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구마라습 생애

강나루터 2021. 8. 12. 05:03

 추천 0 조회 32 20.12.07 08:3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odzen/YkzV/688?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학림사 불자염송경의 금강경을 독송할 때면 보게 되는, '요진 삼장법사 구마라습 역'.
구마라습 스님에 대한 글을 네이버 블로그에서 보다가 복붙합니다.

공空이라고 번역한 구마라습과 그의 운명

청호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려고 불경을 펴면 반야심경제목 옆이 현장玄奘번역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현장스님은 당나라 사람으로 602~664년 까지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불교경전은 그 이전에도 이미 번역되기 시작되어 왔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반야심경은 반야경의 일부분입니다. 반야경이 알리고자 하는 주요사상은 바로 공空사상이며, 공空은 산스크리스트어語로는 '슌야다'(śūnyata)입니다. 산스크리스트어語로는 '슌야다'(śūnyata)는 분명하게 있으나 볼 수 없고, 볼 수는 없으나 틀림없이 있는 것. 그런 순야다를 처음으로 공이라 번역한 사람은 구마라습스님입니다. 그 분의 일생은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이 책을 시작하며 구마라습이 역경사업을 하게 된 배경과 일생의 여정도 아는 것이 도움 될 것 같아 간단하게 써 보려 합니다.

구마라습은 344년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던 중앙아시아의 쿠차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북인도 출신이며, 어머니는 쿠차의 명문 태생이었습니다. 일곱 살에 출가(出家)했으며, 아홉 살 때는 어머니를 따라 계빈(간다라 지방)으로 가서 불교를 배웠습니다. 구마라습은 인도 유학도중 많은 스승을 찾아가 불교에 대해 박학할 뿐 아니라 특출한 기억력으로 천재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던지 요즈음처럼 전파의 매체가 없던 시절임에도 인도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338-385)도 구마라습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383년, 부견은 부하 여광呂光으로 하여금 구마라습을 얻고자 쿠차를 침략하도록 했습니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똑똑한 사람은 지적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부견의 소원대로 구마라습은 얻었으나, 그 사이에 전진은 망하고 부견은 죽었습니다.

여광은 이미 나라가 없어졌으므로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하여 왕이 된 여광은 구마라습을 데리고 다니며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여광은 35살 밖에 되지 않은 이국의 포로 수행자에게 사나운 말이나 소의 등에 태운 후 떨어뜨리기도 하는 등 멸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구마라습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쿠차의 왕녀와 강제 결혼을 시키려 했습니다. 구마라습은 승려로써 강제결혼을 해야 할 때의 사정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구마라습이 결혼하지 않으면 그 여인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17년이란 긴 시간은 구마라습으로 하여금 중국어를 완전히 알 수 있게 하였으며, 사상을 더욱 깊어지게 하였습니다.

후진後秦이 세워지고 불교를 신봉하던 요흥姚興 (401)이 구마라습을 장안長安으로 모셔왔을 때 그의 나이 벌써 쉰여덟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일생을 마치기까지 그는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으며, 주로 장안의 소요원逍遙園에서 역경譯經과 강설講說을 했습니다. 훗날 구마라습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연못에서 연꽃만 볼 뿐, 진흙은 보지 말라.“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던 파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고 번역한 경으로 깨달음의 꽃을 피우라는 뜻이었습니다.
일찍이 천재성을 드날렸고 일생동안 역경사업으로 살았지만 역사의 흥망성쇠에 휘말려 수치를 겪어야 했던 한 수행자의 뼈아픈 말입니다.
구마라습은 입적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나는 우매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장담컨대 내 번역은 원문과 틀린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만약 내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화장한 뒤에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과연 다비를 한 후, 온몸은 다 탔지만 혀는 조금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 불교는 구마라습으로 인해서 중요한 경전의 태반을 손쉽게 얻었습니다. 또, 구마라습의 문하에는 3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 승조僧肇, 승예僧叡, 도생道生, 도융道融은 습문사철(什門四哲)이라고 불립니다. 그렇게 역경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 후진後秦 홍시弘始15년 8월, 서기 413년에 세납 74세에 입적했습니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수많은 불경은 동양인의 기본사상을 만드는 바탕이 되어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에서도 생전 처음 보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고는 의외의 뜻에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산스크리스트어 '순야다'śūnyata를 공空으로 번역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구마라습 일생의 행로와도 관계있습니다. 구마라습의 영명함과 포로가 되어 떠돌던 긴 시간동안 겪었던 욕된 세월은 순야다를 확신하는 힘이 아니면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온몸으로 고통의 세월을 겪었던 수행자였기에 번뇌가 곧 도량(煩惱是道場)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그 자리가 도를 닦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번뇌, 즉 장애를 일으키는 상황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바세계에 그런 곳은 없음에도 우리는 있을 수 없는 발원을 하지요. 그럴 때, 구마라습의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의지가 약함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을 펴면 번역자 구마라습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한없는 함축성을 가진 말, 공空. 무한히 변하며, 끝없이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공空. 이 간단한 한 마디 속에는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야다를 광대무변한 ‘공空’, 한 마디에 담은 한 수행자의 생애가 떠오릅니다. 그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