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역사를 간직한 ‘새내마을’은 선비촌의 원조 | ||||||||||||||||||||||||||||||||||||||||||||||||||||||||||||||||||||||||||||||||||||||||||||||||||||||||||||||
우리마을 탐방[36]단산면 사천1리 | ||||||||||||||||||||||||||||||||||||||||||||||||||||||||||||||||||||||||||||||||||||||||||||||||||||||||||||||
| ||||||||||||||||||||||||||||||||||||||||||||||||||||||||||||||||||||||||||||||||||||||||||||||||||||||||||||||
의연히 선비의 길을 걸어간 달성서씨 사람들 단산면 사천1리(새내) 가는 길 소백의 정기가 동남쪽으로 뻗어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장원봉(壯元峰)을 우뚝 세웠고, 고치령에서 흘러온 구천(龜川)과 국망봉에서 흘러온 죽계천(竹溪川)이 마을 앞에서 만나니 내(川)는 평사요 산은 낙안이라, 예로부터 이곳을 평사낙안(平沙落雁) 형상을 한 길지라고 했다.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갈 무렵인 지난 16일 사천1리 노인회관에서 조승덕(67) 이장, 서중일(77) 달성서씨 문중 총무, 정제홍(77) 노인회장, 원옥교(57) 부녀회장 등 마을 사람들로부터 500년 역사만큼이나 긴 이야기를 들었다.
새내마을의 유래 서중일 총무는 “어릴 적 구천(현 사천)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고 버드나무가 제방 구실을 하고 있었다”며 “마을 이름이 새내가 된 것은 사천을 우리말로 하면 사내가 되고 사내가 오랜 세월 지나오면서 ‘새내’가 됐다”고 했다.
입향조 돈암 서한정 그가 47세 되던 해 계유정난(1453)을 당하자 단종과 명운을 함께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고 믿었고 그 길을 의연히 걸었다. 그는 벼슬길로 나아가려는 꿈을 접고 고향을 떠나 당시 ‘반역의 고을’로 낙인찍힌 소백산 산중 오지인 순흥땅 이곳 새내에 터를 잡았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러한 돈암의 속내를 알지 못했고, 자신도 세상에 그 뜻을 드러내 이름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다.
구고서원과 상절사 구고서원은 선현의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됐다. 1974년 현 위치에 상절사(象節祠)와 서원을 복설하였다. 당초 이웃 마을인 구구리 도인봉 아래에 건립되었으나 훼철 이후 퇴락해지자 종택이 있는 새내로 남은 건물만을 옮겨 세웠다.
돈암의 절개를 닮은 음양천(陰陽泉)
마을의 노래 동가(洞歌)
새내의 선구자 서정순 그가 뿌린 씨앗은 근대사에 빛나는 인재를 양성했고 자신의 아들(서석천, 서울공대, 원자력박사)과 손자, 증손자 3대를 서울대학교 동문으로 만들었다. 새내마을 사람들이 마을 출신 서중도 영주문화원장은 “우리나라 집성촌 가운데 분파되거나 이거하지 않고 한 마을에서 500년 이상 세거해 온 전통마을이 전국에 19개 있다”면서 “그 중 한 마을이 바로 새내마을”이라고 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육부 편수관을 역임한 서석례(81) 씨는 “우리 새내는 조선시대 때 문과급제 2명, 생원·진사 수십 명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해방 후 서울대 졸업생만 40여명으로 인재 배출의 요람”이라면서 “우리집에도 4부자가 모두 서울대 동문”이라고 했다. 새내서씨 18대 종손 서용준(徐庸俊, 67) 씨는 6.25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어려웠으나 문중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 때 정치 입문까지 했었다. 지금은 노 종부(어머니, 여수현, 86)를 모시고 종택을 지킨다.
정제훈 노인회장은 “백산서원은 충의공 죽림 서재승(徐在承) 선생을 모신 서원이며 1983년에 완공된 근대 서원으로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서 젊은 새댁으로 통하는 황명숙(67) 씨는 “마을에는 젊은 50대가 몇 집 있을 뿐 대부분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살고 있다”며 “우리마을 출향인은 300여명 쯤 되는데 모두 고향을 위해 아낌없는 성원과 끊임없는 지원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또한 권선자(66) 씨는 “30여년 전만해도 마을의 풍광이 민속촌 같았는데 지금은 허물어지는 고택을 보노라면 을씨년스럽다”며 “보수가 빨리돼 옛 모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함께 마을을 둘러 본 서중일 총무와 서윤석(67) 씨는 “순흥 선비촌은 여러 곳의 고택을 한 곳에 모아놓은 인위적인 마을이지만 우리마을은 종택 66칸, 대동고택 66칸, 진사댁 99칸 등의 흔적이 남아있고 돈암정, 동활재 등 정자도 그대로 있어 ‘새내’는 진정한 선비촌의 원조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승덕 이장은 서낭당을 가리키며 “새내 성황당의 주신(삼신석)은 세 분의 보살이라고도 하고, 천지인 삼신이라고도 하는데 해마다 정월 15일 자정에 제사를 지낸다. 제관은 음양천을 청소하고 그 물을 사용한다. 또 제물은 어육은 피하고 메밥에 백설기와 채소만으로 정갈히 차리고 마을 사람 53가구 96명 모두의 소지를 올린다”고 했다.
|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고 박승임선생 (0) | 2020.06.08 |
---|---|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 (0) | 2020.05.10 |
이순신과 두사충 (0) | 2020.04.29 |
동춘당 송준길 (0) | 2020.04.25 |
우주의 1년의 처음 제기했던 소강절 (0) | 2020.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