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16~ 17세기를 중심으로 -

강나루터 2017. 4. 19.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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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16~ 17세기를 중심으로 -

장윤수*1)

 


차 례
. 醴泉, 그 인문지리적 배경
. 예천지역 성리학의 선구자, 尹祥
.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인물 환경
. 예천지역의 대표 성리학자
. 맺음말

 


국문초록
이 연구는 16~17세기 예천지역 성리학의 전통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목적으
로 한다. 예천지역 성리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사변적 논변보다는 성리학적 가르침
을 삶의 구체적 場에서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특히 家學의 바탕 위에서 ‘孝行’을
실천하는 전통은 예천지역 성리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
역은 퇴계의 거주지와 가까워 퇴계 학문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수많은
퇴계 문인을 배출했다. 또한 예천지역 성리학자들은 定住民 문화를 일궈온 토착민
들과 移住民들 간의 성공적인 융합을 이루어냈다. 유력한 문중들이 함께 書堂을 건
립하고 자녀 교육에 힘쓰는 등 지역민들의 협력과 단결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예
천지역 학자들의 師承관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家學을 계승한 학자들이 많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
302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이 지역의 학문 전통이 자생적 토양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 마디로 말하여, 가학적 바탕에 기반한 자생적 학문토양에 퇴계학맥이
접목된 것이 예천지역 성리학의 정체성이다.
주제어
권문해, 예천, 윤상, 정탁, 퇴계문인

 


. 醴泉, 그 인문지리적 배경

 

예천은 안동과 상주의 접경지역으로서 인문학적 전통이 풍부한 고장
이다. 이 지역은 丁若鏞이 ‘鄒魯之鄕’이라고 칭했을 만큼1) 유학의 전통이
강하고 특히 퇴계학맥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퇴계의 외가(春
川朴氏)가 이 지역에 있었고, 퇴계의 많은 친인척들이 거주했으며, 타지역
에 비해 퇴계 문인의 숫자가 많다. 그렇지만 종래 예천지역의 성리학에
대해서 연구된 바가 대단히 미미하다. 이 지역 학자들의 저술이 많지 않
고 특별한 학설을 남긴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안동, 상주와 같은 큰 지
역과 이웃해 있어서 이들 지역으로의 귀속성이 강했으며,2) 이로 인해 鄭
琢, 權文海처럼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학자들조차 독자적인 학맥을 형성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16~ 17세기를 중심으로 한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특징을 확인하고 이 지

 


1) 丁若鏞은 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예천에 왔다. 당시 17세였던 다산은 伴鶴亭
에서 공부를 했고 乃城川을 유람하며 詩文을 짓기도 했다.
2) 예천군지편찬위원회, 醴泉郡誌(上卷) (예천군, 2005), 147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03

 

역 대표 성리학자와 士族의 성리학적 삶의 과정을 추적해보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예천지역의 인문지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醴泉’이라는 지명은 7 5 7년(신라 경덕왕1 6)에 水酒縣(신라 지중왕 50 5 )
이 ‘예천군’으로 바뀌면서 처음 생겨났다. 그 후 몇 차례 변화를 겪지만
1 41 6년(조선 태종16 ) 이후 줄곧 예천군이라는 이름을 유지하였다. 일부
행정단위의 소속이 바뀌기도 했는데, 현재의 예천군은 대략 이전시대의
‘예천군’과 ‘용궁현’이 통합된 곳이다.3) 인문지리의 ‘지역’을 논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역의 범위’인데, 이 글에서 논의하는 ‘예천지
역’은 현재의 행정단위를 중심으로 한다.
예천지역은 고려 초기부터 在地세력이 강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에 의거하면 예천의 토성은 林氏, 尹氏, 權氏이다. 그리고 용궁현의 金氏,
朴氏, 全氏도 토성으로 기반을 다졌다. 이 중에서 임씨와 윤씨가문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흥성하였으나 1 6세기 이후로 쇠퇴하지만, 권씨가
문은 후대로 갈수록 성세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예천지역의 외래성씨들은
대부분 外家와 妻鄕을 따라 예천에 들어왔다.
예천은 禮安과 가까워 퇴계의 학문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영남
지역 퇴계문인의 분포는 경상좌도 지역이 전체의 9 4%를 차지하고, 좌도
지역 중에서도 퇴계의 거주지 예안과 안동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
데 그 나머지 지역 중에서는 예천이 가장 많은 숫자의 제자를 배출했다.

 

3) ‘龍宮’은 縣과 郡의 행정단위가 교대로 사용되었는데, 예천군과 통합 당시에는 ‘龍宮
郡’이었다. 東國輿地勝覽 에 따르면, 현재의 예천 甘泉面은 원래 감천현으로 安東大
都護府의 屬縣이었고, 龍宮面은 예천과 관련 없는 독립 縣이었으며, 현재의 의성 多
人面은 예천군 소속인 다인현이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문경군 東魯面 지역도 예천군
에 속하였다. 이 글에서 ‘예천지역’이라 할 때의 의미는 현재의 행정구역을 중심으
로 하여 감천과 용궁은 포함시키고, 다인과 동로는 제외하기로 한다.
304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이 지역의 퇴계문인들은 대대로 세거해 온 토착세력에 비해 父祖 세대
혹은 당대에 이주해온 이주민이 많다. 權文海, 鄭琢, 朴蕓, 全纘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러하다. 金八元은 예천의 안동권씨 외가로 들어왔고,
金復一은 예천권씨 문중에 장가들었으며, 李中立은 안동권씨 외가에서 태
어났다. 그리고 퇴계의 조카인 李完, 李宏 등은 예천의 함양박씨 문중을
외가로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당대나 父祖 세대에 예천지역으로 이주해
온 대표적 퇴계문인들이다.
전통시대에 있어서 한 고을의 인문 역량을 가늠하는 대표적 방법의
하나가 바로 과거급제자의 숫자이다. 예천은 이 방면에서도 뛰어난 실적
을 쌓았다. 통계상으로 볼 때 생원 진사과 14 8명, 문과 1 00명, 음사 1 0 3
명, 문사 7 3명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용궁현 출신자로는 생원 진
사 3 8명, 문과 5 1명, 음사 5 9명, 문사 41명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훨씬
큰 고장인 경주, 밀양, 대구에 비해서도 월등히 많은 숫자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예천을 두드러지게 하는 인문지리적 특징은 이
지역이 忠孝의 고장이라는 사실이다. 성리학적 세계관에 있어서 부모에
대한 孝가 일차적 孝의 의미를 이루며, 가정과 근원적 점착성으로 연계된
국가(군주)에 대한 忠 또한 孝의 연속적 의미를 지닌다. 유교사회에서 ‘가
정’과 ‘국가’는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공동체이며, 또한 ‘부모(군주)의 뜻
을 잘 계승하고 보존하는 것’[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한
면에서 예천지역은 충효의 고장이자, 성리학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고
려 멸망 후 절개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에 은거했던 고려 충신 7 2현 중에
서 예천 출신이 무려 10명이나 된다.4) 그리고 예천지역의 어떤 집안 어

 

4) 예천군지편찬위원회, 醴泉郡誌(上卷) , 146-7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05

 


떤 학자를 주목해 보더라도 孝悌의 실천에 충일했던 삶의 전통을 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유학은 이론과 실천의 합일을 목표로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성리학과
관련한 연구에서 이기론과 심성론에 관한 이론들이 주목받기 때문에 이
러한 이론적 특징들이 크게 주목되지 않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예천지역의 성리학자들은 독특한 이론과 저술
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효행’이라는 실천지향적 삶의 특징이 강했다. 이들
의 관심은 이론적 논변에만 머물지 않고 성리학적 가르침을 삶의 구체적
場에서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서, 성리학적 이론을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통해 진솔하게 이행해
나간 예천지역의 학자들이야말로 선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 예천지역 성리학의 선구자, 尹祥

 

임씨, 윤씨, 권씨(흔씨)는 예천 본읍의 鄕吏職을 세습적으로 주도해 왔
는데, 고려 중기 이래로 吏族의 일부가 상경하여 중앙관직에 종사하면서
士族과 吏族으로 분화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尹祥(13 7 3
1 4 55 )이다. 그는 조선 초기 향리에서 발신하여 사족이 된 대표적인 사
람이다. 여기서는 예천지역 성리학의 선구라는 시각에서 윤상의 생애와
업적을 개관해보기로 한다.
윤상은 麗末鮮初 시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字는 實夫이고, 호는 別洞
이다. 그는 대사성 등을 역임하면서 官學을 영도하였고, 성리학의 보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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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처음에 향리직에 종사하였는데, 당시 그의 주
경야독의 성실한 면학태도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13 9 6년(태조5 ) 2 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고을의 敎授
官을 거쳐, 예조정랑 때 서장관으로 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
다. 그 후 부모님이 연로하자 외직을 청해 여러 고을의 郡事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 4 48년(세종 3 0)에는 예문관제학으로
서 元孫(단종)의 입학례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윤상은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에 직접 가르쳤고, 왕세손(단종)을 가르치기도 했다. 문종이 왕위에
등극한 후에 나이가 많아 귀향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음식물을 내렸다. 고령으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饋物을 내리는 제도가 여
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 강학에 힘썼는데, 당시 그
의 거처에 배우려는 사람들이 크게 운집했다. 고향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8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런데 윤상의 학통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바로 趙庸
이다. 윤상은 조용의 문인이고, 조용은 鄭夢周의 문인이기 때문이다. 즉
윤상은 조용을 통해 ‘한국적’ 성리학의 대표자로 평가받는 정몽주의 학맥
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조용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다 예천에 유
배되었는데, 당시 윤상은 趙末生 裵桓 등과 함께 조용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연찬하였다. 조용을 통해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한 윤상은 특히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하면서 조선 왕조 초기의 성리학 보급과 정
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經學에 밝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로는 윤상이 영남사림파의 맥을 잇는 金叔滋에게
주역 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선산에서 거주하던 김숙자는 멀지않은 지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07

 

역인 황간의 현감으로 부임한 윤상을 찾아가 주역 을 배움으로써 큰 성
취를 이루었다. 그런데 김숙자의 아들인 金宗直 또한 윤상의 시집에 대한
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윤상을 사숙하였다는 잠을 인정하였다.5) 이를 통
해 윤상은 위로는 조용을 거쳐 정몽주의 학맥에 접목하게 되고, 아래로는
김숙자를 거쳐 김종직 등에로 이어지는 영남사림파와도 학연을 맺게 된
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柳道獻(18 3 5~ 1 90 9 )은 한국성리학사에서 차지하는
윤상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아! 고려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문사들은 문장을 꾸미는 일만 숭상하였
다. 그러므로 문장을 다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능숙하지만 道學에 밝은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는 內外와 輕重의 구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程朱의 학문이 조금씩 우리나라로 전해졌는데, 선
생이 정주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여건에서 떨치고 일어나
여러 학자들을 위해 도학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易學에 더욱 정통하여 그것
의 의미를 밝혀내는 등 유학을 흥기시키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
하여 정주의 학문이 다시 세상에 밝게 드러나게 되었으니, 그 공이 이미 위
대하다 하겠다.6)
윤상은 鄕吏로서 입신하여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오랜 기간 國學의
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그래서 공식적인 역사기록에서도 윤
상의 학문과 인품에 대해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세종 때에 성균관 사

 

5) 佔畢齋集 卷1, 序, 尹先生祥詩集序, “余亦私淑人也, 敢不樂爲之書.” 참조.
6) 別洞先生續集 , 跋: “嗚呼. 我東自勝國來, 文學之士, 專尙詞華. 雕琢繪繡之非不工矣, 而
於道則未有聞, 蓋不知內外輕重之分故耳. 幸而程朱之言, 稍稍東來, 先生以私淑之人, 奮孤
寒而爲群儒倡, 尤邃於易學, 表章之, 發揮之, 以興起斯文爲己任. 而洛閩遺書, 燦然復明於
世, 其功已偉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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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있던 윤상이 나이가 많아 사직하기를 청하자, 도승지 趙瑞康이 임
금께 아뢰기를, “이 사람은 나이가 비록 늙었사오나 학술이 精明하고, 또
덕행이 있사와 師表가 되기에 적합한데다가 受業하는 諸生들도 또한 많사
온데, 이제 만약 윤허하시면 여러 생도들이 실망할까 심히 염려되옵니
다.”7)라고 하며 반대하였다. 그리고 14 5 4년(단종 2)에는 임금이 윤상에게
옷 한 벌을 내려 주었다. 윤상은 당시 사직하고 예천에 은거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祔廟를 하례하기 위해 來見하였다. 윤상에 대한 士官의 평
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尹祥은 학문이 精博한데, 더욱이 易經 에 뛰어나고 詩文을 잘하며, 오랫
동안 성균관에서 벼슬하여 학자들이 많이 스승으로 받들었다. 윤상은 하나하
나 자상하게 사람들을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正坐하고 있었으나 일찍이 피
로한 빛이 없었다. 당시에 金泮과 金末이 모두 宿儒로서 司成을 겸하여 각기
의견을 고집하며 쟁론하기를 서로 양보하지 않았으나, 학생들은 대부분 윤상
의 說을 받들었다. 예천군에 살면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니, 사방의 학자들
이 많이 그를 따랐다.8)
그래서 徐居正은 “윤상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매우 정
밀하면서도 자세하게 분석하니 國朝 이래로 스승이 될 만한 유학자로서
는 최고였다”9)라고 하였고, 李滉은 1 5 67년 가을에, 明의 사신으로 온 許
國과 魏時亮이 “동방에도 공자의 心學과 기자의 疇數를 아는 사람이 있습
니까?”라고 묻자, 禹倬, 鄭夢周, 金宏弼, 鄭汝昌, 尹祥, 李彦迪, 徐敬德 7인을

 


7) 朝鮮王朝實錄 世宗23년(1441), 11월 7일(更子), 3번째 기사.
8) 朝鮮王朝實錄 端宗2년(1454), 8월 28일(丁未), 2번째 기사.
9) 筆苑雜記 卷1 ; 燃藜室記述 卷3, 世宗祖故事本末 ‘尹祥’條.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09

 


거론하였다.10) 윤상에 대한 후대학자들의 평가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학문이 정밀하고 깊다는 점과 지성으로 남을 가르쳐 師儒의 으뜸이 되었
다는 점이다. 지금 예천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윤상의 뚜렷한 학맥
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그의 학풍과 성실함이 이 지역의 인문학적 토대가
되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인물 환경

 

1. 예천지역 퇴계문인과 浯川書堂 출신 인물들의 특징
예천은 지리적으로 보아 퇴계의 근거지와 가까워서 퇴계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가 많지 않다.11)
우선 퇴계의 문인록12)에 수록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예천지역 퇴계

 

10) 退溪先生言行錄 卷5, 類編, 論人物 ; 退溪先生文集攷證 卷4, 13卷, 書, 別紙(柳道源)
참조.
11) 다만 黃渭周의 醴泉地域의 退溪學脈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韓國의 哲學 28호,
2000, 113-48쪽 所收)을 참고할 만하다. 이 글은 예천지역 출신 退溪門人들의 개
괄적 특징을 소개하는 것이다.
12) 退溪의 門人錄은 權斗經이 溪門弟子錄 을 처음 작성한 이래 李守淵, 李守恒, 李野淳
이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하였고,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1914년 도산서원에서
陶山及門諸賢錄(甲寅本) 을 간행했다. 최근에는 1997년에 權五鳳이 도산급문제현
록 에 수록된 309명의 간단한 인적사항을 정리하여 도표로 제시하였으며, 1998년
金鍾錫이 이를 다시 수정 보완하여 退溪門人 師承關係圖를 발표하였다.[김종석, 陶
山及門諸賢錄과 退溪學統弟子의 범위 , 한국의 철학 26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98]. 그리고 필자가 2013년에 종전 자료의 누락된 곳과 잘못된 곳을 수정 보완
하여 퇴계학파의 문인록 을 발표했다.[拙著, 경북 북부지역의 성리학 (심산출판
사, 2013), 625-36쪽 참조]
310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문인들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황위주’는 퇴계의 문인록에 의거하여 영남지역 퇴계문인의 지역별 분
포상황을 도표로 정리하였는데, 그는 이 표에서 예천과 용궁지역의 학자
를 총1 3명으로 분류하였다.

 

權文海(1534~1591), 李愈(1521~1593), 李熹(1532~1592), 李應(1536~1597),
宋福基(1541~1605), 朴蕓(1535~1595), 李宏(1515~1573), 李沖(생몰년 미상), 李
令承(1527~1605), 辛弘祚(생몰년 미상), 李中立(1533~1571), 全纘(1546~1612),
安克誠(1541~?)

 

그런데 ‘황위주’는 이러한 분류의 정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예천 용궁지역의 인물로 분류한 安克誠은 증조부 때부터 자신에 이르
기까지 묘소가 모두 경기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예천의 인물로 보기 어
렵다. 반면, 예안 인물로 파악했던 李完, 李宗道, 李宓, 李閱道, 李揆道 등 5
명은 실제로 예천지역에 거주하였고, 안동 인물로 파악했던 鄭琢, 金復一
과 영주 풍기지역 사람으로 분류했던 張謹도 모두 당대에 예천으로 이
주하였다. 그리고 金八元과 辛乃沃은 근거지가 당시 안동의 속현이었던
감천현이었는데, 이 지역이 지금은 예천군에 편입되었기에 이들도 모두
예천지역사람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권오봉’의 연구결과를 반영하면 당
초의 陶山及門諸賢錄 에 등재되지 않은 宋遺慶과 그의 두 아들 宋汝能, 宋
汝玉도 모두 예천에 거주한 퇴계 문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3) ‘황
위주’의 이러한 연구결과를 반영하면 영남지역 퇴계문인의 지역별 분포현
황에서 예천지역의 문인은 무려 25명이나 된다. 그런데 예천지역 향토사

 

13) 권오봉編, 退溪書集成(1) (포항공과대학교, 1996), 430-2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11

 

학자인 조동윤14)은 이 지역 퇴계문인이 3 1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權洙
(1 52 2~ 1 5 79 ), 申暹(1 53 9~ 1 5 94 ), 朴寬(1 51 5~ ?), 李士愿(1 5 40~ 1 5 91 ), 李
(1 5 43~ ?)가 예천에 거주하였으며, 그리고 安克誠(15 4 1~ ?) 또한 여러 정
황으로 볼 때 예천 거주자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당시
예천군 다인현(현재는 의성군 다인면) 출신인 朴士熹(15 0 8~ 15 8 8, 咸陽)도
상당기간 동안 금당실에 거주했기 때문에 예천지역 퇴계문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5) 구체적인 기록을 가지고 좀더 논증해보아야 하겠
지만, 향후 예천지역 퇴계문인의 外延이 더욱 넓혀질 가능성이 높다. 그
렇지만 황위주의 주장처럼 예천지역 퇴계문인이 25명이라고 하더라도 이
것은 퇴계의 거주지였던 예안과 안동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이다.
예천지역 퇴계 직전제자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검토해보면 다음 몇 가
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토착민보다 이주민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둘째, 移居에 혼맥이 크게 작용하였고, 셋째, 예천 주변 지역에서 이주한
퇴계의 친인척들이 많고, 넷째, 지역적으로 호명, 용문, 지보, 감천, 예천
읍에 거주하였으며, 다섯째, 퇴계학과 관련한 이론적 업적이 탁월한 사람
이 거의 없다.16) 그리고 또 한 가지 추가할 수 있는 사실은 예천의 지역
학풍을 주도하는 중심학자가 보이지 않고, 이로 인해 상당수 학자들이 인
근 지역인 안동과 상주의 인문세력의 영향권에 흡수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퇴계문인들의 특징을 외연의 범위를 훨씬 넓혀 浯川書堂 출신
학자들의 특징과 비교해 보도록 하자.

 


14) 예천군청 문화관광과장을 역임함.
15) 朴士熹의 冑孫인 박원갑(예천교육장 역임)의 주장이다.
16) 황위주, 醴泉地域의 退溪學脈 , 139-46쪽 참조.
312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오천서당은 내성천의 ‘浯川’(호명면과 보문면)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
의 2 8門中(2 5문중 또는 2 6문중이라고도 함)의 儒林들이 모여 유가의 학문
을 연찬하기 위해 1 6 37년 5월에 창립되었는데,17) 1 8 44년 과거제도의 철
폐와 18 6 4년 대원군의 서원 서당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堂錄에 등
재된 及門者數는 2,31 3명(1 62 7년~ 1 8 43년)이며, 당록에 등재된 인물 중에
서 대과(문과)급제자만 하더라도 1 5명(진성이씨 6명, 김해김씨 3명, 안동
권씨 2명, 밀양박씨 영양남씨 인동장씨 평산신씨 각 1명)이나 된다.18)

 


李崍(1588~1649), 朴震弼(1597~1635), 南之望(1608~?), 張瑱(1635~1707),
李東標(1644~1700), 權萬濟(1646~1713), 金南甲(1652~?), 李坽(1653~1700), 申
義命(1654~1716?), 李文標(1663~1731), 金正龜(1678~1755), 李濟兼(1683~1742),
金聖龜(1686~1767), 權達國(1692~?), 李忠國(1711~1777)

 


서당 출신의 주요인물은 李瀣(퇴계의 仲氏)의 손자 李味道, 鄭琢의 둘
째아들 鄭允偉, 李堣(퇴계의 숙부)의 6대손 李東標를 언급할 수 있다.
오천서당 출신의 주요 학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예천지역 명문가의
자녀가 많고, 특히 퇴계의 친인척들이 많다. 이 점은 앞서 확인한 퇴계문
인들의 특징과도 일치한다. 이들은 주로 家學이나 지역에 거주하던 선배
학자들을 통해 학문을 배웠다. 그래서 성리학의 이론적 측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거나 지역학계를 주도적으로 이끌만한 세력을 형성한 이는
적었지만, 家學에 기반하여 孝悌의 실천에 힘쓰고 지역인들과 화합하여
토착인과 이주인들 간의 상생문화를 이루어 갔던 점에서 모범을 보였다.

 

17) 예천향토문화연구회, 醴泉村落史 (예천군, 1992), 268쪽 참조
18) 浯川書堂錄 (永慕會, 大譜社, 2015)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13

 

오천서당의 건립에 명망 있는 문중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곳에서 자녀를
함께 교육하였다. 이것은 당시 예천지역의 학파별, 문중별 갈등 대립이
적었다는 점을 드러내주는 증거이며, 또한 지역 구성원들이 함께 힘을 모
아 자녀교육에 힘쓴 아름다운 사례이다.

 

2. 예천지역 학자들의 師承 관계
한국 성리학의 지역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바
로 師承 관계를 분석하는 일이다. 지역출신의 학자들이 과연 어떤 학자들
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찬하였고, 또한 어떤 학자들과 더불어 교유하였는
가 하는 사실은 단순한 사승 관계의 사실을 넘어서 많은 정보를 우리들
에게 제공해 준다. 특히 학문 담론의 차원에서 道統觀的 정통의식과 진리
관을 표방했던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의식을 고려하면 사승관계와 교우
관계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예천지역 학자들의 사승관계는 退溪 李滉을 중심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퇴계 이전과 당대, 퇴계의 직전제자 시대, 퇴계 직전제자 이후의 시대
로 구분할 수 있다. 예천지역 주요 학자들의 사승관계에 있어서 퇴계 이
전 세대의 스승으로 鄭夢周, 趙庸, 金宗直을 언급할 수 있고, 퇴계 당대에
는 周世鵬, 曺植이 거론된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16 , 1 7세기에 있어
서는 퇴계와 그 문인들이 예천지역 학자들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퇴계 문
인들로는 朴承任, 金彦璣, 趙穆, 具鳳齡, 鄭琢, 金誠一, 柳雲龍, 柳成龍, 鄭逑
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퇴계 직전제자 이후의 시대에도 대부분 영남학파, 그 중에서
도 퇴계학맥의 학자들이 예천지역 학자들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鄭經世,

 

314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張顯光, 張興孝, 金應祖, 李玄逸, 柳稷, 洪汝河, 李維樟, 金興洛이 그러하다.

이 외에도 예천출신의 李介立, 李東標, 全五福, 朴孫慶이 문하생을 두었다.
이 중에서도 예천지역에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들로는 鄭逑, 柳成龍, 鄭經
世, 李玄逸, 李東標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鄭逑의 문하에는 鄭允諧(15 5 3~
1 61 8 , 淸州), 鄭榮後(15 6 9~ 1 64 1 , 東萊), 鄭允穆(15 7 1~ 16 2 9, 淸州), 鄭煟
(1 59 1~ 1 6 60 , 東萊) 등이 나아갔고, 柳成龍의 문하에는 李德昌(15 6 9~ 16 1 6,
延安), 鄭允穆(1 57 1~ 1 6 29 , 淸州), 鄭維蕃(1 57 3~ ?, 東萊), 李煥(1 5 82~ 16 6 1,
驪州), 鄭維地(1 6 01~ 16 8 2, 東萊)가 출석했다. 張興孝의 문하에는 金以道
(1 60 4~ 1 6 70 , 金海)와 南之望(1 60 8~ ?, 英陽)이 나아갔는데, 金以道의 장인
邊喜逸(1 57 4~ 1 6 35 , 原州)도 張興孝의 문인이다.


金以道는 예천의 金海金氏 栗隱公派의 후손이다. 이 가문 또한 올곧은
선비정신을 계승하면서 節義와 孝友의 가풍을 세습해 왔다. 이 집안은 관
직을 통한 권력 추구보다는 불의한 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은둔을
통한 겸손한 자기수양과 학문정진에 매진하면서 친족과 이웃을 향한 관
용과 공생의 지혜를 지향했다.19) 金以道의 학문전통은 후손들에 의해 계
승되었는데, 특히 8세손인 金在默(1 79 4~ 1 87 3 )에 이르러 가학의 전통은 道
學의 전통으로 승화된다. 그는 心經 , 近思錄 , 朱子書, 退溪書 등을 연구
하며 爲己之學에 힘썼다.20) 18 4 8년에 敬堂 張興孝의 緬禮가 이루어지자 金
在默은 祭文을 짓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敬堂(張興孝) 학맥의 연원을
분명하게 정리했다.

 


19) 박종천, 고문서로 본 율은문중의 선비정신과 契 운영 ( 2014 선비학술대회 학술
대회발표자료집 , 한국국학진흥원, 2014), 1쪽 참조.
20) 황만기, 志庵 金在黙의 삶과 시 ( 2014 선비학술대회 학술대회발표자료집 ), 4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15

 


선생의 학문은/ 밝게 드러남이 있으니/ 考亭(朱子)이 남긴 실마리/ 陶山
(退溪)에서 그 연원 계승했네/ <敬堂은> 이것을 독실하게 실천에 옮겨/ ‘敬’
字로 당호를 삼았다네/ 窮理格物의 공부로/ ‘一元消長圖’ 전하였네.21)

 

그런데 그는 이러한 敬堂學의 精髓가 자신의 선조(金以道)에게 전해졌
고, 결국 그것이 家學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敬堂의 心學 그 연원이 있어/ 선조(金以道)께서 일찍이 입문하셨네/ 넒은
세상 한 가닥 遺風이 남아/ 집의 편액으로 삼으니 영원히 보존되리라.22)

 

그리고 鄭經世의 문하생으로 李炯(15 77~ 1653 , 驪州), 鄭榮邦(1577~ 16 5 0,
東萊), 申楫(1 5 80~ 1 6 39 , 平山), 李煥(15 8 2~ 1 66 1 , 驪州), 鄭煟(1 5 91~ 16 6 0,
東萊)가 들어갔고, 李玄逸의 문하에 全五倫(16 3 1~ 1 72 0 , 竺山), 鄭煟(1 63 6~
1 70 7 , 仁川), 蔡命元(16 5 0~ 1 69 9 , 仁川), 權壽元(16 5 4~ 1 72 9 , 安東), 張萬杰
(1 65 4~ 1 7 17 , 仁同), 全命三(16 6 3~ 17 2 0, 竺山)이 나아갔다. 지역출신의 학
자 李東標는 退溪의 숙부인 李堣의 6대손으로서 ‘小退溪’라 불릴 만큼 인
품과 학문적 역량이 뛰어났는데, 李濰(1 66 9~ 1 7 42 , 驪州), 李達兼(1 72 3~
1 79 3 , 眞城), 李文標(1 66 3~ 1 7 31 , 眞城) 등이 문하생으로 나아갔다.
예천지역의 학맥을 연구하다보면 가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유난히 많
다. 權山海(1 4 03~ 14 5 6, 安東)는 어려서부터 종조부 軫의 문하에서 수학하
였고, 高夢錫(1 52 5~ 1 57 5 , 開城)도 가학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퇴계의 제자

 

21) 志庵集 卷1, 祭敬堂張先生(興孝)文, “先生之學, 表著者存, 考亭遺緖, 陶山的源, 踐履之
實, 敬字有扁, 窮格之工, 一元圖傳.”
22) 志庵集 卷1, 祭敬堂張先生(興孝)文, “敬翁心學有淵源, 先祖當時早及門, 曠世遺風餘一
線, 爲題楣扁永垂存.”
316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로 유명한 權文海(1 5 31~ 15 9 1, 醴泉) 또한 6세부터 가학을 수학하였으며,
朴成樑(1 53 8~ 1 6 10 , 咸陽)은 從叔 朴士熹에게 가학을 수학하였다. 이 외에
도 李榮門(15 4 8~ 16 1 8, 慶州)과 金光燁(1 56 1~ 1 61 0 , 順天)은 조부로부터 글
을 배웠으며, 權鼈(1 58 9~ 1 6 71 , 醴泉), 鄭焜(1 60 2~ 1 65 6 , 東萊)도 가학을 계
승하였다. 그리고 張信立(1 6 26~ 17 0 0, 仁同)은 숙부 張潯으로부터, 張瑱
(1 63 5~ 1 7 07 , 仁同)은 종속 張裕慶에게서, 金著一(1 66 6~ ?, 禮安)은 재종형
金兌一로부터 가학을 연마하고 성리학 수업을 들었다. 어떤 시대, 어떤 가
문이든 가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孝悌의 실천이다. 예천지역에서 효
자의 사례가 많이 발견되는 것도 가학이 강조되는 학풍과 무관하지 않다.
학문적 지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우관계가 사승관계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천지역의 학자들이 마음을 터놓고 교유하던 학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사승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던 학자들과 일치한다. 즉 이들 또한
대부분 퇴계의 문인이거나 혹은 퇴계학맥의 학자들이다. 예를 들면, 李愈
(1 52 1~ 1 5 93 , 延安), 李憙(1 5 32~ 15 9 2), 李應(15 3 6~ 15 9 7) 3형제는 金誠一,
趙穆, 金克一, 李祥龍, 金涌과 교유하였고, 金八元(15 2 4~ 15 6 9)은 趙穆, 具鳳
齡 등과 道義로써 서로를 이끌었다. 그리고 辛乃玉(1 5 25~ ? )은 權好文, 金
誠一과 교유하였고, 李令承(1 52 7~ 1 6 05 )은 鄭琢, 宋福基와 道義交를 맺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만한 이는 李憙(1 53 2~ 1 5 92 , 延安)이다. 그는 퇴
계의 장손인 李安道와 함께 공부하였다. 퇴계는 손자가 李憙와 함께 공부
한다는 사실을 알고 손자에게 편지를 보내 “子修(李憙의 字)와 함께 공부
한다니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23)라고 격려했다. 李憙는 스승 퇴계가 인

 

23) 李滉, 答安道孫崔子粹 (권오봉編, 退溪書集成(5) , 3498쪽), 己巳年(1569년) 11월 20
일 편지.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17

 

정할 만큼 행실이 뛰어났다. 그리고 李閱道(1 53 8~ 1 59 1 , 眞城)는 퇴계의
제자인 鄭琢, 柳成龍, 金誠一과 가까웠는데, 지역적 학파적 연고가 다른
金尙憲, 李德馨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24) 퇴계
문인 이후의 세대에 있어서 예천지역 학자들이 즐겨 교유관계를 맺은 학
자로는 단연 鄭經世와 洪汝河가 으뜸이다. 鄭榮後(1 56 9~ 1 6 41 , 東萊)는 鄭
經世와 도의로써 교유하였고, 安大胤(1 60 0~ 1 6 83 , 順興)은 鄭彦宏과, 安道徵
(1 61 6~ 1 6 78 , 順興)은 洪汝河와, 그리고 鄭重岱(1 69 1~ 1 76 2 , 東萊)는 權相一,
李象靖, 安日履 등과 교유하였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건대, 예천지역 학자들의 사승관계의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가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많다는 점이고, 그 외로는
대부분 영남학파 그 중에서도 퇴계문인과 퇴계학맥의 학자들의 문하에
나아갔는데, 이러한 점은 사승관계뿐만 아니라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비슷
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예천지역의 서원에 배향된 인물
들과도 거의 일치한다.
예천지역의 서원은 유림의 번성함에 비해 세력이 미흡하다. 대원군
때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 단 하나도 없고, 사액서원도 鼎山書院 하나뿐이
다. 예천지역의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로는 지역출신의 문중인물이 많고,
지역 외 인물로는 鄭夢周, 李滉, 趙穆, 柳雲龍, 柳成龍, 李埈의 이름을 발견
할 수 있다. 정몽주와 이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퇴계 자신을 비롯한 그 문

 

24) 安璜(1488~1551, 順興)이 호남의 선비 李恒의 문인이고, 鄭必達(1611~1693, 晋州)이
鄭蘊과 趙絅의 문인이며, 崔鼎喜(1883~1923, 慶州)가 崔益鉉의 문인이라는 점도 눈
여겨 볼만하다. 그런데 安璜이 호남의 선비 李恒의 문인이라는 일부 기록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安璜이 1488년 출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李恒이 1499년
출생이기 때문이다. 安璜의 生年이 잘못 기록되었든지, 아니면 그가 이항의 문인이
라는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18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인들이다. 정몽주는 東方理學의 祖宗이라 불릴 만큼 한국성리학의 연원과
관련하여 상징적인 인물이면서도, ‘정몽주-조용-윤상’으로 이어지는 예천
지역의 학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웃하는 상주 출
신의 학자인 李埈이 예천지역의 서원25)에 배향되었다는 점은 그 사유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후대 이 지
역의 학풍이 안동지역을 따라 ‘鶴峰(金誠一)-敬堂(張興孝)-葛庵(李玄逸)’ 계
열로 많이 경도되는데 반해 이 지역 서원의 배향인물로는 이 계보의 학
자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도리어 유운룡과 유성룡 형제가 받들어진다는
점이다.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시대별 변천과정과 문중별 학문연원을 면밀
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 예천지역의 대표 성리학자

 

1. 權文海의 개방적 학풍과 인간관계

 

예천권씨는 원래 昕氏였다. 흔씨는 향촌에서 확고한 在地的 기반을 쌓
아 고려 말에 점차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權暹 때에 고려 충목왕
의 이름인 昕을 피하기 위해 권섬의 어머니 성을 따라 권씨로 바꾸었
다.26) 이 집안은 다른 토성들과는 달리 1 6세기 이후에도 가세가 왕성하
여 저곡의 안동권씨, 고평의 청주정씨, 금당실의 함양박씨 문중과 함께

 

25) 대원군 때 훼철되어 아직 복원되지 않은 愚谷書院을 말함.
26)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185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19

 

예천지역의 향촌사회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權文海(15 3 4~ 15 9 1)의 자는 灝元, 호는 草澗이다. 1 5 60년(명종 1 5 ) 별
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좌부승지 관찰사를 지내고 1 59 1년에 사간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단군시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지리 역사 인
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총망라하여 韻別로 분류한 大東韻府群玉 과
文集인 草澗集 이 있다. 그는 6세부터 가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삶의 배
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종조부 權五福(1 4 67~ 14 9 8)이다. 권오복
은 金宗直의 문인이었는데, 기질이 강직하고 절의가 뛰어났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향리에서 서울로 잡혀 올라와 같은 문하의 金馹孫 權景裕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권문해는 평소 종조부를 이야기할 때 비분강개하여 한
숨짓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권문해의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스승 李滉이
다. 그는 15 5 6년 2 3세 때에 陶山의 寒棲庵으로 퇴계를 찾아가서 배움을
얻었다. 당시 퇴계는 陳柏의 夙興夜寐箴 손수 써주며 道學 공부를 권장
했다. 1 5 62년 겨울에 안동교수로 재임하던 권문해는 다시 퇴계를 찾아가
한 달 간 머무르며 유운룡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나 퇴
계를 직접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권문해는 퇴계 사후 스승을
현창하는 사업에 앞장섰다. 권문해는 1 5 73년 정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
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하여 퇴계의 묘비를 세우는 일과 廬江書院 건립
등을 추진하였으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논의하기도 하
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스승 이황을 평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누차 임금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고 물러남을 의리에 따라 했다.
선생은 천성이 대단히 고상하고 순수하게 도덕을 갖추었다. 朱子를 높
320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이 신뢰하고 그의 학문을 깊이 체득하였으며, 제자들과 도산서당에서 道學을
강론하여 큰 성취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우뚝하게 理學
의 祖宗이 되었다.27)
일반적으로 예천지역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 이론에 침잠하기 보다는
구체적 사실과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점은 권문해도 마찬가
지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를 성리학자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지
만, 이러한 평가는 성리학의 정의를 이론이나 저술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성리학의 범위를 사변적 이론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현실
적 經世致用의 삶과 실천위주의 수양에까지 확장하게 되면 권문해야말로
어김없는 성리학자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으며, 오랜 지방관 생
활에서 백성에 대한 교육과 교화사업에 가장 큰 힘을 쏟았다. 그는 향교
를 수리하고, 향교의 학생들과 儒生들을 대상으로 강독회나 詩會를 자주
열어 학문하는 문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했으며, 士林의 결속과 향촌 풍속
의 진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28) 이러한 모습은 모두 유학적 이념을 현
실세계에서 실천하려 했던 성리학적 지식인 관료의 전형적 모습이라 하
겠다.
그런데 권문해의 삶과 사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바로 개방적
학풍과 인간관계이다. 그는 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관직에 나아
간 이후로는 徐敬德의 제자인 許曄(1 5 17~ 15 8 0)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

 

27) 大東韻府群玉 卷9, “屢下徵命, 進退以義. 先生天分甚高, 道德純備. 尊信考亭, 深
得蘊奧, 與門人講道陶山, 多有成就. 集東方大成, 卓然爲理學之宗.”
28) 이해영, 초간 권문해 선생의 통섭적 사고와 학문 (제5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회
자료집, 초간 권문해선생의 학문과 사상 , 2011), 96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21

 

다 권문해는 . 허엽의 輓詞에서 그의 제자된 지 이미 2 0년이 되었다고 하
였다. 서경덕의 철학사상은 한 마디로 氣철학이다. 그는 중국 宋代의 張載
氣철학적 이론구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太虛卽氣’의 氣일원론적 세계
관을 펼쳐나갔다. 허엽의 사상 또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성리이론에 있어
서 기철학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또한 권문해는 허엽의 수양공부를 ‘主
靜’으로 파악했는데,29) 이것은 周敦頤의 ‘主靜論’을 연상시킨다. 중국 근세
유가철학에 있어서 主靜論은 이후 主敬論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양자 간
에는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또한 간과하기 어려운 차이점도 내재해 있
다. 서경덕과 허엽의 수양론이 主靜論的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반면
에, 퇴계의 공부법은 시종일관 主敬論을 강조했다. 권문해는 이처럼 차별
적인 사상의 면모를 지닌 두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연찬하여 비교적 개방
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권문해는 자신의 詩作에서 莊子 와 淮南子 를 비롯한 다양한
고전들을 자유롭게 인용했다. 李涵(1 55 4~ 1 64 4 )이 과거시험 답안에서 장
자 의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罷榜이 되었던 시대에,30) 더욱이 그
의 스승 퇴계가 남명 조식의 학풍에 대해 도가사상의 풍취가 묻어있다고
비판하던31) 현실을 감안하면 “학의 긴다리 오리의 짧은 다리는 모두 조
물주께 맡기세.”32)라고 한 詩句는 분명 그의 개방적 학풍이 아니고서는

 


29) 이해영, 초간 권문해 선생의 통섭적 사고와 학문 , 74쪽 참조.
30) 朝鮮王朝實錄 宣祖33년(1600), 4월 19일(壬辰), 5번째 기사 참조.
31) 朝鮮王朝實錄 光海3년(1611), 3월 26일(丙寅), 5번째 기사 참조.
32) 草澗集 卷2, 偶題 , “媿乏聲名動世人, 只將疏懶保吾眞, 行行止止皆由命, 是是非非不
繫身, 藥裹詩編爲契活, 鶴長鳧短任陶勻, 空餘一片丹心苦, 憂國多年鬢芊新.”에 나오는
“鶴長鳧短任陶勻”을 말한다. 이 구절은 莊子 騈拇 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
게 늘여 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 주어도 아픔이 따릅니
322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개방적 태도는 원칙에 바탕하면서도 현실의
적용을 강조하는 權道論과 깊은 연관이 있다. 유가의 정치철학에서는 원
칙을 강조하는 經道와 현실의 변용을 중시하는 權道를 자주 언급한다. 양
자 간의 적절한 절충이 필요하지만 유가철학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經道를 權道보다 중시한다. 그런데 권문해는 양자 간의 조화를 주장하지
만 필요에 따라 權道를 강조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仁順王后의 喪禮
를 지나치게 극진히 치르고자 하던 선조에게 權道를 따르라고 권고한 상
소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억지스런 명분보다 구체
적 현실을 중시하던 개방적 삶의 태도와 관계가 있다.
권문해의 개방적 학풍과 삶의 태도는 교우관계에도 이어졌다. 그는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퇴계의 제자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는데,
조목, 유성룡 등과 가까이 지냈다. 특히 조목과는 1 0여 세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대단히 깊은 우의를 나누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東人系에 속해
같은 동인계열인 金孝元, 許葑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렇지만 서인에 대해
서도 무조건 비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리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당시 학
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던 盧守愼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의 일기에는 율곡
이이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지나는 길에 영의정 朴淳의 집을 찾아가니 병조판서 李珥가 먼저 와 있
었다. 그런데 李珥는 지난 번 避嫌하였던 일 때문에 나에 대해 언짢게 여기
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자를 것이 아니며, 본래 짧은 것은 늘일 것이 아닙니
다.”(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라는
글귀를 인용한 것이다. 莊子의 상대론적 세계관을 잘 표현한 名文인데, 문제는 이
러한 莊子的 세계관을 儒家人들이 강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23

 


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 내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털끝만한 사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라고 해명하자 그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33)

 

권문해는 율곡과의 편치 않은 관계에서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의도
가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인간됨이 그러했기에 율곡의
아우인 李瑀34)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문해는 공주목사로 재직하
고 있던 당시인 15 8 1년 10월 2 2일에서 25일까지 이우와 함께 한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李瑀를 위하여 아헌에 술자리를 베풀고 종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우는 글씨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구경하는 이
들이 담장처럼 빙 둘러쌌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35)

 

그렇지만 권문해의 교우관계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이는 바로 徐
起이다. 권문해의 日記에서는 “서기는 賤人 출신인데, 自號를 頤菴이라 하
였다. 孔岩書院이 있는 동네로 이사 와서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그를
따르는 학자들이 많았다.”36)라고 하였다. 서기는 권문해를 존경하여 “도
는 곧아 남들의 굽음을 미워했고, 행실은 방정하여 세상의 두루뭉술함을
병으로 여겼네.”37)라고 칭송했고, 권문해는 학문이 뛰어나도 신분적인 한

 

33)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癸未年(1583년), 閏2월 22일, 장재석 외 옮김(한국국학진
흥원, 2012), 339쪽.
34) 李瑀는 琴 書 詩 畵에 모두 능한 ‘四絶者’로 불렸는데, 만년에 妻鄕인 경북 선산
에 거처하면서 朋黨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두루 어울렸다.
35)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辛巳年(1581년), 10월 23일, 177쪽.
36)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辛巳年(1581년), 12월 20일, 202쪽.
37)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辛巳年(1581년), 12월 20일, 203쪽 : “道直憎人曲, 行方病世圓.”
324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계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서기를 가슴 아파하면서 “천고의
神龍은 숨어서 일어나지 않으니, 묻노니 그대는 어느 날 風雷를 울리려는
가.”38) “어찌하면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솟아, 높이 날아올라 제일 높은
곳에 오르게 될까.”39)라고 했다. 권문해의 개방적 인간관계는 보편적 인
간애에서 발로한 것이다. 인간애에 바탕한 권문해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
나는 사례가 바로 충직한 종(凡丁)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추모시이다.
주인 위해 너처럼 마음 다하고 부지런한 이 드무네 / 이전의 일 생각하
매 눈물이 흥건히 소매를 적시는구나.40)
그의 이러한 따뜻한 마음은 말[馬]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는 평소 선친
이 타던 말을 임지에까지 끌고 가서 먹이고 길렀는데, 어느 날 밤에 갑자
기 죽게 되었다. 오랜 시간 수고한 말의 죽음에 애통해했고, 그 말이 평
소 선친께서 타던 말이라서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며 더욱 애통해했다.
선고께서 평소 타시던 말이 한 밤 중에 갑자기 죽었다. 선군께서
평소 늘 타셨던 말이라 관직생활에도 끌고 와서 먹이고 길렀는데, 나이가
25~26세나 되었다. 마음이 애통해 하루 종일 근무하지 못했다.41)

 


38)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辛巳年(1581년), 9월 12일, 161쪽 : “千古神蹤潛不起, 問渠
何日鼓風雷.”
39)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辛巳年(1581년), 9월 12일, 163쪽 : “何緣兩腋生風翰, 飛上
高高第一層.>
40)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甲申年(1584년), 1월 17일, 412쪽.
41) 權文海, 국역 草澗日記 , 戊子年(1588년), 2월 10일, 534쪽.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25

 

권문해는 누구보다도 고향 사랑이 많았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2 7
세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면서부터이다. 결국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관직생활을 하였고, 임종도 서울에서 맞게 되지만 그는 관직생
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했고, 또한 귀향을 염원하였다.
그는 이런 마음을 詩作을 통해서도 자주 표현했는데, 그가 지은 思鄕詩
중에서 대표적인 한 편을 인용해 보자.

 

오랫동안 나그네 생활 주머니 비었고 / 근심 많고 병까지 들어 배불리
먹지 못하네 / 마음은 한강물과 같이 먼 곳으로 떠나니 / 눈에는 남쪽 아득
한 곳 고향의 구름만 보이네 / 흰머리 빗어 넘기니 더욱 헝클어지고 / 거울
속 붉은 얼굴 쇠락해져만 가네 / 돌아갈 보퉁이는 언제 꾸릴 것인가 / 천
리나 먼 곳 내 집만 꿈꾸네.42)

 

그는 어디에서도 예천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했고, 그의 이러한 마음은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家統으로 확립되었다. 바로 이러한 면에
서 후대사람들은 예천출신의 유학자를 떠올리게 될 때 가장 먼저 권문해
를 떠올리게 되며, 권문해의 삶과 관련하여 고향 예천을 강하게 연상하게
된다.

 

2. 鄭琢의 우국충정과 경세치용

 

鄭琢(1 52 6~ 1 60 5 )은 본관은 淸州, 자는 子精, 호는 藥圃 또는 栢谷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유성룡과 비교된다. 우선 퇴계 문하생 중에서 서애와

 

42) 草澗集 卷1, 洛城客中偶吟 : “客久囊垂罄, 愁多病不饒, 心同漢水遠, 眼入楚雲遙, 白
髮梳邊亂, 朱顔鏡裏凋, 歸裝何日理, 千里夢吾寮.”
326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함께 가장 外王의 치적이 뚜렷한 사람이다. 정승의 반열에 올라 임진왜란
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출신 고향이 지척이며 또한 이순신
을 발탁하고(유성룡) 모함에서 구해냈다(정탁)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두
사람은 각각 龍蛇日記 와 懲毖錄 을 지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생생
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실질적 관계는 그다지 우호적
인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아마도 유성룡의 和戰論에 대한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정탁의 三男인 鄭允穆이 서
애의 문하생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탁은 비교적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였다. 그는 經史는 물
론 천문 지리 象數 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평소 水經學을
익히고 실용적인 학문들을 두루 익혀 막힘이 없었고, 八鎭六花 등의 병법
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조정에 있을 때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수미일관하게 온화한
인품을 드러냈지만, 직무와 관련해서는 강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대
표적인 사례가 校書館 正字로 재직할 때의 일화이다. 그가 香室에서 당직
하고 있을 때 佛供으로 쓸 香을 보내라는 文定王后의 명을 받았다. 이에
정탁은 “이 향은 校祀用이니 불공에 쓸 수 없다”고 하며 보내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조정에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에 당시
권세가이던 尹元衡을 탄핵하기도 하였다.43) 직무에 충실하고 강직했던 정
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師承 관계에 있어서 정탁은 退溪와 南冥 두 선생을 모두 스승으로 섬
겼다. 처음에는 백담 구봉령과 함께 仲父 鄭以興에게 수학했지만, 1 7세에

 


43) 藥圃集 卷7, 附錄 : 神道碑銘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27

 

퇴계의 문하에 입문한다. 퇴계의 문인 중에서도 金富倫, 趙穆, 柳成龍, 金
誠一, 具鳳齡 등과 가까웠다. 그는 3 6세에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남명을 사사하였고, 그 문하생인 金宇顒, 吳健과도 평생토록 교유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퇴계의 학문을 淵源이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堯舜의 心法이 孔孟과 朱子를 거쳐 퇴계에로 이어졌다는 퇴계학파의 일반
적인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학의 도가 오랫동안 적막하니 / 오랜 세월 후에 주자를 그리워 한다
/ 그 목소리 작아져 다시 접하지 못하니 / 구름 같은 이 세상 내 마음 슬프
게 하네 / 도산의 퇴계 선생 성인의 도리를 강론하니 / 바다 바깥사람들조
차 북두칠성처럼 우러러 보네 / 선비들이 옷 소매 걷고 스승으로 모시니 /
우리 동방이 문화가 사라지지 않았구나.44)

 

그는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한 이후로 주로 퇴계의 문인들과 교
유하고 서로를 격려하였다. 정탁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서신들을 살펴
보면 퇴계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이 전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퇴계 문인들
과 주고받은 서신들이다. 반면,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기록 및 그의 문인
들과 주고받은 서신들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퇴계학파에
경도된 정탁의 사상적 특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남명학파가 궤멸된 이
후에 문집이 편집된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탁이 퇴계에게 올린 서신은 文昭殿의 位次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피력한 것으로서 대단히 소략하다. 반면, 정탁과 퇴계의 문인 간에 주

 

44) 藥圃先生續集 卷1, 詩 : 慕古, “師道久寥寥, 千龝想紫陽, 音徽無復接, 雲物我心傷. 陶
山講古道, 海外皆斗仰, 凾文士摳衣, 吾東文不喪.”
328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고받은 서신은 부지기수이며, 내용도 다양하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바로 月川 趙穆과의 관계이다. 월천과 주고받은 서신은 수량에서도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각별한 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서
신을 통해서 정탁이 隱逸之士로 살아가던 월천의 삶을 동경하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정탁은 또 다른 서신에서 관직 생활하는 것이 집에 있는 것
보다는 못하지만 수령의 일이 光風霽月의 멋 가운데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을 통해 다스리면 오래지 않아 완악한 백성이 절로 순해지고
마음의 병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며, 벼슬길의 묘미를 말하기도 했다.45)
또한 정탁은 1 55 4년 성균관에 있을 때 易學啓蒙 을 얻어 애지중지 하다
가 월천에게 주게 되는데, 그는 월천이 이 책을 읽다가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퇴계 선생께 질문하여 그 깊은 뜻을 연구하고, 혹여 터득한 것이
있으면 자신에게도 알려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46) 한편, 정탁이 월천에
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멀리 鵝湖를 바라보고 육씨 형제를 생각하게 된
다”(遙向鵝湖思二陸)는 구절이 있었는데, 월천은 이것이 곧 陸學을 존숭한
다는 의미가 아닌지 의심을 하였다. 이에 대해 정탁은 해명하기를, 鵝湖
는 河回를 가리키고 二陸은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다만 先人들의 문장
에서 차용한 것이지 절대로 육학을 숭상한 것이 아니라고 변론하였다.47)
정탁의 서신에서 주목되는 것의 또 한 가지는 명나라 摠兵 劉綎의 軍
師로 있던 胡煥과 주고받은 서신이다. 그는 여기에서 왜적의 상황과 왜적

 

45) 藥圃集 卷1, 書 : 答趙士敬(1577년) 참조.
46) 藥圃集 卷4, 雜著 : 書啓蒙卷端贈趙士敬 참조.
47) 藥圃集 卷1, 書 : 與趙士敬(1583년)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29

 

을 막을 방책을 논하였다. 정탁은 이 편지에서 敵將의 능력, 士卒의 강성
함, 兵仗器의 정밀함, 적의 용감성, 왜적의 수, 형세 등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였다.48)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성리학적 공리공담이 아니라 현실적
실천에 힘썼던 정탁의 經世致用의 면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탁은 왜적의 침입으로 혼란한 때 국가에서 서둘러야 할 것 네 가지
에 대해 箚子를 올렸으며,49) 또한 임금에게 왕릉으로 성묘 가는 것을 그
만 두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기도 했다.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져 백성들
이 고달픈데 왕이 행차하면 백성을 동원하여 교량을 보수하고 도로를 보
수하는 공사를 해야 하므로 백성들에게 주는 피해가 크다고 경계하였
다.50)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에서 나온 것으로서 정탁의 經世觀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사례이다.
한편 정탁은 자신이 스스로 변방을 按撫시키러 가길 청하였다. 거듭되
는 왜적의 침입으로 호남이 붕괴되어 호남의 인심이 무너졌으니 만약에
때에 맞게 그 민심을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비록 늙었지만 호남으로 파견해 준다면 임금
의 德音을 전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겠다고 하였다.51) 정탁의 우국충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사례이다.
정탁의 정치적 업적 중에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임진왜란
때에 국가를 위기에서 건진 충신들의 가치를 일찍 알아보고 이들을 천거
하고, 또한 이들이 모함에 빠져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 항변했다는 점이

 

48) 藥圃集 卷2, 書 : 與明儒胡煥 참조.
49) 藥圃集 卷2, 劄 : 條陳事宜 참조.
50) 藥圃集 卷2, 劄 : 請停拜陵 참조.
51) 藥圃集 卷2, 劄 : 請自行巡邊 참조.
330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다. 李舜臣, 郭再祐, 金德齡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특히 정탁은 이순신
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적극 변론하였
다. 그는 이순신을 구명하는 箚子에서, 육군이 모두 괴멸되었을 때 오직
이순신의 수군만이 연전연승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水軍이 급
한 상황에서 힘껏 싸우지 않은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상황을 들어 변론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남의 공을 가로채 자기의 공으
로 삼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변론하였다.52) 또한 그는 이순신 같은 인재
는 참으로 얻기 어렵고, 또 왜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순신인
데 이제 조정에서 이순신의 목을 벤다면 왜적들은 술잔을 들고 서로 축
하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순신의 죽음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일이
므로 獄事를 통해 이미 법령의 엄중함을 보였으니 죽음만은 면하게 하여
다시 전공을 세워 속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진정하였다.53)
정탁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거의 평생을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뚜렷한
성리이론서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그가 월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가
를 얻게 되면 朱子語類 를 구해 全文을 정독하겠다고 하였으며,54) 또한
생애 말기인 16 02년(77세)에 權旭과 함께 心經 을 講하기도 한 점을 보
면55) 그가 비록 현실정치에 오래 몸담고 있기는 하여도 여전히 스승 퇴계
의 학풍을 계승하여 성리학에 대한 갈망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역학 강연이 재개될 때 周易 의 ‘乾卦’와 ‘蒙卦’를 강
연하였으며, 만년에는 中庸 과 大學 에 심취하였고, 小學 을 服膺하였다.

 

52) 藥圃集 卷3, 啓 : 論救李舜臣劄 참조.
53) 藥圃集 卷3, 啓 : 李舜臣獄事議 참조.
54) 藥圃集 續集, 卷3, 書 : 與趙士敬(1598년) 참조.
55) 藥圃集 卷1, 年譜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31

 

또한 의 성리학자 元代 許衡을 깊이 경모하고 朱熹를 존숭하였는데, 그는 주
희가 周敦頤 邵雍 張載 程顥 程頤의 학문, 즉 北宋五子의 학문을 체계화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성리학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는 생각
에서 抄錄朱書 와 小學衍義 를 집필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성리학의 공부는 유학의 진리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탁은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을 하지 않고, 연원 있는 학문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였기에 배운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했다.
그런데 정탁이 許衡을 깊이 경모했다는 부분은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허형은 주자가 편찬한 小學 을 신명과 같이 믿고 부모처럼 공경했으며 그
제자들에게도 灑掃應對로써 進德의 기틀을 삼으라고 했으며,56) 아울러 소
학 에서 강조되는 ‘敬’공부를 중요시하였다. 許衡 學風의 영향으로 麗末 유학
자들 사이에서 소학 이 널리 읽히게 되고, 조선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소
학 은 15세기 관학의 필수교과목이 되며 조선의 주자학자들에 의해 더욱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다. 정탁 또한 수양법으로 敬공부를 주목하였다. 그는
마음과 뜻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조심하는 성리학의 공부를 강조했다.
마음의 기미에 선악이 있으니/ 정성스럽게 함이 가장 귀중하다네/ 하나
의 관문 지척 사이지만 / 사람과 귀신의 존재 천리만큼이나 구별된다네.57)
이것은 바로 敬공부를 말한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지 않는 持敬의 삶
과 연결된다. 일관성 있게 善을 지향하고 성인이 되려는 열정을 잠시도
그치지 않는 持敬의 삶이야말로 퇴계와 남명의 삶이며, 또한 그들의 가르

 

56) 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 (楊家駱 主編, 宋元學案(下冊) , 1693쪽 참조)
57) 藥圃先生續集 卷1, 詩 : 閒居感興, “意幾有善惡, 誠之最爲貴, 一關咫尺間, 千里別人鬼.”
332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침을 따르고자 했던 제자 정탁의 삶이었다. 다만 정탁의 경우에 그러한
삶을 내면적으로 살아내는[內聖] 것보다 외적으로 실천하는[外王] 모습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진다.

 


3. 東萊鄭氏 첨사공파 후손들의 가학계승

 

예천지역 성리학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가학계승 전통이 강하다
는 점이다. 이들은 학업을 연찬하고 효제의 도리를 실천하는 가운데서 자
연스럽게 가문의 전통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 선조들의 전통
을 현재의 나의 삶속에서 되살려내고 이것을 다시 미래 후손들의 삶의 자
양분으로 남겨주었다. 지면 관계상 주요 가문들의 면모를 모두 소개하기
는 힘들고, 그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으면서도 가문의 학문적 정체성
이 분명한 東萊鄭氏 첨사공파 후손들의 가학계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천과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東萊鄭氏는 주로 첨사공파 鄭弼을 파조
로 하고 있다. 후손 鄭承源은 고려말에 관료로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이
쇠진해지자 잦은 정변을 피해 송도를 떠나 안동을 거쳐 용궁현 구담에
은거하였다. 그가 바로 동래정씨 嶺南中祖이다. 그의 손자 鄭龜齡은 조선
세종대에 어진 관리로 치적을 쌓았으며, 德行으로도 명망이 있었다. 정귀
령의 증손자 鄭光弼(1 4 62~ 15 3 8)은 中宗廟廷에 배향된 명재상으로서 관직
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耆社에 들었다. 정귀령의 또 다른 증손자 鄭渙
(1 45 5~ 1 5 06 )은 관직에 있으면서 연산군에게 忠諫하다가 귀양을 갔으며
謫所에서 세상을 떠났다.58) 그리고 정환의 玄孫이 鄭榮後(1 56 9~ 1 64 1 ), 鄭

 

58) 예천군지편찬위원회, 醴泉郡誌(下卷) , 503-20쪽 참조.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33

 

榮邦(1 5 77~ 16 5 0) 형제인데 이들로부터 가문의 學運이 융성해졌다.
鄭榮後는 金誠一과 鄭逑의 문인으로서 鄭經世와는 道義로써 교유하였다.
그는 經史와 禮學에 밝아 선조 때에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
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조카인 鄭焜(1602~ 1656)
은 祭文에서 “아! 우리 큰아버지께서는 천품이 남보다 뛰어나셨으니 어려부
터 민첩하고 통달하셨고 자라나서는 더욱 단정하고 순수하셨네. 禮와 儀節
에 있어서는 정성과 형식이 적절하였고 修身하고 齊家함은 先人들의 법도를
이어받으셨네. 조상을 효성으로 섬기어 허물이나 결여됨이 없었고 성심으로
우애를 행하여 형제간에 서로 좋아하고 화합하였네.”59)라고 하였다.
鄭榮邦(15 7 7~ 16 5 0)은 진사에 급제한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에서
講學과 詩作에 전념하였다. 그는 15 9 9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愚谷의 산중
에서 강론하던 정경세의 문하로 나아가 학업을 연찬하였는데, 특히 中庸 ,
大學 , 心經 을 힘써 배웠다. 당시 우복은 제자를 인정하여 말하기를
“무릇 학문은 窮理와 格物을 귀하게 여기나니, 비록 마음을 다하고 하늘
의 이치를 아는 공부라 할지라도 이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음이 없네. 그
대의 器局과 식견을 보건대 이루지 못할 것이 무슨 걱정이겠는가? 다만
잊지도 말고[勿忘] 조장하지도 말라[勿助長]라고 하는 말에 유의하기만 하
면 될 것이네.”60)라고 하였다. 그는 臨川(현재 영양군 입암면)에 못을 파
서 ‘瑞石池’라 하고, 못 가에 두 칸 집을 지어놓고 齋名을 ‘主一’이라 하였
다. 주지하다시피 ‘主一’이란 敬의 구체적인 의미로서 程伊川이 강조한 말
이다. 정영방은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고, 평소 과거시험에 대해서는 부정

 

59) 益齋遺稿 , 祭文: 祭伯父梅塢公文.
60) 益齋遺稿 , 行狀: 先府君石門公家狀.
334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것은 결국 利慾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기에 본심을 잃어버
리기 쉽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子姪들 중에서 과거공부를 하는 이들이
있으면 비록 엄금하지는 않았지만 끝내 좋아하지 않았다. 만년에 朱子書
를 즐겨 읽었는데, 항상 책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가 단정히 앉아 용모를
수습하고 책을 읽었다. 孝友의 삶을 실천하고 朱子書를 즐겨 읽으며 본래
의 마음을 회복하는 경공부에 힘쓴 정영방의 삶이야말로 성리학에서 강
조하는 참된 선비의 삶 그 자체이다.
鄭焜(1 60 2~ 1 65 6 )은 정영방의 장남이다. 그는 家學을 계승하고 실천을
숭상하여 평생 동안 몸가짐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하였다. 정혼은 ‘퇴계-
서애’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서애의 생질인 李燦과 李煥 형제로부터 학업
을 연찬했으며, 서애의 아들인 柳袗(1 58 2 - 1 6 35 )과 가장 가까웠다. 평소
유진은 정혼의 얼굴이 검은 것을 빗대어 ‘검은 옥[玄玉]’이라고 칭하였
다.61) 얼굴이 검지만 속에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을 칭찬한 것이다. 정
혼은 서애의 손자인 柳元之와도 道義의 벗으로 교유하였다. 이러한 배경
에서 정혼의 行誼와 文章이 서애를 모범으로 삼은 것이 많았다. 또한 정
혼 父子는 李時明(15 9 0~ 16 7 4)과도 깊게 교유하였는데, 이시명은 특히 정
혼을 칭하여 ‘龍城大儒’라 하고 그를 존중하였으며, 정혼의 죽음을 애도하
는 輓詩에서 “냇가 집에서 어버이 모시며 큰 孝를 알았고/ 무덤 곁에서
侍墓하며 지극한 정성 보였네/ 詩와 禮를 가르쳐 가문의 명예를 더욱 높
였고/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고 관직을 가벼이 여겼네.”62)라고 하였다.

 

61) 益齋遺稿 , 附錄: 行狀 참조.
62) 石溪集 卷2, 詩: 輓鄭如晦(焜).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35

 

정혼은 의 연원이 私淑 陶山에서 나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히 퇴계의 문
집을 깊이 공부하였다. 그는 그 중에서도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李子書節
要 6책을 편집하였는데, 당시 학자들로부터 斯文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
를 받았다.63) 이 책은 퇴계 학문의 핵심 되는 내용과 일상에 절실한 내용을
편집한 것인데, 퇴계학에 정통한 그의 식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가 편
집한 책에는 부분적으로 原集에 없는 小註가 달려 있고, 중요한 부분에는 批
點이 새겨져 있어서 그의 편집 작업이 단순한 요약이 아님을 보여준다.
鄭堯天(16 3 9~ 17 0 0)은 정영방의 손자이고, 정혼의 조카이다. 그 또한
선조들처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삶의 대부분을 향리에서 강학과 독서
에 전념하였다. 그는 1 2세에 柳稷(1 6 02~ 16 6 2)의 문하에 나아갔다. 유직은
1 65 0년에 경상도의 儒生 9백여 인이 李珥와 成渾의 文廟從祀를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을 당시의 疏頭이다. 당시 영남의 유생들은 상소문을 통해 특
히 ‘栗谷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는데, 특히 율곡학이 理와 氣를 제대
로 분별하지 못했으며, 중국 南宋의 유학자 陸九淵(1 13 9~ 1 19 2 )과 佛敎의
이론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정요천이 유직의 제자라고 하는 말
은 곧 정요천의 학문적 流派와 정치적 입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
다. 유직은 정요천이 그의 문하에서 수업할 때 누차 칭찬하기를, “이 아
이는 어눌한 것 같으나 견해가 명철하고, 일에는 더딘 것 같으나 실행에
는 민첩하다.”64)라고 하였다. 정요천은 스승 유직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제문에서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小子는 公을 스승으로 삼았었네. 영
남 선비들의 기상이 公 덕분에 유지되었는데, 이제 불행한 일을 당하게

 


63) 益齋遺稿 , 附錄: 行狀 참조.
64) 訥齋遺稿 , 附錄: 行錄.
336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되었으니 슬프도다, 우리 黨이여! 溫雅한 자태와 위대한 의론을 이제는
접할 길이 없어졌네. 앞으로 어디에서 그러한 덕을 접하며 어디에서 학문
을 물을 것인가?”65)라고 하였다. 스승은 제자가 말보다는 실행에 앞선
사람이라고 인정하였고, 제자는 스승이 영남 유림의 宗匠이라고 평하였
다. 정요천은 당시 영남 남인의 대표 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행하였다. 李
嵩逸, 權斗經, 趙德隣 등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조덕린의 고모가 정요천의
어머니였기에 두 사람 간의 관계는 대단히 친밀하였다.

 

이 외에도 정요천의 아우 鄭堯性(1 6 50~ 17 2 4), 정요천의 막내아들 鄭道
鍵(16 6 8~ 1 74 0 ), 정혼의 증손인 鄭泰來(1 68 3~ 1 72 1 )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家學으로부터 나아가 학문의 분명한 연원을 가졌으며, 문집
을 남기고 독실한 行誼로써 후대의 귀감이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향리에서 性理의 학문에 침잠하고 후학을 양성하
였다. 당대 영남 南人의 뚜렷한 학자들이 이들과 교유하였고, 그들의 여
유로우며 지조 있는 삶을 칭송하였다.

 


. 맺음말
이 연구는 예천지역 성리학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것이
다. 이러한 작업은 곧 곧 조선성리학, 특히 영남학파의 지역적 확산에 대
한 심화 연구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예천지역 성리학의 전통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理氣心性의 성리이론보다 孝悌忠信의 성

 

65) 訥齋遺稿 , 祭文: 祭百拙菴柳先生文.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37

 

리실천의 전통이 강하다는 점이다. 權文海와 鄭琢의 경우가 그러했고, 東
萊鄭氏를 비롯한 여러 가문의 학문 전통이 그러하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사변적 논변보다는 성리학적 가르침을 삶의 구체적 場에서 실천하는 데
에 있었다. 특히 家學의 바탕 위에서 ‘孝行’을 실천하는 전통은 예천지역
성리학의 특징이자,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유교에 있어서 孝는 모든 덕의
근본이다. 예천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 어디에서도 孝悌 실천의 사례를 쉽
게 찾아볼 수 있으며, 거의 모든 가문마다 효행의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
하고 있다.66) 고려말 林騭은 3年喪의 전통을 세웠고, 퇴계의 문인 金八元
은 계모에게 효성을 다했으며, 조선 후기 저명한 성리학자 朴孫慶은 ‘우렁
이 효자’로 이름이 나 있다. 예천지역의 효자로 都始復(18 1 7~ 1 89 0 , 星州)
이 가장 유명한데, 많은 효행 사례를 남겨 임금이 그의 행적을 明心寶鑑
續編 에 실어 삶의 지침서로 삼도록 했다.
예천지역의 학자들은 고향사랑과 이웃사랑의 마음이 각별했다. 고향
을 그리워하며 애닯게 읊은 權文海의 思鄕詩가 고향사랑의 마음을 대표한
다면, 고평동계(향약)를 만들어 백성들을 교화하고, ‘고평들’을 개척하여
향토주민의 복리증진에 힘을 쏟은 鄭琢의 사례가 이웃사랑을 대변한다.
1 90 0년대 초기에 예천은 ‘제2의 개성’으로 불렸으며, 일본제국주의 시대
에도 일본사람들이나 그들의 가게가 발을 붙이지 못했을 만큼 예천사람

 


66) 孝行의 사례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학자들을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潘冲(1508~1584, 巨濟), 金八元(1524~1569, 江陵), 高夢錫(1525~1575, 開城), 李閱道
(1538~1591, 眞城), 金復一(1541~1591, 義城), 李榮門(1548~1618, 慶州), 金光燁(1561
~1610, 順天), 李光胤(1564~1637, 慶州), 鄭榮後(1569~1641, 東萊), 鄭榮邦(1577~1650,
東萊), 金錕(1596~1678, 禮安), 金以道(1604~1670, 金海), 全五倫(1631~ 1720, 竺山),
李東標(1644~1700, 眞城), 鄭重岱(1691~1762, 東萊), 朴孫慶(1715~1782, 咸陽), 張華
植(1853~1938, 仁同), 鄭鳳鎭(1875~1952, 東萊)
338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들은 자긍심이 높고 단결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조건적
으로 이주민을 배척하는 배타주의 문화와는 구분된다. 즉 16~ 17세기 예
천지역 성리학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麗末鮮初 이래로 定住民 문화를 일
궈온 토착민들의 후손과 주로 妻鄕 또는 外家를 따라 들어온 移住民 간의
융합을 이룬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예천지역의 유력한 문중들이 대거 참여
하여 浯川書堂을 건립하고, 자녀 교육에 함께 힘쓴 일은 지역민들의 연합
과 단결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타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예천지역 학자들의 師承관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家學을 계승
한 학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이 지역의 학문전통이 자생적 토
양이 강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자생적 토양에다 영남학파 그 중에
서도 퇴계학맥의 접목이 예천지역 성리학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특징은
사승관계뿐만 아니라 교우관계와 그리고 이 지역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
과도 일치한다. 예천은 안동과 더불어 퇴계학의 중심부를 이룬다. 그렇지
만 예천에서는 여타지역에서 볼 수 있는 학파와 문중 간의 대립이 크게
주목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지역출신의 학자와 관료들이 성리이론보다는
孝悌의 실천에 매진하였고, 黨利黨略의 패권주의적인 경쟁보다는 經世致用
을 중시하는 개방적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을 함께 아우른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끝나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삶을 재구성함으로써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고,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지혜
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예천지역 유학자들에 대한 이해는 이 지
역의 정신사적 전통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하
여 지역 인문 풍토의 새로운 모색을 도모할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오
래된 미래’를 주목해 보자.
예천지역 성리학계의 지형도 33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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錄(甲寅本) (陶山書院) / 別洞先生續集 (尹祥) / 石溪集 (李時明) / 藥圃先生續集 (鄭
琢) / 藥圃集 (鄭琢) / 浯川書堂錄 (永慕會, 大譜社, 2015) / 益齋遺稿 (鄭焜) / 佔
畢齋集 (金宗直) / 志庵集 (金在默) / 草澗日記 (權文海) / 草澗集 (權文海) / 退溪
書集成 (권오봉編, 포항공과대학교, 1996) / 退溪先生言行錄 / 筆苑雜記 (徐居正)
東國輿地勝覽 / 宋元學案 /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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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2000, 113-148쪽.
340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9號

 

Abstract
Jang, Yun-Su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in general the tradition of
Neo-Confucianism in Ye-Cheon around the 16th~17th century. The main concern
of Neo-Confucians in the Ye-Cheon area was to practice the teaching of Neo-
Confucianism in real life rather than to argue speculatively. The tradition of
filial conduct on the basis of fam ily-study was the m ain characteristic of
Neo-Confucianism in the Ye-Cheon area. This area is so close to Toegye's
residence that much influence of the Toegye-study remains and has produced
m any of Toegye's literary scholars. Neo-Confucians in Ye-Cheon succeeded
in integrating the native peoples, cultivating dom iciled culture with that of
the im m igrants. They tried to unify and integrate the com m unity; the m ajor
fam ilies built the village schools together and taught their children. The
m ost typical characteristic in the succession of teachers am ong the scholars
in Ye-Cheon is that there are m any who inherited their fam ily-study.
K ey W ord
Disciples of Toegye, Jeong-Tak, Kwon-Munhae, Ye-Cheon, Yoon-Sang

 

논문투고일 201 6.6.30 . 심사완료일 201 6.7.27 . 게재결정일 20 16.8.1 7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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