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조광조의 꿈 기묘사화◈ 조선을 지배한 사람들은 사대부들이고 사대부들을 지배한 것은 유학의 한 계통인 성리학이었다. 사대부들은 유학을 유일하게 정학(正學)으로 생각하고 다른 학문은 사학(邪學)이라고 여겨 이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성리학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어서 다른 학문을 탄압했다. 이는 유학이 탄생한 중국보다 더 극심해서 조선은 공자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여 성리학이라고 불렀다. 성리학은 보통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는데 공자와 맹자를 도통(道統)으로 삼고 도교와 불교가 공허한 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단으로 취급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진다. 이들은 사림파라고도 불리는데 중종 때 훈구파 대신들과 부딪쳐 수많은 선비들이 숙청당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된다.
중종 14년 11월16일, 조광조(趙光祖)는 옥중에서 비통한 상소를 올렸다. …신이 망령되고 어설프며, 우직한 자질로 경연에 출입하면서 전하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으므로 어리석게 속마음을 죄다 말씀 올려 뭇사람의 시기를 받았습니다. 신은 오로지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임금이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임금을 위한 것이 죄라면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옥사가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어서 선비들이 사화에 걸려들 것입니다. 임금이 계신 곳이 멀어서 감히 신의 생각을 아뢸 길이 없으나 이대로 죽는 것도 참으로 견딜 수 없사오니 친히 국문을 하시면 만 번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뜻은 넘치고 말은 막혀서 차마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광조는 옥중상소에서 자신이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사화가 한 번 일어나면 많은 사대부들이 죽을 것이고 이는 국가의 명맥을 흔드는 일이라고 하면서 차라리 중종이 친히 국문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중종은 국문조차 하지 않았다. “조광조가 무슨 죄가 있기에 투옥했습니까?” 정광필이 조광조의 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신들이 조광조가 죄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의금부에 가둔 것이다.” 중종이 정광필에게 궁색한 답변을 했다. “전하, 언제 대신들이 조광조에게 죄가 있다고 했습니까?” “훈구대신들이 조광조가 교만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했다.” 중종은 어떻게 하던지 조광조를 제거하려고 했다. 중종시대 최대의 옥사인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제거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무엇 때문에 제거되어야 하고 선비들이 대거 숙청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일까.
조광조는 개국공신인 조온의 5대손으로 어머니는 여흥 민씨였다.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엄격한 훈육을 받았다. 그는 예의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고 총명하여 학문의 진도가 빨랐다. 그가 하루는 사랑에서 글을 읽는데 이웃집 여종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는 누구인데 밤중에 선비의 방을 침범하는가?” 조광조가 여종을 쏘아보면서 호통을 쳤다. “소녀는 이웃집에 사는 아무개의 여종으로 도련님 글 읽는 소리가 하도 낭랑하여 찾아왔습니다.” 여종이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내외가 엄중한데 어찌 이리 괴이한 짓을 하는 것이냐? 물러가라.” “도련님의 글 읽는 소리가 소녀의 방심(芳心)을 흔들었습니다. 하룻밤만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 “장부가 독서를 하는데 여자가 침범을 하여 맑은 정신을 어지럽히니 마땅히 매로서 경계할 것이다.” 조광조는 이웃집 여종의 고백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종아리를 때려서 돌려보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일화지만 이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뇌리를 관통한 미담이었다. 선비는 색을 멀리하고 오로지 책을 읽고 예를 지켜야 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답게 행동에 있어서도 사대부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광조는 소년 시절에 학문을 좋아하여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리학에 깊이 빠졌다.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실행하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했다. 부친을 여의자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학문을 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학문과 예의가 뛰어나 동료들에게 존경 받았고, 성균관 학생들이 학행이 있는 자를 나라에 천거할 때 첫 번째로 뽑혔다.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 2백 명의 천거로 관직에 올라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이 그랬던 것처럼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요순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산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중종이었다. 그에게는 많은 공신들이 있었는데 공로가 없는 자들도 공신에 책록 되어 높은 벼슬에 임명되고 녹봉을 받았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조광조는 이와 같은 훈신들과 대립했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얻자 과거제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많은 신진사류를 조정에 발탁했다.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지방의 유교적인 교화에 앞장섰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훈구파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무슨 개혁인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반정을 일으킨 공신이야.” 훈구파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눈엣가시였다. “남곤은 소인이고 유자광 같은 이는 패악한 자입니다. 심정 또한 바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을 숙청해야 비로소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사림파도 훈구파에 맞서서 그들을 비난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대표들인 김정, 김식 등과 더불어 위훈 삭제 문제를 논의했다. “위훈삭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허락을 하시겠습니까?” 김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허락하게 만들어야지요. 우리에게는 사림이 있지 않습니까?” 조광조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사림의 힘으로 임금을 압박하자는 말씀입니까? 잘못하면 임금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조정을 깨끗하게 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공신들이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흉계를 꾸며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비가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인정하지만 공을 세우지 않고도 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을 과감하게 축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희안은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공신이 되고, 유자광은 오로지 척족의 권력과 재물을 위하여 반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삭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공신들은 바짝 긴장했다. 조광조 혼자서 주장을 하면 얼마든지 반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림파가 집단으로 주장을 하면 목숨을 건 싸움이 된다. 공신파가 잔뜩 긴장하여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을 때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위훈삭제 를 요구하고 나섰다.
중종시대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공신들을 제거해야 할 세력으로 보았다. 타깃은 성희안과 유자광 등 일부지만 실제로는 공신 전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림파의 대대적인 공격이었다. 이들의 주장으로 한 달 내내 조정이 들끓고 정치가 마비되었다. 조광조를 앞세운 사림의 위훈 삭제 요구는 중종이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강력했다. “위훈삭제를 청하면서 신은 생사를 돌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조정이 이 일로 논의가 분분한데 명색이 대신이라는 자들이 침묵을 지키면서 보신만 하고 있습니다. 남곤은 1품인 재상으로서 육경의 반열에 있으면서 나라의 일을 염려하지 않고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의 향사(香使 : 제사지낼 때의 사신)로 차출되어 갔습니다. 변을 보고 교묘히 피하였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매우 간사합니다. 이를테면 유순, 김감 같은 자도 그 죄를 밝게 바루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공적에 끼어 있습니다.” 대사헌 조광조는 현역 대신인 남곤까지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가 향사가 된 것이 과연 피하려고 그런 것이겠는가. 나는 모르겠다.” 중종은 조광조가 남곤을 탄핵하자 불편하게 생각했다. 대사간 이성동, 승지 유인숙도 남곤이 옳지 않다고 아뢰었다. “안당은 사림 중의 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바른 대로 아뢰지 않습니까?” 조광조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도파 대신 안당까지 비난했다. 정승과 육경의 반열에 있는 대신들은 조광조의 비난을 받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전하께서 속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안당이 눈치를 살피면서 중종에게 아뢰었다. “신은 귀양 가거나 죽더라도 청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속히 공신록을 개정하라는 영을 내리소서.” 조광조가 중종을 재촉했다. “개정할 수 없다.” 중종은 고개를 외로 꼬고 조광조의 간청을 거부했다. 조광조 등은 어전을 물러나오자 항의하는 뜻으로 일제히 사직했다. 남곤은 조광조가 자신까지 비판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다. 남곤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에게 가르침을 받아 조광조에게는 사형뻘 되는 사람이었다. 한때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적도 있었으나 문한(文翰 : 문장)이 출중하다고 하여 다시 등용되었다. 그는 심정, 홍경주와 손을 잡고 조광조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는 중종이 총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조광조를 모함했다. “전하,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하옵니다.” 희빈 홍씨는 은밀하게 조광조를 비난했다. 중종은 희빈 홍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경빈 박씨까지 가세하자 조광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심정, 남곤, 김전 등 훈구파가 사림파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육조의 모든 대신들과 의정부, 승정원의 사림파까지 가세하여 중종을 몰아세웠다. ‘너희들의 요구는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임금을 핍박했으니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중종은 마침내 대간들을 불러들여 위훈을 개정하여 공훈이 없는 자들을 위훈록에서 삭제하라는 영을 내렸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요구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중종은 마침내 2, 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을 삭탈하기에 이르렀다. 숫자는 불과 76인에 불과하지만 훈작이 삭탈되면서 노비와 재산까지 모두 몰수되어 훈구파는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남곤, 심정, 홍경주는 마침내 궁중의 여인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대궐의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쓰고 꿀을 발라놓게 했다. 주초위왕은 주초(走肖)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벌레들이 꿀을 먹기 위해 나뭇잎을 파서 글자를 만들었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가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했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강력한 요구를 들어주기는 했으나 사림파와 더 이상 정치를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빌미로 조광조를 하옥하기에 이르렀다.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는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성균관의 유생 이약수 등 1백 50여 명은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리고 반응이 없자 궐문을 밀고 난입하여 곧바로 합문밖에 이르러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통곡하고 울었다. 유생들의 곡성이 대궐 뜰을 진동했다. 중종 14년 11월17일 성균관의 생원 임붕 등 2백 40여 인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억울함을 아뢰고 감옥에 함께 들어가겠다고 청했다. 19일에도 성균관의 유생 이약수 등 3백여 명이 상소를 올렸다. 조광조에 대한 구명운동은 폭넓게 전개되었다. “조광조 등의 당초의 마음은 나라의 일을 그르치고자 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조정에서 이와 같이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죄주지 않을 수 없다. 조광조,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 김구는 장 1백에 처하여 절도에 안치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장(杖)을 속(贖)하고 고신을 빼앗고 외방에 부처하도록 하라.” 조정에서 죄를 줄 것을 청했기 때문에 사사한다는 중종의 판결이었다. 그러자 기사관인 채세영과 이공인이 깜짝 놀라 아뢰었다. “전하, 조광조 등에게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나라의 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이 일은 조정에서 상세히 의논하였다. 영을 내린 대로 판부하라.” “신 등은 감히 판부를 쓸 수가 없사옵니다.” 채세영과 이공인이 엎드려 아뢰었다. 그러자 김근사가 돌아보고 채세영의 붓을 빼앗아 판부를 쓰려고 했으나, 채세영이 곧 붓을 가지고 멀리 물러가서 아뢰었다. “전하, 조광조를 사사한다는 영을 거두소서.” “무엄하다. 기사관들이 어찌 이리 방자한가?” “전하 신들도 함께 사사하소서.” 채세영과 이공인이 머리를 짓찧으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나 중종의 마음은 조광조에게서 돌아서 있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수백 명의 사림파가 의금부에 체포되어 가혹한 심리를 받은 뒤에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금부도사가 사약을 받들고 오자 독한 술을 마신 뒤에 죽었다. 조광조는 학문이 뛰어났으나 현실정치에 실패했다. 위훈삭제 파동으로 훈구대신들에 의해 실각 당한 선비들을 기묘팔현(己卯八賢)이라고 부른다. 조광조를 비롯한 이들의 도학정치가 실현되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요순의 태평성대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조광조 등이 죽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조선에서 요순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광조가 죽은 뒤에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하면 조광조처럼 죽음을 당한다고 학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까지 퍼졌다.
|
[스크랩] 수몽(守夢) 정엽(鄭曄) 행장(鄭知事行狀) (0) | 2018.11.18 |
---|---|
[스크랩] 경북문화재이야기<12> 성주 김창숙 선생 생가 (0) | 2018.11.01 |
[스크랩] 한․중 외교사의 보물「봉사조선창화시권」등 2건 국보 승격 (0) | 2018.10.07 |
[스크랩] 고송유고 (孤松遺稿) 최 찬 (崔纘) 1554-1624 (명종9-인조2)字: 伯承‚ 號: 孤松‚ 本貫: 水原‚ (0) | 2018.10.04 |
[스크랩] 포항 장기 읍성 장기 유배문화체험촌 (0) | 2018.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