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유적답사회 제114회 답사
< 2007.11.10(토)~11(일) 경상도 밀양․청도지방 >
① 표충비 ---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밀양은 밀양아리랑과 같이 흥과 낭만이 넘치는 고장이면서 신비로움을 품은 고을이다. 천황산 중턱 얼음골은 한여름에도 얼음도 얼고 냉기를 뿜어내고,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삼랑진 만어산에는 물고기들이 입질하는 모양의 돌 수천이 너덜지대를 이루고, 아랑의 전설과 같은 애잔한 슬픔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이곳의 표충비는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렀던 신비스런 비석이다. 즉 1894년 갑오농민전쟁, 1910년 한일합방, 1919년 3.1만세운동, 1945년 광복, 1948년 이승만대통령 취임, 1950년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승려의 신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왕명으로 적국인 일본에 건너가 왜장과 담판으로 잡혀간 포로를 데리고 돌아온 애기들은 많이 들었던 일화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묘향산에 1년을 머문 후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에 백하암이란 작은 암자를 지어 지냈으며.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한 뒤 백하암에서 표충사란 사당을 지어 대사를 제향 하였다.
백여년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나라로부터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년 후,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이 옮겨가자 사명대사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표충비를 “삼비”라고도 하는데 전면에는 사명대사의 행적과 임진왜란 때 활약을 그리고, 뒷면에는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공적을, 측면에는 표충사사적기로 표충사의 사적을 담고 있다.
② 소태리 오층석탑 ---밀양시 청도면 소태리
이 5층석탑은 고려예종 2년에 황룡사 출신의 승려 중대사 학선이 주지로 있으면서 금당과 함께 조성한 것이다. 1919년 3월에 이 탑의 상륜부에서 가로 60cm 세로 40cm의 백지에 반초서로 묵서한 "당탑조성기"가 발견된바 있는데 이 조성기는 고려 예종(1109년)에 해당되며, 이 해에서 206년전 즉 신라 효공왕 8년에 황룡사 사문 혜조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는 것과 또 황룡사에 있던 중대사 학선이 8년전에 이 절의 주지로 와서 금당 1칸과 불좌를 만들고 5층 석탑을 세웠는데 구리와 놋쇠를 아울러 62근을 사용하였으며, 향로와 향합 등 절에 들인 물목과 재료의 사용량 등을 적고 불사에 참여한 주지이하 스님들의 법계와 법명을 열기했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길어 보이는 이 탑은 기단부터 특이하다. 우리나라 석탑의 기본이 이중기단인데 이 탑은 단층기단이면서 보통 석탑의 기단과 달리 아주 작고 낮다. 또한 전탑과 모전탑 등에서 나타나는 1층 몸돌에 감실을 만들었다. 그 안을 들어다 보면 두광처럼 둥근 무늬가 돋음새김 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신라시대 탑들의 처마받침이 5단인데 비해 이 탑의 처마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는 점 등이 특이하다.
③ 표충사 ---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이름을 죽림사라 하였다. 죽림사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지금도 절 뒤편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그 후 흥덕왕 때 인도스님 황면선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3개를 모시고 동방의 수려한 강산을 찾던 중 이곳에 들러 석탑을 세우고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중창하면서 영정사로 바뀌었다. 영정사로 바뀌게 된 연유는 나병에 걸린 흥덕왕 셋째 왕자가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치자 왕이 기뻐하며 가람을 중창하도록 하고 영정사로 바뀌었다.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천여명의 승려를 모아놓고 수도하는 등 번창하였으나, 조선시대 불교 억제정책 탓일까 조선후기는 아주 퇴락하였다. 사명대사 8대 법손인 천유대사가 표충서원을 옮겨오고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꾸었다. 유교문화인 서원이 절 안에 있는 점이 다른 사찰과 달리 독특하며 서원인 사당영역과 부처를 모시는 사찰영역으로 구분된다.
사당역역 : 천유대사가 표충서원을 옮겨올 때와 지금의 가람배치는 달랐으며, 당시에는 대적광전 옆에 있던 관음전과 명부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관음전을 사당으로 개조하여 세분의 대사를 모시는 영당으로 삼았다. 사당 맞은편 계단아래 강당과 서재를 만드는 등 일반 서원과 같았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의식도 주재하였다고 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 1926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으며 그 후 중창하면서 사당의 위치가 팔상전 자리로 바뀌었다. 표충사는 좌․우에 표충서원과 유물관을 거느리고 있다. 유물관에 사명대사의 유품 등 300여점 전시하고 있다.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항완은 항로 곳곳에 범어와 구름 등 각종 문양을 음각하고 그 흠에 은사를 메워 장식하였다. 높이 27cm인 향로입구 둘레에 대정11년(1177)이라는 년도 표시 청동함은향완이라는 명칭, 효초라는 장인의 이름외에 창녕 복면 용흥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우리나라에 향완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찰영역 : 사천왕문을 지나서 첫 눈에 들어오는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으나,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사찰에는 보편적으로 석탑과 석등이 법당과 일직선으로 배치되는데, 그 틀이 크게 틀어졌다. 대흥원전이라는 승방건물 앞에 있는데 정면으로 배치된 것도 아니다. 반대편 서래각 일원은 담장으로 가로 막히는 스님들만의 공간으로 어색한 감이 있다. 통일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근거도 없는 것으로 보아 중창을 거치면서 창건당시의 가람배치를 많이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인데 보물 제46호인 이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으로 이형을 보이며 지붕돌받침도 5단이 아닌 4단을 보인다. 찰주를 비롯해 상륜부 전체가 온전히 남아있다.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을 높이 2.4m의 적지 않음에도 석탑과 너무 가까이 있어 다소 왜소해 보인다. 연꽃 모양의 상대석과 하대석을 갖춘 8각의 간주석 위에 화사석, 지붕돌을 차려로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경남 유형문화제 제14호이다. 서래각은 담장에 가려 일부밖에 볼 수 없지만 48칸이나 되는 큰 건물로 H자 모양의 독특한 외형이며 기왓장으로 꽃 모양을 장식한 합각벽 등이 특이하다. 처마 밑에 걸려있는 서래각, 보화루, 무랑수각 승련암 등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현의 글씨이다.
탑앞의 약수로 목을 축이고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명부전과 관음전이 보이고 왼편에 사찰의 중심인 대광전이다. 사천왕문, 삼층석탑, 대광전의 일직선의 틀이 벗어날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대광전 앞 우화루가 진입로였다 하는 등 중창을 거치면서 얼마나 변형되었는지 짐작할 수 없으며 남계천이 흐르는 옛길은 폐쇄되었다. 2~30년 전에는 사찰 진입로에 재악산 약초와 나물 등을 뜯어다 파는 할머니들만 있는 한적한 시골이었는데 지금은 사천왕문 코앞까지 차량이 번잡하게 늘어져 있고 경내에도 채석장에서 가공한 자갈을 깔아 거닐 때면 조용해야 할 선원이 소란스럽다.
④ 영남루 --- 밀양시 내일동
평양에는 부벽루, 남원에는 광한루, 삼척에는 죽서루, 진주에는 촉석루가 있다면 밀양에는 영남루가 있다. 이들 누각의 공통점은 강을 끼고 있어 예전에는 영화와 번영을 누렸던 장소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신라시대에 창건된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종각인 금벽루만 남은 폐사지에 공민왕 때 김주라는 군수가 처음 영남루를 지었다. 물론 당시의 건물은 아니며 조선시대에 넓혀 짓고 화재로 훼손되기를 반복하다가 현종10년(1844)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 팔작지붕으로 양쪽에 날개처럼 두개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어 더욱 화려하고 웅장해 보인다. 영남루에 올라 밀양강을 내려보거나 강 건너편에서 영남루를 올려보는 것 모두 펼쳐지는 경치가 시원스럽다. 영남루 왼쪽 건물이 능파당 오른쪽 건물이 첨류각이며 능파당을 통해 영남루에 오를 수 있다. 영남루에는 구한말 명필 하동주가 쓴 “영남루”, “강좌웅부”, “교남명루” 편액이 나란히 걸려있는 등 명인들의 편액들이 많이 걸려있다. 본루와 첨류각의 높낮이를 층층계단으로 연결하고 지붕을 연속으로 얹어 율동적이고 본루가 한층 더 웅장해 보이고 층단의 추녀마루 마감 장치로망와의 도깨비상 장식도 재미있는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이다.
영남루 외에도 천진궁, 무봉사, 아랑각 등이 있으며, 천진궁은 옛 객사 건물의 하나였으나, 1957년 대종교에서 천진궁이라 하고 안에 단군의 영정과 8대 시조와의 위패를 모셨다. 천진궁과 영남루 곳곳에 돌의 무늬가 꽃 모양을 닮았다는 석화가 있다. 무봉사에는 영남사가 폐사되면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493호의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광배까지 온전한 채로 남아있다. 한편 조선 명종 때 부사 윤씨의 아라따운 딸 정옥이 정절을 지키려다 숨져간 아랑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각과 아랑비가 대숲 사이에 스산하게 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애잔하게 한다.
⑤ 운문사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댐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중 하나의 끝자락쯤인 호거산 아래 운문사가 있다. 원광․일연․원응 등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인물들이 거쳐간 유서깊은 사찰로 지금도 200여명의 비구니들이 살아가는 큰 도랑이다. 숲길을 조금 지나면 평평하고 너른 대지 위에 수십 채의 기와집이 나타난다. 운문사 주변에는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 장군봉과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절을 감싸고 돌아간다. 그 형상이 연꽃 같다하여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에 비유하기도 한다. 운문사는 산을 등지고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어 특이하다. 찾아가는 사람들은 절 뒤쪽을 먼저 보게 되는데 이는 풍수지리상 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다.
운문사(대적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6세기경이며 첫 중창자로 원광법사를 들고 있으며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해준 바로 그 스님이다. 고려 창업을 거들어 사세를 키운 운문사는 원응국사가 있을 때 인종이 행차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 그 뒤 한세기 가까이 농민과 노비들의 반란으로 일대가 피폐되고 잊혀졌다가 몽고의 간섭기가 시작되는 1277년 운문사에 일연스님이 기거하면서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떠나기 전까지 유명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운문사는 일주문이 없이 긴 담장을 따라가다 범종이 걸려있는 2층 누각 아래가 정문이며 절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처진소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소나무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매년 봄과 가을에 막걸리 한말씩 뿌리에 부어준다. 왼쪽 담장 앞에는 고려초 운문사를 크게 중창시킨 원응국사를 기리는 비(보물 제316호)가 파손이 심하지만, 그의 행적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고 나란히 서 있는 설송대사비는 임진왜란 때 피폐해진 운문사를 중창시킨 스님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만세루는 164평이나 되어 운문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지만 낮은 기단과 건물의 바닥도 아주 낮다. 바로전(보물 제835호)은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이지만, 5칸 건물과 맞먹을 정도로 크다. 공포의 번잡스런 장식들을 줄여 통일성과 간결함을 주면 꽃창살과 연꽃과 국화를 3단으로 새긴 수미단이 아름답다.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에 세워진 팔각석등이 있는데, 연잎 안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를 닮은 무늬가 하나씩 새겨져 있다. 지붕돌 또한 팔각으로 밑면은 수평이고 낙수면은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는 이 석등은 보물 제193호이다. 비로전 앞에 동․서 삼층석탑로 서 있는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물 제678호이다.
운문사에서 제일 작은 건물인 작압전 안에 10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물이 두점 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은 대좌와 광배를 갖추고 온천한 채 남아있다. 네모진 상체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 등 다소 경직된 느낌이다. 석불 좌․우에 사천왕상(보물 제318호)이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서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⑥ 임당리 김씨고택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청도 임당리 김씨고가는 대대로 내시가 살았던 내관가로 가옥의 실측조사시 별묘에서 발견된 「內侍付 通政金馹俊家世係」에는 시조부터 15세까지의 실직과 이름 및 본관, 산소의 위치와 좌향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시조가 이곳에 입향, 정착한 1500년대와 이성독자로 상속되어 이어온 내시가계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으며 가첩의 주인인 16세 김일준(1863~1954)은 그 벼슬이 정3품인 통정대부에 이르기도 하였다.
가옥구조가 전체적으로 1800년대 이후 형태이며 사랑대청에서 대문채와 중문간을 마주보게 배치하여 부녀자들의 출입을 반가에 비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주인이 내시 인만큼 항상 부녀자의 안위를 고려함과 동시에 출입이나 행동을 규제할 목적에서 의도된 것으로 내관가 배치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⑦ 운강고택 ---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운문댐으로 물길이 막히기 전에는 비단천 같다는 비단내(동창천)가 실개천으로 남아 옹색하지만, 중요민속자료 제109호로 지정된 밀양박씨 세거지인 운강고택이 옛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박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결혼한 뒤 1595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당시는 초가집으로 시작하였으나, 대를 거듭하면서 기와도 올리고 규모도 점차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 건물 배열은 평평한 대지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자형 건물군으로 이어지며,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가진 형태로 1,700여평 대지에 80여칸이나 되는 규모다. 여인들이 사랑채를 지나지 않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내외문을 내었고 사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꽃담으로 막았다.
비단내 오른쪽 벼랑가에 운강이 1856년에 지은 ㄱ자형 만화정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금천을 바라보는 풍광이 좋았으련만, 그러나 강이 마르고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가 가로질러 그 경치는 많이 변해버렸다. 이 마을에는 운강고택외에 도일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운남고택 등이 있으나, 모두들 운강고택에서 분가한 집들이라 규모와 짜임새가 떨어지지만 뿌리 깊은 가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⑧ 청도 석빙고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⑥ 대적사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
신라시대에 큰 절이 있던 자리로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졌다가 15세기에 성해대사가 초가삼간을 짓고 대적사라 하였다. 대적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아담한 건물이다. 이중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공포는 화려하지만 측면은 공포를 가설하지 않았고 후면의 공포는 장식이 없어 각기 다른 맛을 풍긴다.
조선시대 기단이나 소맷돌에 무늬를 새긴 예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의 기단은 특히 주목된다. 상층 기단에 거북무늬가 양각되어 있으며 H자형 선각이 연속되어 있다. 어미와 새끼인지 두 자라는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가느랴 바쁘고 게 한 마리는 집게발을 벌린 채 덤덤하다. 동심원 3개를 새기고 원마다 햇살이 퍼지듯 선을 그어 만든 국화꽃에는 화심에 자라 한 마리가 들어않았다. 왼쪽 소맷돌 옆면에는 태극무늬가 둥글게 돌아가고 그 아래 귀통이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반쯤 몰을 내밀고 있으며 오른쪽 소맷돌 옆면에는 구름속을 나는 용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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