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물이 유난히도 희게 보여 ‘백수동(白水洞)’ 우리마을탐방[183]풍기읍 백신2리 ‘백수’
200년 전 경주김씨가 터 잡은 우이동(牛耳洞)
풍기읍 백수동 가는 길
백수동의 역사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순흥부에 속해 있던 창락면이 풍기군으로 이관됐다. 이 때 창락면 백수동(白水洞)이 정식 행정구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 할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풍기군 창락면을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시켰다. 이 때 백수동과 신기동이 통합됐는데, 백수동의 백(白)자와 신기동의 신(新)자를 조합하여 ‘백신동’이라 이름 지었다. 통합된 백신동은 일제 때 1,2리로 분리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병용(60) 이장은 “백신2리는 웃마을(백수동), 아랫마을(우이실), 바깥마을(굴밖)로 구분한다”며 “예전에는 80여 세대에 400명 이상 살았으나, 지금은 48세대에 104명이 살고 있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많은 편이고, 대부분(100%) 사과를 주 농업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명유래 굴다리 안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우이실’이라 한다.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이 소의 귀를 닮았다 하여 우이실(牛耳室)이라 부른다. 또 백수동 뒤쪽 마을을 ‘작두막골’이라 하는데 주변 형세가 작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우이실 앞들을 ‘마우(馬牛)들’이라 부른다. (조선 때) 창락역이 있을 당시 마장(馬場)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우이실의 전설 우이실 김주식(69) 씨는 “우이실 경주김가는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해방(1945년) 전까지 1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면서 “산업화 이후 모두 도시로 떠나고 지금은 3가구만 남았다. 현재 전국 각지에 후손 150여세대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백수마을의 형성 홍영관(77) 노인회장은 “저의 경우 조부님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백수마을에 정착하신지 100년이 넘었다”면서 “지금 여기 사시는 분이나 미리 사셨던 선대 어르신들 이야기로는 우이실이 제일 먼저 생기고 난 다음에 작두막골이 생겼고, 이어서 백수동이 생겼다고 들었다. 그래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50년경부터 마을 형성이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작두막골 이야기 예전에 이곳에 살았다는 임영택(88) 어르신은 “이곳은 화전민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라며 “1850년경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초가삼간 토담집을 짓고, 원시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 예전에는 12가구가 살다가 6가구가 남았는데 6.25 전 빨갱이들의 출현이 빈번해지자 마지막 남은 6가구도 백수동으로 소개되어 마을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당도높은 백수사과 김창섭(65,사과발전연구회) 씨는 “백수동 사과의 시작은 ‘1960년대 초부터’라고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번성하여, 본격적인 생산과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라며 “현재 마을에서 1만평 이상 대농을 하는 농가도 3집이나 된다”고 말했다. 은장도 명인 김희동 서영길 노인회총무는 “은장도(銀粧刀)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죽음과 바꿀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한복 속에 간직하던 순결의 상징”이라며 “은장도 대장간이 마을 앞 국도변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 포장공사로 흔적이 없어졌다. 대를 이어온 은장도 대장간은 1896년 창락역(찰방역)이 폐쇄될 때까지 ‘말발굽의 징’ 등 철물을 창락역에 납품했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백수마을 사람들 45세(1975)부터 59세(1989)까지 14년동안 동장직을 수행했다는 임영택 어르신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도로변에서 마을까지 슬레트를 지게로 져 올렸다”며 “당시는 길이 지게길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홍영관 노인회장은 “추수할 때 마우들에서 마을까지 지게로 하루 여섯 짐 지고나면 해가 저물었다”고 말했다.
이동우(81)·이분년(82) 부부는 40여 년 전 살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으로 오게 됐다면서 “강원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는데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게 첫째 이유”라며 “백수동은 인심 좋은 마을로, 마을사람들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낸다”고 말했다. 이산면 용암대에 살다가 백수동으로 시집왔다는 임옥순(90) 할머니는 “당시 우이실에는 초가집 10여 채 있었다”며 “이곳에 와보니 일꾼 두고 농사를 짓는 부잣집이 여러 집 있었으며, 보릿고개 때도 쌀밥 먹고 사는 부자마을 이었다”고 말했다. 동부동 소전거리에서 태어나 19살 때 가마타고 백수동으로 시집왔다는 박상희(88) 할머니는 “새댁시절 하루종일 샘물 여다 먹는 게 큰 일 이었다”며 “마을 동편 계곡물에서 빨래를 하고, 김장 배추를 절이고 씻을 때도 계곡에서 했다”고 말했다.
박순자(81) 할머니는 “인심 좋고 화목한 마을이 된 것은 이장님과 노인회장님께서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라며 “김병용 이장님과 홍영관 노인회장님의 봉사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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