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스크랩] 이광사의 서결

강나루터 2016. 10. 9. 07:02

                               

                                          李匡師의 書訣
   
                                                                      이광사


이광사의 본관은 전주, 자는 道甫, 호는 員嶠(圓嶠)이며, 노년에는 壽北山人이라 칭하였다. 그의 부친인 角里 李眞儉(1671-1727)과 母夫人 尹趾祥의 따님(1667-1724) 사이에서 1705년(숙종 31, 을유) 8월 26일 5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전통적으로 少論에 속하였기 때문에 득세하기도 하였지만 노론에 의해 정치적 진출이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원교의 초년시절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는 극히 소략하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소론이 결정적으로 정권밖으로 밀려나면서 원교는            
 야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임금인 영조는 난이 평정된 후 탕평에 힘썼으나 점차 노론이 조정에 들어오고, 이후 100여년간 노론의 권력기반이 확고해 졌다. 그 때 윤순은 소론계인사였으므로 초학의 원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731년 원교는 아내를 잃고 전전긍긍하였다. 1733년 재혼하였으며 서울 변두리에서 셋방살이로 생계가 막연하였다. 이 시절에 양명학을 접하게 되고, 강화도를 찾아 정제두(1649-1736)로부터 실학에 관해 들었고 이후 여러 차례 하곡 정제두의 학문을 배웠다.
 1755년(영조 31) 소론일파의 역모사건을 尹志의 난이라고도 한다. 소론파의 선봉들은 노론을 조종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윤지의 문서상자 가운데 원교의 백부 이진유와 부친 이진검의 서찰과 함께 원교의 서찰이 나왔기 때문에 원교는 윤지와 상통하였다는 죄목으로 마침내 200리 밖 두만강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호남의 薪智島로 보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신지도로 이거하게 된다.(1762-1777) 그는 여기서 서론인 "서결"을 지어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1777년 8월 26일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원교의 서예는 처음에 윤순에게 배웠고, 나아가 30세부터는 왕희지를 비롯하여 위진의 고법을 배웠으며, 40세 이후로 필명을 날렸다. 그 후 호남에 유배된 50대 후반에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원교의 서론인 서결전편은 위부인필진도와 왕우군제위부인필진도후라는 원문을 싣고 이를 사항별로 나누어 자신의 설명을 가하였다. 후편은 상, 하로 나뉘는데 상은 전편에서 부족한 것을 부연설명하고, 하는 역대서법에 대한 논평으로, 아들 영익으로 하여금 대술하게 한 뒤 자신이 교정하였다. 

서결
 옛사람의 필법이 예서로부터 모두 붓대를 곧게하고 붓끝을 펴서 써서 온갖 털끝이 힘을 가즈런히하여 한 획에도 상하나 내외의 구별이 없었다. 명대애 이르러서도 경건, 정예, 둔중의 차이는 있지만 운필은 대체로 모두 그러하다.
 
 내가 보건대, 서예를 닦은자는 많으나, 크게 기대된는 이가 쉽지 아니한 것은 그 잘못이 옛 법첩을 배우지 아니하는 데에 있으며 전일하고 정성스럽게 하지아니함에 있다. 모든 사실리 옛 법첩을 배우지 아니하고 터득할 수 있는 이는 없으니, 대체로 사사로운 정에 매달려 참 길을 버리면서 더구나 옛 것을 본받지 않음은 이사나위부인의 세대에도 없었거늘 하물며 오늘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이것을 두렵게 여겨 옛 서결들을 가려서 후배들에게 보이려고 한다.

 먼저 글씨를 배우는 이는 우선 붓 잡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약 진서를 쓰게되면 붓머리에서 2치 1푼을 떨어지고, 만약 행서 초서를 쓰게 되면 붓머리에서 2치2푼을 떨어져야 한다. 붓을 잡아 먹을 묻히고 획을 긋되, 파임을 하든 삐침을 하든 또는 구부리든 모두 다 한 몸의 힘을 쏟아서 구사하라.

 이른바 초학자는 먼저 큰 글씨를 해야한다 함은 마음이 조약한 자로 하여금 획의 힘이 신장되고 강건하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옛날에 말한 큰 글씨라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과거시험에 쓰는 글자(시권자) 정도를 말하는 것이니, 실은 초학자라하더라도 모름지기 정밀하게 들어가야지 , 만약 한갓 크기에만 힘써 잘못된 버릇으로 익히면, 끝내 평생 정밀하지 못한 병의 원인이 될 것이다.


『서결(書訣)』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전편(前篇) : 지묵필연(紙墨筆硯)·집필(執筆)·기본점획칠조(基本點劃七條)·육종용필(六種用筆)·결구(結構)·삼과절(三過折)·각체서법(各體書法)·(草 篆·八分·古隸)·학고비(學古碑)·논소황서(論蘇黃書)후편상(後篇上):필(筆)·집필(執筆)·묵법(墨法)·용필(用筆)·행획사결(行 四                   訣)·영자고결(永子古訣)·결구(結構)·논질연(論質姸)·임서(臨書)
후편하(後篇下) : 오체일법(五體一法)·전법(篆法), 논역산비論 山碑·논이양빙서論李陽氷書)·논이왕소해(論二王小楷)·논당인서(論唐人書)·논송서(論宋
書)·각체서법(各體書法)초草·비백飛白·대자서大字書)·논이왕서
(論二王書)·논각법(論刻法)·논동국필법(論東國筆法) 
   전편과 후편上은 주로 기본적인 서법이며, 후편下는 중국의 古帖·古碑에 대한 논의와 중국 및 우리나라 서가들에 대한 논평이다. 따라서 『서결』은 서예이론서 내지 평론서의 성격을 겸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書史·書品·書體·書風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교의 서예에 관한 관점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원교가 『서결』에서 인용하고 있는 인용문의 출처를 보면, 손과정의 『서보』, 미불의 『서사』·『해악명언』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고 이 외에 강기의 『속서보』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서결』 전편(행서에 대한 원교의 견해)
 행서도 역시 법전이 어엿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쉽게 여겨 진서를 쓸 때보다 덜하다는 생각을 하지말라. 이것이 바로 전서 예서로 말미암아 변하여 진서가 되고 진서에서 변하여 행서 초서가 되니, 모두가 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후세에서는 진서에는 이미 진서 예서의 법식이 없고, 행서 초서는 또 진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서체가 되어 한 획도 서로 같음이 없이 다만 매끄럽고 급하게 하여 화려하고 현란하게 하기를 자랑하니 오로지 법도를 잃은 것이다.
 왕희지는 극히 취한 상태에서 <난정서>를 썼지만 정밀하고 온건함을 다하였으니, 옛 사람의 필법 의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두 왕씨의 법첩이 글씨가 오래되어 획이 이완되었지만, 홍복사(弘福寺)나 흥복사(興福寺)의 비는 획은 강경하나 글자는 속되니 이해할 수가 없다. 마땅히 옛날 전서 예서와 두 왕씨의 진서에서 행서 초서를 구하면 바른 법식을 터득할 것이다.
 
 『서결』 후편 상(후편의 집필 경위에 대한 설명)
 내기 이미 서결 한 편을 썼으나, 다 자세히 논하지 못한 것이 있어 다시 옛 서결들을 취하여 논변하여 널리 전하고자 하나 돌아보면 힘이 미칠 겨를이 없는지라. 자식인 영익(令翊)에게 대신 초록하게 하여 글이 이루어지니 위곡(委曲)하고 해괄(該括)하여 깊은 뜻까지 다 발명하였으니 내가 한 것과 다르지 않다. 드디어 간략히 수정하여 『서결 후편(書訣後編)』이라고 한다.
 (운필할 때 4가지의 요결)
대저 획을 실행함에 모두 4가지 요결이 있다.
 첫째, 넉넉한 마음으로 붓은 긴장하나 천천히 함이 귀하다.
그러므로 왕희지가 이르기를 "글씨는 침중하고 조용함이 귀하니 붓을 댈 때 급하려 하지 말고 모름지기 더디더디하라."고 하였고, 초서도 급히 쓸 수 없다 하였으니, 진서 행서에는 더욱 그러한 것을 알 것이다.
 들째, 힘을 다하여 추진하되 경건을 귀하게 여기라.
손과정이 이르기를 "골격과 기개가 있도록 힘써 고운 윤기를 더하라. 아름다움이 뛰어나고 골격이 모자라기보다는 기골이 유독 많아 아름다움이 적은 것이 고움은 비록 없지만 체질이 존재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서예의 본말을 알 수 있다.
 셋째, 큰 획 작은 획이 서로 섞여야 한다.
송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획이 많은 것은 의당 수척하게 하고 획이 적은 것은 의당 비대하게 하라."함도 이것도 역시 얽매임이니, 크고 작음에 있어서 비대 수척을 생각에 따라 할 일이지 일정한 법도가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 자 안에서 다시 더 비대 수척이 정제되지 않음이 없다면 어찌 이치에 옳겠는가.
 넷째, 수직과 굴곡이 서로 적당해야 한다.
획은 살아있는 물건이고 운필은 이 살아움직임을 실행하는 것이다.

『서결』후편 하(우리나라 서가를 평하고 총결함)
 석봉 한호(자가 景洪)는 재주와 학문이 높지는 않지만, 연습이 쌓여 공력이 일어 비록 고인의 획법은 모르더라도 자연히 서로 합한다. 신분이 미천하기 때문에 관가의 서사 규격에 매었다. 진서는 더욱 비루하지만 역시 필력이 볼 만하고, 행서나 초서의 득의처에 이르러서는 웅심하고 건실함이 높이 근원을 뛰어넘으니 여기에 이론이 있을 수가 없다.
 백하 윤순은 뒤늦게 출세하여 홀로 중국의 획법을 터득하여 체제나 격식이 새롭고 재주와 정서가 공교 유려하여, 우리 나라의 졸렬함을 한 번에 씼었으니, 후학을 계몽한 공이 4가들(안평, 김구, 봉래, 한호)에게 견줄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세대에 따라 논의할 만한 것이 있겠다.
  무릇 배우는 이는 재주와 학문이 근면 독실을 겸해야 이룰 수가 있다. 재주를 믿는 것이 정성어린 배움만 못하니, 정성 어린 배움이란 반드시 독실한 공부가 필요하다. 어찌 서예만 그러하랴. 온갖 일이 다 그러하다. 재주가 공부보다 뛰어난 이는 안평대군이고, 공부가 재주보다 뛰어난 이는 한석봉이다. 두 분의 성취는 볼 만한 것이나, 애석하구나 석봉의 독실함에다 학문을 빌려 일찍이 도에 드는 문을 깨달았다면, 어지 진(晉) 당(唐)만 못했으랴. 배움이란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으로 실행함이 귀하니 변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정수이다.
                                                                                                                        

출처 : 이광사의 서결
글쓴이 : 전선수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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