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耘谷 원천석(元天錫) 墓域

강나루터 2018. 9. 8. 05:06

耘谷 원천석(元天錫) 墓域

<강원도 기념물 제75호>

○위치: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

 (태종대와 묘역, 운곡시사)

 

 

 

 

 

 

 

 

 

 

字는 자정(子正), 號는 운곡(耘谷), 本貫은 원주(原州)로서, 윤적(允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고려말의 忠臣이자  忠義의 人物이다.   高麗에서 국자진사(國子進士)를 지낸 그는 문장이 풍부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忠義가 대단했던 사람으로 고려말에 국정이 문란하여지자 原州 치악산으로 들어가 農事를 지으며 부모를 공양하는 한편 이색(李穡)등과 교재 하면서 시사(時事)를 개탄하였다.

 

일찍이 조선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바 있어 태종이 즉위하자 자주 벼슬할 것을 권유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한 임금만을 섬긴다는 절개를 지켰다. 작품으로 망국(亡國) 고려를 회고(懷古)하는 시조(時調)한수가 전해지며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 (國史)와 저촉된다는 점이 많아 후손의 화가 두렵다 해서 모두 불살랐다고 한다.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며, 저서로는 운곡시사(耘谷詩史)가 전해진다.

 

특히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는 時調

"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五百年)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라는 회고가<懷古歌>의 작자로 유명하다.

 

꿩의  報恩 傳說에서 보여지듯 예로부터 義와 禮,   그리고 소박한 인심을 자랑하는  태백산맥의 허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차령산맥 남쪽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험하다고 하여 "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는 산 " 이라는 우스갯소리의  치악산국립공원  비로봉아래,  친구 無學大師가 所點했다는 소박하고 예쁜 봉요혈(蜂腰穴)은  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스승 耘谷 원천석 先生의 墓다. 

 

[形氣論]

龍脈과  주룡(主龍)을 살피기 위해 내용(來龍)을 따라 올라 보니  기복(起伏)의 고저(高低)와 행룡(行龍)의 폭에도 힘이 넘치는 생룡(生龍)으로  입수도두 旺盛하고 아름답고 貴한 돌이 穴氣를 받쳐준다.  현무봉(玄武峰)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탐랑성(貪狼星)으로 위풍당당하며 좌우(左右)로 뻗어 내려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기세(氣勢)도 대단하고, 관쇄(關鎖) 또한 잘 되어 있다.

겹겹이 감싸준  外靑龍 外白虎는 은둔자(隱遁子)의 神仙界라 하기에 충분하다.  순전밑으로 봉요형(蜂腰形)이 되어있어 단순하면서도 예쁜 모양은 山形을 君子形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묘(墓) 앞으로 길게  뻗은  순전(脣前)과 같은 능선이 있어 그  끝에 선생의 부인 묘(墓)가 있는데 그 곳이 혈처(穴處)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간쯤에 혈처(穴處)가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 곳 역시 양쪽 골짝이 너무 깊고 혈(穴)을 보호(保護) 해주는 보호사(保護砂)가 없어 혈처(穴處)로 보기엔  현재의 墓 形態가 보는 자에게 시사해준다.

 

傳하는 말에는 生存時에 교분이 있었던 無學大師가 墓所를 잡아주면서 " 현재 墓가 있는 위 지점은 삼대정승이 나서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고, 아래지점은 백대자손이 번영할 곳이다 "라고 하니, 耘谷 선생은 후손을 위해 아래 지점인 봉요혈(蜂腰穴)로 定하였다고 한다.

유언(遺言)에 따라 모셔진 선생의 묘(墓)는 정혈지(正穴地)  아래지점을  擇하여 蜂腰穴 자리에 썼다.
“ 이곳에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定)해야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지 않고 손(孫)이라도 이어져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선생은 이미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를 깨닫고 하늘의 뜻을 간파한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옛날 어느 현인(賢人)도 “ 도(道)는 그 곳에 있는데 인간(人間)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라고  탄식(歎息)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耘谷先生은  정혈지(正穴地)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은 주인(主人)이 아니며, 때가 이르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처럼 하늘의 뜻을 깨달은 선생이라면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는 통달(通達)한 분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찾아 올 것을 미리 알고서 만나주지 않은 것도 인간사(人間事)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로 조상(祖上)의 묘(墓)를 명당(明堂)에 모시고 음덕(陰德)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려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선생은 이미 이세상의 도(道)를 깨닫고 가신 분으로서 후세(後世)에 찾아온 풍수학인(風水學人)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실까............

꾸밈없이 소박하고 청초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일생을 淸高하게 살다간 선생의 선비정신을 후세에 傳하고져 하였으니 許穆先生은 碑文에서 백이 숙제(伯夷 叔齊)가 절개를 지킨 고사에 비유 함이다.

 

原州市內서 동쪽으로 강을 건너 시립박물관 방향으로 가면 치악산 아래 마을 " 황골쉼터 및 먹거리단지" 로 가는 道路를 이용하여  가다보면  석경사(石逕寺)라는 푯말 옆에 里程表가 보인다.

우측 길따라 몇구비 돌면 墓所入口가 보이며 도로및 주차장 시설정비에 한참 바쁘다.   墓所로 가는 山道에는  先生에 관한 이야기를  圖 .書로 짜임새 있게 羅列시켜놓은 것은 他의 模範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耘谷선생의 墓所가 있는 이곳을 石逕이라하여 석경촌(石逕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理氣論] 

이곳은 입수도두처(入首倒頭處)에서 경사지는 곳에 타원형의 유두혈(乳頭穴)을 맺어 놓고 있다.  

탐랑성(貪狼星)은 대부분 좌우(左右)로 개장(開帳)하여 청룡(靑龍)·백호(白虎)를 만들고  개장천심(開帳穿心)으로 내려온 주룡(主龍)은 기복(起伏)하여 행룡(行龍)하는데  용진처(龍盡處)에서 혈(穴)을 맺고자 할 때는 일반적으로  유두혈(乳頭穴)을 맺는 곳이 많다.

後龍이   乙辰龍으로  乙入首에   진좌술향(辰坐戌向)하고   물은 左水到右하여 巽巳方 臨官水와 丙午方 帝旺水,丁未方의 巨門水와 같이 우측의 艮寅長生水가 乾亥의 絶位에서 합하여 나가면 火局의   正墓向이다. 辛入乾宮百萬庄이라 辛向을 하고 乾方으로 물이 흘러나가면 大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發富發貴하고 人丁旺盛하고 福壽雙全한다고 하니  일찌기 唐나라의 양균송(楊筠松) 先生께서는 八十八向法을 바르게 作局할 수 있다면 天地에 버릴 땅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물이 右水到左하였다면  生水到沖絶位되어 극히 凶하다.

 

또한 乙入首에 戌向이라. 入首가  陽이면 向도 陽이 되어야 하는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과 포태법(胞胎法)에도 합당되는 法術이다   

墓所를 向하여 우측아래 쪽  떨어진 자리에 당대의 仙人 미수 허목(許穆)이 글을 짓고 이명은(李命殷)이 글씨를  섰다는 아담하면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碑石이  있다.

 

[묘갈(墓碣)]

선생은 원주 사람으로 성은 원(元)씨요. 이름은 천석(天錫)이고, 자는 자정(子正)이며, 고려국자진사(高麗國子進士)이다. 고려(高麗)의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지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살면서 호(號)를 운곡(耘谷)이라 하였다. 선생은 고려(高麗)가 망하자 치악산에 들어가 종신(終身)토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라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그 절의(節義)를 높이 추앙(推仰)하여 선생의 초막을 찾았을 때 선생은 이를 피하고 만나지 아니하였다. 태종(太宗)이 계곡 바위에 올라 선생의 거처를 지키는 노파를 불러 후사하고 선생의 아들 형(泂)에게 기천현감(基川縣監)의 벼슬을 내렸다.

 

후인(後人)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하였는데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근방에 있고, 지금 원주(原州)시가지 동쪽 10리쯤 되는 거리인 석경(石鏡, 石經이라고도 쓰고 우리말로는 돌갱이라고 함)에 운곡(耘谷)선생의 묘(墓)가 있으며 선생의 묘(墓) 앞에 있는 묘(墓)가 부인의 묘(墓)라고 한다.

부인 원씨는 선생과 같은 원씨가 아니니 원주(原州)에 두 원씨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장남 지(沚)는 직장동정(直長同正)이고, 차남 형(泂)은 기천현감(基川縣監)이다. 선생의 후손(後孫)들이 매우 많으나 기천현감(基川縣監)의 후손(後孫)이 더욱 많다.


내가 듣기로는 군자(君子)는 은둔(隱遁)하여도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先生이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어 살았으나 세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며 도(道)를 지킨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몸을 깨끗하게 함이다.

백이(伯夷)의 말에 "옛날에 선비들은 잘 다스려진 성세를 만나면 그 맡은 바 임무를 피하지 아니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 하였으니 천하가 암울하니 이를 피하여 깨끗하게 내 지킬 바를 지킴만 못하다." 하였다. 이런 탓으로 전(傳)에 이르기를 날이 추어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홀로 푸르름을 알게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맑은 선비를 알아보게 된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 백이(伯夷)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고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물러났으니 백이(伯夷)는 성인(聖人)으로 청백(淸白)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선생은 백이(伯夷)에 견줄만한 사람이다.

미수 허목(1595~1682 許穆)선생은 찬(贊)하여 이르기를 "뜻을 세워 암혈(巖穴)에서 사는 선비도 나아가고 물러날 때가 있고, 세상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을 굽히지 않았도다. 그 몸이 욕되지 않았으니 후세(後世)에 모범(模範)이 되어 우직(禹稷)과 이제(夷齊)와도 같으니 선생은 과연 백대의 스승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출처 : 영일서단(해맞이 마을)
글쓴이 : 妙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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