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차 문화유산답사(5-4); 국립중앙박물관 둘러보기(3-2)
(46)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太子寺 郎空大師 碑] –보물 1877호(2015.04.22)-
통일신라의 國師였던 朗空大師(832~916)의 행적을 기리는 塔碑로 원래 이름은
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이며, 비신 높이 2m, 너비 0.96m이다.
경북 奉化郡 太子寺에 있었으나 廢寺된 후 조선 中宗 때 永川市 永川面으로
옮겼으며, 1918년 景福宮 勤政殿 回廊으로 碑身만 옮겼다가 현 위치로 옮겼으며,
碑身 중간부가 절단된 이외에 상태는 좋다.
碑文의 앞면은 朗空大師의 일생과 업적을 當代 文章家 崔仁渷이 撰하고, 뒷면은
낭공대사의 門下法孫인 釋純白이 後記를 쓰고, 門下僧 端目이 名筆 金生의
行書글씨를 集字하여 승려 숭태, 수규, 청직, 혜초 등이 새겨 光宗 5년(954)에
세운 비이다. (*渷: 물 이름 연)
신라 말 고려 초의 高僧 朗空大師 行寂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비석의 건립과 관련하여
비문의 撰과 集字, 비문을 건립하는데 관여한 인물 등 당시의 사회와 문화상을
고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또한 金生의 글씨를 연구하는데 기본적인 자료로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47) 선조가 쓴 글씨 탑본[宣祖御筆 搨本] (*搨: 베낄 탑)
-宣祖 –조선 1725년 -2002냔 구입
宣祖가 聾巖 李賢輔(1467~1555) 家門에 내린 글씨로 筆劃이 굵으면서도
形과 劃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松雪體를 지향했던 조선 王室의 書風은 글자의 뼈대가
부각되는 양식으로 변화했는데 宣祖의 역할이 컸다.
이와 같은 大字글씨는 名筆로 알려진 딸 貞明公主(1603~1685)의 글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48) ‘지주중류’를 새긴 글씨[砥柱中流碑 搨本]
-조선 1789년 -1916년 입수
‘砥柱中流’는 중국 黃河의 激流에도 우뚝 솟아있다는 砥柱山을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志操와 節槪가 굳은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사
용하였다. (*砥: 숫돌 지)
碑의 앞면 글씨는 중국 福建省에 살던 楊晴川의 글씨이며 뒷면에 새긴 글은
宣祖 때의 文臣 西厓 柳成龍(1542~1607)이 지었다.
西厓의 兄 謙菴 柳雲龍이 仁同縣監으로 부임 한 후 吉再의 忠節을 기리고자
이 내용이 적힌 碑를 세웠다.
*仁同縣: 경북 龜尾市 仁同洞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통일신라 이래 행정구역.
*西厓 柳成龍이 지은 비석 뒷면의 내용
-前 略-
뜻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은 取하고 버리는 분수를 마음 속에 미리 자세히 살펴
확고하게 움직이지 않게 하기 때문에 富貴와 貧賤, 威武가 능히 흔들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자 하는 것이다.
(49) ‘백세청풍’을 새긴 글씨[百世淸風碑 搨本]
‘百世淸風’은 ‘百世의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본래 의미는 <孟子>에서 비롯되었다.
孟子는 “聖人은 百世의 스승이니 伯夷와 柳下惠가 이런 분이다. 伯夷의 風度를
들으면 둔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우게 되며, 柳下惠의 풍도를
들으면 각박한 자는 敦厚해지고 鄙陋한 자는 寬大해진다.”고 했고,
“백이는 성자 중에 가장 淸節한 자이다.”라고 하여 백이를 청절한 인물로
공경하였다. (*鄙: 더러울 비 *陋: 더러울 루)
朱子(1130~1200)는 伯夷를 사모하여 首陽山 夷齊廟에 ‘百世淸風’의 네 글자를 썼다고
하며, 이 글자의 탑본이 朝鮮에 전해지면서 여러 곳에 百世淸風의 비석을 새겼다.
이 글씨는 吉再의 淸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錦山의 淸風書院의 碑에 있는
탑본으로 특이하고 힘이 넘친다.
(50) 김홍도 글씨첩[金弘道 筆 書畵帖]
-金弘道 –조선 18~19세기 -1914년 구입
檀園 金弘道의 글씨를 그의 아들 金良驥가 모아서 꾸민 書畵帖이다. (*驥: 천리마 기)
金弘道는 圖畵署畵員으로 山水, 道釋人物, 風俗, 花鳥 등 여러 畵目에서 뛰어났다.
서화첩의 앞부분에는 檀園의 書畵를 칭찬하는 洪奭周와 申緯의 題贊이 있고, <午睡堂>에
이어 檀園이 楷書와 行書로 쓴 詩文 및 知人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다.
총 40매에 이르는 書畵帖은 檀園 金弘道의 書藝的 技倆은 물론 그의 個人史를
잘 보여주고 있다.
(51) 다보탑비 탑본[長安 薦福寺 多寶塔碑 搨本]
-顔眞卿 –唐 752년 -1981년 기증
顔眞卿(709~785)은 唐나라 玄宗 때의 관료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씨는 長安 薦福寺에 건립된 多寶塔碑 글씨로 단정한 字形에 정밀하고 변화가 큰
筆劃을 보이고 있다.
(52) 금강반야바라밀경 탑본[金剛般若波羅蜜經 搨本]
-翁方綱 –淸 1801년 -2006년 보관
翁方綱은 중국 淸代 제일의 書藝家이며 鑑識家로 金石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작품은 嘉慶 6년(1801) 옹방강이 쓴 글씨를 法帖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의 글씨는 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의 書風에 큰 영향을 주었다.
*翁方綱(1733~1818)
號 覃溪, 淸나라 法帖學의 四大家로 꼽히는 金石學, 碑版, 法帖學에 통달한 학자 겸
書藝家로 詩論에서는 의리와 文詞의 결합을 주장한 肌理說을 내세웠다.
주요 저서로 <兩漢金石記>, <漢石經殘字考>등이 있다. (*肌: 살가죽 기)
秋史 金正喜가 翁方綱 등과 交遊하면서 經學∙金石學·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53) 김정희 종가 유물 벼루[金正喜 宗家 遺物 硯] -보물 547-1호-
-金正喜 –조선 19세기 –1976년 기증
충남 禮山의 金正喜 宗家에 傳來되던 벼루로 앞∙뒤 구분 없이 먹을 갈 수 있으며 앞면의
위쪽에 詩文을 새겼다.
예로부터 벼루는 文人들의 필수품으로 鑑賞의 대상이었고 秋史는 “반드시 벼루부터
고른 후에야 글씨를 쓸 수 있다”라고 할 만큼 벼루의 중요성을 깊이 認識했으며 鑑識眼도
뛰어났다.
*金正喜 宗家 遺物(보물 547-1호)은 그의 宗家에 代代로 내려오는 秋史의 작품과 유물로
생전에 지니던 印章, 念珠, 벼루, 붓의 유물류와 그의 習作부터 편지, 달력, 筆寫本,
對聯 등에 이르는 遺墨, 독립된 서첩인 金槃帖과 心經帖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哲宗 8년(1857) 李漢喆이 그린 金正喜影幀(가로 57.7㎝, 세로 131.5㎝)이 함께 지
정·보관되고 있다. (*槃: 쟁반 반 *帖: 문서 첩)
(54) 김정희 종가 유물 인장[金正喜 宗家 遺物 印章] -보물 547-1호-
-金正喜 –조선 19세기 –1976년 기증
金正喜 印章은 30종류에 31顆가 있는데, 모두 石材·玉材 등에 조각하고 ‘金正喜印’ ·‘秋史’
·‘遣閒’ ·‘楊柳堂年’ ·‘吟自十詩’ 등을 새겼으며 그 중의 일부이다.
秋史 金正喜는 중국 학자 및 文人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많은 인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印章을 새기는 篆刻에도 造詣가 깊어 여러 인장을 사용했다.
姓名印을 비롯하여 秋史, 阮堂, 老果와 같은 號印, 자신의 서적이나 書畵에 찍은 收藏印,
鑑識을 나타낸 審定印, 유명한 詩文句節이나 名言을 새긴 名句印 등이 있다.
(55) 인조의 글씨와 탑본[御筆石刻∙列聖御筆 搨本帖]
-仁祖 –조선 -1918년/2015년 구입
仁祖의 글씨는 宣祖와 追尊王 元宗의 글씨를 본받아 강직하면서도 힘찬 필체를 보이며,
글씨의 형태는 흐트러짐 없이 바르고 강직하게 전개하는 것이 宣祖의 글씨를 계승한
國王글씨의 특징이다.
이 글씨는 중국 中唐期의 詩人 錢起(722~780)의 詩 <江行無題>의 일부를 楷書風으로
쓴 것이다.
* 江行無題 (揚子江을 내려가면서 제목을 붙이지 않고 짓다)
斗轉月未落(두전월미락) / 북두성은 기울고 달은 아직 남았는데
舟行夜已深(주행야이심) / 뱃길에 밤은 이미 깊었네.
有村知不遠(유촌지불원) /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음을 알겠네
風便數聲砧(풍편수성침) / 다듬이질하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을 보니.
咫尺愁風雨(지척수풍우) /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비바람에
匡廬不可登(광려불가등) / 廬山을 오를 수가 없네 (*廬: 농막집 려/여)
祗疑雲霧窟(지의운무굴) / 다만 저 운무가 자욱한 골짜기에
猶有六朝僧(유유육조승) / 아직 육조의 스님들이 살고 있을까
*廬山: 중국 江西省 九江市 남쪽에 있는 名山으로 匡山·匡廬라고도 함.
(56) 문종의 글씨와 탑본[御筆石刻∙列聖御筆 搨本帖]
-文宗 –조선 -1918년2015sus 구입
조선 제5대왕 文宗은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는데 중국 元나라 趙孟頫(1254~ 1322)의
松雪體를 바탕으로 유려한 느낌을 잘 살리고 있으며 섬세하고 깔끔한 筆致를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頫: 구부릴 부)
특히 살이 많이 붙지 않은 筆劃을 쓰면서도 날이 선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文宗 글씨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57) 안평대군이 쓴 글씨탑본[安平大君筆 送嚴上座貴南 序 搨本]
-安平大君 -조선 1679년 -2002년 구입
安平大君 李瑢(1418~1453)은 世宗大王과 昭憲王后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詩∙書∙畵에 모두 능하고, 識見과 度量이 넓어 名望이 높았으며 많은 책을 所藏한
收藏家였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高麗 末 중국 元에서 유입된 趙孟頫의 松雪體를 수용하여 자신만의
글씨를 완성하였다.
이 글씨는 安平大君이 스님 嚴上佐의 佛法에 대한 法文을 듣고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쓴 것을 仁祖의 셋째 아들 麟坪大君의 장남 福昌君 李楨(1641~1680)이模刻하였으며,
이를 탑본한 것이다.
(58) 현화사 비액 탑본[玄化寺 碑額 搨本]
-顯宗(992~1031) –고려 – 1916년 기증
開城에 있던 玄化寺碑의 碑文題目부분에 해당되는 碑額이다.
玄化寺碑에는 사찰의 創建緣起와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하였다.
상단에 顯宗의 御筆로 <靈鷲山大慈恩 玄化寺之碑銘(영취산대자은 현화사지비명)>
이라고 篆書로 刻字하였다.
오래된 탑본이며 보기 힘든 碑額을 볼 수 있어 가치가 크다.
(59) 유점사 범종의 명문 탁본[楡岾寺 鐘銘 搨本] (*岾: 땅이름 점)
-鄭蘭宗(1433~1489) –조선 1469년 -1916년 기증
조선 前期에 鑄造한 楡岾寺鐘은 6∙25전쟁 당시 유점사가 파괴되면서 땅속에 묻혔다가
戰後에 北韓에서 발굴하여 妙香山 普賢寺로 옮겼으며, 북한의 국보급유물 169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鐘의 銘文으로 成化 5년인 睿宗 元年(1469) 鑄造했음을 알 수 있다.
銘文은 조선시대 文臣으로 佛敎에 造詣가 깊었던 乖崖 金守溫(1410~1481)이 짓고
虚白堂 鄭蘭宗이 썼다. (*乖: 어그러질 괴)
오래 된 탑본이며 보기 힘든 金石文의 내용을 볼 수 있어 歷史資料의 가치가 있다.
(60) 달항아리[白磁壺] -조선 18세기 -2016년 입수
(61) 구름 용무늬 항아리[白磁 靑畵雲龍文 壺]
-조선 18세기 -2003년 구입
(62) 구름 봉황무늬 항아리[白磁 靑畵雲鳳文 壺]
-조선 18~19세기 -1945년 입수
(63) 풀무늬 항아리[白磁 鐵畵 草文壺] -조선 17세기 -1945년 입수
(64) 매화 대나무무늬 항아리[白磁 鐵畵 梅竹文壺] –국보 166호-
-조선 16~17세기 -1930년 구입
品格 있는 莊重한 형태와 뛰어난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16~17세기의 대표적인 鐵華白瓷이다.
백자의 품질과 그림의 표현수준으로 보아 圖畵書畵員이 무늬를 그린 王室用 철화백자로
보고 있다.
朝鮮 前期 대표적인 鐵華白瓷 항아리로는 초기작품으로 높이 41.3㎝, 입 지름 19㎝,
밑지름 21.5㎝로, 이런 항아리의 형태는 16세기 粉靑沙器에서 보이며, 특히 중국 明代의
항아리와 비슷하다.
매화, 대나무의 모양이나 밝은 釉藥色으로 보아 16세기 후반 경 경기도 廣州郡 일대의
觀音里 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畵壇의 四君子 표현기법을 가늠할 수 있는 秀作이다.
*鐵華白瓷: 흑갈색 무늬를 그려 넣은 백자.
(65) 항아리[白磁 壺] -조선 17세기 -1970년 구입. -조선 15~16세기 -1996년 구입
(66) 매화 새 대나무무늬 항아리[白磁 靑畵 梅鳥竹文 壺] –국보 170호-
-조선 15~16세기 -1980년 입수
조선 前期의 대표적인 靑華白瓷항아리로 높이 16.8㎝, 입 지름 6.1㎝, 밑지름 8.8㎝이다.
뚜껑의 손잡이는 연꽃봉오리 모양이며, 어깨는 벌어지고 잘록한 허리의 선은 바닥에서 약간
도드라지는 듯한 느낌을 주며, 뚜껑의 손잡이에 꽃잎 4장을 그리고 그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그린 것은 조선 전기 회화에서 보이는 樹枝法과 비슷하다.
이 항아리는 조선 초기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무렵 백자항아리의 형태와
문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67) 끈무늬 병[白磁 鐵畵 繩文餠] -보물 1060호-
-조선 15~16세기 -1995년 서재식 기증
조선시대 백자로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줄무늬를 그린 높이 31.4㎝,
입 지름 7㎝, 밑지름 10.6㎝인 술병이다.
굽의 안쪽 바닥에는 ‘니나(아래 아)히’ 한글이 새겨 있는데 뜻은 모르나
1443년 한글 창제 이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15세기 후반부터 만들었으나, 15~16세기에는 그 예가
드문데 이 병은 16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귀할 뿐만 아니라, 끈을 목에 매고
밑으로 늘어뜨린 특이한 문양으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68) 이희영의 묘지와 합[白磁 靑畵 李喜榮 墓誌∙盒] -조선 1692년 -1994년 구입
(69) 물고기무늬 매병[粉靑沙器 象嵌 魚文 梅甁] -보물 347호-
-조선 15세기 -1908년 구입
조선 전기에 제작된 청자 매병으로 높이 30.0㎝, 입 지름 4.6㎝, 밑지름10.4㎝이다.
고려 때 유행하던 매병은 조선시대 白磁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粉靑沙器로
그 맥이 이어지는데, 이 청자도 분청사기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담청색을 띤 청자유액에 가까운 유약을 사용하여 釉藥에서도 과도기적
모습을 볼 수 있다.
(70) 모란 넝쿨무늬 항아리[粉靑沙器 剝地 牡丹唐草文 壺]
-조선 15~16세기 -1941년 입수
몸체 밑부분까지만 白色 粉粧土를 발랐는데 분장토를 바른 부분과 바르지 않은
부분의 경계가 분명치 않으며 이로 인해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生動感이 살아 있다.
전남 高興 雲垈里陶窯에서 만든 항아리이다.
(71) 모란무늬 편병[粉靑沙器 剝地 牡丹文 扁甁]-연꽃무늬 편병[粉靑沙器 剝地 蓮花文 扁甁]
=모란무늬 편병(왼쪽) –조선 15~16세기 -1996년 구입
=연꽃무늬 편병(오른쪽) –조선 15~16세기 -1981년 이홍근 기증
(72) 물고기무늬 편병[粉靑沙器 彫花 魚文 扁甁] -국보 178호-
-조선 15~16세기 –개인 소장품, 寄託
조선 전기에 제작된 분청사기 편병으로 높이 22.6㎝, 입 지름 4.5㎝,
밑지름 8.7㎝이다.
백토을 두껍게 입히고 彫花手法으로 무늬를 새겼으며, 앞·뒷면과 옆면에 서로
다른 무늬와 위로 향한 두 마리의 물고기를 생동감 넘치는 선으로 나타냈다.
물고기 무늬는 분청사기 조화수법의 특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데
彫花手法은 白土로 분장한 그릇에 선으로 陰刻 무늬를 새겨 넣고 백토를 긁어내
하얀 선으로 된 문양을 만드는 技法이다.
양 옆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위와 중간에 4葉 모란무늬를 새기고, 배경을
긁어냈으며 아랫부분에는 芭蕉를 넣었다.
(73) 모란 넝쿨무늬 편병[粉靑沙器 彫花 牡丹唐草文 扁甁]
-조선 15~16세기 -1939년 구입
물레로 둥근 형태의 병을 만들고 다시 양면을 두드려 편평하게 만든 병으로 한쪽으로
기운듯하면서도 균형이 잡혀있다.
모란꽃과 줄기가 마구 헝클어져있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은 단순함과 장난스러움이
연상된다.
(74) 모란무늬 자라병[粉靑沙器 剝地鐵彩 牡丹文 甁] -국보 260호-
-조선 15세기 -1930년 구입
납작한 몸체에 주둥이가 달린 형태로 자라를 닮아 ‘자라병’이라고 하며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하던 용기로 높이 9.4㎝, 지름 24.1㎝이다.
무늬가 大凡하면서도 白土로 남겨진 부분과 細部를 표현한 技法에 흐트러짐이 없으며,
剝地된 부분에는 검게 칠하여 對比效果를 높였다.
黑白의 對照가 대비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무늬 장식기법을 剝地技法이라고 하며,
분청사기 무늬 중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나다.
박지기법과 검은 색 안료의 사용이 잘 조화되어 분청사기 특유의 대범하고 활달한 분위기가
잘 나타난 작품이다.
(75) 풀꽃무늬 자라병[粉靑沙器 象嵌 草花文 餠] -조서 15세기 -2012년 구입
(76) 버드나무무늬 통모양 병[靑磁 鐵畵 楊柳文 筒形 餠] -국보 113호-
-고려 12세기 -1931년 구입
고려시대 鐵畵靑瓷餠으로 높이 31.6㎝의 긴 통모양의 병 앞뒤에 한 그루씩의
버드나무를 붉은 흙으로 그려 넣은 소박한 병이다.
몸통의 양면에 있는 버드나무를 제외하고 특별한 장식이 없으며,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버드나무의 간결한 표현에서 韻致 있고 세련된 감각이 엿보인다.
고려 철화청자 중에서 몇 점 전해지는 긴 원통형의 몸체를 지닌 특이한 형태의
병 중의 하나로, 형태상의 적절한 비례와 어깨의 모 깎기 형태, 몸체에 그린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 독창적인 표현들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77) 모란 넝쿨무늬 표주박모양 주자[靑磁 象嵌 牡丹唐草文 瓢形 注子]
-국보 116호-
-고려 12~13세기 -1926년 구입
12세기 중엽의 고려자기 중에서 종종 확인되는 표주박모양의 청자주전자로
높이 34.4㎝, 입 지름 2㎝, 배 지름 16㎝, 밑지름 9.7㎝이다.
세련된 流線型의 모양에 완벽한 비례의 아름다움까지 곁들여 調和시키고,
목의 윗부분에 흑백상감으로 구름과 鶴 무늬를 그려 넣고, 잘록한 목은
골이 지게 패여 있어 주름이 잡혀 있는 듯한 형태를 이루고, 아랫부분 몸통에는
활짝 핀 모란과 피지 않은 봉오리, 잎들이 꽉 짜여진 채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그릇 형태나 선이 매우 우아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은근한 빛을 머금고 있어
高麗人의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78) 매화 대나무 물가풍경무늬 표주박모양 주자
[靑磁 象嵌 梅竹蒲柳水禽文 瓢形 注子]
-고려 12세기 -1912년 구입
고려청자 특유의 曲線美를 보여주는 주전자로 자연적인 멋과 낭만이
배여 있는 물가 풍경을 장식한 무늬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이런 물가 풍경은 고려 王室이나 귀족들에게 사랑 던 裝飾素材이다.
(79) 어룡모양 주전자[靑磁 魚龍形 注子] -국보 61호-
-고려 12세기 -1951년 입수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 작품으로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한 象形의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용의 머리모양이고.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부분을 본떠서 만들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奇異하면서도 각 부위를 갖춘 한 마리의 想像의 동물모습의
이 주전자는 祥瑞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象形靑磁 중에서도
매우 기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80) 칠보무늬 향로[靑磁 透刻七寶文蓋 香爐] -국보 95호-
-고려 12세기 -1911년 구입
高麗 前期의 청자 향로로 높이 15.3㎝, 臺座지름 11.2㎝이며, 뚜껑과 몸통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球形部分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구형부분 곳곳의 교차지점에는 흰 점을 하나씩 장식하였다.
몸통의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 잎으로 싸고 다시 커다란 국화 잎이
이를 받치고 있으며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臺座로, 세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으며, 釉藥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象嵌靑瓷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技巧를 부린
작품으로 工藝的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81) 물가 풍경무늬 정병[靑銅 銀入絲 蒲柳水禽文 淨甁] -국보 92호-
-고려 12세기 -1916년 입수
고려시대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의 하나로 높이 37.5㎝의 銀入絲한 정병이다.
둥근 몸체의 어깨와 굽 위에 꽃무늬를 두르고, 그 사이에 갈대와 수양버들,
오리와 물새 등 서정적인 물가풍경을 묘사하였다.
이 정병은 형태에 안정감이 있고 流麗한 曲線美를 보여주며, 무늬표현도
고려 전기부터 크게 발달된 入絲技法을 발휘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은입사 정병은 여러 점이 알려져 있으나, 이 정병은
푸른 색조와 어우러진 문양의 抒情性이 돋보이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82) 동종[靑銅 鐘] -고려 13세기 -1911년 구입
(83) 천흥사 종[‘天興寺’銘 靑銅 鐘] -국보 280호-
-고려 1010년 -1910년 구입
통일신라의 銅鐘을 계승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동종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寶珠를 들고 있는 용과 제작 연대를 새긴 위패모양의 틀은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양식적 요소이다.
위패모양의 틀에는 ‘聖居山天興寺鍾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陽刻銘文이 있어 遼 나라 統和 28년인 高麗 顯宗 元年(1010)에
鑄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上院寺 銅鐘(국보 36호), 聖德大王神鍾(국보 29호)
다음으로 크면서도 제작기법이나 樣式이 高麗 梵鐘을 대표하는 동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銅鐘은 원래 天安 聖居山 天興寺에 있었으나 언제, 어떤 緣由인지는 몰라도
南漢山城으로 옮겨 조선시대에 山城에서 時刻을 알려 주는 역할을 했으며,
日帝强占期에 李王家博物館으로 옮겨졌다가 光復 後 德壽宮美術館을 거쳐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所藏∙展示하고 있다.
(84) 금령총 금관[金鈴塚 金冠] -보물 338호-
-三國時代(新羅) 5세기 –慶州 金鈴塚 출토 -1924년 입수
慶州 金鈴塚에서 출토된 金冠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에서는 가장
작으면서 단순한 형식으로, 높이 27㎝, 지름 15㎝이다.
관 테 위에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상징으로, 신라의 금관은 皇南大塚 北墳 조성단계에 완성되며 國家儀例
또는 葬地로 보내는 葬送用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금관은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玉 장식이 없고, 금으로만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85) 귀걸이. 삼국시대[(1): 고구려 (2)~(6): 신라]
1. -삼국시대(고구려) -1996년 구입
2. –삼국시대(신라) -1998년 구입
3. –삼국시대(신라) -1962년 구입
4. –삼국시대(신라) -1936년 입수
5. –삼국시대(신라) -1962년 구입
6. –삼국시대(신라) –慶州 皇吾洞 출토 -1936년 입수
(86) 감은사 터 동탑 사리구[感恩寺址 東三層石塔 舍利具] -보물 1359호-
-통일신라 682년경 -2001년 입수
경북 月城郡 感恩寺 터의 感恩寺址三層石塔(국보 112호)의 동쪽 石塔을 1996년에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일괄유물 중 舍利 一括品으로 바깥을 감싸고 있는 外函과 안쪽의
舍利器, 舍利甁 등으로 구성되었다.
외함의 네 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四天王像이, 주변에는 귀신의 얼굴모양을 새긴 고리를
배치하였다.
사리를 모셔 둔 內函은 基壇部, 몸체, 天蓋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은 높이 3.65cm이며, 정교하게 금 알갱이가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 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 사리구는 제작기법이나 유물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공예기술의 精髓를
보여주는 것으로 佛敎彫刻史와 工藝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87) 공양탑[金銅 多層 小塔] -고려 前期 -1915년 구입
높이 74.5cm의 金銅 小塔으로 佛殿 안에 봉안하는 舍利塔으로 추정된다.
이 소탑은 4각형의 基壇, 11층의 塔身과 相輪部로 구성되었으며 기단부의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탑으로 연결하고 있다.
탑신 初層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모서리에는 四天王像을 배치하였다.
(88) 부처[純金製 佛 立像](왼쪽) –국보 80호- 와 아미타불[阿彌陀佛 坐像] –국보 79호-
-경북 慶州 九黃洞 三層石塔 出土 –통일신라 692년∙706년 -1942년 입수
皇福寺로 전해오는 慶州 九黃洞 절터의 三層石塔 舍利函에서 발견된 佛像이다.
사리함 뚜껑의 銘文에 神文王이 昇遐하여 692년 아들 孝昭王이 母親 神睦太后와 함께 石塔을
세우고, 孝昭王이 승하하자 706년 聖德王이 金製 阿彌陀像 1具와 <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에 안치하였다.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 –국보 80호-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국보 79호)과 함께 皇福寺址 三層石塔(국보 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臺座와 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肉髻가 솟아 있고, 갸름한 얼굴은 量感이 있고 자비롭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光背는 원형으로,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寶珠形을 띤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692년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국보 79호-
1942년 경주 皇福寺址 삼층석탑(국보 37호) 해체∙수리 공사 할 때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銘文에 통일신라 聖德王 5년(706) 사리함 속에 순금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으나 크기에 조금 차이가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耳目口鼻와 균형 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 모양이나 옷주름, 量感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89) 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보물 331호-
-삼국시대 7세기 -1910년 구입
왼다리를 내리고 걸터앉아 오른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륵보살 半跏思惟像이다.
조각수법이 線과 面의 구분이 분명하고 잘 다듬어져 세련된 모습이며,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으나 2중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蓮花臺座 아래 4각형 대좌는 韓半島의 영향을 받은 日本 半跏思惟像에도
많이 남아있는 臺座 모양이다.
(90) 부처[金銅 佛 立像] -국보 186호-
-경기 楊平 발견 –삼국시대 7세기 前半 -1976년 입수
楊平新花里 金銅如來立像(*문홰청 명칭)은 1976년 경기도 楊平郡 新花里에서
농지를 정리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된 높이 30㎝의 佛像으로 이곳에서
기와조각 등 유물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臺座와 光背는 잃었으나,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鍍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묵직하고 단순한 원통형의 몸체, 간결한 U자형의 주름은 중국 隋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신라가 점령하고 있던 漢江流域에서 출토되어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91) 관음보살[金銅 觀音菩薩 立像] -국보 127호-
-서울 三陽洞 발견 -삼국시대 7세기 前半 -1968년 입수
서울 三陽洞金銅觀音菩薩立像은 1967년 서울 道峰區 三陽洞에서 발견된
높이 20.7㎝의 보살상으로,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왼쪽 옷자락이 약간
떨어져 나갔다.
이 보살상은 삼각형 모양의 관에 작은 부처 하나를 새기고 있는 점과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이 분명하며, 살찐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옷 등으로 보아 7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전반부터 寶冠의 부처모습이 나타나고 淨甁을 들고 있는 觀音菩薩像이
제작되어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觀音信仰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삼국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92) 부처[蠟石製 佛 坐像] -보물 329호-
-충남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삼국시대(백제) 6세기 -1936년 발굴
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은 1936년 충남 부여 軍守里의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木塔 자리에서 菩薩像, 光背 파편, 각종 玉, 土器破片 등과 함께 발견된 불상으로, 곱돌로
만들었으며 4각형의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백제 특유의 佛像이다.
두터운 옷자락에 싸여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점, 좁아진 어깨, 두 손을 배 앞에서 모아
깍지를 낀 단아한 손 모양 등에서 옛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형식과 자세로 보아 4~5세기 중국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얼굴 모습이나 신체의 표현 등 세부모습에서 百濟化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완숙한
6세기 중엽 백제불상의 특징을 갖고 있다.
(93) ‘정덕 십 년’이 새겨진 새겨진 지장보살[‘正德十年’銘 石造 地藏菩薩 坐像] -보물 1327호-
-조선 1515년 -1998년 구입
石造地藏菩薩坐像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으로 바위형태의 臺座에 앉아 있는
높이 33.4㎝ 정도의 작은 불상으로 몸체는 두껍게 도금되어 있고 대좌는 붉은 빛이 돌도록
칠하였다.
조선시대 불교조각품으로는 드문 소형 석조상으로, 특이한 바위형태의 대좌 뒷면에는
貞德 10년(1515) 3월 金順孫 夫婦 등의 施主로 絶學을 비롯한 승려가 彫刻했다는
銘文이 있다.
貞德 10년인 조선 中宗 10년(1515)에 만든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하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조성배경이나
연대가 확실하여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제65차 문화유산답사(5-5); 국립중앙박물관 둘러보기(3-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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