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 사림파(조광조)
(세조)수양대군=훈구파 /조광조=개혁파
조선이 건국되면서 먼저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게 된다. 사림파와 대립되는의미에서의 훈구파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세력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에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연산군을 축출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권력을 유지, 강화시켜 왔던 것이다.
드라마-공주의남자에서 수양대군역 김영철님
원래 진양대군이었으나 세종께 바꿔달라고 졸라 수양이라는 작호를 얻었다고함
首(머리수.곧 왕이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하나 확인할수없음)
世祖(수양대군)는 그들의 권력과 재산의 세습을 인정하였으며, 권력을 독점하면서 인사권,병권, 토지의 강점등으로 부정부패를 일 삼아 경제권까지 확보하였으며, 그들끼리의 통혼(通婚)으로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왕실과의 혼인으로 외척(外戚)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한다.
世祖에 의하여 탄생된 훈구파.. 이들은 세조의 후반기에 잠시 위축되지만, 세조가 죽은 후 오히려 더욱 그들의 지위가 강화된다. 즉, 중앙정부의 독주에 반발한 이시애의 난(李施愛의 難)을 진압한
남이(南怡)장군 등의 세력이 병권을 장악하며 훈구파와 본격적으로 대립하지만,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유자광(柳子光)의 음모로 남이(南怡)를 죽인 이후 그들은 다시 익대공신(翼大功臣)으로 책봉되었고, 예종이 즉위 1년만에 죽어, 나이 어린 成宗이 즉위하게 되자 그들의 세력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들은 특정한 벼슬이, 직책이 없어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원상(院相)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권력을,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성리학적 명분을 훼손하였다는 잘못보다도, 그가 원하거나 또는 예측하지 못했어도 결과적으로 조선 500년을 뒤 흔들었던 세도정치의...당쟁의 씨앗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인 과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훈구파는 성종 26년간 과 연산군 시절까지 권력의 전횡을 일삼다가 스스로 연산군을 내쫒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다시 공신으로 책봉된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한다
반정(反正)에 의하여 연산군(燕山君)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中宗..그는 명색뿐인 왕,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그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 하였다. 심지어 功臣들은 왕비의 아버지 신수근(愼守根)이 연산군 시절에 영의정을 지냈다하여 왕비의 폐위(廢位)를 주장, 관철시킨다.신수근의 동생이 연산군의 왕비이었으며, 그의 딸이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이었다.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던 中宗은 재위 8년 무렵, 박원종 등 반정공신 3인방이 죽으면서, 기존의 훈구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파트너를 찾게 되었다. 이 때 조광조는 과거 初試에 장원하였고, 5년 후인 1515년에 성균관에서 치룬 알성시(謁聖試)에서도 2등으로 급제하여 중종의 주목을 받으면서,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었다.
어느날 중종은 성균관을 방문하여 " 오늘 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聖人의 理想的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라는 책문(策門)을 던졌고, 조광조는 "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을 핵심으로 하는 답언을 내었다.
이 책문을 계기로 가능성만 있던 조광조는 中宗의 파격적인 신임을 얻어 대사헌 등의 요직에 임명하면서 중종은 자신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삼았다.
자신의 시대를 " 改革의 時代 "로 인식한 조광조는 시대의 不正과 모순을 극복해 가는 다양한 정책들을 강력하고도 급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한마디로, 유교적 이상정치, 도덕정치의 실현이었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敎化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의 실현, 이 것이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핵심이었다.
그는 우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정치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학문적 소양과 개혁의지가 있는 인재들을 고르게 발탁하기 위하여 기존의 과거시험 대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한다. 추천제인 현량과를 통하여 신진인사를 대거, 과감하게 영입하여 정치권의 물갈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개혁 성향의 젊은 인재들이 정계에 등장하여 조광조의 지지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 세력들은 王에게 도덕적으로 완벽할 것을 요구하면서 신하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언론의 위상을 강화시켜 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한편, 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의하는 경연(經筵)의 활성화를 통하여 왕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조광조는 성리학 이외의 이단(異端)사상을 차단하기 위하여, 도교(道敎)의 제천행사(祭天行事)를 주관하던 소격서(昭格署)를 페지, 정치문제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조광조 세력은 "소학(小學)"과
향약(鄕約)의 보급에도 전력을 기울인다. 사람들이 향촌을 주도할 수 있는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향촌에서 士林派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小學을 보급함으로써 유교질서의 확산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훗날 서원(書院)의 토대가 되었다.
조광조는 민생개혁도 추진한다. 당시 백성을 가장 괴롭힌 (貢物..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였으며, 均田制를 실시하여 토지의 집중을 완화하고,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여 부유층의 재산 집중을 막으려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기존 훈구파들의 반발 또한 조직화되고, 확산되었다.
여기에 조광조의 위훈삭제(僞勳削除)는 기름을 끼얹었다. 위훈삭제(僞勳削除)란 중종반정 때에 공을 세운 공신세력에게 준 훈작(勳爵) 중에 가짜로 받은 것을 색출하여, 이를 박탈하고, 이들에게 지급하여 준 관직,토지,노비와 저택을 몰수하려는 것이었다.
실제 중종반정 후, 박원종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은 무려 126명으로 45명의 개국공신, 그 후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공신 53명을 훨씬 뛰어 넘는 숫자인 것이었다. 결과 76명이 해당되었고, 이로써 훈구세력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중종과 조광조... 두 사람은 서로 이용하면서도 서로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종은 반정공신들에 의하여 위축된 자신의 입지를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의 발탁을 통하여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비록 반정에 의하여 추대된 왕이었지만, 중종도 점차 왕권을 강화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상론에 입각하여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불편한 관계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반정공신들과 훈구파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기용하였던 中宗 또한 자신의 기반을 어느 정도 강화하자, 이제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릴 나약한 王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림파의 견제에 불편과 피곤을느낀 중종은 사림들을 견제할 세력을 훈구파의 반발에서 찾았다. 그야말로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었다.
남곤(南坤), 김전(金銓), 심정(沈鼎) 등은 희빈홍씨(喜嬪洪氏)의 아버지인 홍경주(홍경주)를 중심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통하여 "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 "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글자를 당분(설탕)이 섞인 글을 쓰면 개미가 설탕을 파먹으면서
형상이 나오게함...음모조작질)
주.초.위.왕 (走.肖.爲.王 ...走.肖는 趙의 破字)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王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조장하였다. 1519년 11월 드디어 홍경주 등은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하다고 건의하자, 中宗을 이를 선뜻 받아들였다.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었고, 그 외 수 십명이 처형,자결,유배,파직을 당하였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조광조 체포)
기묘사화 이후 훈구파는 다시 要職에 임명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고, 위훈삭제된 공신들의 지위를 복권시켜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면서, 사림파의 권력기반이었던 여러 제도를 혁파한다. 그러나 이러한 훈구파의 노력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사림파의 주장은 시대적인 설득력이 있었기에 근원적으로 불식시킬 수는 없었다. 즉 사림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宣祖시절 사림파들은 다시 再起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의 理想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했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환히 비춰주리
- 정암 조 광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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