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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기 지명이야기

강나루터 2018. 3. 3. 09:19

교촌리

 

향교마․향교촌․교촌리


풍기향교 주변에 큰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향교 옆에 있다 하여 ‘향교마’라 불러오고 있다.

 

풍기향교 양심문

 

조선시대 향교는 선비들이 공부하는 곳이기도 하였는데, 인근 동양대학교 학생들이 이 마을에 하숙을 하고 있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생들로 북적대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정림사(井林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정림촌(井林村, 亭林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등두들․등고(登皐)․등구(登邱)

 

향교마을에서 금계천 개울을 건너 약 400m쯤 가면 왼쪽 언덕 위에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등두들’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언덕 위로 오르는 것 같다 하여 ‘등두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숯가매[炭釜] 

 

등두들 북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숯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용미봉(龍尾峰)

 

등두들 마을 뒤편에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가 용(龍) 꼬리 형상이라 하여 ‘용미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잠뱅이들․도롱이들․도릉(桃陵)

 

교촌교 다리 오른편에서 광복동산 방향으로 들판이 있는데, 이 곳을 ‘잠뱅이들’이라 불러오고 있다.

 


진등 

 

잠뱅이재 남쪽의 긴 등성이. 잠뱅이재에서 광복동산으로 이어지는 등성이를 말한다.

 


개보[犬洑]

 

등두들 마을 뒤편 산 아래에 삼가리에서 내려오는 보(洑)가 있는데, 이 보(洑)를 ‘개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이 개울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었는데, 눈이 오는 날 키우던 개가 주인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꼬리에 물을 묻히면서 상류 방향으로 올라가길래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 보니 개가 이끄는 길로 농수로를 만들면 쉽게 물을 댈 수가 있어 보여 이 곳에 보(洑)를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개의 안내를 받아 만든 보라 하여 ‘개보’라 불리어지고 있다.

 

 

금계리

 

 

잿밭[災田]․잣밭[栢田]

 

풍기향교에서 금계중학교 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학교 주변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잿밭’ 이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는 낮은 밭이라는 뜻이다.

 

전해오는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옥룡자금계도(玉龍子金鷄圖)에 의하면, 이 곳을 ‘재밭[災田]’ 이라 불렀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과 의미가 변하고 마을 주변 산기슭에 잣나무가 많다 하여 잣 백자, 밭 전자를 써서 ‘잣밭[栢田]’ 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부계밭․부개밭․부거밭․부용전(芙蓉田)․금계촌(金鷄村)

 

잿밭 마을에서 왼편 농로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들판 한 가운데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부계밭’ 이라 불러오고 있다. 정감록10승지 중 제1승지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전해오는 신라시대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의하면, 이 마을 지세가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의 연꽃이 만발한 밭이라 하여 연꽃 연, 연꽃 용, 밭 전자를 써서 ‘부용전(芙蓉田)’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 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金鷄抱卵形]이라 하여 알을 품을 부ㆍ닭 계자를 써서 ‘부계밭[伏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임실마을 동수
 
임실(任室, 壬實)

 

부계밭 마을에서 서쪽으로 작은 개울 다리를 건너면 산 아래에 큰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임실’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곳에서 아기를 임신하여 낳으면 큰 인물을 얻을 수 있다 하여 아이밸 임ㆍ집 실자를 써서 ‘임실(姙室)’이라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의미가 변하여 ‘임실(任室)’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구향굣골․구교동(舊校洞) 

 

임실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풍기향교가 있었는데 중종 37년(1542)에 교촌리에 옮겼다가 숙종 18년(1692)에 다시 복귀하였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현재의 교촌리로 옮겼다 하여 구향굣골이라 부른다..

 


기생골

 

임실 마을에서 백1리 방향으로 약 100m쯤 가면 오른편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곳을 ‘기생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풍기향교가 옛날 이 곳에 있었다 하여 ‘구향교골’이라 불렀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지명이 변하여 ‘기생골’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자수고개․자시고개․잣수고개[栢樹峴]

 

기생골 입구에서 백1리 방향으로 약 300m쯤 가면 작은 고개가 있는데, 이 곳을 ‘자수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잣나무가 많았다 한다.

 


등왕성(登王城)

 

자수고개에서 풍기상수도배수지가 있는 곳까지 산 능선이 있는 데, 이 능선을 ‘등왕성’이라 불러오고 있다.

 

도선비기에 의하면, 옛날 임실 마을에서 왕비감이 태어나 정씨 성을 가진 왕이 이 곳에 와서 장가를 들어 이 성(城)에 오른다 하여 ‘등왕성(登王城)’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원산, 공원밑

 

영주소방서 풍기119 안전센터 앞에서 중앙선 건널목 건너 산밑 마을 뒤편에 상수도 풍기배수지가 있는 산이 있는데, 이 곳을‘공원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공원산 끝자락 높은 곳을 ‘보평대(保坪坮)’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공원밑’ 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제시대 이 마을 뒤편 산을 풍기공원이라 불러 공원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공원밑’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주들(成主-)

 

공원산밑 마을 뒤편에서 부계밭 마을 방향으로 넓은 들판이 있는데, 이 곳을 ‘성주들’이라 불러오고 있다.

 

도선비기에 의하면, 이 들판이 금계촌에 입주하여 살던 28성씨(姓氏) 중 성씨(成氏)가 주인이었다 하여 ‘성주들’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한다.

 


쇠바리․쇠발이[牛足]

 

금계중학교 왼편 농로를 따라 약 400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쇠발이’라 불러오고 있다.

 

신라시대 도선비기에 의하면, 이 곳을 소발리(小發里)라 불렀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이 변하여‘쇠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 뒷산이 마치 소의 발굽 형상이라 하여‘쇠발이[牛足]’라 불리어지고 있다 한다.

 


용천지(龍川池)

 

쇠발이 마을 뒤편 농로를 따라 약 1km쯤 가면 오른편에 작은 못이 있는데, 이 곳을 ‘용천지, 또는 용천동 못’라 불러오고 있다.

 


질막골

 

용천지 못 입구에서 용천동 마을방향으로 약 200m쯤 가면 수 백년된 느티나무가 있는 오른편에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곳을 ‘질막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어신재

 

질막골 입구에서 용천동 마을방향으로 약 400m쯤 가면 동신당이 있는 마을이 있고, 그 곳에서 오른편 골짜기 너머 삼가리로 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곳을 ‘어신재’라 불러오고 있다.

 


용천동(龍川洞)

 

동신당이 있는 마을에서 오르막으로 약 500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용천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이 곳에 용천사(龍泉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문경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진영(眞影)을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이 곳 용천사로 옮겨 봉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중종 임금 때 군수 임제광(林霽光)이 사당을 중수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자, 당시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다시 사당을 지어 봉안하려다가 이임하게 되자, 선조 9년(1576년)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마전현(麻田縣)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노적봉(露積峰)

 

용천동 마을 앞 남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산봉우리가 마치 곡식을 쌓아놓은 노적가리 형상이라 하여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십승지(十勝地)

 

신라 도선대사의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의하면, 스님이 우리나라 지세를 살피기 위해 7년 동안이나 전국을 누비고 다녔는데, 당시 시중을 들던 제자 신엄(信嚴)이 최고의 명당 터를 물었더니ꡒ소백산 아래 두 강 사이로 돋아 있는 풍기 금계동은 훗날의 안전을 도모할 터이다ꡓ라 하여 전국 십승지 중 제일로 꼽은 곳이라 전해오고 있다.

 


장선이․장생이

 

금계중학교에서 삼가리 방향으로 약 500m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길 왼편에 길게 이어진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장선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 지형이 마치 긴 배(船)와 같다 하여 ‘장선이(長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농바우 

 

장선이 마을 북쪽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농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선대(錦仙臺) 

 

장선이 마을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서, 황준량(黃俊良)이 명명하고 군수 이징계(李徵啓)가 바위에 ꡐ錦仙臺ꡑ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전한다.

 

 
 
금선정과 금양정사
 


금선정(錦仙亭)

 

금계2리 마을회관에서 상류 계곡 방향으로 약 400m쯤 가면 조선 정조 5년 군수 이한일(李漢一)이 높다란 반석 위[錦仙臺]에 세운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를 ‘금선정’이라 불러오고 있다.

 


금양정사(錦陽精舍)

 

금선정 정자에서 서북편 마을 뒷산 중턱에 조선 명종 20년(1565년)에 황준량(黃俊良)이 세운 ‘금양정사(錦陽精舍)’가 있다.

 


독안터

 

금선교 다리를 건너 왼편 농로를 따라 약 800m쯤 가면 순흥면 태장리로 너머 가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곳을 ‘독안터’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서 옹기 독을 굽는 굴이 있었다 하여 ‘독안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풍기북부6회
글쓴이 : 정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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