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도 단상(烏耳島 斷想)
小白山 竹溪九曲 梨花洞天 鄕人
省岩 金 洛 淳. 詩人. 隨筆家
소백산 초암사小白山 草庵寺 아래 첫 동네인 죽계천변竹溪川邊에 자리 잡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앞가마골전부동前釜洞. 동쪽하늘에 뜬 햇살이 금방 서쪽 산으로 가리워져 버리는 손바닥만 한 하늘만 빠꼼히 쳐다보이는 두메산골에서 유 소년기幼 少年期를 보내면서 자란 촌놈이다 보니 대처 넓은 곳을 늘 동경하며 자랄 때에 할머니께서는,
“정핵(정학-正學, 나의 아명兒名)아 ”너그들은 조상님과 신령님께 정성 드려서 낳았데이 그래서 크게 될끼다” 라는 말씀을 늘 듣고 자라다가 부조선대父祖先代의 권문세거지權門世居地였든 대구로 중학 진학하여 조상님들의 유업을 계승 복원시키려고 할머니말씀대로,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큰 인물이 되겠다고 대지대망大志大望을 품고 내 나름대로는 학창시절과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였으나 그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세파世波에 낙엽처럼 휘날리다 보니 어느덧 고희古稀도 휘딱 지나고 엄동설한 언덕배기 나목裸木 처럼 된 나를 문득 발견할 때 심회心懷가 황란荒亂 하면 불현듯 망망대해에 출렁이는 거센 파도생각이 나서 따분한 일상日常을 털고 휘딱 바다로 가본다.
그럴 때에는 사무실 인근 충무로전철역이나 우거인근寓居隣近인 지하철4호선 한성대학역(삼선교역)에서 무임승차권 달랑 쥐고 종착역인 오이도역으로 간다.
오이도! 烏耳島
두메골짝에서 자라면서도 “까마귀”귀는 도무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그 까마귀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법 호기심도 발동하여 몇 번을 가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까마귀 귀 섬”은 온데간데없고 간척사업으로 연육連陸 된 시화공단始華工團과 아파트단지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 버렸으니 해안 방파재防波堤에 파도만 출렁이는 구나.
그런데도 다행히 흰색 붉은색 코스모스와 가을꽃들이 늦가을 바닷바람에 군락群落을 이루어 하늘거리며 갈메기때 와 비릿한 바닷내음이 만추晩秋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구나.
기왕 바다에 나왔으니 한때 바다에 마음을 심었든 지난날이 스쳐 떠오르는 구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당시로는 전국 유일唯一했든 “전국바다낚시회”회원으로 저명인사들과 낚시를, 서해, 남해 어디를 가도 오목조목 떠있는 섬들이 많아 낭만이 넘쳤는데....
또한 문득 생각나는 바는 몇 년 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어느 백화점 관리소장으로 재직할 때에 소위 대구공고 제25회 동기생중 자타칭 삼걸自他稱 三傑로 불리든 권00(안동출신-성균관대학), 박00(경북 약목출신-경북대학)등과 이 못난 사람인데 이 3인이 작당作黨하여 청려장(靑藜杖-명아주지팡이-퇴계 이황선생이 생전에 손수 만들어 짚고 다니시든 그 청려장이 지금도 그대로 도산서원에 잘 보관 전시되고 있음)사업을 하면 아주 좋다고 나를 꼬드겨서 사장으로 추대(?)하고 “명아사”를 발족하고는 그 명아주 재배적지를 찾느라고 휴전선 근방에서 시작하여 강화도 서해안 일대를 두루 살피고 다닐 때에, 이 오이도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적지適地가 아님에 느닷없이 충북괴산 땅에 내려가 자리 잡고, 힘든 일이라곤 별로 해 본적이 없었는데 허리가 휘도록 일 한 적이 있는데 감회가 새롭다.
기왕 거명된 친구들이니 그들과 내 가문家門의 내력에 대하여 적어보고 넘어 가야할 사정이 있겠다.
왜냐면 그들과 내 가문과는 너무도 상이相異한 바이기에.
권은 안동태생으로 그의 양부養父는 젊을 때 조선총독부관리로서 여러 지방 군수를 역임 한 고급관리였고, 은퇴한 뒤에는 안동에 사립학교를 세워 뒤에 안동중학교로 발전 하였고, 박은 그의 부친이 왜정 시 법원 서기로 있다가 광복 후 판사로 재직 후 대구변호사회장까지 하였다하니 이런 부조父祖를 둔 사람들과 각별한 친구지간이 된 나는 참으로 얼간이구나.
그 연유는 내 부조께서는 왜정을 반대하여 조상대대로 벼슬하며 대구 와룡산과 대구 뒷들을 임금님으로부터 하사 받으셔 권문세가로 사시든 대구의 세거지世居地를 을사강제늑약(서기1905년)채결 후 조상님의 정문각旌門閣 마저 버리시고 감록監錄에 이르기를 격암 남사고 格庵 南師古께서 소백산 자락을 지나며 천하명산이라며 나귀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였다 하는 그 산자락인 풍기 금계동豊基 金鷄洞으로 이거은둔移居 隱遁 하시면서 조부님께서는 아드님인 내 선고先考가 다섯 살 부터 대구에서 독선생을 모셔다가 십여년간 한학을 이수履修하셨는데 왜정倭政이 굳어짐에 과거제도科擧制度는 없어지고 뜻을 펴보시지도 못하시고 왜정에 비협조하시며 등 돌리시고 평생 음지에 묻혀 농부로 지나셨고 조부님께서는 춘하추동 찾아드는 손님 과객들과 시대를 한탄하시며 바둑 장기로 소일 하시다가 환고향還故鄕도 못하시고 을해년(서기1935년)작고하셔 죽계칠곡竹溪七曲옆산인 옥녀봉玉女峰에 유텍 幽宅을 정하셨고, 선고先考께서는 경인년(서기1950년) 6. 25동족상잔의 전쟁참화중이든 1, 4 후퇴 무렵에 작고 하셔서 역시 환고향還故鄕 못하시고 살고 계시든 아랫평장개 뒤 이자산二子山에 묻혀계시고. 조모님께서는 뜻도 제대로 펴 보시지도 못하시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신 아드님인 나의 선고先考님을 먼저 보내고 불과 며칠 지난 뒤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귀여워하시든 12세 외동 손녀孫女가 인민군이 버리고 간 수류탄오폭誤爆 근방에 있다가 그 파편에 맞아 비명횡사함에 심화心火가 쌓이고 쌓여 그 일로 얼마 뒤 돌아가셨으니 불벼락 같은 이 무슨 참화慘禍인가.
조부님께서 십승지지 피란처十勝之地 避難處를 찾으신지 오십년도 채 못돼서 졸지猝地에 이런 참화慘禍를 당하고 보니 명승지도 없고 명당도 없는 모두가 헛말이 로다.
이 모든 일이 정직하고 선한 마음과 올바른 행동이 사람의 도리일 터인데 명당이란 것이 어디 따로 있으랴.
그러나 조부모님이나 부모님께서는 지성至誠을 다 하다 가셨는데 이 못난 속물俗物은 정말로 불효 막심 하구나.
나의 학구와 전도에 대하여 온갖 정성으로 심혈을 기우리셨는데 고희古稀도 훨씬 지난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더더욱 무릎 꿇고 송구함을 빕니다.
선고先考께서는 높은 학식은 묻어 두시고 왜정시는 물론 광복 후 까지 동리 리장이나 면장직 권유도 뿌리치시고 작고하실 때 까지 오직 배점국민학교학부형회장과 소백산 애림계장愛林契長 을 하시면서 시골농부로서 은둔隱遁 하셨고, 할머니는 마을에서 호랑이 할메로 불리는 “대구어른” 이라는 택호宅號를 갖고 계셨는데 독선생 모시고 10년여 수학修學하시든 선고님의 뒷바라지 하시면서 어께 넘어로 배운 천자문에서 주역周易에 이르기까지 두루 암송하셨고 위인전 고담, 전래 민속 민담 등에 해박該博하셨으며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의 웬만한 모든 병은 약초목과근피藥草木果根皮와 “내손은 약손이다” 로 다 고치시고 ,혹 동네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거뜬히 해결 하시고, 또한 초암사草庵寺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단바위” 아래 정화수井華水 우물 샘 파놓고 춘하추동 초하루 보름과 길일吉日에는 목욕재계 하시고는 상제上帝님과 천지신명님과 산신님과 조상님께 기도드리시며 늘 근엄하게 사시면서 정성으로 길러 오신 자손들의 성공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으니 눈이나 감으셨을까.
이제 대구는 조상대대 권문세가로 사시든 조상님들의 옛 고향이고, 내 고향은 경북 영주 순흥 땅이니 곧 환향還鄕할 준비가 되면 부조님의 유택幽宅이 계시고 내 탯줄을 묻은 순흥 땅으로 가야지.
또한 총칼을 앞세우고 우리조국을 깡그리 수탈하든 일본제국주의 제2차대전 말기, 내가 12세 때에, 일본인교장에게 “일본은 곧 패전 할 것이니 조선 학생과 조선 사람들에게 잘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시오” 라고 절규하여 처음은 혼비백산 혼줄이 났으나 왜정말기 철저한 온갖 횡포에 대하여 울며 불며 절규 하였드니 결국에는 교육자인 그 교장의 양심을 울려 참회의 눈물을 받아내고 왜정시 교내에 설치하였든 일본신사에 등하교시 강제로 참배해야했든 그 자리에 60년이 지난 뒤 이 사건과, 선배들이 일본인 담임선생을 배척하는 동맹휴학사건을 기록한 “항일학생의거기념비”와 “개교 100주년탑”을 내가 앞장서 세워 둔 그곳 내 고향으로 환향 할 때에는 조부님께서 찾아드신 감록상의 십승지十勝地가 아닌 마음속에 색여 진 “십승지十勝地”인 “평화와 안식”을 안고서.
어허 친구들 소위 삼걸三傑을 말하려다 내 집안 내력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 놓았구나. 아무튼 이렇게 상이相異한 가문의 후예들인 나와 그 친구들과는 죽마고우로 교분을 갖고 지나고 있으니 참으로 세월이 아이러니를 싣고 왔나 보다.
왜냐하면 내 조부님께서는 왜정을 반대하셔 대구의 세거지世居地를 다 버리시고 감록에 구인지지 양백求人之地 兩百인 소백산 중을 찾아오셔 은거隱居하시든 부조의 후예이고 권權과 박朴은 시대변화를 재빨리 파악하여 양지를 찾아 일제하에서 출세 성공한 부조父祖들의 자식이니까.
권은 성균관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젊을 때부터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편히 쉬고 있고, 박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때 교생 나갔다가 교직에 실망을 느끼고 보장된 접장의 길을 팽개치고 자신의 재주만 과신하며 이러저러한 사업을 하다가 종래에는 우리나라 경보기 산업의 창시자가 됐고 여러 건의 발명 실용신안 의장특허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80년대 초 그가 손수 만든 땟목으로 대구공고 25회 동기 몇 사람과 낙동강 상류 하회河回에서 시작하여 하구河口인 삼랑진 구포까지 종주하여 매일신문(대구)에 “낙동강땟목종주”라는 기사로도 발표된 적이 있는 괴짜인데 늘 말하기를 “내가 없어 졌거든 기구氣球타고 저 넓은 태평양위에 떨어져 없어진 줄 알아라”고 했었는데 그 태평양은 가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몇 년째 거동도 못하고 방안에 갇혀있으니 애석한 일이로다.
한때는 또한 동해 호미곶 앞바다 대왕암大王岩의 수중능水中王陵의 비밀을 캐내겠다며 울진 온정리에 방을 얻어 놓고 1년여 간 호미곶 까지 왔다 갔다 하였고 또 때로는 “하회탈”을 연구하여 문화상품으로 발전시키겠다고 경기도 문산에 공방工房을 차려놓고 미술공예품솜씨도 뽑낼려 했고, 또한 써 모아 두었든 시를 정리하여 시인이며 영문학자이신 고려대학교 김종길金宗吉명예교수(김치규金致逵 전 대구공고 영어교사)의 감수를 받아서 시집을 발간한다 하였는데 문학에도 재주 있어 고등학교 재학시 “경상북도학생문학의밤”행사시 나와 같이 문예반 활동을 하든 그의 시가 선발되기도 하였고 김종길(김치규)선생의 지도로 1년 선배인 고 권오택 시인과 더불어 2년 연속 우승을 한 바도 있고 중. 고등학교 졸업식장 휘장徽章을 그려서 장치裝置하기도한 다재다능한 친구인데 그 모든 것을 다 접고 이제 정신없이 누워만 있으니,
“이 고집불통아 억울하고 원통해서 어찌 계속 누워만 있노. 이 친구야 어서 빨리 털고 일어나 그 제왕帝王 같은 당당한 고집을 다시 살려야지”.
어허 내가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노, 여기는 오이도인데.
각설하고 갈매기 떼가 끼룩끼룩 환송하는 사이로 수평선 저 넘어 붉은 낙조를 드리우며 바다로 풍덩 빠지면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면 어느덧 사위四圍가 암흑으로 덥혀 가는가 하면, 저 멀리 대부도, 제부도, 선감도, 영흥도에서 반짝이는 전등불빛, 인천 LNG 저장창의 휘황찬란한 전깃불 빛, 시화호를 둘러싼 방조재로防潮堤路의 가로등, 출어 나갔던 소형선박들의 뱃고동소리와, 선박점등(船舶點燈) 등이 훤히 암흑바다를 밝혀주니 적막하든 주위가 생동감이 넘친다.
다만 등대가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고 또한 “까마귀 귀”를 보러 왔으되 이미 그 까마귀 섬은 형태조차 없어졌으나 그런대로 “사리” 때에 밀물이 방조제까지 가득 차 출렁이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시원히 탁 터지고 썰물 때에는 들어난 갯벌에서 바위에 붙은 굴을 따먹기도 하며 조약돌 틈으로 재빨리 숨는 작은게 들을 잡는 재미 또한 일품이다.
이럴 때는 모든 시름을 다 잊을 수 있는데 아차 하는 사이 밀물이 드리닥치면 큰일이지.
자 이제 툴툴 털고 일어나 주변을 살펴볼까.
선착장 주변에서 굴까는 아낙네, 투망 손질하는 뱃사람, 잡아온 각종 생선류 조개류를 팔고 있는 사람들, 망둥이 숭어낚시꾼 ,연인들의 속삭임, 어린이 손잡고 온 엄마 아빠들, 가족들 끼리 오순도순 벌리는 파티, 친지끼리 어울려 질펀하게 벌리는 술자리, 부부인지 연인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노신사와 늙수레한 여인, 목이 쉬도록 외쳐대는 각종행상, 세파에 시달리고 볶여 지치다 정신 이상 된 사람, 등등 파시波市는 않이드라도 비릿비릿한 선착장의 생동하는 현장을 구경하다보면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진솔한 사람들의 냄새 말이다.
이젠 어시장魚市場으로 들어가 볼까
우선 좌판에 거터앉아 모듬조개구이나 생선회 한 접시에 막걸리 한잔 걸치다 보면 밤 시간이 제법 돼버리지, 그러면 먹음직한 생선 무겁지 않게 사들고, 자! 이제 모든 시름 툴툴 털어 파도에 실려 저 멀리 흘려보내고 홀가분한 심신으로 처소 귀로에 올라 볼까.
전철로 왕복 4시간정도 소요의 거리이니 400리는 족히 되리라.
허참 차비는 공짜로 갔다 왔다 한 것은 순전히 늙은 탓이니 늙음도 그리 섭섭지는 않구나.
오직 바라든 “까마귀 귀”를 못 본 아쉬움은 남지만.
국가원로회의 원로위원 겸 운영위원장
도덕국가건설연합 수석부총재 겸 격월간지 “도덕국가” 편집인
(사) 충 효 예 실천운동본부 고문
(사)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 회원
소수국학대학원대학교 설립추진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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