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사 행장(鄭知事行狀)
공의 성은 정(鄭), 휘는 엽(曄), 자는 시회(時晦), 호는 설촌(雪村), 또 다른 호는 수몽(守夢)인데 초계인(草溪人)이다. 6대조 발(發)은 벼슬이 지중추부사이다. 증조 희년(熙年)은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조 선(璇)은 감찰(監察)에 추증되었으며, 고 유성(惟誠)은 진사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3대에 은전을 추급한 것은 모두 공의 귀(貴)로 인한 것이다. 모(母)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정경부인에 추봉되었는데, 찬성에 추증된 언태(彦台)의 딸이다. 윤씨 부인이, 어떤 이인(異人)이 채작(綵鵲)을 주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가정(嘉靖) 계해년(1563, 명종18)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나서부터 풍채와 재기가 뛰어나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3세 때에는 글자를 능히 읽었다. 이때 모부인에게 혈질(血疾)이 있었는데, 의원이 황구(黃狗)로 소주(燒酒)를 내려 쓰면 좋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때 공이 곁에서 이 말을 듣고 뒤에 유모를 따라 길에 나갔다가 황구를 보고는 유모에게 말하기를 “네가 저 개의 주인이 누군지 물어 보지 않겠느냐.” 하자, 유모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그 개를 사서 어머니 병에 약으로 쓰려고 한다.” 하므로, 듣는 이들이 공을 기특하게 여겼다.
4세 때에는 남의 집 문희연(聞喜宴)에 가 구경을 하는데,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공을 눈여겨 보고 누구의 아이냐고 물어 보고는 공을 불러 “네가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면서 글을 외어 보게 하자, 공이 묻는 대로 착오 없이 척척 외니, 온 좌중이 몹시 감탄하였다. 참판 최옹(崔顒)은 공의 이웃에 살았는데, 그 역시 이르기를 “이 아이는 틀림없이 재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학문에 더욱 힘썼고, 판서 이산보(李山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판서의 숙부 지함(之菡)은 세상에서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라 일컬어진 분으로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고 지인지감이 있었는바, 공의 뛰어난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후일에 반드시 큰 명예를 독점할 것이다.” 하였다.
16세 때에는 향해(鄕解)에 선발되어 화려한 명예가 마침내 드러났다. 이어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의 문하에 가서 학업을 받았고, 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종유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어 호강한 기습을 제거하고, 단정하고 엄숙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함께 사귀는 사람은 모두 한 시대의 명사들이었는데, 도의로써 서로 절차 탁마하여 기거(起居)와 어묵(語黙)에 모두 법도가 있었다.
만력(萬曆) 계미년에 처음 벼슬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에 보임되었다가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니, 명망이 매우 성대하였다. 이해 겨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치도록 집상(執喪)을 하였다. 그래서 몸이 아파도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잠을 잘 때도 옷을 벗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제전(祭奠)을 드릴 때는 손수 칼과 도마를 잡아 제수를 갖추었다. 이렇게 하여 여름을 지나다 보니, 등살이 다 문드러지고 두 눈은 눈물을 많이 흘림으로 인해 가리는 것이 생기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모부인께 걱정을 끼치게 될까 염려하여 그 사실을 숨기고 고(告)하지 않았는데, 달포 뒤에 공의 선인(先人)이 모부인의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우리 아이가 곧 실명(失明)을 하게 되었는데, 왜 방치해 두고 구원하지 않는가.” 하므로, 그제야 모부인이 깜짝 놀라 비로소 약을 써서 그것을 완치시켰다.
복(服)을 마치고는 순서에 따라 정자(正字)ㆍ저작(著作)ㆍ박사(博士)에 승진하였다. 정해년에는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무자년에는 모친 봉양을 위하여 김포 현감(金浦縣監)으로 나가서 청렴하고 간솔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이때 부평(富平)에 사는 한 백성이 원가(怨家)가 있었는바, 그 원가 사람을 사죄(死罪)로 몰아넣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한 구를 남몰래 입수해 가지고 이를 원가의 자식이 제 종을 죽인 것인양 속여서 관에 고발하였다. 그러자 관찰사가 공에게 그 옥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뭇사람들이 모두 이 자식이 사람을 죽였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공만은 이 옥사에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 중 말로 연좌된 미결수 하나가 있어 스스로 진술하기를 “나는 모역을 한 것이 아니요, 주인집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거짓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멀리 도망가 있다가 이번 일로 잡혀온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명하여 그의 주인집을 조사해본 결과, 그가 바로 원가를 무고한 그 부평 백성의 종이었다. 이로 인해 그 부평 백성의 옥사가 제대로 처리되었다. 그 후 어버이 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역적 정여립의 변으로 높은 벼슬아치들이 마구 연좌 처벌되자, 공은 문을 굳게 닫아 내빈을 거절하고서 항상 옥사 다스리는 것이 정도에 지나침을 걱정하였다. 이어 형조ㆍ공조의 낭관에 옮겨졌다.
신묘년에는 조모의 상을 당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었다. 임진년에는 왜란을 만나 대부인을 모시고 호서에 우거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더욱 독실히 학문을 연구하였다. 갑오년에 상제(喪制)가 끝나자 홍문관 수찬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왔다.
이때 묘당(廟堂)에 왜적과 강화(講和)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도 소장을 올려 강화하기를 청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불가함을 굳게 쟁론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총독(總督) 고양겸(顧養謙)이 참장(參將) 호택(湖澤)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왜적과 강화하라고 협박하자,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상의 앞에 나아가 의견을 아뢰기를 “다만 천조(天朝) 장관(將官)의 말을 빙자하여 천조에 주문(奏聞)할 것이요, 강화를 청한다고 드러내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강화를 하고 안 하고 간에 의당 그 이해를 분명하게 가려서 솔직하게 청해야지, 군신(君臣)의 사이에 어찌 두 가지로 말을 해서 되겠습니까. 유성룡의 말은 명백하지 못합니다.” 하고, 인하여 화의를 준절히 배척하니, 선조가 이르기를 “이러한 유자(儒者)의 논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당시 남쪽 변경에서 올라온 치보(馳報)에 봉함(封緘)을 뜯은 흔적이 있었으므로, 어떤 농간이 있는가 의심하여 공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해서 일로(一路)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공이 그곳에 가 보았으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므로, 농간을 부린 자는 찾아 내지도 못하고 백성들만 소요시킬까 두려워하여, 상께 아뢰어 이 일을 작파하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충직함 때문에 시속 사람들에게 해독을 받아왔는데, 그가 이미 죽은 뒤에도 당로자(當路者)에게 씹혔는바, 당로자가 그의 관작을 추탈하려고 하나 공이 옥당(玉堂)에 있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공을 무함하기를 “정모(鄭某)가 장차 상의 앞에서 정철의 관작 추탈하자는 논의를 막을 것이다.” 하고는, 먼저 공을 공격하여 제거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곧 해면되었다.
을미년에는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나갔다가 방백에게 거슬리어 파면되자, 군민들이 성문을 닫고 못 가게 가로막았으며, 송덕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병신년에는 예조 정랑으로 고급사(告急使)에 임명되어 명 나라 밀운(密雲)의 군문(軍門)에 가서 원병(援兵)을 청하고 돌아와 성균관 사성을 거쳐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수원은 서울 근교의 산읍(山邑)인데다 또 삼도(三道)의 큰 길에 위치하였고 막 병화를 겪은 상태라서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텅비었는데, 명 나라의 대군이 연달음으로써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소요하였으나, 공이 방도가 있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안도하였다. 황조의 장사(將士)가 왔을 적에 다른 군현들은 저들에게 욕을 많이 받았으나, 저들이 공을 보면 공경하므로, 이졸(吏卒)들이 서로 축하하며 이르기를 “우리 부백(府伯)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상국 사람들도 예로 대우하는데, 더구나 우리 백성들 무리임에랴.” 하고, 일로써 속이지 말자고 서로 경계하였다. 이곳에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무술년에는 성균관 직강, 홍문관 응교, 겸 시강원 필선,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고 통정(通政)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김공 수(金公睟)가 호조 판서로 있었는데,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군량을 대지 못한다 하여 김수를 체직시키고 한응인(韓應寅)을 대신 호조 판서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좌승지 허성(許筬)이 양호의 의견을 따르자고 청하자, 공이 반대 의사를 견지하여 이르기를 “관작을 주거나 뺏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이므로, 그 권한을 남에게 빌려 줄 수 없다.” 하였는데, 선조의 하교가 공의 의논과 똑같았다. 그러자 허성이 공의 견해에 감복하여 자신이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이어 우부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에 체배(遞拜)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갔는데, 함께 간 사신이 비루한 행위가 있었으므로, 공이 그곳을 왕복하는 동안에 한 번도 그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의 모함을 받았다.
기해년에는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는데, 병사(兵使) 이광악(李光岳)이 나주의 13도(島)를 빼앗아 병영(兵營)으로 이속시키자, 공이 이 사실을 방백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광악이 여기에 앙심을 품고 다른 일로 공을 능멸하여 책망하므로, 공이 벼슬을 그만두어 버렸다. 그러자 이광악이 공의 죄를 얽어 확대시켜서 조정에 보고하니, 선조가 하교하기를 “정엽은 벼슬살이를 잘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방백에게 명하여 철저히 조사하게 한 결과 과연 끝내 그런 사실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잉임하도록 하였으나, 공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그 후에 이광악이 군졸을 징집하면서 살아 있는 군졸을 죽은 군졸로 처리하였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선조가 대단히 진노하고 양사(兩司)는 서로 소장을 올려 이광악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은 이때 간원에 있으면서 이광악의 죄는 고의가 아닌 과오에서 빚어진 것임을 알고서 힘써 그를 구원하니, 사람들이 그제야 공의 마음씀이 공평함을 알았다.
경자년에는 병조 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강직하게 일을 논의하니, 조야가 모두공의 인품을 사모하며 기대하였다. 이어 다시 병조 참의가 되어 영위사(迎慰使)로 관서(關西)에 가서 조사(詔使) 도사(都司)를 맞이하고 들어와 예조 참의가 되었다. 이때 기자헌(奇自獻)이 척리(戚里)로 일어나 권세를 은밀히 도모하면서 겉으로는 사류를 사모한 체하였으므로, 당시 의논이 그를 이조 참판에 의망하려 하였으나, 공은 그를 불가하게 여겼다. 그리고 기자헌이 혹 공에게 들른 적이 있더라도 공은 그에게 보답하여 사례하지 않았으므로, 기자헌이 원한을 품고 은밀히 공을 중상하였다.
임인년에는 기자헌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축출하면서 공을 물리쳐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그러나 공은 그 직임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서, 폐해진 일들을 일으키고 병폐된 것들을 제거하여 성지(城池)와 기계를 시원스럽게 일신시키고,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들을 장려하여 초하루와 보름이면 향교를 참배하게 하였으며, 학생들에게 일과를 주어 시서와 예법을 가르침으로써, 종성 사람들이 책을 끼고 글공부를 하게 된 일이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은 날마다 공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경전에 크게 힘을 써서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유고(遺稿)에 실려 있다. 또 종성부에 황폐한 전답이 있었는데, 호조에서는 오히려 종성부에 명령을 발부해서 그 세금을 다른 물품으로 대납하도록 하여 해마다 초피(貂皮)를 수백 장씩 징수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심지어는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상환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여 이 일을 혁파시켰다.
계묘년 가을에는 노추(奴酋)가 홀온(忽溫)을 공격하면서 육진(六鎭) 길을 거쳐 수만의 기병이 갑자기 성 밖에 이르자, 모두 노(虜)가 우리 국경을 침범한 것이라 하여 백성과 병졸들이 물끓듯이 소란해졌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아군과 적군의 수가 현격한 차이가 나니, 기묘한 계책을 쓰지 않으면 저들을 방어하기 어렵다.” 하고는, 마침내 성문을 활짝 열고 기치를 많이 늘어 세운 다음, 남녀 노약자까지 모조리 징발하여 군복을 입혀서 성을 순회하게 하되, 밤이면 횃불 하나에 두서너 가지를 만들어 함께 불을 붙이도록 하니, 그 불꽃이 하늘까지 비추었다. 이에 앞서 공이 경내 호구(戶口)를 계산하여 성첩(城堞)을 분담하여 주고, 급한 일이 있으면 와서 그 성첩을 지키도록 약속을 하였는데, 노가 이르자 과연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이 모두 모여 지킴으로써 노가 마침내 군졸을 이끌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노가 7주야 동안 성을 포위하였으나 그들에게 패배당한 것은 없었고 부노(府奴) 한 사람만이 사로잡혀 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정에 이 보고가 전해지자, 이때 기자헌이 막 정권을 잡은 터라, 공이 적을 물리친 공로는 따지지 않고 한 사람이 사로잡혀 간 것으로 공의 죄를 만들어 치죄(治罪)하게 한 뒤 동래(東萊)로 좌천시키니, 종성의 선비들 가운데 소장을 올려 공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배소에 있으면서 오직 서적을 보며 스스로 즐기었다.
갑진년에는 사유를 받아 광릉(廣陵)의 전장(田莊)으로 돌아와 있다가, 연해서 성주(星州)와 홍주(洪州)의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모두 파면되었다. 그러자 공은 세상에 용납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고 여강(驪江)의 옛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무신년에는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기유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태학생들을 인솔하고 날마다 《심경》ㆍ《군사록》을 강의하면서 제대로 수업을 하지 못한 자는 회초리로 때려서 경계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사학(四學)에도 나가서 강독하기를 마치 태학에서와 같이 하니, 선비들이 모두 성대히 공의 풍도를 추향하였다.
경술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선량한 자를 발탁시키고 간악한 자를 적발하여, 호령을 엄숙하고 명백하게 하였다. 신해년에는 예조 참의, 승지를 거쳐 판결사가 되었는데, 관청에 오래도록 체류된 송사가 없었다. 이어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이 직에 있은 지 이미 10년이 되었기에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이 모두 신진 소년이었고, 또 시사가 날로 그릇되어 감을 알고는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임자년에는 도승지가 되었는데, 광해군이 경연에 나오지 않으므로, 공이 간언(諫言)을 올리고, 또 임금이 사특한 자들의 인연하는 길을 터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여 넌지시 경계하였다. 이윽고 병으로 해면되었다가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 가선(嘉善)에 올라 참판이 되었다.
계축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해 여름에 박응서(朴應犀)란 놈이 이이첨(李爾瞻) 등의 은근한 뜻을 받들어 허위 고변을 함으로써 마침내 큰 옥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위로는 자전(慈殿)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무함하였으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은 8세의 동자(童子)로 해도(海島)에 유배하였고, 명경(名卿)ㆍ거실(巨室)을 체포 수감하였다. 그러자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자전께 효도를 극진히 하라는 뜻으로 진계하려 하였는데, 대부인의 저지를 받아 진계를 올리지 못하고는, 스스로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책임을 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갑인년에는 공조 참판으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을묘년에는 저주 사건으로 교서를 반포하려 할 적에 이이첨이 금부(禁府)와 회의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공만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인하여 동지의금부사의 직임을 사퇴하였다. 이해 가을, 가의(嘉義)에 올랐고, 병진년에 자헌(資憲)이 되었다. 공이 계축년 이후로는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오직 대부인 봉양 때문에 한산한 직임에나마 억지로 종사하기는 했으나 절반 이상을 시골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일본이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자, 공이, 반드시 황조(皇朝)에 아뢰어 처리해야지 우리 마음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헌의하였다.
정사년에는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무오년에는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논의가 결정되자, 항론하는 자는 법망에 걸리고 아부하는 자는 부귀를 도모하여, 온 세상이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는데, 공은 하찮은 지방관으로 영외(嶺巍)에 은거하여 산해(山海)의 절경을 두루 다 수탐하면서 세속 밖에 유유자적하였다. 이때 궐내에서 사람을 보내 그곳에 사찰을 크게 짓고자 하여, 궁노(宮奴)가 후궁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나, 공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을에는 파면되어 여주의 전장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로는 다시 경성을 들어가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강상(綱常)이 단절되었는데 어찌 다시 벼슬아치의 반열에 설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곳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동안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성현들의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탐색한 결과 혼자만이 터득한 즐거움이 있었다.
기미년에는 광주(廣州)로 옮겨가 살면서 세상과는 날로 멀어졌으나, 시속을 걱정하는 마음은 가슴속에서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항상 자제에게 이르기를 “간악한 신하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현혹시킴으로써 국사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말 한 마디라도 올려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지 못하고, 몸을 감추고 한가이 물러나서 마치 세상을 잊어버린 자와 같이 하고 있으니, 이는 성은을 크게 저버린 것이다.” 하였다. 기미년에 일찍이 광해군이 엄한 교지를 내려, 재신(宰臣)으로 교외에서 쉬고 있다는 것으로 공을 책망하자, 공이 대궐에 나아가 대죄하였는데, 임술년에 또 명을 내려 공을 독촉하였으나, 공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계해년에 금상(今上)이 대의를 일으켜 반정(反正)하고 광해군을 강화(江華)에 안치시키게 되자, 공이 말하기를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천명을 끊었지만, 신하들로서는 일찍이 북면(北面)하여 섬겼던 분이니, 의당 곡하여 보내야 한다.” 하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기색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 조정에 들어갔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먼저 조정으로 들어가면 공을 배제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므로, 공이 참소를 피하여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한 시대의 명사들이 공이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모두 벼슬을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자 공을 저해하던 자가 크게 뉘우쳐 다시 공과 기꺼이 화합하였는데, 공은 앞서의 일을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이때 상이 사습(士習)을 새롭게 하기 위해 사표가 될 만한 조신을 가려 대사성으로 삼으려 하자, 뭇 사람의 뜻이 공에게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대사성으로 동지경연 원자사부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이 학제(學制)를 정하여 일과를 권면하기를 마치 옛날에 시행하던 것과 같이 하되, 과조(科條)를 더욱 엄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횡당(黌堂)과 재사(齋舍)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함께 거처하면서 학문을 강토하게 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이 날마다 책을 들고 사석(師席)에 나아가 공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로 다투어 공을 사모하여 본받으니, 법도가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지평 박지계(朴知誡)는 한빈한 선비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으로서 사묘(私廟)를 추숭(追崇)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공이 그를 대면하여 “그대는 징사(徵士)로서 맨 먼저 상의 뜻에 영합하는 논의를 내놓는 것은 무슨 뜻인가.”고 힐책하였다.
이해에 폐조 때의 관계(官階)를 사헌부의 논의로 인하여 모조리 고치게 되자, 공 또한 자헌(資憲) 품계를 반납하였다. 이때 이조 참판 자리가 비어 공이 수선(首選)을 받았는데, 상이 공이 아니면 선비를 양성할 수 없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옛날에도 실직으로 대사성을 겸임한 자가 있었는가?” 하니, 대신이 정인지(鄭麟趾)와 서거정(徐居正) 등이 겸임했다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겸임했는데, 그 후 여러 관직에 누차 전임되면서도 대사성을 그대로 계속 겸임하였다. 공이 간원에서도 매우 엄정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강(侍講)을 할 적에는 장구(章句)의 훈고(訓誥)만을 위주하지 않고, 어떤 사건을 지적하는 데 있어 경도(經道)를 의거하여 넌지시 타이르곤 하니, 그때마다 상이 반드시 안색을 나타내어 들어주었다. 공은 또 진계하기를 “전하께서 날마다 부지런히 경연에 임어하시는데도 성학(聖學)은 더 진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타고난 자질로 만일 학문에 공을 들인다면 요순이 되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이 재주와 슬기가 비록 높았더라도 진실로 학문의 힘이 없으면 그 정치는 끝내 반드시 구차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간절히 묻고 가까이 몸에 견주어 생각하며, 힘써 행하고 지키기를 간략하게 하시어, 정치를 도모하는 데 있어 반드시 삼대(三代)를 표준으로 삼으소서. 또 야기(夜氣)가 청명한 때에 자주 유신들과 토론하여 끊임없는 공부를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겼다.
그 다음날에 야대(夜對)를 명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일을 아뢰었으나 상은 자못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천위(天威) 아래서는 신하들이 회포를 진술하려 해도 항상 두려워서 머뭇거리어 백에 한두 가지도 진달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전하께서 말이 없이 대하심에리까. 전하께서 애써 나라를 다스린 지 벌써 1년이 지났음에도 치적에는 그만한 보람을 얻지 못했는데, 신이 삼가 그 연유를 헤아려 보니, 상하가 모두 하나의 사(私) 자를 타파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상께서 하신 아무 일은 사(私)이고, 아무 일도 사입니다.” 하며 10여 가지 일을 죽 열거하니, 상이 안색을 엄숙하게 고치었다. 또 말하기를 “경연을 여는 날에는 대간의 계사를 의당 바로 들어와 아뢰어서, 위에 간언 들어주기를 급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유배지에 있는 광해군이 일찍이 병이 났는데, 공이 중종 때에 연산군을 대접하던 규례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광해군이 비록 종사의 죄인이기는 하나 신이 일찍이 그를 섬겼었으니, 그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어찌 옛정이 없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상이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에게 수용되는 물품을 후히 보내도록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폐조대의 궁인 중에 죄가 있는 자는 죽이거나 유찬시키는 것이 합당하지만, 그 나머지는 꼭 심하게 다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폐조 때의 궁녀들은 모두 악행을 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다시 액정(掖庭)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상소하여 시무에 관해 수천 언을 진술하였는데, 그 귀추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갑자년 봄에 이괄(李适)이 모반하자, 이원익(李元翼)이 도체찰사가 되어 공을 불러 부체찰사로 삼았는데, 적병이 도성 가까이 깊이 들어옴으로써 도성의 인심이 몹시 소란해졌다. 그러자 공이 상께 아뢰어, 왕자와 삼사의 여러 관원들로 하여금 금중(禁中)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역적 제(瑅)가 이 사변 초기에 흉독을 제멋대로 부리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이때 적이 경기 지방에 육박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피란 계획을 결정짓지 못한 채, 서로 앞을 다투어 집안의 귀중품들을 가지고 나가 피하므로, 공이 그것을 논박하였다. 그런데 적에 대한 경보가 점점 급하여지자, 공이 곧바로 서울을 떠날 계책을 결정하였다. 하루는 공이 상의 앞에서, 좌우에서 좋은 계책을 헌의하는 자가 하나도 없음을 분하게 여겨 성난 목소리로 진언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순간에 달려 있는데, 이 어찌 대신이 말을 하지 않을 때입니까.”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강화(江華)로 가려고 했다가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따라 남쪽으로 가게 되었다. 한강을 건널 적에 배 안의 물이 무릎까지 찼는데도 공이 조용하게 절하고 꿇어앉자,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황급한 때에 어찌 예를 차리는가.” 하니, 공이 사례하기를 “아무리 급한 때인들 어찌 감히 예를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적이 패하여 적의 목이 바쳐지자, 상이 백관에게 은전을 내리고 특히 공에게는 자헌 품계를 도로 주었다. 도성에 돌아와서는 정헌(正憲) 품계에 승진, 대사헌에 제수되자,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일체 법에 따라 시행하였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세상이 혼란한 틈을 타서, 유배중에 있던 재신 권진(權縉)을 제멋대로 죽였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런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된다.” 하고, 그의 죄과를 상주하여 탄핵하였다.
그리고 새로 지은 본궁(本宮)의 종이 궁가(宮家)의 인지(印紙)를 가지고 민간에 횡행하자, 공이 헌부에서 그 횡행한 자를 형신하였다. 그러자 상이 자전께 그 일이 관계된다 하여 헌부의 관원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의 말에 의해 그 명이 환수(還收)되기는 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을축년 봄에 세자의 관례(冠禮)를 행하고는, 공이 원자 사부로서 1품인 숭정(崇政)에 승진되어 세자좌부빈객이 겸해졌는데, 공이 이를 사퇴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이 원자를 가르치는 것이 매우 지성스러우므로, 내가 가상히 여겨 감탄한 지 오래이다.” 하였다. 이때 이조에서 공의 자급이 이미 숭품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사성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원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공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잉임시켰다가, 대신에게 물어 본 결과, 대신이 체직시켜야 한다고 대답하자, 상이 그제야 체직을 윤허하였다.
이때 공이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어 드러눕자, 상이 내의를 보내 위문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공이 유차(遺箚)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과 사정(私正)을 분별할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그해 여름에 별세하니 향년이 63세였다. 공은 병이 막 들었을 적부터 부녀자를 물리치고 조용히 거처하였는데, 별세할 때 역시 부인이 뵙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손을 휘저어 거절하고는 베개를 옮겨 동쪽으로 머리를 두르고 운명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슬퍼하고 조회를 폐했으며, 우의정을 증직하라고 명하고 의식대로 부의(賻儀)와 조제(弔祭)를 내렸다. 동궁도 요속을 보내어 조제하였다.
공의 손자 원(援)이 공의 유차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선경(先卿)의 유차를 보니, 죽음에 임박해서도 임금을 잊지 않아서, 충직하고 절실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다. 유차를 재삼 펼쳐 보고 내가 매우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고 몽매할지라도 감히 그 말을 가슴속에 간직하여 지하에 있는 선경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학생들은 성균관을 비우고 모두 와서 제전을 드렸다. 이해 6월에 양주(楊州)의 소재지 서쪽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여기는 선영이다.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조 판서 산보(山甫)의 딸인데, 인자하고 유순하고 온화하여 남편을 짝함에 있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1남 4녀를 두었다. 1남 원석(元奭)은 문과에 급제하고 현감이 되었는데, 심종민(沈宗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그가 바로 원(援)이다. 장녀는 이정철(李廷哲)에게 시집갔는데, 이정철은 감역(監役)이고, 다음은 나만갑(羅萬甲)에게 시집갔는데 나만갑은 교리이다. 그 다음은 유철증(兪哲曾)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이상질(李尙質)에게 시집갔다. 이정철은 2남 3녀를 두었고, 나만갑은 2남 1녀를 두었으며, 유철증은 1남 1녀를 두었다.
공은 자품이 뛰어나고 기국이 엄정하며, 풍채가 청수하고 기거동작이 묵중하며, 식견이 고원하고 언론이 정대하였다. 옛을 좋아하되 현시대에 어긋나지 않고, 시속을 따르되 세상과 혼동되지 않았다. 일찍부터 사우(師友)를 종유하여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었고, 고서를 깊이 연구하느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그 중에도 《주역》ㆍ《근사록》ㆍ《심경》 등의 글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먼저 가묘(家廟)를 배알하고 대부인께 문안을 드렸다. 좋은 때에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대부인을 모시고 잔치를 하며 즐겼고, 이를 동기간과 친척들에게까지 베풀어 주어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써 서로 화합하였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몸소 살펴 마련하되, 모든 것을 미리 갖추어 저장해 두곤 하여 조금도 신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자신을 위하는 데는 절약하고 검소하여, 한 끼니에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나라에서 받은 봉록은 자기 맘대로 하지 않고 대부인에게 드리어 대부인이 하는 대로만 따랐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는 권세를 피하기를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하여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적인 일로 간청하지 못하였다. 공의 모당(母黨)과 처당(妻黨)들이 폐조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으면서, 공을 배경으로 임금의 원조를 받기를 바랐으나, 공이 일체 물리치고 통하지 않았다. 이이첨(李爾瞻)ㆍ박승종(朴承宗)과는 평소의 교분이 있었는데, 그들이 정권을 쥐고 나서는 공에게 더욱 친절을 베풀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으니, 소인을 대하는 데 있어 미워하지 않으면서 엄격하기는 이와 같았다. 여가로 글을 더러 지었는바, 그 글은 풍부하고 활달하며 사리가 통창하였는데, 공이 저술한 《역학석의(易學釋疑)》ㆍ《근사석의(近思釋疑)》와 유고(遺稿) 약간 권이 집에 소장되어있다.
공이 벼슬을 한 지 40여 년에 걸쳐, 조정에 들어가서는 경악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했다 하면 극진히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바,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고 세상의 교화를 만회시키려고 힘썼다. 또 밖으로 나가 주군들을 다스릴 적에는 은혜와 위엄을 병행함으로써,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에 감복하여, 이르는 곳마다 훌륭한 장관이라 일컬어졌고, 공이 떠나고 나면 더욱 사모하곤 하였다.
천지의 강상이 무너지던 때를 당해서는 그 탁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나 천 길 밖으로 훌쩍 떠나 있음으로써, 혼탁한 시속에 물들지 않아 이름과 행실이 다 온전하게 되었으니, 어찌 책임은 중하고 갈 길은 멀기에 대절(大節)을 당해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는 분이 아니었겠는가. 만년에야 성명한 임금을 만나서는 자주 국가의 이해를 논의하여 명망과 실제가 아울러 융성해짐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공을 재상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불행하게 역량대로 다 쓰이지 못하고 작고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찍부터 공과 막역한 교분이 있었고 진퇴와 출처도 대략 서로 같았는데, 공은 다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아들 원석(元奭)씨가 공의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보여 주고 또 나에게 행장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는데, 그 기록을 보니, 공의 돈후한 덕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위에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그 번다한 것만 산삭하여 돌려보내노니, 비석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는 일은 당세에 덕행 있고 문장에 능한 분이 하게 될 것이다. 동양(東陽) 신흠은 행장을 쓴다.
公姓鄭。諱曄字時晦。號雪村。又號守夢。草溪人。六代祖發。官知中樞府事。曾祖曰熙年。沙斤察訪。 贈左承旨。祖曰璇。 贈監察。考曰惟誠。進士。 贈議政府領議政。三世推恩。皆用公貴。母曰坡平尹氏。封貞敬夫人。 贈贊成彥台女。夢異人授綵鵲有身。嘉靖癸亥擧公。符彩英發。與凡兒殊。三歲能讀字。母夫人有血疾。醫言黃狗肉酒良。公在傍聞之。後隨乳媪出路。見黃狗謂媪曰。爾盍問彼狗主。媪曰奚。公曰欲買爲母病藥。聞者異之。四歲。詣人聞喜宴觀光。鄭林塘惟吉,李栗谷珥在席。目屬公曰。誰氏兒。招而曰。汝學書否。令誦之。公應口誦不錯。一座驚嘆。崔參判顒在比隣。亦曰。茲兒當作宰相云。稍長。學益力。受室於李判書山甫。判書之叔父曰之菡。世稱土亭先生。嘉遯不仕。有藻鑑。奇公俊逸曰。他日必擅大名。十六。選鄕解。華問遂闡。遊於栗谷,牛溪兩先生之門問業。且從宋龜峯翼弼資益焉。有志爲己之學。刮磨豪習。端嚴自持。所與交盡一時名勝。以道義相切磋。起居語默。靡不有度。萬曆癸未。釋褐補承文權知。選弘文錄。聲望藹鬱。冬。丁外艱。持制有過於禮者。病不脫衰。寢不解衣。晨夕祭供。躬操刀俎。經夏。背肉皆爛。兩目因淚生翳。公恐母夫人貽慮。諱不告。月餘。公之先人見母夫人夢曰。吾兒將失明。何置不救。母夫人驚。始用藥已之。服闋。序陞正字,著作,博士。丁亥。司憲府監察,刑曹佐郞。戊子。爲養出宰金浦。莅以廉簡。富平民有怨家。欲寘之辟。潛得溺者尸。誣怨家子殺其奴。告于官。觀察使使公治。衆共言此子殺人無疑。公獨曰。獄有疑端。越明年。鄭賊汝立獄起。有囚辭連。自陳我非謀逆。因主家報仇。詐託死遠去被引。 宣廟命按其主家。乃富平民誣告怨家者奴也。其獄得定。以親癠去官。鄭賊之變。株累薦紳。公杜門却掃。恒憂治獄過當。遷刑,工郞。辛卯。遭祖母憂。持承重服。壬辰。値倭亂。奉大夫人寓湖西。流離遷徙。講學彌篤。甲午。制除。徵以弘文館修撰。廟堂有和議。全羅觀察使李廷馣亦上章請之。公進箚固爭。 皇朝總督顧養謙差參將胡澤。脅我國與倭和。柳相成龍至 上前論奏曰。但憑 天朝將官言爲 奏聞。不須顯言請和。公曰。和與不和。宜辨其利害直請之。君臣之間。豈宜爲兩端說。成龍之言不明白。因峻斥和議。 宣廟曰。此儒者之論。不可無也。南邊馳報有拆封痕。疑有奸。除公敬差官。驗問一路。公往無迹可尋。懼奸不能鉤而徒擾民。白罷之。鄭松江澈以忠直見螫於時。旣歿猶爲當路者所噬。欲追奪其爵。而憚公居玉堂不敢發。誣捏公曰。鄭某將於前席閼其論。先擊公去之。未幾復授司憲府掌令。卽免。乙未。出爲舒川郡守。忤方伯罷。郡民閉城門遮留。立頌德碑。丙申。以禮曹正郞。差告急使。赴密雲軍門請兵。還拜成均館司成,水原府使。水原爲畿輔岩邑。而又當三南孔道。新刳於兵。公私赤立。而大軍絡屬。遠近騷屑。公處之有方。民賴按堵。 皇朝將士之來。郡縣多被詬辱。而見公輒敬。吏卒相慶曰。吾府伯之賢。 上國人猶禮之。況吾氓屬乎。戒毋瞞以事。居九月病遞。戊戌。拜成均館直講,弘文館應敎兼侍講院弼善,司憲府執義。躋通政。承政院同副承旨。金公睟判戶曹。楊經理鎬以餫餉不繼。欲遞睟代以韓應寅。左承旨許筬請從鎬。公持之曰。官爵人主大柄。不可以假人。 宣廟下敎如公議。筬服公之見爲不可及。由右副遞拜刑曹參議。以冬至使如 京。同行使臣有鄙行。公往返。未嘗與之語。竣事還。爲其所陷。己亥。出爲羅州牧使。兵使李光岳奪州十三島。移屬兵營。公報方伯。光岳銜之。以他事轢責公。公棄官。光岳文致公罪上之。 宣廟敎曰。鄭曄善居官。寧有是事。 命方伯究覈。終無事實。 特命仍任。公終不赴。其後光岳簽軍。以生爲死事覺。 宣廟盛怒。兩司交章請罪。公在諫院。知光岳之罪由於眚。力捄之。人乃知公處心公平。庚子。拜兵曹參議,司諫院大司諫。論事侃侃。朝野想望風采。復爲兵曹參議。以迎慰使迎 詔使都司于關西。入爲禮曹參議。奇自獻以戚里起。陰圖權勢。而陽浮慕士流。時議將擬亞銓。公以爲不可。自獻或過公。公不報謝。自獻懷憾陰中之。壬寅。盡逐異己。斥公爲鍾城府使。公不鄙夷之。興廢祛弊。城池器械。噲然一新。崇學礪士。朔望拜鄕校。課諸生。敎之詩書禮法。鍾人挾筴修文事。自公始。公簿領之暇。大肆力於經傳。著四端七情書。在遺稿中。府有田荒廢。而度支猶符府折其稅。歲徵貂數百皮。民至壞產而償之。公乃建請革之。癸卯秋。奴酋之擊忽溫也。路由六鎭。數萬騎猝至城外。咸以謂虜犯我境。民卒鼎沸。公曰。衆寡懸殊。非用奇計難禦。遂開門多張旗幟。悉發老弱男女。幷着戎衣巡城。夜則以一矩作數三枝。光焰燭天。先是公計境內戶口。分堞授之。約以有急則來守其堞。及虜至。皆集無敢後。虜竟引去。圍城七晝夜。無所衂。而一府奴被擄。報聞。自獻方秉柄。不擧却敵功。以一人被擄。成公罪下理。貶東萊。鍾之士子有陳疏訟冤者。在謫唯以圖籍自娛。甲辰宥還廣陵莊。連拜星州,洪州。未幾皆罷。公自知不容於世。返驪江舊居。戊申。拜禮曹參議。己酉。拜成均館大司成。率大學生日講說心經,近思錄。其不能修業者榎楚以警之。時往四學。講讀猶大學。士皆蔚然嚮風。庚戌。拜忠淸道觀察使。擢摘良姦。號令嚴明。辛亥。拜禮曹參議承旨判決事。庭無淹訟。拜大司諫。公居是職已十年。同列皆新進少年。且知時事日非。辭遞。壬子。拜都承旨。光海不御經筵。公進諫。又言人主不可啓邪佞夤緣之路。以諷切之。尋以病免。拜戶曹參議。陞嘉善。爲參判。癸丑。都承旨。夏。朴豎應犀承李爾瞻等風旨上變。大獄遂起。殺 國舅金悌男。上誣 慈殿。永昌大君以八歲童子。竄海島。名卿巨室。相繼逮囚。人人自危。公欲以盡孝 慈殿陳啓。爲大夫人所止不果上。引入遞免。甲寅。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乙卯。以咀呪事將頒敎。李爾瞻要與禁府會議。公獨不往。仍辭同知義禁。秋。陞嘉義。丙辰。資憲。癸丑以後。無仕宦意。唯以大夫人故。黽勉散秩。而太半在江湖。日本請通信使。公獻議必奏 皇朝處之。不可擅許。丁巳。襄陽府使。戊午。廢 母后之議決。抗論者罹文罔。附麗者圖富貴。擧一世汶汶。而公吏隱嶺外。窮搜山海之勝。自適於物外。自闕中遣人。大造寺刹。宮奴持後宮書至。公拒而不納。秋。罷歸驪莊。不復入京城曰。綱常絶矣。何可更齒衣冠之列。居閑益自刻苦。探索聖賢微言奧旨。有獨得之樂。己未。徙居廣州。與世日疏。而傷時悶俗。不弛於中。常語子弟曰。奸臣蔽惑。國事罔極。而不得發一言悟天心。斂身閑退。有若忘世者然。辜負聖恩大矣。己未。光海下嚴旨。責公以宰臣偃息郊圻。公詣 闕待罪。壬戌。又下令督公。公以親老不起。癸亥。今 上擧大義反正。置光海于江華。公言廢主雖自絶于天。群臣曾所北面。當哭送。左右失色不答。公初入 朝。人咸謂先入岩廊。有排擠公者。公避讒謝病歸故里。一時名流聞公去。皆欲引退。沮公者大悔。復與公驩。公不以介意。 上欲新士習。擇朝臣可爲師表者爲大司成。衆意屬公。於是兼同知 經筵元子師傅。公定學制。勸課如昔年所施措。而科條益嚴。大修黌堂齋舍。使群居講討。日操卷就皐比。承公指誨。爭自慕效。有法度可觀。朴持平知誡以韋布徵。上追崇私廟疏。公面折曰。君以徵士。首發迎合之論何歟。是年。廢朝時官階。因臺議盡改之。公亦納資憲階。亞銓缺。公膺首選。 上以爲非公無以造士。不許。久之。 上問大臣曰。古有以實職兼大司成者乎。大臣對以鄭麟趾,徐居正等兼之。尋除大司諫兼大司成。後累遷而兼帶如故。公在諫院。棘棘不阿。其侍講。不專章句訓詁。指事據經。因以諷喩。 上必賜顏色聽納。進戒曰。 殿下日孜孜臨筵。而聖學不加進。以 殿下天資之粹美。若下功於學問。則爲堯舜不難。自古帝王。才智雖高。苟無學力。其治終必苟矣。願 殿下切問近思。力行守約。圖治必以三代爲準。且夜氣淸明之際。頻與儒臣討論。加不息之功。 上嘉之。翌日。命夜對。筵臣奏事。上頗淵默。公曰。天威之下。群臣有懷欲陳。而常恐懼囁嚅。百不達一二。況淵默以臨之乎。 殿下憂勤已踰年矣。治未食效。臣竊究其由。上下俱不得打破私字。因言 上某事私也。某事亦私也。歷擧十餘事。 上爲之改容。且言開筵日臺諫啓辭。當令直入奏之。以示上急於聽諫之義。 上從之。光海嘗病。公引 中廟朝待燕山之規曰。光海雖宗社罪人。臣嘗事之矣。聞其疾。豈無情哉。仍泣下。 上令該司優送需用之物。又曰。廢朝宮人有罪者合誅竄。其餘不必深治。廢朝時宮女。皆嘗爲惡之人。不宜復入掖庭。 上從之。疏陳時務數千言。而其歸格君。甲子春。李适叛。李元翼爲都體察使。辟公副之。賊兵深入。都下洶洶。公白令 王子三司諸官。入禁中宿衛。逆瑅之不能逞兇於變初。以此也。賊迫畿輔。 朝廷定算未決。爭先發家藏出避。公論之。而賊報漸急。公卽旋策去邠計。一日在 上前。憤左右無獻言者。厲聲進曰。國家存亡。在呼吸。此豈大臣不言之時耶。 上初欲之江華。用群議南幸。渡漢津舟中。水沒膝。公從容拜跪。 上曰。蒼黃間。安事禮爲。公謝曰。造次何敢違禮。賊敗獻馘。 上加恩百官。 特還公資憲階。還都。陞正憲。拜大司憲。事無巨細。一遵三尺。慶尙觀察使閔聖徵乘亂擅殺謫宰權縉。公曰。漸不可長。 奏劾之。新本宮奴持印紙橫行閭閻。公自憲府刑訊其橫行者。 上以事涉 慈殿。命遞憲府官。以大臣言還收其 命。而辭不出。拜議政府右參贊。乙丑春。 世子行冠禮。公以元子師傅。進一品崇政兼 世子左副賓客。辭謝。 上敎曰。卿敎誨元子。出於至誠。予嘉嘆久矣。天官以公資級已崇。請遞大司成。 上以敎胄非公不可。仍之而問于大臣。大臣對以宜遞。 上始許遞。公猝患風疾。 上遣內醫存問。病。進遺箚。以格君心辨邪正爲要。夏卒。享年六十三。方病。屛婦人靜處。其卒也夫人請見。 公以手麾之。移枕東首而逝。訃聞。 上震悼輟朝。 命贈右議政。賻弔祭如儀。 東宮亦遣僚屬致弔祭。公孫援以遺箚上之。 上答曰。觀先卿遺箚。臨死不忘君。忠直切實。有踰尋常。披閱再三。予甚悲嘆。予雖寡昧。敢不服膺。以副先卿泉下之望。太學生捲堂來奠。是年六月。葬于楊州治西卯坐之原。先兆也。夫人韓山李氏。吏曹判書山甫之女。仁順慈和。配君子無違德。男一人女四人。曰元奭。文科縣監。娶沈宗敏女。生一男。援是也。女長曰李廷哲監役。次羅萬甲校理。次兪哲曾。次李尙質。李廷哲有二男三女。羅萬甲有二男二女。兪哲曾有一男一女。公資稟超邁。器局峻整。儀觀粹朗。容止簡重。見識高遠。言論正大。好古而不背於今。應俗而不混於世。早從師友。學有淵源。硏覃墳素。手不釋卷。尤用力於周易,近思錄,心經等書。居家也夙興盥櫛。先謁家廟。起居大夫人。佳辰令節。置備物之享。奉以讌娛。施及同胞族姻。一以誠信相孚。凡祀事皆躬莅視辦。豫具偫藏。罔或不恪。自奉節儉。食不重肉。衣無完采。所俸廩祿。不自專。獻大夫人。唯所以也。立朝也避權勢如浼。一介不取於人。人莫敢干以私。母黨妻黨入廢朝後庭承寵。要藉公爲奧援。公一切斥不通。李爾瞻,朴承宗與之有素。其秉柄也致殷勤。公亦不應。其待宵人。不惡而嚴如此。餘事爲文。贍暢而理達。所著易學釋疑,近思釋疑,遺稿若干卷藏于家。公筮仕四十餘年。入而昵侍 經幄。知無不言。言無不盡。務欲引君當道。挽回世敎。出而歷典州郡。恩威竝行。吏畏民懷。所至稱爲循良。去而愈思。當天地閉塞之日。勇退於濁流之中。翩翩在千仞之表。涅而不緇。名行俱全。豈任重道遠。臨大節而不可奪者非耶。晩際 聖明。數論國家利害。望實竝隆。莫不以公輔期公。而不幸未究其用而卒。詎非天哉。欽早與公爲莫逆交。進退出處。略相同符。而公遽先我而逝矣。公之胤元奭氏。述公行示余。且屬余爲狀。見其述。惇史也。何加焉。删其繁而歸之。若夫著之顯刻。以詔來者。常世之有德行能文章者存。東陽申欽狀。
- [주-D001] 야기(夜氣) :
- 한밤중 고요한 때의 깨끗하고 조용한 마음을 가리킨다. 《孟子 告子上》
- [주-D002] 제(瑅) :
- 선조(宣祖)의 열째 서자인 흥안군(興安君)의 이름.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반란 때, 이괄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0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樂民(장달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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