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매죽헌 성삼문 [1]

강나루터 2018. 1. 11. 06:24

 창녕 성씨가 창녕을 떠나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매죽헌 성삼문(1418~56)의 고조부인 이헌 성여완 (1309~97)때부터라고 한다.

숙종 35년 (1709) 성환이 편찬해 낸 "창녕성씨 족보"에 의하면
성여완의 고조부인 성인보가 창녕 성씨의 시조로 되어 있다.

족보에 실린 성인보 행장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성인보는 창녕 호장으로 조정사가 되어 어느 때 송경, 즉개성에 올라 왔다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그의 독자인 송국이 이 소식을 듣고 천리를 달려 올라와서 부친의 시신을 몸소 짊어지고 고향으로 내려오는데 창녕을 거의 다 와서 날이 저물자 청산원 문밖을 빌려 자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와서 하얗게 쌓여있고 시신 아래로부터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서 앞산으로 이어져나가 있다.
괴이하게 생각하여 그 발자국을 쫓아가 보니 지포 뒤의 북산 산꼭대기에 이르러서 그쳤는데 그친 곳만 자리 한잎 정도의 넓이로 눈이 녹아 있다.

이에 송국은 바로 이곳에 부친의 시신을 장사지내게 되고 미구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그 묘소가 있는 곳은 창녕현 서쪽 십리쯤에 있는 맥산이라 하며 성송국이 이런 명당을 호랑이로부터 점지받게 된 것은 부친의 시신을 천리밖에서 몸소 지고 내려온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까닭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하시중까지 지낸 성송국이지만 역시 고향을 떠나지 못하여 그가 서거하였을 때도 그의 시신은 고향 집에 안치되어 있었고 그의 상중에 그의 집을 찾아온 산승을 그 자제들이 극진히 대접한 덕으로 그의 묘소는 창녕현 서쪽 20리밖에 있는 대곡 우항산에 자리잡게 된다. 이때 이 자리를 잡아준 산승은 그 자제들에게 후세 자손들이 대대로 큰 벼슬에 오르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뒤에 풍수가들은 이를 보고 와우형 명당에 화초안이 갖춰지고 좌우수가 청룡 백호를 휘감아 명당앞에서 합수되어 20여굽이를 굽이치며 화초형의 안산을 휘감아 나가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니 반룡수파형을 아울러 갖췄다고 하며 영남지방에 있는 3대 명당 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그래서 그랬던지 송국의 증손자인 성여완은 충숙왕 5년 (1336) 병자에 26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종2품 첨서밀직정당문학에 이르러 대신 반열에 오르게 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는 그 자제들이 개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고향으로 유배되는 상황인데도 84세의 기로 대신이라 하여 검교문하시중을 제수하며 정승대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여완의 아들들인 성석린 (1338~1423) 성석용 (1352~1403) 성석인 (?~1414) 삼형제는 조선 태조와의 친분관계 때문에 결국 태종때부터는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는데 특히 독곡 성석린은 태조의 옛친구로 태종의 부탁을 받고 왕자난 이후 함흥으로 물러나 있는 태조의 마음을 돌려 서울로 되돌아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움으로써 결국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둘째 자제 회곡 성석용은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정2품 자헌대부 개성유후를 지내고, 셋째 자제 상곡 성석인은 예조판서에 이르는데 이들 삼형제가 한결같이 글씨를 잘 쓰고 용모가 출중하며 성격이 원만하여 주변의 부러움을 독차지하였다 한다.그러나 이들의 이런 면모가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허다 하였으니 우선 성석린은 태종의 세객이 되어 태조를 설득하러 가면서 태종에게 벼슬하지 않는 포의를 가장하고 가서는 자신이 만약 태조를 속였다면 자신의 자손들이 천벌을 받아 반드시 눈이 멀거라는 거짓 다짐을 둔다.그래서 결국 태조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장자로부터 눈이 멀기 시작하여 이후 3대가 모두 복중 맹인으로 태어났었다고 "소대기년"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성석인의 경우 태종 8년 (1408) 4월16일 명나라 사신 황엄이 와서 미녀를 구하자 태종은 금혼령을 내리고 명나라에 보낼 미녀를 간택하게 되는데 당시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던 그가 그 따님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기 위해 금혼령을 어기고 출가시키고 마는데 그 벌로 일시 순금사에 갇히고 벼슬을 내놓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모두 미모의 혈통을 타고난 덕에 겪는 수난이었다.이런 미남 3형제 대신 중 가운데인 회곡 성석용이 매죽헌 성삼문의 증조부이다.

성석용은 당시 명문세가인 광산 김씨 성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다시 아들 3형제를 두는데 장자가 달생 (1376~1444), 차자가 개, 3자가 허였다.장인인 김성리는 사온승을 지냈지만 그 부친 김진은 정당문학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재상의 배출이 끊이지 않는 집안의 후예였다.성석용의 장자 성달생이 바로 성삼문의 조부이다.
성달생은 고려 공양왕 원년 (1390)에 15세로 생원시에 합격한 수재였는데 인물이 빼어나게 잘 생기고 담력이 있으며 기운이 장사라서 오히려 무과에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태종이 잠저에서 한번 보고 몹시 사랑하여 항상 호남아라고 부르며 대우를 남다르게 하니 벌써 동궁 시절에 정종에게 아뢰어 정4품 호군으로 승차시키고 자신이 등극하여서는 2년 (1402) 임오에 무과를 처음 신설하며 이에 응시하게 하여 1등으로 뽑아 즉시 종3품 대호군을 제수하고 뒤이어 흥덕진 병마사로 내보내며 8년 (1408) 무자에 왜구를 격퇴하자
말 한 필을 하사하고 사연을 내려 위로하기까지 한다.

태종 10년 (1410)에 성달생이 다시 무과 중시에 2등으로 뽑히자 태종은 즉시 빈객을 접대하고 종친과 재상을 공궤하는 등 일체 조정의 접대와 연회를 총괄하는 예빈시의 수장인 판예빈시사 (정 3품 당하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태종 13년 (1413) 계사에는 경상도 성주 목사로 내려보냈다가 임기도 차기 전에 함길도 경성 절제사로 옮겨서 야인을 다스리게 하는데 야인들이 매일같이 와서 성달생과 함께 활을 쏘면서 쏘기만 하면 과녁을 맞히는 그의 활솜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한다.

드디어 태종 16년 (1416) 병신에는 중앙으로 불러 올려 종2품 중군동지총제를 시키고 다음 해인 태종 17년 (1417) 정유 12월 3일에는 전라도 도관찰사겸 병마도절제사를 제수하여 전라일도를  내 맡긴다.

그리고 다음해인 태종 18년 (1418) 무술 8월8일 세종대왕이 즉위하고 나서는 11월 20일에 함길도절제사겸 판길주 목사로 옮겨가게 하여 다시 야인을 방어하게 한다.그러나 성달생은 함경도로 부임해 가지 못한다.
바로 11월23일 왕비 청송심씨의 친정아버지인 영의정 심온 (1375~1418)이 군사권은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사실이 상왕인 태종에게 알려져서 태종이 이를 대역죄로 다스리게 되는데 성달생도 이 옥사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심온은 이때 명나라에 가 있어서 이런 옥사가 진행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세종의 즉위를 인정하여 책봉사를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사은사의 정사로 9월8일에 명으로 떠나서 사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심온이 국왕 부자를 이간하여 권력을 다투게 하려 했다고 하면서 그를 대역죄인으로 몰아갔으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이는 다분히 태종이 의도적으로 꾸며낸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외척의 간정이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인 것을 역사를 통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태종은 세종으로 하여금 마음껏 이상정치를 펼쳐내게 하기 위해 세종의 외가이며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집안을 이미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계기로 역적으로 몰아 처단하고 나서 이제는 세종의 처가까지 역적으로 만들어 간정의 길을 차단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심온 집안은 이 옥사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심온의 형인 동지총제 심정은 11월 26일에 참수되고 심온도 12월 22일 국경을 넘어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채 잡혀와서 변명할 새도 없이 수원으로 압송되어 자진을 강요받고 역적으로 죽어간다.

이런 와중에 성달생은 이 옥사에 연루되어 11월 26일 삼척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이 옥사가 워낙 태종이 만들어낸 무옥이었으므로 심온 집안이 역가가 되어 간정의 길이 막히자 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은 미구에 모두 사면되어 풀려나니 성달생도 다음해인 세종 원년 (1419) 3월5일에는 중군총제로 다시 복직된다.
그런데 이렇게 왕실과 성씨 집안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던 해인 세종 즉위년 (1418) 무술에 왕실에서는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용 (1418~53)이 9월19일 창덕궁에서 탄생하고 성씨 집안에서는 장자인 매죽헌 성삼문이 충청도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난다.성삼문의 외조부는 당시 명문세가이던 죽산 박씨 집안의 호조정랑 박담이었다.
그런데 박담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고려왕조와 운명을 같이한 최영(1316~88) 장군이 나고 자란 마을인 노은동의 그 터전을 모두 차지해 살고 있었다.그는 서산 정씨 수문전학사 정상의 따님과의 사이에 3남5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성삼문의 모친이 장녀로 맨 맏이였고 그 아래로 아들 3형제가 있었으며 그 다음에 딸 4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넷째 따님에 해당하는 이가 기계 유씨 유해에게 출가하여 조선 후기를 주름잡는 명문 기계 유씨의 기틀을 잡아 놓는다.

그래서 그의 9세손인 영의정 지수재 유척기 (1691~1767)는 노은동에 있는 유해의 묘소에 묘지를 지어 넣으면서 그 9대 조부인 유해의 맏동서이던 성승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성승의 묘소와 성삼문의 부인 묘소 및 유해의 묘소가 모두 그 장인인 박담의 묘소 왼쪽 산기슭에 있기 때문이었다.유해는 처가에 의탁해 살다가 겨우 24세에 유복자 하나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떴으므로 그대로 처가 묘산에 장사지내게 되었고 성승은 능지처참되어 그 시신의 일부가 이곳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매죽헌 성삼문 [2]
성삼문이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해당한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천안에서 장항으로 이어지는 21번 국도를 타고 예산에서 홍성으로 가는 도중에 예산 군계를 벗어나 홍성군으로 진입하여 인후원이란 곳을 찾으면 된다.이 인후원 고개에서 홍성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다가 방향의 오른쪽으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대인리 다음에 노은리가 나오는데 백제 멸망 당시 최후의 항전이 있었던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 산자락이 벋어 내려 매봉(응봉)과 닭제산(계봉)을 차례로 나즈막하게 일으켜 놓은 그 산밑에 자리잡고 있다.

1923년 홍선군수 이민녕이 편찬한 "홍성군지"에 의하면 그때까지 성삼문이 탄생했던 집인 성삼문의 외가 죽산 박씨 댁이 그 외손의 후예인 김경지에게 전해져서 지켜지고 있었다 한다.그러나 지금 노은동에 가서 그 집터를 확인하려 하니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다만 노은동 제일 높은 터에 기와집 한 채가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그 집이 박씨댁 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성삼문이나 최영 같은 인재가 태어나려면 그런 터라야 할 듯 하니 말이다.

그 집에서는 용봉산이 맞바라다 보이는데 용봉산 자체가 마치 금강산이나 설악산 월출산처럼 험준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골봉암산으로 강인한 기질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부드럽고 완만한 토산 연봉으로 일관되는 태안반도의 산세에서 어떻게 이런 험준한 산이 돌출 될 수 있었던지, 참으로 자연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다.
최영장군이나 성삼문 같은 충의열사를 배출하기 위해 자연은 이런 산을 이곳에 있게 하였던 모양이다.

어떻든 성삼문이 외가인 노은동 죽산 박씨 댁에서 탄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번이나 소리쳐 묻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그래서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 하는데 이때 아마 부친 성승의 나이는 18세전후로 아직 무과급제 전이었을 듯하다.그래서 상승 부부는 노은동 처가에 기거하면서 자유롭게 과거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이때 성삼문의 조부인 성달생(136~1444)은 43세의 장년으로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로 전주에 가 있다가 11월20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겸 판길주사가 되어 함길도 길주로 임지를 옮기려다 11월23일 심온옥에 연루되어 11월26일에는 삼척에 유배되고 있기 때문이다.집안이 이렇게 어수선하니 장손의 출산을 위해 시골 친정으로 보낸 큰 며느리와 장손의 귀가는 무한 보류되었을 것이다.더구나 심온옥이 단시일에 종결되고 성달생의 혐의도 풀리게 되어 다음 해인 세종 원년91419) 3월5일에 성달생이 중군총제로 복직되어 중앙의 병권을 장악하므로써 집안의 근심이 사라짐에 있어서랴!
성삼문은 서울 본가로 나들이를 할 만큼 클 때까지 노은동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달생은 노은동에서 얼마 멀지 않은 비인에 왜구가 침략하였다는 급보에 접하자 5월3일에 중앙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비인으로 내려가서 왜선 50여척을 불지르는 대공을 세우는데 아마 손자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이렇게 질풍같이 달려가 왜구를 섬멸하였을 것이다.이렇게 성달생이 비인에서 왜구를 격파하자 세종은 즉시 성달생에게 경기 황해 충청 수군도처치사를 제수하여 경기 황해 충청 3도 수군을 총괄하도록 한다.그리고 왜구의 뿌리를 뽑아 이를 근원적으로 소탕하기 위해 5월14일에 대마도 정벌을 결의하고 5월21일에 삼군도통사 최윤덕(1376~1445)을 거제도 임지로 보내는데 5월23일에 성달생은 백령도 근해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왜구를 수장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대마도 정벌의 성공을 예시하는 듯한 상서로운 조짐이라서 태종과 세종은 그 소식을 듣고 성달생의 공로를 크게 치하한다.드디어 6월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1360~1425)가 전함 227척과 군사 1만7천2백5인을 거느리고 거제현 주원도 방포를 떠나 6월20일 대마도로 진격해 들어가서 대소적선 1백29척을 빼앗고 1천9백39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백14인을 참수하며 21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포로가 된 중국인 남녀 31명을 되찾아 오는 전과를 올린다.이때 성달생은 경기 황해 충청 수군처치사로 후방에서 대마도 정벌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지원이 신속하지 못했다 하여 6월21일에 의금부에 하옥되는 불행을 겪기도 한다.그러나 대마도 정벌의 성공으로 기분이 좋아진 태종과 세종은 동정군을 포상한 다음 성달생을 바로 사면하여 9월25일에는 중군총제로 다시 기용한다.

지난해 태종 18년(1418) 2월4일에 천연두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태종의 막내왕자 성녕대군 종(1405~1418)은 성달생의 사촌아우 성억(1386~1448)의 맏사위인데 불과 14세에 요절하니 성씨를 불쌍히 여긴 태종이 세종에게 성씨 집안을 공신가문의 예에 준하여 특별히 우대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이에 10월24일에는 성억을 경창부윤으로 삼고 성억의 친형인 성엄은 강원도 관찰사를 삼는다.

성녕대군은 태종이 가장 사랑하던 아드님으로 그 사랑이 유별날 정도라서 대군 부인도 절세 미인의 명문 규수를 택하노라 미모의 혈통을 타고난 창녕성씨 가문에서 간택해 들였었는데 불과 14세에 허망하게 돌아가니 태종은 이 막내왕자를 잃고 거의 실성할 정도로 애통해 한다.그래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형제들을 살육하면서 왕권을 장악했던 자신의 일생을 반성하며 불교를 박해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성녕대군의 집을 절로 만들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례가 되어 도성 안에 절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는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자 성녕대군의 무덤이 있는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대자암이라는 원찰을 크게 짓고 왕실 불사를 전담하게 한다.

그리고 성녕대군의 묘소 아래에 신도비를 세워 대군의 사적을 길이 남기는데 글은 당대 석학인 변계량(1369~1430)이 짓게 하고 글씨는 대군의 처당숙인 명필 성개(1380~1440)에게 쓰게 하니 성개는 성달생의 바로 아래 친아우였다.
태종은 막내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여 이 해 6월 3일에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제3왕자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뒤 8월 8일에는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통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만다.그런데 이 해에 안평대군과 성삼문이 탄생하였던 것이다.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성녕대군을 잃고 애통해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이 해 탄생한 안평대군을 성녕대군에게 양자로 보낸다.그러니 안평대군은 성삼문의 재당고모인 성억의 따님 성씨의 양자가 되어 둘 사이가 내외종 8촌 형제가 되고 말았다.안평대군과 성삼문의 만남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종 초년 성삼문이 유아기에 있었을 때부터 왕실과 창녕성씨 일문은 인척으로 밀착되어 부귀영화를 함께 누려가게 된다.이에 성삼문이 세살되던 세종 2년(1420) 4월 15일에는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이 45세의 장년으로 사은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는데 아마 이 어름에 성삼문의 부친 성승(1400께~56)이 20대 초반으로 무과에 급제하였을 듯하다.

성삼문이 8세되던 해인 세종 7년(1425) 4월 11일에는 성달생이 다시 명나라 사신을 전송해 보내는 반송사가 되어 우리나라 출신으로 명나라 황실의 내관(환관)이 되어 자주 본국에 사신으로 나오는 윤봉을 신의주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성달생의 용모가 윤봉의 눈에 띄게 됨으로써 성삼문의 집안에 뜻밖의 재앙이 닥치게 되었다.

성삼문이 10세되던 해인 세종 9년(1427) 정미 1월 25일에 성달생이 공조판서로 임명되어 온 집안이 경사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4월 21일 윤봉이 다시 사신으로 나와 명나라 황실의 여러 친왕비빈으로 간택할 미녀를 구하면서 윤봉이 성달생의 막내 따님을 지목하여 간택 대상으로 삼고 4월 25일에 세종과 함께 편전에서 미인들을 모아 놓고 간택하는 자리에서 성씨를 제1등으로 뽑아 다른 6인의 처녀와 함께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미모의 혈통을 타고 났기 때문에 당하는 횡액이었는데 마침 이때 도총제를 겸하여 평안도 도절제사로 평안도에 내려가 있던 성달생은 이 뜻밖의 사태를 맞아 5월 4일에 왕명으로 소환된다.그리고 성씨 일행 미녀 7인을 명나라까지 호송하는 호송사의 책임을 맡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게 된다.결국 막내따님을 명나라 황실에 강제로 시집보내면서 그 위요(혼인때 가족 중에서 신랑 신부를 데리고 가는 사람, 상객 요객 후배 후행으로 부르기도 한다)로 따라가게 된 셈이었다.함께 뽑힌 처녀는 목사 차지남, 판관 정효충, 부사직 노종덕, 부사정 안복지, 목감직 오척, 서승 최미의 따님들이었는데 이들 7인의 명문가 출신 미녀들은 음식 시중을 들어줄 집찬비 10인과 시중을 들어줄 종비 16인과 함께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7월 20일에 서울을 떠나기로 하자 7월 18일에는 세종왕비 청송 심씨가 이들을 모두 경회루로 불러 전별연을 베풀어 준다.이때 처녀의 모친을 비롯한 친족들도 외명부의 자격으로 시연하게 되는데 밤이 되자 초가을 열여드레 둥근 달이 휘영청 밝고 밤기운 소슬하여 풀벌레 소리 구슬프니 누하의 시종비들로부터 터지기 시작한 울음소리가 궐밖까지 들릴 만큼 구슬프게 번졌다 한다.

성씨의 사주단자에 의하면 신묘(1411) 8월 17일 신시 생이라 하였으니 이때 성씨의 나이는 17세로 장조카 성삼문보다 겨우 7세가 더 많았다.이에 성삼문은 10세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7세 연장으로 함께 자라나며 온갖 잔정이 다든 막내 고모를 생이별하는 뼈아픈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30일자).

매죽헌 성삼문 [3]
성삼문이 14세 나던 해인 세종 13년(1431) 7월 2일 그의 조부 성달생(1376~1444)은 56세로 함경도의 군사권을 전담하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종2품)가 되어 함경도로 부임해 가는데, 다음해 세종 14년(1432) 1월 29일에는 성달생의 사촌 아우들인 성엄과 성억(1386~1448) 형제가 성달생이 거쳤던 벼슬인 우군총제와 전라도 관찰사에 각각 임명되어 성씨 집안의 영화는 계속된다.이 해 3월 18일 성달생은 중추원사(종2품)를 겸하고 4월 25일에는 길주목사를 다시 겸하게 된다.
함경도 변방의 통치권까지 모두 성달생에게 맡긴 것이다.
세종 15년(1433)은 성삼문이 16세 되던 해이다.


이 해 10월 2일에 세종은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철원평야로 사냥을 떠난다.말이 수렵이지 사실은 군사훈련(강무)이었던 것이다.이 사냥 도중 10월 4일 매를 놓아 고니(천아)를 잡다가 왕세자의 말이 진흙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이때 사냥에 겸사복의 벼슬로 시중하고 있던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어 왕세자와 말을 구해낸다.그러니 세종과 왕세자가 성승의 충성심에 얼마나 감복하였겠는가.

뒷날 문종이 되는 왕세자가 20세 때의 일이었다.그래서 성승에게 활 한벌을 상으로 내려준다.
이때 김종서도 좌승지로 호종해 있다가 이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이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11월 10일에 성승의 당숙이자 성녕대군의 장인인 성억을 하성절사의 정사로 삼아 명나라로 보낸다.명나라 친왕비가 되어 있는 당질녀 성씨, 즉 성삼문의 막내고모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세종대왕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12월 9일에는 좌승지 김종서(1383~1453)를 함길도 도관찰사로 내려 보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있는 성달생과 함께 여진족을 본격적으로 정벌하여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게 한다.

그러나 북방 영토확장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그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함길도 도관찰사를 자원해 오다시피 한 김종서는 2년 가까이 함경도를 다스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는 자신이 직접 군사권을 장악하여 여진 정벌의 일선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한다.그래서 세종께 품신하여 세종 17년(1435) 3월 8일에 7세 연장의 성달생을 숭정대부(종1품) 중추원사로 승진시켜 중앙으로 올려 보내고 3월 27일에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자리로 옮겨 앉는다.함길도 관찰사 자리는 정창손의 부친인 정흠지(1378~1439)에게 맡겼다.
성달생이 승진하여 서울로 발령받던 날 그의 사촌아우 성억은 공조판서에 제수된다.

그런데 이 해 4월 17일에 을묘년 식년시가 치러지니 성삼문은 18세의 나이로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시 3등 56인 중의 하나로 합격한다.벌써 학문이 숙성해 있었지만 명문 집안답게 자손의 소년 등과를 달가워하지 않아서 아직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명년인 세종 18년(1436)병진년은 조부 성달생의 회갑해이므로 아마 집안에서 장손의 소과 응시만은 허락하였던 모양이다.소년등과하면 교만 해져서 대성하기 어렵게 되므로 뼈대있는 명문가에서는 이를 극력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부의 회갑년이 되니 장손으로서 등과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 될 터이라, 생원시에 응시하는 것만을 묵인했을 듯하다.그래서 그 다음 식년시인 세종 10년(1438) 무오에 21세로 문과급제하면서 문과방목에 생원 성삼문이라 기록하게 된다(그 생원시에 제출한 시권이 "성근보선생집"이 편찬되던 영조연간까지 성삼문의 외손 박호의 방손가에
보존되어 있었다 한다).이 과거에서 하위지가 장원급제하였었고 하위지의 아우 하기지도 동방이 되어 함께 급제하였으며 신숙주는 소과인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89)이 현종 9년(1668)에 지은 "홍주성선생유허비"에 의하면 성삼문이 문과에 급제하고 나서 태어나 자란 외가에 인사하러 왔을 때 잔치를 베풀면서 삼현육각의 연주용 악기들을 걸어 놓았었다는 오동나무가 그때까지 살아 있어 그 가지를 고로들이 지적하고 있었다 한다.이때 성승은 정3품 대호군에 올라 있어 4월 28일에 경원절제사 이징옥이
모친상을 당하여 이임할 때 그 후임의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성달생은 세종 19년(1437) 12월 1일에 지중추원사를 맡게 되었으니 부자가모두 군권을 장악하는 요직에 있게 되었던 모양이다.성삼문이 문과에 급제하자 안평대군을 통해 그 학문과 인품을 전해 들은 세종은 집현전에서 키워낼만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그를 집현전에 배속시켜 그 또래의 수재들인 박팽년(1417~56) 신숙주(1417~75) 하위지(1415~56) 이개
(1417~56) 이석형(1415~77)등과 함께 학문 연구에 골몰하게 한다.

그래서 이들을 삼각산 진관사로 보내어 사가독서를 시키니 세종 24년(1442) 임술년에 이들은 공부하던 여가에 삼각산을 시제로 하여 서로 시를 주고 받는 연구형태의 창수시를 짓는데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선생집" 권1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진관사 승려인 일암이 항상따라다니며 이를 베껴 놓았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진 내용이다.
그런데 성삼문은 이때 조모상을 당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종 22년(1440) 7월 22일에 그 부친인 성승이 경상도 병마절제사로 임명되고 12월 4일에 조부 성달생이 판중추원사에 제수되니 아직 집안에 상사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 세종 24년 2월 30일에 성승을 기복시켜 평안도 창성진 첨절제사를 삼는다는 전지를 내리고 있으니 세종 22년 12월과 24년 2월 사이의 어느때에 그 조모가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성승은 3월 2일 다음과 같은 사직소를 올린다.
"신은 이미 적을 막는 재주도 없었고 그 일에 관계한 몸도 아니었는데,이제 기복의 명을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남방에서 수자리를 지키다가 자모와 영결하지 못해서 애통한 마음 끝이 없는데 지금 또 기복하여 상제를 마치지 못하면 생전과 사후에 모두 어미에게 효성스러움이 없는 것이니 부끄러운 낯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의 자비가 신을 기복시키는 명령을 돌이키어 상제를 마치게 하십시오"

그러나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승은 창성진에 부임하기는 하였으나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 하여 무예를 익히고 육식하는 일을 거부하며 지내게 되니 7월 6일에 세종은 평안도 관찰사 정분(?~1454)에게 전지를 내려 이를 못하게 하라고 명한다.장자인 성삼문이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성리학적인 의례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마당이니 아무리 성승이 무반으로 발신하였다 하나 그 의례를 철저하게지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이 해에 성삼문이 사가독서장인 진관사에서 동료들과 창수시를 남겼다면 이미 장손의 상기는 끝난 상황이라고 보이니 성삼문의 조모 풍양 조씨 운개의 따님은 세종 23년(1441)에 돌아갔으리라 생각된다.

조씨부인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명승이던 환암 혼수(1320~92)의 맏형인 조건의 세 아들 석간 조운흘(1332~1404), 조운개, 조운식 3형제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혈손이었다.그래서 풍양조씨 3형제의 공동 상속인으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아 성씨 집안에 보태게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성달생은 66세에 부인 풍양조씨를 잃고 나서 67세 되던 해인 세종 24년(1442)에 장자 성승마저 창성도호부사로 내려가게 되자 장손인 성삼문과 함께 지내게 되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69세 나던 해인 세종 26년(1444) 갑자 2월 28일 세종대왕과 왕비 청송심씨가 청주 초수리로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 판중추원사의 자격으로 어가를 수행하여 이에 호종해 간다.
당시 48세이던 세종이 태종의 총애를 받던 원로대신으로 오랫동안 외직에 많이 나가 있다가 10여년전부터 내직에만 있어 온 성달생에게 바람을 쐬게 하려고 일부러 호종시킨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69세의 나이에 3백여리 청주 여행길이 무리였던지 4월 10일 초수리 형재소에서 성달생은 병없이 급서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정사를 철폐할 정도로 몹시 애도하며, 장례를 성대히 치러서 자손에게 유감이 없도록 하라고 명한다.

세종이 반함(시신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 여부를 확인하고 창졸간에 잊었다고 하자 내탕보배를 내려주어 반함하게 하였다든지, 사후에 곧바로 시호를 양혜라고 내려주었다는 사실 등은 그 예우의 정도를 알만하게 한다.
세종대왕이 온천행행에 항상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 최항 등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을 편복으로 수행시켜 전도하게 하면서 고문에 응하게 하였었다하니, 이때도 성삼문이 편복 수행하여 조부 성달생의 시중도 아울러 들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그래서 세종은 더욱 성달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장례를 성대히 치러주도록 면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아우 성녕대군의 처당숙이라 손윗사돈에 해당하고 그 자손인 성승과 성삼문이 무반과 문반에서 믿을 만한 신하로 신망이 두터운데 자신이 극노인을 외지로 끌어내어 객사시킨 듯한 죄책감도 있어서더욱 세종은 그 장례를 극진하게 치르게 하였던 듯하다.성달생의 묘소는 파주 동면 금동에 있다고 한다.

"세종실록" 권104 세종 26년 갑자 4월 무자조에서는 성달생이 폭졸한 내용을 싣고 그의 행장을 약술하고 있는데 풍채가 아름답고 편지글씨(서찬)를 잘 썼다고 밝히고 있다.
미모에 글씨 잘 쓰는 것은 창녕성씨 집안의 혈통이었던 것이다.


매죽헌 성삼문 [4]
성삼문이 조부상을 당하게 되자 창성도호부사로 나가 있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은 복상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상경하게 된다.

그러나 세종은 장손인 성삼문을 소상도 치르기 전인 다음해 세종 27년(1445)
1월7일에 불러내서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함께 요동으로 보내어 요동에
귀양와 있는 명나라 학사 황찬에게 음운학을 배워오도록 한다.

훈민정음의 제정을 시작하여 음운학적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기 때문
이다.

그래서 성삼문은 조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숙주와 더불어 요동으로 출발
하게 되는데 서울의 여러 문사들이 모두 나와서 송별연을 베풀고 송별시를
지어 전별한다.

이에 성삼문도 그 전별시의 운을 빌려 신숙주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으니
"성근보선생집" 권1에 수록된 "요동으로 향하면서 서울 여러 친구들이 송별
하는 시의 운을 가지고 범옹(신숙주의 자)에게 화답한다"는 긴 제목의 시를
짓는다.



그 제목에 붙은 세주에 의하면 성삼문은 이로부터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을 열세번이나 왕래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성삼문이 29세 되던 해인 세종 28년(1446) 병인 9월에
훈민정음을 제정 반포하게 한다.

한편 안평대군 용(1418~53)은 천성이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벌써
20세 전후한 시기에 유가 경전을 모두 꿰뚫고 시문서화는 물론 거문고와
바둑까지도 일가를 이루게 되니 쌍삼절의 풍류왕자로 국내 외에 그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이에 자연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예원의 기린아들이 운집하게 되니 세종성시
의 문예기반은 안평대군에 의해 다져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종도 그 능력을 인정하여 안평대군이 25세 되던 해인 세종 24년
(1442) 임술 6월에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여 일가를 이루었음을 인가
한다.

이 사실을 취금헌 박팽년(1417~56)이 "비해당기"에서 밝히고 있으니
그 일단을 옮겨보겠다.

"정통 임술(세종 24년, 1442) 6월 어느날 안평대군이 대궐에 입시하니
상감께서 조용히 물으시기를 "아무의 당명은 무엇이라 하느냐" 안평이 없음
으로 대답하자 상감께서 증민의 시를 외우시고 또 "서명"에 미쳐서 이르시기
를 "비해로 현판을 다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신다.

안평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받들고 나서 기쁘고 놀라워 드디어 궁중에
있던 여러 선비들에게 말을 구하여 그 뜻을 펼치니 이는 대개 상감께서 내려
주어 권면하신 것을 자랑하고자 해서였다" "비해"라는 것은 게으르지 않다는
뜻으로 "시경" 권18 대아 증민편에 "아침 저녁으로 게으르지 않으니 이로써
한 사람(천자)을 섬긴다(숙야비해, 이사일인)"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세종대왕은 바로 "시경"의 이 대목을 외우면서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주어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문예 수련에 정진
하여 왕업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라고 권장 격려하였던 것이다.

"서명" 역시 송나라 거유인 횡거 장재가 지은 책으로 주희(즉 주자)가 주를
달고 있는데 장횡거가 서창 위에 걸어놓았던 것으로 유가 윤리의 근본인
인의를 간명직절하게 약술한 내용이다.

이런 "서명"의 내용과 서창 위에 이를 써서 현판으로 걸어 놓았었다는 고사
까지 언급하면서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하사하였으니 안평대군으로서는
감격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현전 및 승문원 학사들에게 이를 기리는 시문을 지어달라 요청하게
되니 집현전 수찬(정 6품)으로 있던 박팽년이 이와같은 기문을 지었고 승문원
부교리(종 5품)로 있던 성삼문과 집현전 수찬이던 신숙주 등이 모두 이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그런데 성삼문 시는 전하지 않고 신숙주 시는 그의 문집인 "보한재집"
권10에 "제비해당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지만 비해당의 사호가 선덕계축,
즉 세종 15년(1433)에 있었다고 기록해놓고 있어 박팽년의 "비해당기" 내용과
크게 어긋나 있다.

세종 15년이라면 안평대군의 나이가 불과 16세이니 세종이 당호를 내려
문예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인정할 리도 없었을 때이거니와 신숙주도 17세밖에
되지 않아 아직 진사급제도 못한 때이니 궐내에서 문한의 직책을 맡을리
없으므로 이 내용이 어떤 착오로 잘못 기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안평대군은 "비해당"의 당호를 부왕인 세종으로부터 하사받고 나서
부터는 더더욱 당시 예원의 중심을 자부하여 문예에 종사하는 풍류문사들과
교유를 넓혀가니 비슷한 또래의 집현전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강희안 이현로 등이 특히 친교가 깊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 해 8월에 비해당이 "동서당고첩"에서 송 영종의 소상팔경시를
얻어보고 이를 모각하게 하고 화원으로 하여금 그 시에 맞춰 소상팔경도를
그리게 한 다음 고려때 대시인이었던 이인로(1152~1220)와 진화의 소상팔경시
를 손수 써놓고 당세 문사들에게 다시 소상팔경시를 지어 채우게 해서
"비해당소상팔경시권"을 이루어내는데, 여기에 이들 같은 또래 문사들이
모두 참여해 있고 원로 대신으로는 좌찬성 하연과 절재 김종서가 들어 있다.

이해 안평대군은 자신이 화원화가로 길러 놓은 현동자 안견(1418~?)으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던 모양이니 신숙주가 지은 "비해당진찬"
("보한재집" 권16)에서 이를 확인할수 있다.

신숙주와 박팽년이 안평대군의 측근으로 부상할수 있었던 것은 성삼문이
이들과 절친했기 때문이었다.

성삼문은 안평대군의 양모인 성씨부인이 재당고모라서 어려서부터 성녕대군
저에서 함께 놀며 자라난 사이이니 안평대군과는 친형제 이상 가까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 총명호학하는 성품이 비슷하여 더욱 친분이 두터웠었다.

그러던 것이 성삼문이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면서
안평대군과 궁중에서 조석 상봉하게 되자,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사가 독서
하면서 사귀게 된 같은 또래 학사들을 안평대군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안평대군 주변에는 늘 성삼문과 박팽년 신숙주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세종대왕과 문종은 늘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이 어느때 세자와 함께 한강변 희우정으로 나가 연희별궁에서
자게 되는데 안평대군이 그의 친구들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과 연회를
즐기면서 풍류놀이를 하자 세자이던 문종이 그들의 흥취를 돋우기 위해 귤을
하사하는 쟁반에 시를 지어 깔아 내림으로써 여러 학사들이 그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게 하니 성삼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공자(안평대군)의 속마음 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니, 위해서 호수위에
특별히 잔치를 열었다.

달빛은 대낮같이 밝고 사람은 옥과 같은데, 아래에는 맑은 강이 있고 위에는
하늘이 있다.

천한 선비 때를 만나 몸소 임금 모시다가, 오늘 행궁에서 신선되어 오르는
일 시험하였네.

산수의 기이한 경치로 이미 즐거웠거늘, 하물며 궁에서 내린 귤을 받고
술독 앞에서 취했음에랴!"

드디어 성삼문은 30세 되던 해인 세종 29년(1447) 정묘 8월 27일 식년시에서
세종대왕이 친림한 자리에서 치르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한다.

집현전 학사 20인을 대상으로 책문을 지어 올리게 하여 8인을 우등으로 뽑고
다시 그들 8인에게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여 어떤 형태의 문장이든 자유롭게
지으라 하니 성삼문이 "팔준도전"을 지어 바쳐 장원한 것이다.

세종을 비롯하여 문종과 안평대군이 얼마나 대견해 하고 믿음직스러워
하였겠는가.

이미 이해 4월 23일에 안평대군은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고 여러 명사들에게 그 제사를 짓게 하였을 때도 성삼문으로 하여금 그들의
친구들인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이에 참여하게
하였었다.

이때 성삼문은 이런 글을 남긴다.

"아침에 도원도 보고, 저녁에 도원기 읽고 나서, 비로소 지금과 예전에
도원이 있음을 믿겠으니, 신선의 얘기가 거짓이 아니구나.

만약 도원이 신선의 땅 아니라 한다면, 세간에 어찌 한 조각 도원의 땅이
없겠는가.

진실로 진나라 사람 발자취 미치지 못했던 것 알고 있으니, 상상하여 꿈이나
꾸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천만번 찾는데, 길을 잃고 다시 가지 못했겠는가.

가련한 옛사람들, 있고 없고 옳고 그름 가리려다가, 잘못해서 선경만 욕되게
하여 인간세상 만들어 놓았네.

고기잡이 배에 탔던 이들 한번 깨어난 후에, 꿈속에서 가 본 사람 한둘
아니었었지.

응당 이는 상계의 진인이 맑고 깨끗한 것 사랑하여서 십분 감추어 새어
나가지 않게 함이었으리.

그러기에 지금까지 천백년에 이르도록, 겨우 한사람 고사의 잠 속에만
허락했겠지.

스스로 정신이 우주 천지 간에 노닐지 않는다면, 신선의 땅에 끝내 다다를수
없거늘, 배종해 따라갔던 몇몇 사람에게 묻노니, 어떻게 수행해서 이에
이르렀던지 모르겠구나.

애닯다.

인간이 잠 속에 곯아떨어져, 달게 홍진 만장의 티끌 세상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도원도가 있기에, 사람으로 하여금 도기가 생기게 한다.

아침에 그림을 보고, 저녁에 기문을 읽으니, 솔솔 부는 맑은 바람이 양날개
에 생겨나서, 푸른 하늘 학 등에서 다시 노닐 듯하고, 솥바닥 핥고 날아오를
때 탈 수도 있을 듯하다" (회남왕 유안이 신선이 될때, 신선되는 약을 담았던
그릇을 개와 닭이 핥아 먹고 덩달아 날아올랐다는 옛 얘기가 있다)

매죽헌 성삼문 [5]


성삼문은 자를 근보라 하고 호를 매죽헌이라 하였다.

이름과 자는 어려서 집안 어른들이 지은 것이겠지만 호는 문예가 숙성한
뒤에 자신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짓거나 주변에서 지어준 것이므로 대개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매죽헌이라 하였으니, 성삼문은 매화나 대나무 같은 군자 기질을
호상하였던가 보다.

그래서 "성근보선생집" 권1 맨 첫머리에 실린 "매죽헌부"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음양 이기가 엉켜 움직이고, 사시가 그 신진대사를 바삐하면, 이에 식물
이 그 사이에서 생겨나 자라났다가 죽어가는 조화를 보인다.



비와 이슬은 불려서 그를 생육시키고 서리와 눈은 그를 얼려서 시들어
떨어지게(조락)하니, 거의 모든 만물이 휩쓸리듯 좇아서 변화하여 일찍이
저 원칙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없었거늘, 오직 매형(매화의 아칭, 황정견의
수선화시에서 수선화를 아우로, 매화를 형으로 표현한 데서 나온 말)의
아취있는 지조와 차군(대나무의 아칭, 왕희지가 빈 집에 대나무만 심고
살면서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어찌 하루인들 이 사람(차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는 "진서" 왕희지전의 내용에서 유래한 말)의 굳센
절개만이 비와 이슬을 빌려 꽃피지 않고, 서리와 눈을 내리 깔본다.

두가지 아름다움은 반드시 합쳐져야 한다고 하여 합쳐서 고헌에서 아취있게
감상하노라"

여기서 고헌이라 한 것은 안평대군의 저택, 즉 비해당의 누마루를 일컫는
것이니 이 "매죽헌부"는 분명 안평대군의 별호인 매죽헌을 두고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안평대군의 별호도 매죽헌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안평대군이 30세
때인 세종 29년(1447) 정묘 4월 23일에 쓴 "몽유도원도기"에서 "이를 비해당
의 매죽헌에서 쓴다"라고 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다시 안평대군이
32세때인 세종 31년(1449) 기사에 썼다는 서첩의 말미에 "매죽헌 청지
(안평대군의 자)가 성의 서쪽 작은 방(소재)에서 썼다"고 한 데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은 성삼문과 매죽헌이란 호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지기상응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시기하여 수앙대군에게 빌붙은 인사들은 뒷날 "단종실록"
권6, 단종원년(1453) 계유 5월 19일조에 세종의 특명으로 단종을 양육한
세종 후궁 혜빈 양씨가 안평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고 밀계하였다는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 기록한 다음 안평대군이 성삼문 김종서 등 조정의
선비들과 결탁하였다 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용이 널리 조사와 연결하고자 하여 "시가"로 칭탁하고 이현로 이승윤
박팽년 성삼문 등과 심계를 맺으니 문하를 자칭하며 모두 헌자가 든 호로
도장을 만들어 서로 자랑하니 일시 문사들이 모두 농락당한 바가 되었다.

이현로 등은 용을 일컬어 사백이라 하기도 하고 또 동평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김종서는 매양 용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맹말이니 맹로 요시라고
자칭하니 용의 거짓 명예가 이미 넘쳐서 임금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혜빈과 그의 소생인 한남군 어(?~1459)와 영풍군 천(?~1457)을 제거
하고서야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혜빈이 안평대군의
모반을 밀계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영풍군은 박팽년의 사위였다.

이런 터무니 없는 거짓 기록을 조작해 남겼지만 안평대군이 이들 집현전
학사들과 문예로 교유하며 헌자 돌림의 별호를 나눠 가졌었다는 내용만은
사실이었던 듯하다.

정치적 야심이 없던 그들은 오직 문예로 교유하며 성리학적인 정치 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김종서도 이들에게 의지하여 수양대군의 야심을 견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헌자 호를 나눠갖게 되니 성삼문은 안평대군과 함께 매죽헌
이라 하였고, 박팽년은 사위 영풍군과 함께 취금헌이라 하였으며, 박인년
은 경춘헌, 이개는 백옥헌, 이석형은 저헌이라 하였다.

아마 성삼문이 매죽헌이란 호를 안평대군과 함께 쓰기 시작한 것도
안평대군이 그것을 쓰기 시작하던 세종 29년(1447), 즉 그들이 30세 되던
해부터였으리라 생각된다.

"삼십에 선다(입)"는 공자의 평생관을 실천하려는 그들의 자부심이 30세가
되자 일가의 성립을 표방하고 싶어하였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해 8월 21일에 성삼문은 문과 중시에 당당히 1등으로 급제
하였으니 말이다.

이때 성삼문 집안은 경사가 겹친다.

지난해 9월 29일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은 그 부친 성달생의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중추원 부사(종2품)로 복직되었는데 이해 9월 2일에는 하성절사
의 정사가 되어 북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성삼문은 자제군관이 되어 부친을 수행하는데, 이는 성삼문으로 하여금
음운학에 밝은 중국 석학들을 만나서 이를 배워오게 함으로써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을 계속 보완해 가려는 세종의 특별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인사발령
이었다.

성승은 당대 제일의 대학사를 맏아들로 둔 덕을 톡톡히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막내 누이가 이역만리 먼나라에 시집가 있어서 서로 만나려면 사신이 되어
가는 길밖에 없는데 뜻밖에 부자가 함께 가게 되었으니 성씨 일가의 기쁨이
어떠하였었겠는가.

성승 부자는 이해 12월 28일 공무와 사무를 모두 원만히 마치고 귀국한다.

이때 중국으로 표류해 갔던 본국인 김원 등 13인을 송환해 오기도 하였다.

그 사이 성삼문이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과 함께 편찬해 낸 "동국정운" 6권이 완성되어 세종께 바쳐지는데 서문은
직집현전(종3품) 성삼문 바로 아랫자리에 있던 신숙주가 9월 29일에 짓는다.

성삼문이 성승을 수행하여 명나라로 가지 않았던들 성삼문이 지었을 서문
이었다.

세종 30년(1448)은 성삼문의 나이 31세 되던 해인데 3월 6일에 부친 성승이
도진무(정2품)로 승진하고 4월 3일에는 원손인 홍위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니 이가 곧 단종이다.

일찍이 세종은 어린 원손을 안고 궁정을 산보하다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
을 돌아보며 "과인의 천추만세후에 경등이 이 아이를 보호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었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은 이 부탁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8년 뒤에
자신의 목숨은 물론 일문의 목숨을 내걸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것은 뒷날 이야기이고 이해 5월 3일에는 판중추부사 성억
(1386~1448)이 돌아가는데, 성억은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의 사촌아우로
성녕대군의 장인이니 곧 안평대군의 양가 외조부에 해당한다.

그러니 안평대군과 성삼문은 모두 성억의 상에 상복을 같이 입는 유복친
으로 안평대군은 소공 5개월을, 성삼문은 시마 3개월의 상복을 입고 근신
하게 되었다.

성승 역시 당숙인 성억을 위해 소공 5개월의 상복을 입게 되었지만 세종은
7월 1일에 경상도 우도처치사를 제수하여 서부 경상도의 방비를 맡겨 내려
보낸다.

이해 7월 17일부터 세종은 경복궁 서북쪽 공터에 내불당을 짓기 시작하여
뭇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2월 5일에 이를 이룩해 내는데 이
일은 주로 안평대군이 맡아 이루어내었다.

따라서 성삼문은 직집현전의 직책을 맡고 있는 집현전의 중진이었으므로
이를 반대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이 기간동안 서로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였을듯 하나 두사람 사이의 우정이 워낙 깊었던 관계로 오히려 첨예한
대립을 무마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듯하다.

이때 성삼문은 안평대군저에서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등과 함께
"비해당사십팔영"과 그 인문(서문)을 짓는데, 안평대군저인 비해당의
정원에 심어진 기화요초와 비해당의 진풍경을 48수의 시로 읊은 내용과 그
서문이다.

시제로 등장하는 꽃은 모란 배꽃 살구꽃 해당화 자미화 산다 동백 왜철쭉
황등 버드나무 전나무 단풍 대나무 감나무 치자 난초 소나무 사계화 백일홍
금전화 영산홍 석류 국화 오동 작약 장미 옥매 원추리 해바라기 파초 삼색도
옥잠화 등꽃 포도 연꽃 등이며 학과 금계 비둘기 사슴및 인왕산 절에서
들리는 저녁 종소리와 남산에 걸린 맑은 구름도 시제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삼문은 연꽃을 보고 "연송"을 지어 군자 기상을 칭송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아! 연아! 이미 뚫리고 또 곧으니, 군자가 있지 않다면, 어찌 덕을
비교하겠는가.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럽지 않고, 물 속에 있으면서도 젖지 않는구나.

군자가 사는데야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연아! 연아! 깨끗한 벗(정우)이라 이름짓고 싶구나"

자신이 연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송이다.

뿐만 아니라 "송죽설월송"도 짓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다.

"소나무와 대는 곧고 굳세다.

곧고 굳센 것은 군자가 공경하는 바이다.

달과 눈은 밝고 깨끗하다.

밝고 깨끗한 것은 군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내지방에는 소나무가 없고 기땅에는 대나무가 없으나 군자가 옮기니
지척에 있게 되었다.

여름에 눈이 오지 않고 대낮에 달이 뜨지 않으나 군자가 있으니 시절이
없구나"

곧 군자는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고 굳센 절개와 눈과 달의 밝고 깨끗한
성정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런 군자가 있는 곳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눈과 달이 없어도 그들이 갖춘 곧고 굳세고 밝고 깨끗한 덕목으로 말미암아
저들처럼 주변을 정화한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자신을 송죽설월에 비길만한 군자임을 자부한 문장이다.

성삼문다운 기개와 자부가 넘쳐 흐른다.

매죽헌 성삼문 [6]


세종 31년(1449) 기사는 성삼문이 32세 되는 해이다.

이 해에 명의 정통황제, 즉 영종은 환관 왕진의 꾀임에 빠져 달단의
와랄야선을 친정하러 갔다가 8월 15일에 대동부근 토목보에서 포로가 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서 9월 6일에는 아우인 성친왕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경태황제
대종(혹은 경종)이다.

명나라는 대국의 체면도 체면이려니와 혹시 조선이 달단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에 조선에 이 사실을 가능한한
숨기려 하였지만 사신의 내왕으로 이 사실이 탄로나자 오히려 9월
9일에는 요동지휘 왕무를 사신으로 보내어 10만 군사의 출병을 요구하는
선수를 친다.

이에 세종은 9월 19일 중국어에 능한 한성부윤(정2품) 김하(?~1462)를
정사로 삼아 사은사의 명목으로 명에 파견하여 왜인과 야인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므로 파병이 어렵다는 사실을 통보하는데, 이 김하가 바로
성삼문의 처숙부였다.



명으로서는 애초에 파병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므로 조선의 제의를 쉽게
받아들여 세종32년(1450) 1월 13일 김하가 귀국하는 편에 전마 2만~3만 필로
대신하라는 조건으로 파병 요청을 철회한다는 칙서를 보낸다.


말 2만~3만필이라는 것도 지나친 요구였으므로 결국 세종은 말 5천필을
보내주는 선에서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세종32년 윤1월 1일에
한림학사 예겸과 형과급사중 사마순을 사신으로 보내어 신황제의 등극을
알리게 된다.

과거에는 대체로 본국 출신 환관들이 사신이 되어 왔었는데 이번에는
학식있는 선비들을 봉조사로 삼아 파견한 것이다.

조선을 예우한다는 사실을 표방하기 위해서 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김하와 공조판서 윤형(1388~1453)을 사신 접대역인
관반으로 삼고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 가장 박학하고 시문에 능한 성삼문과
신숙주를 발탁하여 이들과 학문으로 교유하게 하였다.

이에 33세의 직집현전(종3품) 성삼문과 34세의 집현전 응교(정4품)
신숙주가 이들 두 사신들과 매일같이 어울리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주고
받게 되었다.

불과 20여일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예겸은 성삼문의
풍부한 학식과 잘 생긴 용모에 반하고 충직하고 정의로운 성품과 호탕한
기개에 이끌려 그와 마음을 허락하는 친구로 사귀게 된다.

그래서 압록강까지 따라와 전별하는 성삼문에게 이런 애절한 이별시를
남기게 된다.

"바다 밖에서 서로 만나 곧 친구가 되니, 잔치하고 놀면서 담소하다가
매번 때를 넘겼지.

한가지 마음으로 즐겨 금란계(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은
쇠를 끊을 만하고 그 향기는 난초와 같다는 "주이"계사에서 유래한 말로
마음을 같이하는 친구 사이를 일컫는다)맺고, 함께 마시며 그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지나치게 사랑하였네.

감히 양웅(한의 대학자로 박학다식하였다)이 글자를 많이 안다 말하겠는가.

자우(공자 제자인 담대 멸명의 자, 의리에는 응하나 위협에는 불응하는
기개를 과시하는 말을 남겼다)가 말 잘하던 것도 잘 알고 있지.

강가에서 소매 나눠 떠나지 못해, 동풍에 말고삐 조이면서 이별을 원망만
하네"

성삼문이 화답한 송별시는 다음과 같다.

"서로 알던 그날 마음으로 아는 것 기뻐했는데, 이별 후에 상사는 얼마나
할까.

학령의 구름이 차가워져서 납설(동지후 제3의 술일인 랍일 전후에 내리는
눈, 즉 섣달 그믐께 내리는 눈)되더니, 압록강 물결은 이미 푸르러 봄
모습일세.

비단주머니 비게 되면 해노가 주워담고(당나라 이하가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지으면 해노가 비단주머니를 가지고 따라다니다 이를 주워담았다는
옛얘기가 있다), 말술은원래 번쾌(한 고조의 공신, 천하장사로 무예가
뛰어나고 술을 잘 마셨다)가 사양하지 않았네.

천리 밖에서 공을 보내는 오늘의 마음, 남포의 한잔 술로 차마 헤어져
나눠가겠나"

예겸이 윤정월 초하루에 서울에 왔다가 같은 달 20일에 서울을 떠났으니
성삼문이 예겸을 압록강까지 배웅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봄빛이 완연한
2월 초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는 2월 14일에 병마에
시달리던 세종대왕이 격무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서 2월 17일에 승하하고
만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자신들을 키워온 세종대왕을 잃게 된 집현전 학사들의
슬픔이야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성녕대군의 처가 집안으로
안평대군과 교분이 두터워 세종의 사랑이 남달랐던 성삼문의 경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애통을 감내해야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세종 못지않게 자신을 사랑하던 왕세자가 즉위하니
성삼문의 신상에는 큰 변화가 없게 된다.

오히려 새로 등극한 문종이 세종보다도 더 성삼문을 극진히 아껴 즉위년
9월 18일에 신정을 베풀면서 의정부와 이조 병조 및 승정원의 수뇌들로
하여금 승진시킬 인물을 천거하라 하였는데 성삼문의 이름이 빠져있자
도승지 이계전을 불러 "승진시킬만한 사람 중에 어찌 성삼문이 없는가"라고
힐책할 정도였다.

이에 이계전이 "성삼문이 쓸모 있는 사람이기는 하나 근일에 동료 박팽년
등이 항론상소할 때 그 말이 간절함을 꺼려서 핑계 대고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지사기풍이 없다하여 여러 사람이 이를 그르게 여기므로
빼었다"고 대답하자 문종은 "박팽년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고 성삼문이
상소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 옳은 일인데 어찌 이 일로써 그르게 여길 수가
있는가"라고 단호하게 성삼문을 옹호하고 나섰었다.

그래서 문종 원년(1451) 신미년부터는 국왕과 학문을 토론하며 정책을
의논하는 자리인 경연에 성삼문이 검토관의 자격으로 항상 참여하여 중요
정책 결정에 많은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이때 성삼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러나 다음해 문종2년(1452) 임신 5월 14일에 문종이 불과 39세의 젊은
나이로 오랫동안 앓아왔던 등창이 도져서 승하하고 마니 5월 18일에 겨우
12세밖에 안된 왕세자가 보위에 오른다.

지난 겨울에 문종은 병세가 위독해짐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촛불을 밝혀두고 토론하다가 밤이 깊자
무릎 아래에 세자를 불러다 놓고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고 한 다음 술을 내리는데 어탑에서 내려와 평좌에
앉아서 먼저 술잔을 들어 모두 한잔씩 권하였었다.

이 자리에는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 모두 함께 있었으며 이들이
취해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자 문종은 환관들에게 문짝을 떼어 담가를
만들어 차례로 실어다가 집현전 입직청에 뉘어놓도록 하였다.

이날밤 마침 큰눈이 내렸는데 여러 사람이 깨어보니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온몸에 담비가죽 이불이 덮여 있었다.

문종이 손수 덮어준 것들이었다.

이를 깨달은 여러 학사들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남다른 은혜에 보답하기를
맹세했다고 한다.

"성근보선생집" 권3)

그래서 성삼문은 안평대군과 더불어 김종서를 도와 어린 왕의 보위를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단종 즉위년(1452)에 성삼문 집안에 뜻밖의 재앙이 닥쳤다.

지난해 8월 6일에 문종이 성승을 판의주목사(정3품)를 제수하여 의주를
다스리게 하였었는데 이해 8월 14일에 성승을 따라 내려간 군관인
오자경이란 자가 국상중 임에도 불구하고 관비를 간음하다가 아전인
김사염에게 발각당하자 오자경은 무안풀이로 도리어 김사염이 관비를 때리고
꾸짖었다고 성승에게 무고하였다.

사실을 모르는 성승은 군관의 말만 듣고 김사염을 매로 다스렸는데
6일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성승은 이 죄로 고신과 과전을 박탈당하는 벌을 받고 벼슬에서
떨려난다.

그러자 안평대군이 8월 21일에 성삼문 집을 찾아가서 술을 마시며 성승을
위로하고 임금께 아뢰어 이를 모두 돌려주게 하겠다고 말하였었다고 한다.

수양대군 일파가 성삼문과 안평대군과의 밀착된 관계를 과장하기
위해 "단종실록" 권2 단종 즉위년 8월 신사조에 기록해 놓은 내용이다.

여기서 안평대군은 이런 말도 하였다고 한다.

"혹시 변이 있으면 성승은 마땅히 나의 말 앞에 설 자이다"

안평대군의 주선 때문이었던지 다음해인 단종 원년(1453) 10월 2일에
성승은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로 제수되어 충청도 해미로 내려간다.

이 보다 앞선 4월 10일에 성삼문은 집현전 직제학(정3품 당하관)으로
승진하는데 이로부터 경연에서 시독관이나 시강관을 겸하게 되어 국정에
깊이 관여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을 비롯해서 김종서나 성삼문 등은 모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군자들이었다.

그러니 왕법을 물샐틈 없이 지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대권을 탈취할 야심을 가지고 시정의 무뢰배들을
끌어들여 인륜 도덕을 도외시하고 으레 전장이나 왕법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니,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단종 원년(1453) 계유 10월 10일에는 수양대군이 늦저녁에 좌의정
김종서집을 찾아가 거짓으로 김종서를 유인해내어 데리고간 무사로 하여금
철퇴로 때려죽이게 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어린 왕을 보호하던 의정부와
조정 요로의 중신들을 차례로 왕명으로 불러다가 살해하면서 거꾸로
안평대군이 모반하려 한다고 뒤집어 씌워 안평대군을 10월 18일 교동에서
사사하고 만다.

이때 안평대군의 나이 36세였으니 동갑인 성삼문도 36세 때의 일이었다.


매죽헌 성삼문 [7]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던 날 성삼문의 재당고모인 양모
창녕 성씨와 함께 성녕대군저에 있다가 수양이 보낸 삼군 진무 최사기와
의금부 도사 신선경이 거느리고 들이닥친 백명 군사에게 영문도 모른채
잡히게 되었으니, 안평대군이 진정 역모를 꾀했다면 성삼문도 당연히 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어야 한다.

동갑나기로 이 성녕대군저에서 수시로 함께 뛰놀며 자라나 항상 그림자
처럼 서로 따르며 지금껏 뜻을 같이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성삼문을 처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10월 15일 논공행상에서 정난공신
3등으로 녹훈까지 한다.

정변에 적극 가담하였었던 신숙주를 2등으로 녹훈한 것에 비교하면 뜻밖의
대우였다.

성삼문의 재주와 학식을 아끼어 그를 회유해 들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안평대군과 가장 절친했던 그를 끌어들여 안평대군의 모반을 사실로 인정
하게 하려는 음모도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성삼문은 안평대군과 함께 죽음을 택할 것이냐, 이들의 회유에 순응하는
척하고 있다가 후일을 기약할 것이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였다.

이미 현재의 사세로는 안평대군의 목숨을 지켜줄 도리가 없음을 간파한
그는 차라리 어린 임금을 보호하여 뒷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삶이지만 삶의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한명회를 비롯하여 수양 편에 선 집현전
학사 출신 모사들인 정인지 최항 신숙주 등은 집현전 직제학 성삼문을
사간원 우사간(종3품)으로 즉일 임명하여 안평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에
적극 참여하게 한다.

나이도 같고 아름다운 용모도 비슷하며 학문과 예술에 타고난 재주도
같아서 어려서부터 의기투합하여 한쌍의 벽옥처럼 서로 따르며 아끼던
지기지음을 역적의 괴수로 몰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으니 성삼문의 심정은 죽음보다 더 참담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10월 17일에 우사간으로 처음 상소하기를 안평대군에게 병기를
실어 보냈다는 이경유와 함경감사 김문기, 도사 권수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고 하여 병기를 실어 보냈을리 없는 무옥을 밝혀 안평대군의 목숨을
구해보려 한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반드시 죽이려 작정하였으니 이런 상소가
용납될 턱이 없다.

오히려 그 시행을 서두르게 하여 10월 18일에 좌의정 정인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안평대군과 그의 장자 이우직의 죄를 결단하라고 어린 왕에게
강청한다.

이에 어린 왕은 억지로 그 청에 따라 의금부 진무 이순백을 강화로 보내어
안평대군을 사사하고 이우직은 진도로 옮긴다.

이 상소에 성삼문도 우사간의 자격으로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자 이 날로 이들은 공신들을 포상하는 계문을 지어 바치게 하여 논공
행상을 시행하고자 하니 드디어 11월 4일에는 성삼문도 정난공신 3등에
들어 다른 3등공신과 함께 다음과 같은 포상을 받게 된다.

"정난 3등공신이라 일컬으며, 전각을 세워 초상을 그려 붙이고,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록하며 부모와 처는 일등을 올려 봉하고 직계자식이 없는 이는
생질이나 사위에게 음직을 주고 밭 1백결과 노비 7구 구사(공신이나 종친이
본인 일생동안만 부리다가 사후 3년만에 반납하는 지방의 관노비) 3명,
반당(공신이나 종친이 본인 일생동안만 부리는 병졸, 사후 3년만에 병조에
반납해야 함) 6인을 주며, 적장자가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고, 자손은
정안에 정난공신 아무의 후예라 기록하여 비록 죄를 범한게 있더라도 용서
하는 것이 영세에 미치리라"

평생지기의 죽음을 재촉한 대가 치고는 너무나 하찮은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안평대군의 양모인 재당고모 성씨가 안평대군의 구명을 위해 진력하다가
저들의 눈밖에 나서 모자 상간하였다는 추악한 누명을 쓰고 안평대군의
모반죄에 연좌되어 처벌되는데 있어서 그를 위해 변명 한마디 거들지 못하고
처벌하자는 의견에 묵묵히 동조해야만 했으니!

그래서 안평대군의 양모인 제안부인 성씨는 10월 23일 경주에 안치되고
그의 집과 재산은 모두 국가에 몰수되고 만다.

다시 11월 8일에는 정난공신을 비롯하여 대소 관료들의 벼슬을 높여주는데
이는 정변으로 조정 중신들이 많이 피살되어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논공행상을 겸해서 자리를 보충하는 수양대군 체제의 대규모 인사개편이었다.

여기서 성삼문은 수충정난공신 사간원 좌사간(정3품 당하관)으로 한등급이
오르고 성승은 충청도 병마도절제사(종2품)가 되어 본래의 벼슬을 되찾는다.

성삼문은 11월 14일 경연에 참석하였다가 경연관이 진강을 마치자 임금이
유충하다고 해서 궁중에 깊이 거처하여 여러 신하들을 한번도 접견하지
않으면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매월 초하루와 16일마다 백의를 입고(상중
이기 때문에) 근정문에 나와서 신하들의 조참을 받으라고 아뢴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신하들과 면대하지 못하도록 궁중에 유폐하다시피
가두어 두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옛날에 주공이 성왕을 업고 제후의 조회를 받은 것은 천하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바입니다"라고 시작한 말의 허두에서 주공을 자처하며
어린 왕을 농락하는 수양대군에 대한 경고가 강하게 감지된다.

대신과 의논해보겠노라는 나약한 대답이 나오자 경연이 파하면 경연관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사다나 대화를 함께 하는 사좌의 예가 있는 것이니 이를
실행하여 경연관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 대할 것을 청한다.

수양대군의 전횡을 방지해서 왕권을 지키려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1월 18일에는 환관 엄자치와 전균을 정난공신 2등으로 녹훈하여
각각 영성군과 강천군으로 봉군한 것이 예법에 어긋나니 이를 철회하라고
계청한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정난공신 중에 공이 없는
자들이 많이 섞여 있으니 이들을 가려내어 삭훈해야 한다는 상소를 같은
날 다시 올린다.

이에 다음날인 11월 19일에 좌의정 정인지를 비롯한 많은 정난공신들이
피혐하여 공신호를 삭제해 주기를 청하자 성삼문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삭호를 간청한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자 같은 날 대사헌 권준과 함께 다시 한번 간절하게
공신호를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는다.

그래서 11월 24일에 성삼문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를 올린다.

"신은 본디 어리석고 지식도 없으면서 한갓 문필을 다루는 말예로
오랫동안 맑고 빛나는 직책을 맡아 왔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심에 미쳐서는 경연에서 모시게 되었지만 한 자의 도움도
드리지 못해 대죄를 해가 넘게 하고 있는데 어찌 정난때 공로와 능력이 없는
신으로서 외람되게 훈맹에 참여하리라 생각했겠습니까.

이어서 사간으로 발탁하니 신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편안치 못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으나 다만 조정이 신의 말로써 나가고 물러나고 하게 하지
않는 까닭에 공신을 사면하지 못하고 억지로 직무에 나아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간관은 위로는 임금의 잘잘못을 말하고 아래로는
대신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므로, 자신의 결함이 조금도 없어서
남이 비난하여 의논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면 하루도 이 직임에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어찌 신과 같이 용렬하고 유약한 자가 외람되게 그 직책을 도적질 할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은 권간이 흐려놓은 이후에 새 정치를 다시 펼치는 날이라
또 말해야 할 일이 많을 터인데 신은 멍청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니 이는
신의 사람됨이 심히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한두가지 관견으로 진달하였으나 조정이 쓰지 않았으니 족히 쓸
수 없어서 였을 것입니다.

이는 신의 직책에 이바지함이 또 신통치 않아서 였습니다.

하물며 신은 한치의 공로도 없이 외람되게 훈상을 받아서 속으로 불안한데
어느 겨를에 남의 시비와 득실을 말하겠습니까.

근일에 대간(사간원)에서 낭리(육조의 정낭,좌낭)들 품계 올리는 일의
잘못을 말하였으나 신은 한마디 말도 내놓지 않았고, 또 내시 봉군의 불가를
논박하였으나 신은 애초에 서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두려워 주눅들어서가 아니라 안으로 부족해서 였습니다.

신이 이 일에 있어서 말하고자 하면 혐의가 닥칠 것이고 말하지 않으려
하면 직무를 버리게 되니 밖으로는 물의가 두렵고 안으로는 동료들에게
부끄럽습니다.

하물며 대간은 한 몸인데 이제 대간이 공신의 등제가 편치 못하다고
논박하니 신은 얼굴들고 재직하며 떳떳하게 다닐 수 없습니다.

신의 이 말은 실로 마음속에서 나왔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직임을
파하고 어질고 능한 이로 대신하게 하십시오"

이 상소 내용으로 보면 실록 기사에 우사간 또는 좌사간 성삼문 등이 상소
했다는 내용이 거의 성삼문의 서명을 거치지 않은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저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삼문의 이름을 빌려 상소하게
함으로써 마치 성삼문이 그 일을 주장한 것처럼 꾸며서 처단하곤 했던
것이다.

안평대군을 죽이자는 것도, 안평대군의 양모이자 성삼문의 재당고모인
제안부인 창녕 성씨를 처벌하자는 것도 모두 그런 음모의 소산이었다.

성삼문이 참다 못하여 사훈과 사직을 핑계삼아 이런 상소들이 모두 자신의
본뜻이 아니었음을 상소로 밝히자 저들은 다음날인 11월 25일 임금으로
하여금 성삼문을 불러 사직소를 돌려주게 한 다음 11월 26일에는 좌사간
성삼문 등의 이름으로 안평대군의 유일한 혈육인 장자 이우직을 죽이고
김종서 당여로 몰려 귀양가 있는 전 우의정 정분, 전 이조판서 허후등
수많은 충의지사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엄청난 상소를 올린다.

이우직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수악의 자식이라는 것과 임금과 동갑이라는
것이다.

세종 당년에 한해에 두 손자가 탄생하여 얼마나 경사스러워 하였었던
일인데!

수양대군은 보위를 탐하여 아우를 죽인 다음 그 조카마저 죽이려고 이런
참혹한 음모를 진행해 가고 있었다.

성삼문은 그 음모에서 벗어나 보려다 오히려 되로 주고 섬으로 받는 참담한
결과를 맞는다.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자식과 다름 없는 안평대군의 혈육인 이우직과 과거의
동지들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진퇴양난의 지경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었겠는가
매죽헌 성삼문 [8]


수양대군은 문종의 대상이 끝나자 대권 탈취의 행보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해간다.

단종 2년(1454) 5월 21일부터 개국이래의 4종 공신들과 종친들로 하여금
14세밖에 안 된 국왕에게 헌수연을 올린다는 명목으로 연일 연회를 열어
국왕의 얼을 빼고, 6월 2일에는 왕비 송씨의 부친 송현수에게 지돈녕부사
(정2품)를 제수하여 무려 4품을 일시에 뛰어넘게 하는 한편 5월 22일에는
왕비 송씨의 유모에게 역적으로 몰아죽인 전 충청감사 안완경의 첩의 집을
하사하여 송씨일가를 감격하게 한다.

뒤이어 6월 8일에는 왕의 외조부 권전에게 영의정 화산부원군을 추증한
다음 6월 27일에는 왕비의 조부 송복원을 공조참의에 제수한다.

이날 성삼문도 집현전 부제학으로 승진한다.

7월 16일에는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의식을 치르는
데 이때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정3품 당상)의 자격으로 당상집례관이 되어
이 의식에 참여하고 7월 18일에 그 공으로 비단 한필을 상으로 받는다.



그리고 8월 5일에는 다시 성삼문을 예조참의(정3품)로 옮겨놓는데, 추석날
태조 건원릉과 문종 현릉이 있는 현재의 동구릉으로 추석 제사를 지내러
갔다 오는 도중 중랑포에 이르러서 수양은 지난해 11월 26일 좌사간 성삼문
으로 하여금 처단하기를 청하게 하였던 안평대군의 장자 이우직과 황보인의
손자 황보가마, 김종서의 서자 목대, 김승규의 아들 조동 수동, 정효강,
정분, 조순생 등을 사사하라는 교지를 내리게 한다.

반대세력을 뿌리뽑아가려는 첫번째 시도였다.

이렇게 안평대군의 당여로 몰아 세종과 문종이 길러놓은 충의열사들을
멸족시킨 다음 수양은 단종 측근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그의 보호세력마저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8월 28일에 세종의 둘째 서왕자 계양군 증(1427~64)과 첫째 서왕녀 부마인
영천위 윤사로(1423~57)로 하여금 제6 대군인 금성대군 유(1426~57)가
세종대왕의 제1 서왕자인 화의군 영과 함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하게 한다.

이는 장차 세종과 문종의 특명을 받아 궁중의 내정을 총괄하고 있는
세종후궁 혜빈 양씨를 비롯한 궁정내의 단종 보호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의 시작이었다.

계양군의 생모는 신빈 김씨인데 원래는 내자시의 종이었다.

세종의 눈에 띄어 궁인이 된 다음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등 5왕자를 생산하여 봉빈하기에 이르렀지만 워낙 출신이 미천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소생 왕자들은 항상 불만이
많았었다.

그래서 이들 신빈 소생 왕자들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려는 수양편에 서서
적극 그를 돕는다.

윤사로 역시 그 부인 정현옹주가 출신이 미천한 상침(정6품) 송씨의
소생이었기에 함께 수양편에 섰던 것이다.

수양은 이런 왕실내의 불만세력들을 규합하여 단종의 보호세력에 대항하게
하는 한편 어린 단종으로 하여금 방탕하게 하려는 계책을 세워 사냥이나
활쏘기에 정신이 팔리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9월 1일에 태종 헌릉과 세종 영릉이 있는 대모산에 갔다 오다가
살곶이들에서 사냥을 하고 다음날인 9월 2일에는 서현정과 경회루 아래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9월 18일에는 광나루 아차산에서 사냥한다.

9월 28일에는 다시 모후인 현덕왕후의 소릉에 제사지내러 가면서 시위
군사들로 하여금 계속 사냥을 하게 하고, 10월 1일 소릉 제사를 끝내고
헌릉과 영릉을 들러오면서 수리산, 청계산에서 계속 사냥을 하다가 10월
3일 밤늦게야 환궁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10월 16일에 아차산으로 사냥구경을 나가겠다고 하자,
보다 못한 사간원에서 10월 14일에 어린 군왕이 자주 사냥다니는 것은 옳지
못하니 중지하라고 계청한다.

단종은 생각해보겠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수양이 의정부 사인 황효원
(1414~81)을 보내어 아뢰기를 정사를 보는 일이 지극히 번거로우니 하루에
세번 경연에 나가는 것은 몸을 피로하게 하므로 주강(낮 강의)을 없애자고
청하게 하며 사간원의 죄를 열거하며 그 관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게 한다.

경연에 열심히 나와 학업에 열중해야 한다고 간한 사간원을 역공하여
국왕이 학업을 소홀히 하고 사냥에나 정신팔리는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부추기는 처사였다.

아무리 어린 나이인들 단종이 어찌 수양의 음흉한 내심을 짐작하지
못하였겠는가.

그래서 11월 24일 동지 행사를 치르면서 수양을 비롯한 공신들의 발호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11월 25일 자미당에 나아가 세종이 앉았던 어탑을
보고 탄식하기를 "세종이 세상에 계셨다면 내가 사랑받는 것이 어찌
적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곁에서 이 소리를 들은 시종신들은 모두 눈물을 삼켰다고 하는데 수양
부부도 슬피 우는척 하였던 모양이다.

수양은 궁중의 내정을 장악하기 위해 왕비 송씨일가에게 더욱 은전을
베풀어나가니 왕비의 부친인 송현수를 12월 2일에 다시 판돈령부사(종1품)로
승진시키고, 12월 23일에는 왕비 송씨로 하여금 그 친정 고모댁인 영응대군
저에 가서 부모에게 헌수하는 연회를 베풀게 한다.

이 연회에는 수양대군 부부를 비롯한 왕실 지친과 송씨의 조부모와 부모
및 사촌 이내의 형제들이 참석하고 도승지 신숙주가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수양이 왕비 친족을 제압하고 있는 사실을 중외에 선전하려는 계략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단종 3년(1455) 을해 정월 14일에 "수양대군이 군병을 거느리고
장차 백성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거나 수양이 장차 임금에게 불리하리라는
소문이 도는데, 이는 반역 도당들이 꾸며낸 얘기이며 수양은 주공과 같은
인물이니 떠도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요지의 교서를 내린다.

이미 이 해에 수양이 왕권을 탈취하리라는 소문이 세상에 떠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월 20일에는 수양의 큰딸을 둘째 아들 현조의
처로 맞이하여 수양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좌의정 정인지가 23일에 자신의
집에서 공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연다는 사실을 아뢰고, 도승지 신숙주는
술과 음악을 내려보내주자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에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정난공신을 불러 잔치하고
공신 하나하나에게 정난의 공을 치하하며 포상하는 내용의 교서를 내려주게
한다.

여기에 성삼문에게 내린 교서도 있다.

"추충정난공신 통정대부 예조참의 성삼문에게 하교하여 이른다.

참모 협조하여 난을 평정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고,
공훈을 기록하여 갚는 것은 제왕이 뒷사람을 권면하는 법전이다.

다만 너는 삼한의 우족(명족)이며 일대의 명유로 중시에 으뜸으로 뽑히어
영예가 더욱 드러났었고, 임금곁에 가까이 모시어 오랫동안 조칙을 맡았었는
데 항상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정성을 품고 매양 곧은 의논을 드리었었다.

근자에 지친 이용이 간신 황보인, 김종서, 이양, 민신, 조극관 등과
결탁하고 가만히 불궤를 도모하여 음모가 이미 이루어지니 화가 호흡간에
있었는데, 숙부 수양대군이 기밀을 밝히고 먼저 도모하여 흉당이 죄를 받고
죽게 되었다.

너는 왕명을 듣고 난에 다다라 같은 마음으로 협찬하여 종사에 공이
있으니 감히 대려(황하가 띠처럼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지는 영원한
세월동안에도 변치 않는 맹세)의 맹세를 잊겠는가!

이에 공훈을 기록하여 3등으로 하고 그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주며 죄를
사면하는 것이 영원히 후세에 미치게 하겠다.

이어서 밭 1백결, 노비 7명, 말 1필, 백은 10량, 표리 한벌을 주노니
이르면 받도록 하라.

아아! 가만히 큰 계책을 도와 이미 세상에 없는 공을 세웠으니, 특수한
공을 크게 보답하려면 의당 비상한 은총을 더해야 하리라"

성삼문은 수양 일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이 교서를 받고 단종에게
위험이 박두한 사실을 감지했겠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월 25일에는 국왕이 수양대군의 저택에 가서 위로연을
베풀겠다는 뜻을 승정원에 전하니 도승지 신숙주는 송태조가 조보의 집에
갔었던 고사와 조선 태조가 의안대군 화의 집에 갔었던 고사를 이끌어 이를
적극 권유한다.

조보와 의안대군이 어디 권신들이었더란 말인가!

신숙주의 간휼함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수양은 그를 도승지로 국왕곁에 있으면서 대권을 내놓도록
유도하는 책임을 맡겼을 것이다.

드디어 2월 4일 국왕 부부는 수양대군저로 가서 종친들과 정난공신을
모두 불러 먹이는 위로연을 베풀고 수양 일가에게 많은 선물을 내린 다음
환궁하는데 이것이 단종이 차렸던 최후의 만찬이기라도 하듯이 다음날인
2월 5일부터 단종의 측근을 쓸어내는 작업이 시작된다.

사헌부 장령 이승소(1422~84)가 상소를 올려 "왕비가 들어왔으니 선왕
후궁은 출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선왕 후궁이란 세종과 문종의
특명으로 단종을 탄생 다음날 그 모후가 돌아간 직후부터 양육해온 상궁
박씨를 지칭한 것이었다.

단종에게는 친어머니와 다름없는 이로 이제 14세밖에 안된 단종에게는
왕비보다 더 필요한 존재였다.

이에 단종은 선왕 유교를 내세우며 내보낼 수 없다고 버틴다.

그러자 수양은 기다렸다는듯 2월 27일에 단종을 보호하고 있는 금성대군과
화의군의 죄를 얽어 고신을 거두거나 귀양보내고, 환관 엄자치 등이 국정에
간여했다 하여 단종측근의 환관들 수십명과 함께 모두 고향으로 쫓아내
버리자고 아뢴다.

엄자치는 세종이 가장 신임하던 환관으로 단종을 친손자와 같이 생각하는
인물이니 그를 살려두고서는 대권 탈취가 불가능할 터이므로 이와같이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어 단종으로부터 일단 격리시키고자 한 것이다.

단종으로서도 이 일만은 결코 저들의 뜻에 선뜻 따를 수 없었다.

출처 : 盡人事待天命 (대한민국 명장 : 성광호)
글쓴이 : 성광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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