면 못 이룰 대사가 없을 것입니다."
"어서 인재 대감을 불러 오게나. 아니면 내가 그리로 갈까. 천기가 누설됐으니 한시가 급해."
"그럴 것이 없습니다. 인재 대감께서 저물녘에 대감 댁으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시면 인재 대감과 은미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까.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네."
"백성들의 민심도 대감 편을 드니 이번 대사에 말 그대로 천운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두 사람은 술을 마시는 시늉만 했으나 금세 한 병을 기분 좋게 비워버렸다. 두 병째 비워갈 때 과연 성희안이 나타났다.
"대감마님, 손님이 왔사옵니다요."
"누구시더냐."
"성 대감이라 하옵니다."
신윤무가 뛰어나가 성희안을 맞아들였다. 성희안은 말 대신에 소를 타고 왔다. 참판 직을 잃은 후, 연산주의 잘못된 인사에 항의하는 뜻으로 말 대신에 소를 타고 다녔으므로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동정을 사기도 했다.
"대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군자부정이 여기 있는 줄 몰랐소. 이거 박 대감께 드리려고 가져 왔소. 아주 귀한 술이라고 말씀드려주시오 ."
"두 분께서 서먹서먹할까 걱정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 분을 소개만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군자부정이 있다고 못할 말이 무에 있겠소. 자리에 남아도 상관 없으니 마음 편한 대로 하시오."
박원종은 사랑방을 나와서 성희안을 맞아들였다. 박원종이 직접 일어나 손님을 맞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가 와도 높은 방석에 앉아 한 손은 고침(高枕)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맞이하는 것이 도도한 그의 인사법이었던 것이다.
"대감, 어서 오시오."
"진즉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제야 인연이 되어 왔습니다."
"대감, 지척에 살면서도 왕래가 없었으니 제 불찰입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닙니다. 만나는 것도 때가 있는가 봅니다. 오래 된 지기가 다시 만나 듯 때가 되니 이렇게 찾아와 반갑게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인재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옳고 말고요."
술이 몇 순배 주거니 받거니 돌아간 뒤에야 박원종이 눈짓을 보내니 신윤무가 눈치 빠르게 방을 나갔다. 그러자 박원종이 삐딱하게 벽에 대고 있던 등을 곧추세우며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박원종의 두 눈에서는 살기 같은 것이 쏟아지는 듯했다.
"자, 이제 방 안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소이다. 그렇지 않소이까."
성희안은 각오하고 온 걸음이기에 결코 박원종의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맞받았다.
"아니오. 방 안에 두 사람밖에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늘이 보고 있고, 땅이 보고 있고, 우리 두 사람의 양심이 보고 있소이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얘기는 하늘과 땅, 그리고 각자의 양심에 두고 하는 맹세입니다."
기세 싸움 같은 인사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성희안이 먼저 말을 하려다가 굵은 눈물을 떨어뜨려 박원종이 흠칫했다.
"대감."
성희안의 눈물은 박원종의 마음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성희안은 이내 소리 내어 짧게 통곡하고 난 뒤 말했다.
"대감, 이 성희안은 나라를 위해 충의(忠義)를 펴고 싶소이다. 이 순간 사사로운 욕심은 한 티끌도 없소이다."
이에 박원종은 갑자기 격해진 성희안의 감정에 전염된 듯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박원종이도 천지신명께 맹세할 수 있소. 천도가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신명을 다 바칠 생각뿐이오."
"대감, 마땅히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을 바칠 것이오. 대장부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어찌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이 가까이 있는데도 돌보지 않으리오."
신윤무가 주선한 이들의 만남은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두 개의 화살이 한 과녁을 맞추듯 단 한 순간에 아무런 이견 없이 동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반정(反正)은 성희안의 지략에서 비롯되었으나 무반의 벼슬아치들에게 신임이 두터운 박원종이 신윤무를 지휘하여 전술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치밀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신윤무는 무반들의 세력을 모으는 연락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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