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운루 누각은 풍기군 관아 문루門樓로서 1936년 일제 강점기 까지 현 풍기초등학교 운동장 앞 정문 옆에 우뚝 서 있었다. 영주․영풍향토지(송지향 편저)의 기록에 보면 1936년 풍기번영회에서 공원산 보평대保平坮로 옮겨 세웠는데 관리부실로 무너졌다고 한다. 전아典雅한 건축미를 보여주었으며 보평대에 옮겨 세울 때 순치順治 고려 말 기주절제사가 있었던 현판 년간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있었으니 순치는 조선 인조-효종 무렵으로 서기 1650년 전후였는데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안동 영호루 필체와 같은 제운루 현판
누각에 걸려 있던 제운루齊雲樓와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衙門 현판은 현재 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 보존되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주절제아문 글씨는 알려지지 않으나 제운루는 이조 중종조 주세붕군수의 글씨로 전하며 한편 고증 자료에 의해 고려 말 건축물로서 공민왕이 사액한 글씨로도 전해지고 있다. 위의 글을 참고로 조사한바 공원산 보평대에 옮겨지고 일제 말기와 미군정 기간을 지나며 공원 유원지로 찾는 이가 많았으며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이용되면서 기념 촬영도하고 솔경지에서 점심과 원족놀이 하는 장면도 발견할 수 있다.
1939년도 6학년 가을소풍
조성되지 않은 공원에 덜렁 누각 한 동 만 서 있다 보니 당시 재정이 어려운 때라 관리가 부실하여 1958년 여름 안타깝게도 장마 시 무너지고 만다. 이후 건축물자재는 온데 간 1939년도 6학년 가을소풍 데 없어지고 겨우 현판 두 점이 개인 집에 보관시켰다가 1960년대 풍기읍사무소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는다.
1936년도, 1938년도 동아일보 신문에 제운루에 대한 내용을 네 차례나 보도한 글이 있어서 역사적인 고증자료로서 매우 귀중하게 살펴 볼 수 있기에 원문 사본을 붙이고 글을 옮겨본다.
▷ 비운에 잠긴 풍기 제운루(1936년 6월 14일)
- 군의 처사로 딴 데로 옮겨가 - 시민반대운동 치열
최초 신문보도 내용
(풍기) 경북 풍기시 풍기공립보통학교 뜰 앞에 서 있는 약 600년 전 고려 공민왕시대에 창건 제운루, 그 후 한번 축융의화를 입었었으나 당시 중수하여 그 지은 품의 웅려함이 이 지방의 첫째로서 고적의 하나로 일반은 여겨왔으나 하등의 보호하는 바 없이 그냥 학교측의 임의에 맡기었는데 요사이 와서 이것이 학교로부터 영주군 농회에 팔리게 되어 불원간 헐어다 상품진열소를 짓거나 또는 영주번영회에 넘겨 공원용 누각으로 사용케 됨을 알자 풍기시민은 일어나 내 지방의 고적을 남을 준다는 것은 부당하다하여 당지 번영회에서는 지난 8일 긴급 역원회役員會를 열고 대책을 토의 하였다는바 금후 사건의 추의가 자못 주목된다고 한다.
▷ 풍기제운루 보평대에 이축(1936년 8월 6일)
- 군 양보로 번영회 매수
풍기번영회에서 제운루매수
(풍기) 6백년 역사를 가진 이 땅의 건물인 풍기 제운루가 학교 측으로 부터 팔려 장차 헐리어 딴 곳으로 옮기게 되어 당지 번영회에서 궐기하여 유치운동을 열열히 한다함은 이미 본보에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그동안 여러분의 힘쓴 바가 헛되지 않아 군농회의 양보로 마침내 번영회에서 사드리기로 약정되어 이 땅을 떠나가지는 않게 되었다는데 장차는 그것을 헐어 풍기 풍기번영회에서 제운루매수 기지 북부에 있는 보평대 위에 공원용 다락으로 짓게 되어 지난 3일 오전에 유지 제씨가 실지로 기지 답사를 한 결과 별반 이의 없이 아주 결정되었다는데 이 달 15일 안으로 철거하여 재목을 운반하리라 한다.
▷ 풍기공원시설하고 제우루도 이축(1936년 8월 9일)
금계봉 보평대 공원시설계획
(풍기) 한동안 풍기의 고적 제운루가 매각되어 영주로 간다 논의가 분분할 뿐 아니라 지상으로도 보도된 바 있거니와 그 후 풍기번영회에서는 그 보존지역으로 공원을 시설하고 그 공원에다 제운루도 옮기기로 결정하고 운동중이 던 바 벌써 기금․기부 받은 것도 7백 원을 초과하였고 그 외 기지의 기부도 있어서 일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으로 오는 8월 15일 이내로는 제운루도 이축 공사에 착수한다는바 공원 위치는 그 전부터 논의되어 온 유서 깊은 보평대로 결정된 바 있다 한다.
▷ 6백 년 전 구적舊蹟인 제운루를 이축! (1938년 9월 13일)
-금계봉 보평대에 옮겨
철거 2년 만에 이건완공
(풍기)풍기의 제운루는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인 고려 공민왕 시절에 건립한 것으로 이래 풍기군청 사 앞에 아문衙門으로서 풍우風雨의 시달림을 받 아 오던 바 거금 50여년에 불에 타 없어진 것 을 다시 증수하여 겨우 옛 모양을 전해오다가 풍 기가 면으로 폐합되면서 일반 수호의 손에 미치 지 못하여 도래에 빈한 것을 재작년 영주군 농회 로부터 매수하여 영주로 가지고 간다는 소문이 일게 되자 당지 번영회에서 분연히 일어서 오직 이 땅에 남은 한 개의 향토색인 그 것을 잃어버 리기가 아깝다하여 이에 대책을 강구한 나머지 그 것을 헐어다 금계봉 보평대에다 공원으로서 세우기로 되어 이래 공사에 힘을 들어오던 바 중간의 관계자의 사정으로 중지 되었다가 요사 이에 이르러서야 겨우 준공을 보게 되었다는데 비록 집안?은 이루어 놓았으나 아무 수식 단청이 없어 황량한 그대로 정자만 둥그렇게 놓여 있어 자못 오르는 자로 하여금 적막한 감회를 금치 못하게 하는데 앞으로 완전한 공원의 면모를 갖추기는 그 어느 때일 런지 아득하나마 우선 활성화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며 풍기의 중앙부인 지대이므로 그 위에 올라서 원근의 조망이 극히 명미明媚하여 벌써부터 유상객의 발자취가 매일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 제운루 이전과정과 발자취
풍기군 관아의 상징인 제운루의 역사적 의미가 간단하지 않음을 신문지상의 내용을 곰곰이 읽어 볼 때 알 수 있다.
건축 연대는 600여 년 전 고려 말 공민왕 때이며 제운 루 현판도 공민왕의 사액 현판으로 추정 된다. 1914년 4월 1일 풍기군이 영주군에 통․페합 되고 20년이 지난다. 관아 아사는 헐어 풍기공립보통학교 교사가 지어지고 부속 건물 몇 동이 동 서쪽 에 있었고 학교 정문으로 이용되던 제우루 누각은 아이들 놀이터나 어른들 휴식 장소로 방치된 상태에서 부실 관리 되고 있었을 뿐이다. 학교 측에서는 일본식 교육이 강화되던 시기라 정문의 우람한 옛 건물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철거방침을 세우면서 제운루의 수난이 시작된다. 당시 관의 일방적 처사로 영주군 주선 하에 영주농회에 팔려 넘어 간 것을 나중에 알고 풍기시민들의 치열한 반대운동이 전개된다.
다행이 1935년 9월 7일 창립된 풍기번영회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방안을 강구 하던 중 소백산자락을 이어 풍기중심으로 뻗어 내려 온 보평대에 공원설치와 제운루 누각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독지가가 있어 금계동 보평대 부지의 기지를 희사하여 어려움을 덜었으며 시민모금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1936년 8월 15일 철거를 하게 되며 2년여의 긴 이건공사를 하는 동안 자금난으로 중단사태의 어려움도 있었고 단청이나 단장도 하지 못했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지도 못한 채 금계봉 보평대에 1938년 9월 준공을 보게 된다. 그 후 관의 뒷전에서 외롭게 20년을 버티다가 1957년 장마철 큰 비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면서 비운의 일생을 마감하게 되고 겨우 금계봉 동산은 공원산으로 그 이름만 얻은 채 오늘에 이르게 된다. 역사의 진실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제운루와 기주절제아문 두 현판만이 자기의 영원한 안식처를 기대하며 외롭게 읍사무소 2충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 앞으로 과제
제운루의 운명은 어쩌면 풍기의 안타까운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영주군 행정 아래서 깊고 고귀한 역사적 유물 하나도 아직까지 보존시켜오지 못한 것이다. 제운루 형체가 사라진지 반세기가 되어 꼭 50년이 되었으며 고증까지도 희미하게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미 금계봉 보평대에 옮길 때 원래의 제운루 모습을 잊어버렸다. 규모가 작아지고 재목이 교차되면서 실제의 복원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제 그 모습을 되찾는 일이 기성세대의 과제다. 그러므로 풍기의 전통을 이어온 문화재적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고 풍기군 6백년의 역사 풍기군관아의 상징성을 높이 고 새로운 문화의 시대에 새 이정표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