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제운루(齊雲樓)는 왜?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가....

강나루터 2017. 1. 16. 07:26

 

 

 

제운루(齊雲樓)는  왜?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가....

 

 

어느 고장이던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인 유산을 보전하고

고장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도록

작은  문화유산도  복원하고 계승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엄연히 역사적으로 우리 풍기군의 관아 문루였던

제운루(齊雲樓) 몇십년 전만해도 그 위용이 살아 있던

누각을 몇년동안 많은 뜻있는 분들이 복원을 외치고

그 당위성을 토해 내었건만

아무런 반응도 움직임도 없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다

 

지방자치체가 들어서고 시장, 도의원, 시의원

지역을 대표하도록 우리 손으로 선출해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고

지역민을 대표해 고장의 발전을 이루고

주민의 뜻을 받들라고 했는데...

 

왜 이토록 갈망하는 우리 지역의

혼과 숭고한 이력이 베어있는

현판이 존재하는 누각한정 복원하지 못하는가?

영주의 제민루. 순흥의 봉서루는 복원되고

풍기의 제운루는 무었때문에 아직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가?

 

그냥  뺏지 달고 연설이나 하고 폼만 잡으면 지도자란 말인가?

고향사랑하는 마음과

내 고향의 역사의식이 확고하다면

진정 지역민을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솔선하여 제운루 복원사업 앞장서 추진해 주기를 바란다.

아니면 뜻있는 분들이 서명 운동이라도 벌여

제운루가 꼭 복원되도록 해야한다.

 

어디 제운루가 공원마다 세워지는

정자하나 만큼도 가차 없는 존재란 말인가?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글씨에 능했던

고려 공민왕(1351~1374)의 친필이라 전해오고 있다

안동의 영호루와 필체가 같다

그것만으로도 공민왕의 친필임이 확실하다고 나는 믿는다.

미루어 보면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우리고장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제운루 누각은 풍기군 객관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래 각종 한시의 내용을 부족한 실력이라 잘 이해가 어렵지만

제운루에 대한 선인들의 詩와 칠언절구[七言絶句]예찬이

아마도 구구절절 아름다운 표현이라 짐작된다.

 

삭막한 시멘트 구조물만 요란하다고 발전하는 고장인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 속에 새로움을 깨달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제운루에 올라 자랑스러운 고향 역사를 돌이켜 배우고

사라지는 우리선조들의 소중한 자취를 가슴에 담는다면

이 또한 내 고장이 가슴 뿌듯이 다가오고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지금도 제운루를 기억하는 분들은 많지 않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른다면 아마 제운루는

그냥 기억 속에 묻혀버릴게 자명하다

이대로 잊히게 나 몰라라 할 것인가?

 

가장 적합한 장소로 구 읍청사가 공원화 된다고 하니

옛터 그 자리에 우뚝 서는 제운루의 늠름함을 보고 싶다

애향심으로 제운루의 수난을 이해하는 분들이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성의를 보태겠다는 마음도 들린다.

눈에 보이는 숙원사업도 중요하지만

미래 우리고장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할 수 있는 제운루

그 모습이 재현되어 나타나기를 간곡히 소원한다.

 

옛 풍기군청사의 부속건물로 포도청이던 지서가 있었다

풍기지서 신축으로 철거된 목재들이

어딘가 창고에 보관되어 드르렁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다고 하니

동시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인 만큼

그 목재를 뼈대로 제운루가 살아난다면

더한층 값지고 가치는 높아지리라 본다.

시장님, 읍장님, 도의원님, 시의원님, 풍기발전협의회 여러분들

그리고 관심과 듯을 같이하는 풍기읍민들

모두 사명감을 갖고 중지를 모아 줄 것을 당부 드린다.

 

고향에 대한 더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500년 풍기군의 가치를 찾아 후세에

길이길이 남길 수 있도록 ....

 

2013.8.1

시보네

 

 

 

아래는 2009년

고향을 극진히도 사랑하시는 김인순 선배님이 쓰신

제운루 수난사를 다시 한 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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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군관아 문루
제운루(齊雲樓) 누각의 수난

 

향토문화연구가 김 인 순

고려 말 기주절제사가 있었던 현판
제운루 누각은 풍기군 관아 문루門樓로서 1936년 일제 강점기 까지 현 풍기초등학교 운동장 앞 정문 옆에 우뚝 서 있었다. 영주․영풍향토지(송지향 편저)의 기록에 보면 1936년 풍기번영회에서 공원산 보평대保平坮로 옮겨 세웠는데 관리부실로 무너졌다고 한다. 전아典雅한 건축미를 보여주었으며 보평대에 옮겨 세울 때 순치順治 고려 말 기주절제사가 있었던 현판 년간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있었으니 순치는 조선 인조-효종 무렵으로 서기 1650년 전후였는데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안동 영호루 필체와 같은 제운루 현판
누각에 걸려 있던 제운루齊雲樓와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衙門 현판은 현재 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 보존되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주절제아문 글씨는 알려지지 않으나 제운루는 이조 중종조 주세붕군수의 글씨로 전하며 한편 고증 자료에 의해 고려 말 건축물로서 공민왕이 사액한 글씨로도 전해지고 있다. 위의 글을 참고로 조사한바 공원산 보평대에 옮겨지고 일제 말기와 미군정 기간을 지나며 공원 유원지로 찾는 이가 많았으며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이용되면서 기념 촬영도하고 솔경지에서 점심과 원족놀이 하는 장면도 발견할 수 있다.

 



1939년도 6학년 가을소풍
조성되지 않은 공원에 덜렁 누각 한 동 만 서 있다 보니 당시 재정이 어려운 때라 관리가 부실하여 1958년 여름 안타깝게도 장마 시 무너지고 만다. 이후 건축물자재는 온데 간 1939년도 6학년 가을소풍 데 없어지고 겨우 현판 두 점이 개인 집에 보관시켰다가 1960년대 풍기읍사무소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는다.

 



1936년도, 1938년도 동아일보 신문에 제운루에 대한 내용을 네 차례나 보도한 글이 있어서 역사적인 고증자료로서 매우 귀중하게 살펴 볼 수 있기에 원문 사본을 붙이고 글을 옮겨본다.

 


▷ 비운에 잠긴 풍기 제운루(1936년 6월 14일)

- 군의 처사로 딴 데로 옮겨가 - 시민반대운동 치열

 


최초 신문보도 내용
(풍기) 경북 풍기시 풍기공립보통학교 뜰 앞에 서 있는 약 600년 전 고려 공민왕시대에 창건 제운루, 그 후 한번 축융의화를 입었었으나 당시 중수하여 그 지은 품의 웅려함이 이 지방의 첫째로서 고적의 하나로 일반은 여겨왔으나 하등의 보호하는 바 없이 그냥 학교측의 임의에 맡기었는데 요사이 와서 이것이 학교로부터 영주군 농회에 팔리게 되어 불원간 헐어다 상품진열소를 짓거나 또는 영주번영회에 넘겨 공원용 누각으로 사용케 됨을 알자 풍기시민은 일어나 내 지방의 고적을 남을 준다는 것은 부당하다하여 당지 번영회에서는 지난 8일 긴급 역원회役員會를 열고 대책을 토의 하였다는바 금후 사건의 추의가 자못 주목된다고 한다.

 

 

 



▷ 풍기제운루 보평대에 이축(1936년 8월 6일)

- 군 양보로 번영회 매수

 

풍기번영회에서 제운루매수
(풍기) 6백년 역사를 가진 이 땅의 건물인 풍기 제운루가 학교 측으로 부터 팔려 장차 헐리어 딴 곳으로 옮기게 되어 당지 번영회에서 궐기하여 유치운동을 열열히 한다함은 이미 본보에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그동안 여러분의 힘쓴 바가 헛되지 않아 군농회의 양보로 마침내 번영회에서 사드리기로 약정되어 이 땅을 떠나가지는 않게 되었다는데 장차는 그것을 헐어 풍기 풍기번영회에서 제운루매수 기지 북부에 있는 보평대 위에 공원용 다락으로 짓게 되어 지난 3일 오전에 유지 제씨가 실지로 기지 답사를 한 결과 별반 이의 없이 아주 결정되었다는데 이 달 15일 안으로 철거하여 재목을 운반하리라 한다.

 

 


▷ 풍기공원시설하고 제우루도 이축(1936년 8월 9일)

 


금계봉 보평대 공원시설계획
(풍기) 한동안 풍기의 고적 제운루가 매각되어 영주로 간다 논의가 분분할 뿐 아니라 지상으로도 보도된 바 있거니와 그 후 풍기번영회에서는 그 보존지역으로 공원을 시설하고 그 공원에다 제운루도 옮기기로 결정하고 운동중이 던 바 벌써 기금․기부 받은 것도 7백 원을 초과하였고 그 외 기지의 기부도 있어서 일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으로 오는 8월 15일 이내로는 제운루도 이축 공사에 착수한다는바 공원 위치는 그 전부터 논의되어 온 유서 깊은 보평대로 결정된 바 있다 한다.

 

 

 


▷ 6백 년 전 구적舊蹟인 제운루를 이축! (1938년 9월 13일)

 


-금계봉 보평대에 옮겨

 

철거 2년 만에 이건완공
(풍기)풍기의 제운루는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인 고려 공민왕 시절에 건립한 것으로 이래 풍기군청 사 앞에 아문衙門으로서 풍우風雨의 시달림을 받 아 오던 바 거금 50여년에 불에 타 없어진 것 을 다시 증수하여 겨우 옛 모양을 전해오다가 풍 기가 면으로 폐합되면서 일반 수호의 손에 미치 지 못하여 도래에 빈한 것을 재작년 영주군 농회 로부터 매수하여 영주로 가지고 간다는 소문이 일게 되자 당지 번영회에서 분연히 일어서 오직 이 땅에 남은 한 개의 향토색인 그 것을 잃어버 리기가 아깝다하여 이에 대책을 강구한 나머지 그 것을 헐어다 금계봉 보평대에다 공원으로서 세우기로 되어 이래 공사에 힘을 들어오던 바 중간의 관계자의 사정으로 중지 되었다가 요사 이에 이르러서야 겨우 준공을 보게 되었다는데 비록 집안?은 이루어 놓았으나 아무 수식 단청이 없어 황량한 그대로 정자만 둥그렇게 놓여 있어 자못 오르는 자로 하여금 적막한 감회를 금치 못하게 하는데 앞으로 완전한 공원의 면모를 갖추기는 그 어느 때일 런지 아득하나마 우선 활성화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며 풍기의 중앙부인 지대이므로 그 위에 올라서 원근의 조망이 극히 명미明媚하여 벌써부터 유상객의 발자취가 매일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 제운루 이전과정과 발자취

풍기군 관아의 상징인 제운루의 역사적 의미가 간단하지 않음을 신문지상의 내용을 곰곰이 읽어 볼 때 알 수 있다.

 


건축 연대는 600여 년 전 고려 말 공민왕 때이며 제운 루 현판도 공민왕의 사액 현판으로 추정 된다.
1914년 4월 1일 풍기군이 영주군에 통․페합 되고 20년이 지난다. 관아 아사는 헐어 풍기공립보통학교 교사가 지어지고 부속 건물 몇 동이 동 서쪽 에 있었고 학교 정문으로 이용되던 제우루 누각은 아이들 놀이터나 어른들 휴식 장소로 방치된 상태에서 부실 관리 되고 있었을 뿐이다. 학교 측에서는 일본식 교육이 강화되던 시기라 정문의 우람한 옛 건물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철거방침을 세우면서 제운루의 수난이 시작된다. 당시 관의 일방적 처사로 영주군 주선 하에 영주농회에 팔려 넘어 간 것을 나중에 알고 풍기시민들의 치열한 반대운동이 전개된다.

 

다행이 1935년 9월 7일 창립된 풍기번영회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방안을 강구 하던 중 소백산자락을 이어 풍기중심으로 뻗어 내려 온 보평대에 공원설치와 제운루 누각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독지가가 있어 금계동 보평대 부지의 기지를 희사하여 어려움을 덜었으며 시민모금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1936년 8월 15일 철거를 하게 되며 2년여의 긴 이건공사를 하는 동안 자금난으로 중단사태의 어려움도 있었고 단청이나 단장도 하지 못했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지도 못한 채 금계봉 보평대에 1938년 9월 준공을 보게 된다. 그 후 관의 뒷전에서 외롭게 20년을 버티다가 1957년 장마철 큰 비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면서 비운의 일생을 마감하게 되고 겨우 금계봉 동산은 공원산으로 그 이름만 얻은 채 오늘에 이르게 된다. 역사의 진실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제운루와 기주절제아문 두 현판만이 자기의 영원한 안식처를 기대하며 외롭게 읍사무소 2충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 앞으로 과제

제운루의 운명은 어쩌면 풍기의 안타까운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영주군 행정 아래서 깊고 고귀한 역사적 유물 하나도 아직까지 보존시켜오지 못한 것이다. 제운루 형체가 사라진지 반세기가 되어 꼭 50년이 되었으며 고증까지도 희미하게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미 금계봉 보평대에 옮길 때 원래의 제운루 모습을 잊어버렸다. 규모가 작아지고 재목이 교차되면서 실제의 복원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제 그 모습을 되찾는 일이 기성세대의 과제다. 그러므로 풍기의 전통을 이어온 문화재적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고 풍기군 6백년의 역사 풍기군관아의 상징성을 높이 고 새로운 문화의 시대에 새 이정표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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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운루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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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12) - 임연재선생문집 (臨淵齋先生文集)|
次齊雲樓韻 ( 次齊雲樓韻 )
烟雨??欲暗空、微?時起滿樓風。聯床數日開靑眼、消遣閒愁酒有功。積雨龜潭水若空、天公不借半帆風。嚴程病滯?城館、還棄從前十日功。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11) - 竹下集 - 김익
竹下集卷之二
齊雲樓 樓在基川郡西
高樓表獨立。面面皆靑山。俗客應嫌寂。幽人自愛閑。雲齊?影去。風拂樹陰還。一枕淸凉夢。蒼松碧瀨間。

其二
獨自登樓去。悠然對碧山。?埃簾外遠。身世坐中閑。幽想看雲起。遐期待月還。機心吾已忘。野鳥入?間。

其三
環樓無俗物。入眼但雲山。林邃溪聲遠。人稀野色閑。孤吟吾自樂。小酒客忘還。向晩仍?枕。鳴蟬在樹間。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10) - 풍기객관 제운루 중수기 - 玉川集 - 조덕린
玉川先生文集卷之八
?基客館齊雲樓重修記
?之邑舊有興州之地。西至嶺東至龜城界。北盡小白山下。南踰大山。接襄陽郡。南北百里而遙。東西半之而近。地曠衍。人民衆。爲嶺底巨郡。其?宇樓觀。頗?崇完敞。及興州析爲府。?獨有南界故地。而三方?十餘里爲界。地縮民少。又隙孔道。爲之守者。左右策應。無暇寢?。而邑入??。不足以自給。於是?舍館宇。什損二三。而齊雲樓在客館之傍。舊以宏爽稱。梁?朽?。棟宇?傾。而莫有意修之者。客之從西南來者。皆過而歎
今李侯至。政出不搖。賦入有經。約己裕民。民皆悅喜。一日登樓而歎曰。前人旣勤用心力。成此偉觀。後來者乃獨有其登眺之樂。而不能任其修繕之勞。卒至於頹壞傾覆。惟他人能我不能。於是斥其庫庾之餘者。發材陶瓦。不煩民力。而傾者正毁者完。??者明。而樓之觀一新焉。侯飮于其上而落之。屬諸人賦詩歌?。而北望京闕於雲天??之外。以爲瞻佇祝延之地。旣又貽書不?。使記之。不?謂侯之爲郡。政多可記。奚獨眷眷於此一役。而固要不?之辭。若是之勤耶。豈其利愛之在民者。侯不欲自居。而亦不待吾言而著也。然此一役也。亦足以?之矣。今之爲州郡者。率多傳舍其官。而所務在於簿書期會。以苟免簡書是幸。孰肯弊弊焉。捐力於不課之役。勞心於無責之地。如侯之爲者。無論邑力之殘者不能。卽有餘力者亦不能也。侯以十室之邑。而能區區修補。完此大役。不?前功。無廢後觀。則凡政令之在所急而先乎此者。當不餘力而讓人矣。記如是足也。若夫江山之勝。登覽之樂。雖老矣。如獲從侯遊。尙能爲侯賦之。侯名禎。字聖瑞。以文辭進。歷敭華顯。今守此郡。爲政簡而不煩。有惠愛聲。人皆稱之。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9) - 玉川集 - 조덕린
玉川先生文集卷之一 

次?基齊雲樓韻。呈李使君聖瑞 楨。
齊雲樓最?。隱?見靑山。獻態?峰秀。?詩太守閒。里門眠犬穩。官樹暮鴉還。莫道西方遠。依微夕照間。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8) - 栢潭集 - 구봉령
栢潭先生續集卷之二
七言絶句
?基齊雲樓次韻 
感慨仙遊夢已空。滿庭寒竹響淸風。栽培却憶當年事。甁罐携泉手做功。退溪先生常寧于郡。有郡齋移竹詩。云甁罐携泉忙一僕。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7) - 栢潭集 - 구봉령
栢潭先生文集卷之二
七言絶句
?基齊雲樓次韻。奉汝友兼示具汝膺。
身登寥廓俯雲空。兩袖飄飄九萬風。分寸?攀終得力。須從平地積深功。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6) - 栢潭集 - 구봉령
栢潭先生文集卷之二
 七言絶句
?基齊雲樓次韻
攀雲獨上俯遙空。兩腋冷然萬里風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5) - 무릉잡고(武陵雜稿) 권지삼 별집 - 주세붕
武陵雜稿卷之三 別集

齊雲樓晩霽。次私淑齋韻。
登樓欲霽倚蒼空。浩浩如憑九萬風。三十六峯雲變態。詩翁?老兩難功。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4) - 무릉잡고(武陵雜稿) 권지일 별집 - 주세붕
武陵雜稿卷之一 別集

與李公毅。同登齊雲樓。大醉。使呼韻賦之
衙罷若脫靴。乘風飛上樓。故人李謫仙。許我携手遊。海雲挾腥雨。?暑?不留。狂歌試痛飮。白鳥起前洲。開燈且盡歡。
莫問歲月?。醉筆怒吼雷。揮寫良有由。曲肱吾亦樂。富貴如雲浮


제운루(齊雲樓)에 관한 자료 (3) - 영주금석문헌집 I 에서
齊雲樓 · 齊雲樓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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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豊友會
글쓴이 : 시보네/5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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