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 일등 공신으로 조선 창업의 마스터 플랜을 설계한 사람이 정도전(鄭道傳, 본관은 봉화, 1342년 출생)이다. 그의 부친 정운경은 유학자로 이색의 부친인 이곡과 친구 사이이며, 고려 말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토호 세력 귀족이다. 정운경은 유학자로서 아들 삼형제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 정도존(鄭道存), 정도복(鄭道復)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도전은 도를 전하며, 도존은 도를 보존하고, 도복은 도를 회복시키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정도전은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도(道)에 대하여 배웠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도(道)를 실천하고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결국 이 때문에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태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이름 그대로 살다간 위대한 혁명가였다.
2. 백성이 왕보다 중요한 최고 고객…백성 행복 창출 못하는 왕은 갈아야
정도전에게 있어서 도(道)란 하늘의 뜻을 말하며 하늘의 뜻은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왕은 이 도를 위해 있으며 왕이 이 도를 행하지 못하거나 또는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 통치한다면 왕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왕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는 백성의 행복을 창출하여 주어야 한다는, 즉 백성을 국가의 최고 고객으로 하는 국민고객지향의 선각자였다. 그는 고려 말의 왕실이 무능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백성들의 행복을 만들어 주지 못해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의 행복을 창출할 새로운 성(姓)의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파란만장의 인생길을 거친 풍랑 속에서 오직 하나의 목표인 도(道)를 향해 항해하다 이성계의 5남 이방원(태종)에게 살해를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도전이 권력에 탐이 나서 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멸망시켰다고 보지만, 잘못된 시각이고 식민사관의 일부다. 그는 부친 사망 후 동생들에게 좋은 것을 다 양보하고 힘없는 늙은 노비 몇 명만 가질 정도로 물욕이 없었다. 다음 그림은 정도전의 정치사상체계를 간단히 그린 것이다.
3. 오직 백성의 행복을 위해 스승 이색, 친구 정몽주와 갈라져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공부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여 부친의 친구 이곡의 아들인 대유학자 이색의 문하로 들어가 유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와 함께 공부를 하였고 당시 신진사대부라고 하는 박상충, 권근, 이숭인 등이 이색 문하의 정도전 학우들이다. 정도전은 도의 실천을 위해 왕조를 갈아치우는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려 왕실을 지키려는 친구 정몽주와 이숭인은 물론 스승 이색에게도 등을 돌렸다.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스승과 갈라지고 스승을 감옥에 가도록하게 한다는 것은 정말 뼈가 시리도록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스승과 친구의 의리보다 백성의 행복이 더 중요하고 절실했다. 그는 42 세 때 북방 함경도 출신의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인 맹장 이성계를 직접 함경도로 방문해 이성계 부대 훈련 모습에 완전히 반해 야심을 감추고 있던 이성계와 새로운 국가 창업 계획을 결의했다.
삼봉 정도전(왼쪽)과 포은 정몽주
4. 정도전 모친은 종이어서 조롱당하고 정몽주 모친은 귀족으로 우대 받아
정도전과 정몽주의 스승은 이색으로 같았고 그들은 유학과 성리학을 함께 공부하여 신진사대부라는 면에서 같았으나 모친의 출생 신분이 달랐다. 정도전의 어머니 우씨는 종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어 정도전은 고려 조정의 관료들로부터 종의 자식으로 관직에 올랐다고 여러 번 비난과 조롱 및 탄핵을 받았다. 정도전은 이러한 신분 불리함의 차별 대우와 조롱을 주는 고려사회가 징그럽고 싫었다. 또한 그는 전라도 나주 천민 마을에 귀양살이 가서 8년 동안이나 천민 및 농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그들의 고통을 직접 뼈가 아프게 느끼고 경험하여 그들의 행복과 평안을 위한 신국가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인식하였다.
양친이 모두 귀족이고 젊어서부터 승승장구한 정몽주는 정도전과 같은 출생의 아픔은 물론 백성들의 고통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귀족이었다. 친구지간이었으나 출생 신분과 인생여정이 다른 그들은 같은 길을 갈 수가 없었고 죽어서도 그들은 조선 왕조로부터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일등공신임에도 백성근본과 왕권제한의 철학 때문에 권력의 야심가 이방원(3대 태종)에게 피살당했으며, 조선 왕조 500년 내내 푸대접을 받았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고려 왕조에 목숨 바쳐 충성하다 역시 이방원에게 피살을 당했으나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충신의 귀감으로 최고 우대를 받았다. 다음의 표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생애와 정치성향을 비교한 것이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생애와 정치성향 비교
5. 백성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창업에 도전
원 황실의 부마였던 고려 말의 왕들은 거의 왕 구실을 못하다가 31대 공민왕에 이르러 정치를 잘 했으나 왕비 노국대장 공주가 죽은 후 미소년들과 쾌락을 즐기다가 암살을 당하였다. 공민왕 뒤를 이어 10세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심약하여 전혀 왕 노릇을 못하였다. 도처에 왜구가 침입해 와서 양민을 학살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권문세가들의 토지와 불교 사찰의 토지는 이 江에서 저 江까지, 이 山에서 저 山까지 경계선을 삼을 정도로 넓어 백성들의 땅은 송곳 심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작고 작았다.
권문세가들은 대토지를 기반으로 백성들의 거의 모든 것을 강탈하고 있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으나 이를 시정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정도전은 고려 왕실을 그대로 두고는 백성을 살려 내기는 고사하고 민족 전체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고 고려 국가를 전면 뒤집어엎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이상과 제도를 갖추고 道를 실천하는 신 국가 창업에 이성계와 함께 도전하였다. 다음 그림은 정도전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6. 왕의 통치권 제한하고 재산도 못 갖게 해
정도전은 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왕이 어질고 능력이 있을 때는 좋지만 왕이 무능하거나 폭군일 때는 국가가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로 왕의 통치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물론 사유재산도 일체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국가 제도를 계획했다. 정치는 재상 중심으로 관료들이 하되 그들은 엄정한 시험과 검증을 거쳐 임명되어야 하고 그들 중 일부는 간관(諫官: 왕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여 진술하는 관리)으로 선출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반드시 통치에 반영하고 소통이 되는 국가를 계획했다. 왕과 대신들도 간관들의 언로(言路) 활동을 제한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계획이 조선의 통치제도에 반영되어 조선은 신문고 제도가 있었고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의 언로와 감찰 기능의 소위 3사라는 기관이 발달되어 왕과 대신들의 권력 행사를 세계 어느 나라 보다 효과적으로 제한하였다.
7. 세계 최초로 전농민의 자영농화…농업 산출의 10%만 세금부과 계획
정도전은 백성들의 먹고 입는 것의 충족이 국가 통치의 모든 것에서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위화도 회군 후 백성들에게 악랄했던 권문세가들과 불교 사찰이 소유한 대토지 문서를 모두 회수하여 개경 한복판에서 전부 불태웠는데 불길과 연기가 하루 종일 치솟았다. 그런 후 전국의 모든 농토를 농민들에게 균등 분배하여 소작농을 완전히 없애고 생산된 농산물의 90%는 농민이 갖고 10%만 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전 농민의 자영농제도를 계획하였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이 제도를 조정 논의에 붙였으나 권문세가 출신들의 격렬한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색, 권근 등 중소지주 성리학자들도 반대하였고 정몽주는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이안이 부결되어 관리들에게만 토지가 지급되는 과전법의 형태로 후퇴를 하였지만 권문세가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된 백성들은 그것만으로도 대환영을 하였다.
8. 전국민 전투방법 배워야…장기전략으로 고구려 영토 회복
정도전은 문과 무를 겸비했다. 그는 백성의 평안과 안녕의 유지는 오직 국방력의 강화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국가 경영의 목적과 비전은 부국강병이며 장기 전략으로는 요동정벌을 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남자가 밥을 못 먹고 여자가 옷을 입지 못하면 예의고 법이고 다 무너진다고 생각하여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 다음으로 국방력 강화를 위해 백성들에게 전투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백성들에게 전투방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 하였다. 싸울 줄 모르는 백성은 전쟁이 나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개국 즉시 군량미의 비축은 물론 군대의 훈련과 교육을 강도 높게 시키고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私兵)들을 모두 국가군대에 배속시켜 요동정벌을 7년간 준비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 이방석의 세자책봉, 정도전의 왕권제한 제도 그리고 자기의 私兵들을 빼앗겨 불만에 쌓여 있던 이방원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요동정벌계획 인사들을 모두 살해해 요동정벌 계획은 막을 내렸다.
9. 정도전의 국가경영철학이 반영된 국가의 모형
아래 그림을 보면 국가 경영철학의 핵심은 “백성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라는 인본사상이고 국가 장기전략 목적은 부국강병으로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10. 국민이 최고 고객, 국민 군사훈련, 강대국과 유연한 외교철학은 배울 점
정도전은 백성이 국가의 최고 고객이라는 백성 고객지향적 경영철학을 기초로 하여 국가조직의 모든 기능을 그의 대저서 조선경국전에서 디자인했다. 경복궁은 물론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궁궐의 모든 전각과 문들의 이름은 물론 숭례문 등 사대문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다. 정도전이 건축물에 지은 이름은 모두 나름대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국의 공공조직은 물론 대기업의 경영자들도 최고경영자의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국민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최고의 위치를 갖는 역피라미드식의 조직으로 재구축하는 리엔지니어링을 하고 고객의 유익 창출을 위한 장기 전략을 세워 경영하면 백전백승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문무를 겸한 사상가이며 문장가인 그는 백성에게 전투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전쟁시는 물론 재난 시에도 대피 방법조차 제대로 훈련이 안 된 한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강한 국방력을 기반으로 고구려 엣 영토를 회복하려는 그의 의지는 주변 정세가 불안한 한국이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정도전은 중국(明)과 같은 강대국과의 외교는 우리의 독립과 주권을 확실히 지키면서 정중한 예절로 대하는 유화 정책을 주장했다. 유화정책으로 좋은 것을 받아 들여 국가의 이익 창출에 활용하되 전쟁에 대한 대비도 항상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매우 실리적인 외교정책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국가 경영철학을 보면 그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글로벌 경영을 위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출처 / premium.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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