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사랑한 王…愛民의 혼 되살아나다
민초의 환대에 감동받은 공민왕, 글씨로 고마움 전해
수많은 세월 유실→복원의 곡절 겪으며 오늘날 이르러
정도전·김종직·이황 등 문장가들 누각 올라 名詩 남겨
國難 때마다 ‘방패’가 된 안동…‘雄’자 넣어 각별한 애정 표현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전란을 피해 약 1개월에 걸친 몽진 끝에 1361년 겨울 영주(순흥)에 도착했다가 다시 그해 12월 안동으로 옮겨, 이듬해 2월까지 70일 동안 머물렀다. 당시 이 지역 관리와 백성은 열성을 다해 공민왕 일행을 받들었고, 공민왕은 그들의 환대에 감동해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이로 인해 공민왕과 관련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영주와 안동 일대 곳곳에 전해오고 있다.
이런 연유로 경북 북부지역에는 공민왕 글씨 현판도 적지 않게 전해오고 있다. 안동 관민의 환대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내린 ‘영호루(映湖樓)’와 ‘안동웅부(安東雄府)’는 그 대표적 현판이다.
공민왕과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영호루 전경. |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변 언덕 위에 자리한 영호루에 오르면 왕과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만날 수 있다. 한자로 된 공민왕의 글씨 현판 ‘영호루(映湖樓)’와 한글로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호루’ 현판이다.
박 대통령 글씨 현판은 1970년 지금의 영호루가 건립된 후 걸게 된 것이다. 원래 영호루 자리는 지금의 영호루 맞은편 강변이었다. 그동안 수해를 자주 당해 현재의 위치로 터를 옮기고 건물은 당시 많이 지어졌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 기와를 얹고 단청을 칠했다.
위치도 바뀌고 시멘트 건물로 복원된 누각이지만, 공민왕 글씨만은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650여년 전에 명필이었던 공민왕이 남긴 글씨 현판을 지금도 만날 수 있음은 각별한 일이다. 현재 누각에 걸린 현판은 지난해 만든 복제품이고, 원본은 안동민속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원본 현판은 강변 낮은 곳에 건립된 누각에 걸렸던 탓에 그동안 여러 차례 강물에 떠내려갔다 다시 회수하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민왕은 안동에 머물 때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낙동강변 영호루를 자주 찾았다. 때로는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워 즐기기도 하고, 누각에서 활을 쏘며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옛 기록(고려사)은 ‘을미일에 왕이 영호루에 갔다가 배를 타고 놀았으며, 호숫가에서 활을 쏘았다. 안렴사가 왕을 위해 연회를 베푸니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보았다. 그중 어떤 이는 소매를 흔들며 흥겨워 울었고, 어떤 사람은 비결을 외우면서 탄식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이랬던 공민왕은 개경에 돌아간 후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몇 년 후인 1366년 겨울에는 친히 편액용 대자 글씨로 ‘映湖樓’를 써 담당 신하에게 주어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글씨의 현판을 걸기에 누각이 너무 작고 초라해 물가에 더 가깝게 옮기고 규모를 키운 뒤(1368년), 왕의 글씨이므로 금칠을 한 금자(金字) 현판으로 만들어 걸게 된다.
목은(牧隱) 이색(1328∼96)이 지은 ‘영호루금방찬서(映湖樓金榜讚序)’에 그 내용이 나온다.
“지정 신축년(1361) 겨울에 국가가 남으로 복주(안동)에 옮기고 군사를 출동시켜 북벌, 이듬해 드디어 도적을 섬멸했다. 복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삼으니 대개 그 옛날을 회복한 것이고, 또한 기쁜 일이로다. 병오년(1366)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루’ 세 글자를 크게 써서 정순대부 상호군 김흥경에게 교지를 전하도록 명하고,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권사복을 불러 그에게 글씨를 주었다. 당시 안동도호부의 판관 조봉랑 신자전이 아전들과 의논하기를 누각이 소박해 임금님이 하사한 것을 제대로 걸 수 없을 것같아 두려워하면서 날을 정해 누를 물가 쪽으로 더 넓히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사복은 신(臣)에게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하고 기문을 청했다. 신은 말하기를, ‘누의 기를 쓰는 일은 비록 능하지 못하나 홀로 느낀 바가 있다. 임금께서 안동에 머무를 때 이 누각에 거동하셨는데 신은 모시는 신하로 실제 따라갔다. 그러나 당시의 경계하던 마음은 게을러지고 또 잊은 지 오래되었다. 아! 임금께서 안동을 사랑하여 돌보심이 여기에 이르는데 신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에 그 고루함을 잊고 머리 숙여 찬문을 짓는 바이다.”
◆수차례 유실됐다 되찾은 현판
이렇게 1368년 신자전이 영호루 규모를 더 확장해 공민왕이 하사한 편액을 처음 걸게 되었다. 이후 현판은 수많은 곡절을 겪게 된다.
영호루는 1547년 대홍수로 누각이 유실되고 현판도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렸으나 김해에서 발견돼 6년 후(1552년) 중창된 누각에 다시 걸리게 된다. 이후 1605년과 1775년에도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현판은 보전해 새로 지은 누각에 다시 걸 수 있었다. 1788년에 복원된 영호루는 1792년 다시 유실되고 1796년에 복원되었다. 1820년에는 안동부사 김학순(1767∼1845)이 누각을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 嶺左名樓)’라는 초대형 현판을 걸기도 했다. 이 현판도 지금의 영호루에 걸려 있다.
영호루는 1934년 안동 시가지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 때 주춧돌만 남기는 또 한번의 유실이 있었고, 현판은 구미 부근의 강물에서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원본 현판은 이때 회수한 것이다.
이후 국비지원을 받아 1970년 11월 종전의 위치가 아니라 강 건너쪽 동산 위에 현재의 영호루를 중건해 북쪽에는 공민왕 친필 현판을,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현판을 걸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공민왕 글씨 현판이 1368년에 걸었던 당시의 현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처음 영호루에 건 현판은 금자현판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하는 것은 검은색 바탕에 흰글씨로 되어있다. 수해를 당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칠이 벗겨져 다시 칠한 것인지, 아니면 수해 때 유실되었다가 남겨놓은 탁본을 토대로 다시 만든 현판이 전해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영호루에는 수많은 유명 문인이 올라 경치를 즐기고 다투어 시를 남겼다. 현재 누각에 걸려있는 시판만 해도 우탁, 김방경, 정도전, 김종직, 이현보, 이황, 권근 등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들 작품이 47점이나 된다. 이 중 10여개를 제외하고는 고증을 거쳐 1997년에 다시 만들어 건 것들이다. 당시 박정희 글씨 현판 ‘영호루’도 원래 것은 안동민속박물관으로 옮기고 새로 만들어 걸었다.
양촌(陽村) 권근(1352∼1409)의 ‘영호루시(映湖樓詩)’ 중 ‘…백척 위태로운 난간 푸른 공중에 떨어지고/ 구중궁궐 임금의 글씨 금빛 꽃같이 빛나네/ 긴 내가 돌아가면서 하늘과 맞닿으니/ 지금 당장 뗏목 띄워 멀리 가고 싶네’라는 구절이나 백담(柏潭) 구봉령(1520∼85)의 ‘영호루를 지나며’ 중 ‘성안의 명승은 낙동호에 많으니/ 나랏님 지난 곳 좋은 기상 더하네/ 금자현판(金榜) 그림자 은하 물에 비치고…’ 등을 보면 영호루 현판은 금자현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안동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현판을 파손한 것을 1602년 부사 황극중(黃克中)이 보수하고, 1603년 부사 홍이상(洪履祥)이 금칠을 다시 입혔다는 기록도 있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영호루는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장군 김방경(1212∼1300)이 1274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 들러 지은 시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호루 옛터에는 1992년에 ‘영호루유허비(映湖樓遺墟碑)’를 세워놓았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공민왕 친필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 안동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패해 위세를 잃어가던 중, 안동에서 벌어진 병산전투에서 불리한 여건임에도 안동 주민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에 왕건은 안동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동은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공민왕이 홍건적 침략을 피해 안동에 머물다 간 후인 1362년, 안동에 대도호부를 설치했다.
공민왕은 안동이 자신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고 당시 안동부민이 각별한 환대를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공민왕은 개경에 도착한 후에도 안동을 잊지 못해 ‘안동이 나를 일으켰다(此安東我重興)’고 술회하기도 했다. 공민왕은 이런 안동에 ‘안동웅부’라는 현판 글씨를 특별히 써서 하사했던 것이다.
여기서 ‘웅부(雄府)’라는 단어의 선택이 눈길을 끈다. 당시 안동의 행정적 위상은 안동대도호부였다. 만약 이를 그대로 썼다면 ‘안동대도호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굳이 ‘안동웅부(安東雄府)’라는 단어를 썼다. 불교에서 최고 숭배의 대상인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불교국가인 고려의 왕이 ‘웅’자를 사용해 ‘웅부’라고 편액 글씨를 써서 도호부 관아에 내린 것은 왕의 각별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도호부 관아에 걸려있던 ‘안동웅부’ 현판은 그 후 안동군청에 걸려있다가 1998년 안동민속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지금 안동시청에는 그 복제품이 걸려있다. 현판 ‘안(安)’자 옆에는 고려공민왕이 쓴 보배로운 붓글씨라는 의미의 ‘여공민왕보묵(麗恭愍王寶墨)’이라는 글자가 작게 쓰여 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공민왕의 ‘영호루’와 ‘안동웅부’ 현판을 탁본한 글씨로 만든 첩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1910년대에 구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봉규기자
출처 : 내고향 안동
글쓴이 : 화성골화숙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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