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재연 장군(魚在淵 將軍) 생가(生家)
어재연장군: 1823년(순조23)-1871(고종8)
어재연장군은 근세 조선말기 구미 열강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강화도를 지키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장군의 본관은 함종이며, 자는 성우로 1823년 2월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서 어용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직에 올라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 장단, 회령부사 등을 거쳐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영 진무중군이 되어 침공해 온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소란을 피우다가 평양군민들에 의해 불타버린 것이
원인이 되었다.
셔어먼호의 행방을 탐문하다가 사건의 윤곽을 알게된 미국의 브란트
대통령은
청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에게 셔어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 문책과
조선과의 통상 체결의 임무를 맡겼다.
이에 로우공사가 직접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콜로라도호와 군함 4척에 1천1백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하니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다.
미국은
통상체결에 대한 조선 정부의 답변을 받지 못하자
소함정 4척을 보내 광성진 앞으로 들어서다가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평화적인 교섭이 어려워진 것을 알고 로저스제독은 4월 23일
6백 여명의 병력을 초지진에 상륙시켜
기회를 엿보다가 4월 24일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어재연장군이 포진하고 있는
광성포대를 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광성별장 박치성은 어재연장군의 용감한 죽음을 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전사하였으며,
천총 김현경, 초관 유풍노, 군관 이현학 등 243명의 조선군
장졸이 전사하였다.
이 광성보전투
후 미국이 부평부사 이기조에게 "외국 사신을 배척함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물러감으로써 끝났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은 서양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불러 일으켜
오히려 쇄국정치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나라에서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어재연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어재연 장군 이야기(경기도
영남길)
- 어재연 장군과 말무덤
이야기
산성1리에서
태어난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때 외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장군에게는 집 앞의 돌을 밟고 올라타던 아끼는 말이 있었는데
장군의 사랑을 받으며 늘 함께 지냈답니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장군이 사망하자 이 말은 장군의 안장을 얹은
채로 산성리 장군의 집까지 혼자서 찾아 왔습니다.
주인 없이 혼자 돌아온 말은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댓돌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는데요,
마을 사람들은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일지언정 주인을 향한 마음은
사람보다
더 기특하고 애처로워서 말의 무덤을 만들어 곱게 묻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무덤의 형태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는 아직도
말무덤이라는 지명으로 마을사람들에 의해 불리고 있습니다.
- 어재연 장군과
사장말랭이
어재연
장군이 태어나서 자란 율면 산성1리는 팔성산이 삼면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입니다.
장군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유씨 부인은 혼자서 힘겹게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우며 틈틈이 무술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나가면 산자락에 있는 밭을 향해 활을
쏘고,
다시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화살을 뽑아 반대편 산자락으로 다시
날리며 활쏘기 연습을 했던 것이지요.
그가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은 지금도 ‘사장말랭이’ 혹은 ‘사장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어재연 장군(魚在淵 將軍) 생가(生家)
어재연 장군(魚在淵 將軍) 생가는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이 건물 전면에 배치되어 있으며
동남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일자형 사랑채가 바깥마당에 면하여 앉고, 사랑방 뒤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형 안채가 집안의 중심에 위치한다.
안마당 동쪽으로 광채가 자리해서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대문은 광채의 한쪽을 이용해서 동선을 꺽어 안마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사랑채는 4칸 전후퇴의
우진각 초가지붕이다. 평면은 서쪽으로부터 부엌, 2칸 구들,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원래 3량집이었으나, 앞뒤로 다시 평주를 세우고 퇴를
덧달아 내었다.
앞퇴는 퇴보없이
토막보만을 기둥머리에 맞추고 부엌과 안방, 대청은 모두 2칸으로
부엌 광이나 골방은 별도로 두지 않고 벽장과 다락을 뒤쪽 칸에 시설하고 앞쪽 칸에는 반칸 정도의 나뭇간을 두었다.
구조는 맞걸이 3량 네모 기둥에 납도리집으로 부엌 상부의
지붕틀을 보면
종도리에 맞춰 우미량을 처마도리까지 걸친 다음 추녀 머리를
얹었다. 지붕은 초가집으로 거의 박공집에 가깝다.
어재연장군의 생가는 신미양요 당시인 19세기 초 건물로
추정되며,
안채, 사랑채, 광채는 모두가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있고
건물의 질도 우수하다.
광채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로 여겨지며 사랑채 역시 이때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어재연 장군은 근세 조선 말기(고종8년) 구미 열강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때
서해안을 지키다 강화도 덕포진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으로 "이천의 별"이다.
장군의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자는 성우(聖禹)로 1823년
2월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서 어용인(魚用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장단· 회령부사 등을 거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강화영(江華營)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침공해 온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당시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조선군 350명과 함께 전투의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들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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